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인천채씨(仁川蔡氏),인천채씨시조,채선무(蔡先茂),인천채씨유래,인천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1 14:53 수정일 : 2018-02-03 16:18

인천채씨시조 및 인천채씨유래(본관)

인천(仁川)은 경기도 중서부, 경기만(京畿灣)에 돌출한 반도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매소홀현(買召縣)이라 칭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경덕왕 때 소성(邵城)으로 개칭, 율진군(栗津郡 : 지금의 시흥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018(현종 9)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숙종때 경원군(慶源郡), 인종때 인주(仁州), 1390(공양왕 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2(태조 원년) 인주로 환원, 1413(태종 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으며, 1460(세조 6)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1688(숙종 14)에는 현으로 강등, 1698년 다시 부로 환원하였다. 1914년 인천의 관할구역이 구()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축소되고 구() 인천읍과 부평이 통합되어 부천군(富川郡)이 되었다.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고 1963년 부천군 작약도(芍藥島)를 편입하였으며 1968년부터 구제(區制)가 실시되었다. 19817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시조 채선무(蔡先茂)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그는 고려(高麗)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되고 인천(仁川)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仁川)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그의 아들 신징(愼徵)이 나라에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고, 손자(孫子) 보문(寶文)은 고려(高麗) 의종(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부 상서(禮部尙書)등을 지냈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나 문명을 날렸고, 뒤에 추밀원사(樞密院事)․태자빈객(太子賓客)․지제고(知制誥)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한편 시조(始祖) 선무(先茂)10세손 귀하(貴下)는 고려 말에 정몽주(鄭夢周)등과 교유하며 공양왕(恭讓王)때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隱居)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은 부사(府使) 신보(申保)의 아들 수()1469(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장원하였으며, 부수찬(副修撰)으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세조실록(世祖實錄」과「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후에 대사성(大司成)․호조 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정국사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으나 이미 옛 친구들은 거의 죽고 없어졌을뿐더러 조정(朝廷)의 삼상육경(三相六卿 : 삼정승과 육조 판서)이 모두 후배들인지라, “일찍이 임금이 알아 주셔서 녹()을 먹은 지 40 년이 되어 영화(榮華)를 누림도 이미 극()에 달했으니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함창(咸昌)에 은거하여 시문(詩文)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제2자 소권(紹權)은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고 한성판윤(漢城判尹)을 배수하였다가 사직하였다.

그의 손자(孫子) 무일(無逸)은 예조 정랑(禮曺正])․헌납(獻納)을 거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렀으며 음률(音律)․의학(醫學)․복서(卜筮) 등에도 정통했다.

그외 인물로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무택(無擇)과 학자(學者)로 유명한 응린(應麟)․선견(先見)․이항(以恒)․몽연(夢硯)등이 뛰어났다.

지홍(之洪)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영용(領用)의 아들로서, 권상하(權相夏)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왕자 사부(王子師傅)와 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신임사화(辛任士禍)로 노론(老論)이 실각하자 김일경(金一鏡)등의 소론(小論)을 논척(論斥)하는 상소를 하고 구운산(九雲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기중(其中)이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에 몸 바쳤고, 상덕(相悳)19253월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일본군에게 참패하자 자결하여, 항일 투쟁에 목숨을 바친 응언(應彦)과 함께 가문을 영광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남한(南韓)에 총 8,510 가구, 34,826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43,3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천채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채보문(蔡寶文)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학문(學問)이 탁월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사(樞密院使)․예부상서(禮部尙書)․지제고(知制誥)․보문각(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채귀하(蔡貴河) ()는 청일(淸一), ()는 다의당(多義堂).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대구 후동(大邱 後洞)에서 출생(出生). 천성이 온후(溫厚)하고 문예(文藝)가 출중(出衆)하였으며 영천(永川) 사는 정몽주(鄭夢周)와 소년 시절부터 교유(交遊)하여 경전(經典)을 강론(講論) 도의(道義)를 탁마(球磨)하였으며, 고려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전서 (戶曹典書)를 역임하였다.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다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나 이성계(李成桂)가 새 임금으로 등극(登極) 하니 국파군망 아안귀실(國破君亡 我安歸[) 충신불사 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이씨왕조(李氏王朝)에 조회(朝會)하지 않겠다고 동지 (同志)들과 괘관(掛冠)하고 부조현(不朝峴)을 넘어 만수산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 새 왕조(王朝)에 충절(忠節)로서 항거하였다. 임신년(壬申年 서기 1392) 가을 다의당(多義堂)은 동지(同志) 전서(典書) 박심(朴讓) 이맹운(李孟芸) 과 더불어 벽탄진(il'!ll) 나루를 건너 평산군(平山郡) 다의현(多義峴)에 둔황(逐荒)하여 고대중국(古代中國) ()나라 충신(忠臣) 백이숙제(伯夷淑齊) 형제(兄弟)가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은 안 먹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깨끗하게 생을 마친 그들의 충절(忠節)을 가상(嘉賞)하여 고사리 캐는 모습 채미도(採薇圖)를 그려 놓고 날마다 보니 이는 칠십이현(七十李賢) 중의 백이(伯夷)라 칭송(稱碩)하였고 선생은 이목은(李牧隱)과 가까운 곳에 있어 왕래가 잦았으며 또한 전서(典書) 이맹운(李孟芸) 조안경(趙安卿) 신안(申姜)과 자주 상종하며 오직 고려(高麗)만을 생각 둔황지(遼荒地)인 다의현(多義峴)에서 생애를 마쳤다.

후세에 이씨왕조에서 다의당(多義堂)의 충절(忠節)을 가상(嘉賞) 이를 계세권면(繼世勸勉)토록 기리기 위하여 정의란 시호(論號)를 내렸다. 평산(平山) 유림(儒林)에서 다의당(多義堂)의 충절(忠節) 과 고매한 덕의(德義)를 사표(師表)로 삼아 의현리(義峴里)에 의현사(義峴祠)를 창건(創建) 유림(儒林)에서 주도하여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였으며, 대구(大邱) 서산서원(西山書院) 상주(尙州) 웅연서원(熊淵書院)에 타령(采靈), 개성 두문동서원(開城杜門洞書院) 장성(長成) 경현사(景賢祠)에 각각 배향(配享)하였다. 해방(解放)이후 국토(國土)가 남북(南北)으로 양분(兩分)되자 북으로 편입(編入)되면서 강제철거 당하고 이후 대구(大邱)에 의현사(義峴祠)를 신축(新築)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채영(蔡泳) 조선 때 군자소감(軍資少監)을 지냈다.

채부(蔡浮) 조선조(朝鮮朝)에 세마(洗馬)를 역임했다.

채명양(蔡明陽) 조선(朝鮮)에서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지냈다.

채승(蔡昇) 조선(朝鮮)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채윤(蔡倫) 조선에서 필선(弼善)을 지냈다.

채신보(蔡申保) 1420(세종 2)1489(성종 20). 자는 자휴(子休), 호는 만계(灣溪). 1438년 진사(進士), 함창 경산 현감(縣監),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 진영병마절제사(鎭營兵馬節制使)를 역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소성군(邵城君)에 봉해짐.

채수(蔡壽) 1449(세종 31)1515(중종 10). ()는 기지(耆之), ()는 나재(懶齋), 시호(諡號)는 양정(襄靖). 1468(세조 14) 생원(生員)이 되고, 1469(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장원으로 급제,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三場)에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해 부수찬(副修撰)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세조실록(世祖實錄)」의편찬에참여하고, 이듬해「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75(성종 6)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음악(音樂)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하였으며, 14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78년에 응교(應敎)로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외직(外職)으로 좌천되게 했고, 1479(성종 10) 정현왕후(貞顯王后 : 윤씨)의 폐위(廢位)에 반대했다가 파직, 1481년 용서되어 직첩(職牒)이 환급(還給)되었다. 그후 제학(提學)․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대사성(大司成)․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 1506(중종 1)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1511년에 지은 패관소설(稗官小說)「설공찬전(薛公瓚傳)」은 그 내용이 윤회화복(輪回禍福)으로 민심(民心)을 소란시킨다는 탄핵을 받아 불태워 버렸다. 그후 함창(咸昌)에 은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산경(山經)․지지(地誌)․시문(詩文)에 능했다.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채윤권(蔡胤權)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채소권(蔡紹權) 1480(성종 11)1548(명종 3).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재(拙齋). 한양 명례방(明禮坊)에서 출생. 1506(중종 원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랑(禮郞)이 되었고, 1511(중종 6)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가 같은 해 12월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배수하였다. 1512(중종 7)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14(중종 9)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제수하였다가 1518(중종 13)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제수하고 동문선(東文選)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521(중종 16)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배수하였고 같은 해 사헌부집의 겸 경연시강관(司憲府執義兼經筵侍講官)으로 옮겼다. 1522(중종 17)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523(중종 18)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고 1524(중종 19)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배수하였다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다.

1526(중종 21) 좌승지(左承旨)를 배수하고 영해부사(寧海府使)를 보직하였으나 이 때에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목민자(牧民者)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사의를 표한 후 창고를 열어서 진휼하고 녹봉을 출연하니 도적이 감화되고 경내가 흡연(翕然)해졌으며 지금도 우애거사비가 있다. 1528( 중종 23)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제수하였고 1533(중종 28)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배수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으며 1535년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으나 1538년 사직하고 낙향하니 많은 동료들이 아쉬워하였다.

1545(인종 원년) 재상(宰相)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시서에 전념하였다. 사림에서 웅연서원(熊淵書院)에 배향하였다. 저서 <화왕전 花王傳>은 학계에 연구대상이 되어 있다.

채승권(蔡承權) ()는 이술(而述).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채윤호(蔡允浩) ()는 양오(養吾), ()는 반구당(伴鷗堂).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후진(後進) 교육에 힘썼다.

채낙(蔡洛) ()는 온원(溫源), ()는 채정(蔡亭). 조선에서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채무일(蔡無逸) 1496(연산군 2)1556(명종 11). ()는 거정(居敬), ()는 일계(逸溪).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 윤권(胤權)의 아들. 1522(중종 17)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1534년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1537년 풀려났다.

154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正字)․정언(正言)을 거쳐 여러 조()의 좌랑(佐郞)을 지내고, 1544년 부모의 봉양을 위해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되었다.

그 뒤 예조 정랑(禮曺正郞)․헌납(獻納)을 거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렀다. 그림에 뛰어나 중종이 죽었을 때 중종의 초상을 그렸고, 팔분체(八分體)의 글씨를 특히 잘 썼으며, 음률(音律)․의약(醫藥)․복서(卜筮) 등에도 정통했다. 함창(咸昌)의 임호 서원(臨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채무택(蔡無擇) ?1537(중종 32). 초명(初名)은 무역(無斁), ()는 언성(彦誠), ()의 아들. 1524(중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부교리(副校理)․장령(掌令)․응교(應敎) 등을 거쳐 1535년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채무적(蔡無敵) 1500(연산군6)1554(명종 9). ()는 거인(居人), ()는 교헌(僑軒), 진사(進士) 윤권(胤權)의 아들. 1528(중종 23) 생원(生員)이 되고, 1533년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올랐다. 1535년 누각(漏閣)을 보수(補修)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종부시(宗簿寺)에 전임, 이어 연천 현감(漣川縣監)이 되었다.

1552(명종 7) 음률(音律)에 능하므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율관(律管)을 교정(校正)했다.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채응린(蔡應隣) ()는 군서(君瑞), ()는 송담(松潭). 조선 때 학자(學者)로 유명하였다.

채선견(蔡先見) ()는 명보(明甫), ()는 양부헌(兩傅軒).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후진(後進) 교육에 힘썼다.

채종길(蔡宗吉) ()는 선여(善餘), ()는 송촌(松村).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채용(蔡容) 조선에서 직강(直講)을 지냈다.

채이항(蔡以恒) 1596(선조 29)1666(현종 7). ()는 여구(汝久), ()는 오봉(五峯), 대사헌(大司憲) ()의 후손. 함창(咸昌) 출신. 이 괄(李 适)의 난과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행재소(行在所)에 찾아가 임금을 배알,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강화가 성립되었으므로 향리(鄕里)에 돌아가 복수책(復讐策)을 상소, 1640(인조 18) 김상헌(金尙憲)․조한영(曺漢英)등 척화신(斥和臣)과 함께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3(인조 21) 돌아왔다. 1648(인조 26) 천거를 받아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이르렀다. 1775(영조 51)에 이조판서 오위도총부(吏曹判書 五衛都摠府)에 추증되었으며 1781(정조 5)에 경헌(景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채득항(蔡得恒) 조선때 서령(署令)을 지냈다.

채득기(蔡得沂) ()는 영이(영而), ()는 우담(雩潭)․학정(鶴丁).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고,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음률(音律)․병진(兵陣) 등에도 밝았다. 1636(인조 14) 천문을 관측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예측, 상주(尙州) 자천대(自天臺)에 들어가 출입을 끊고 독서에 전심했다.

병자호란 후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는 왕자들을 호종(扈從)하라는 왕명에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아 3년동안 보은(報恩)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다시 불려 심양에 갔다. 이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으려 하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에게 태공(太公)의 병법(兵法)을 전하고 그와 함께 돌아왔다. 1798(정조 22) 집의(執義)에 추증(追贈), 상주(尙州)의 상의사(尙議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채몽연(蔡夢硯) ()는 정응(靜應), ()는 투암(投巖).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후진(後進)교육에 힘썼다.

채무(蔡楙) ()는 자후(子後), ()는 백포(栢浦). 조선에서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채지연(蔡之沇)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냈다.

채헌징(蔡獻徵) 조선(朝鮮)에서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채영(蔡領) ()는 원경(元卿).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냈다.

채지면(蔡之沔) 1639(인조 17)1689(숙종15). ()는 한경(漢卿), ()는 수암(수菴), 대사헌 수()의 후손. 1681(숙종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1684(숙종 10)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낙방(落榜)하고는 벼슬을 단념,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일생을 학문에 전심했다.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신석번(申錫蕃) 등에게 사사(師事), 송시열은 수암(수菴)”의 두 자를 손수 써서 그 편액을 걸게 했다. 글씨에 능했고 주자학(朱子學)에 밝았다.

채지홍(蔡之洪) 1683(숙종 9)1741(영조 17). ()는 군범(君範), ()는 봉암(鳳巖)․삼환재(三患齋)․봉계(鳳溪)․사장와(舍藏窩),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영용(領用)의 아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1716(숙종 42)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721(경종 1) 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諮議)가 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이 때 신임사화(辛任士禍)로 노론(老論)이 실각하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少論)의 죄를 논척(論斥)하는 상소(上疏)를 하고 구운산(九雲山)에 들어가 은거, 1725(영조 1) 노론이 기용될 때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 ․ 경연관(經筵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그 후 마지못해 부여 현감(扶餘縣監)․형조 좌랑(刑曹佐郞)․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를 잠시 지냈다.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등과 교유가 깊었으며, 조선후기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당시 심성론(心性論)으로 유학계(儒學界)가 호론(湖論)․낙론(洛論)으로 갈라져 논쟁을 벌일 때 한원진과 함께 호론에 속했다.

채득강(蔡得江) ()는 서재(書齋).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채득호(蔡得湖) ()는 양애(陽崖).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채득렴(蔡得濂) ()는 암재(岩齋). 조선 때 교위(校尉)에 이르렀다.

채징휴(蔡徵休) ()는 간재(艮齋).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채하징(蔡河徵) ()는 취암(翠岩). 조선조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채몽익(蔡夢翼)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채몽정(蔡夢井) ()는 석포(石浦). 조선(朝鮮)에서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

채명보(蔡命寶) ()는 성전(聖典). 조선조에 정자(正字)를 지냈다.

채형구(蔡荊龜) ()는 백목당(白牧堂).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채구장(蔡九章) ()는 운와(耘窩). 조선에서 진사(進士)를 지냈다.

채형(蔡泂) ()는 인재(認齋). 조선조(朝鮮朝)에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채식(蔡湜) ()는 후천(後川).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채성우(蔡性禹) ()는 양고(陽皐). 조선조에 학자(學者)로 후진(後進) 교육에 힘썼다.

채광우(蔡光禹) ()는 직서(稷西). 조선조에 생원(生員)을 지냈다.

채장헌(蔡章獻) ()는 직하(稷下). 조선 때 정자(正字)를 역임했다.

채장오(蔡章五) ()는 침간(枕澗). 조선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채홍의(蔡鴻儀) ()는 화헌(화軒). 조선조(朝鮮朝)에 탁지부 참서세무관(度支部參書稅務官)을 역임했다.

채기중(蔡基中) ?1921. 경북 영주(榮州) 출신. 1913년 풍기(豊基)에서 유창순(庾昌淳) ․류장렬(柳璋烈) ․정만교(鄭萬敎) ․ 김상옥(金相]) 등과 비밀결사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고, 1916년 노백린(盧伯麟) ․ 김좌진(金佐鎭) ․ 기명섭(奇明燮) 등을 규합, 광복단(光復團)이라 개칭하여 군자금의 모집과 부일 반역자 및 악질 관공리의 응징을 꾀했다.

1917년 강순필(姜順弼)․임세규(林世圭)와 함께 군자금 모집에 협조를 거부한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고 피체, 서울에서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채상덕(蔡相悳) ?1925. ()는 심호(深湖). 황해도 출신.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1905(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자 최익현(崔益鉉)의 뒤를 따라 의병을 모집, 황해도 일대에서 항전했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이진룡(李鎭龍)․홍재학(洪在學) 등과 항일운동 방책을 논의했고, 1922년 통군부(統軍府)를 조직, 총장(總長)이 되었으나, 통군부의 내분으로 다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총장에 추대되었다. 19253월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군대가 일본군에게 참패하자 집안현 고마령(輯安懸古馬嶺)에서 자결했다.

채응언(蔡應彦) ?1915. 평남 자산(慈山)출신. 1907(융희 1) 숙천(肅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진룡(李鎭龍) 부대에 합류, 부장(副將)이 되어 평안도․함경도 일대에서 활약했다. 1910년 강두필(姜斗弼)과 함께 의병을 인솔, 안변 마전동 주재소(安邊馬轉洞駐在所), 황해도 선암(仙岩) 헌병파견대 등을 습격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후 강원도에 들어가 계속 항일투쟁을 하다가 1915년 성천에서 잡혀 사형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