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봉산봉주지씨(鳳山·鳳州智氏), 시조지채문(智菜文),봉산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0 15:37 수정일 : 2019-02-12 11:56

시조 및 본관의 유래 - 봉산·봉주지씨(鳳山·鳳州智氏)

봉산지씨(鳳山智氏)의 시조(始祖) 지채문(智菜文)은 고려(高麗) 때의 명장(名將)인데, 그의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는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契丹軍)이 내침(來侵)했을 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또 왕(王)의 피난길을 호종(區從)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아 난(亂)이 평정된 후 공(功)으로 토지(上地)를 하사(下賜)받고 무관(武官)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직했다.

후에 상장군(上將軍) ·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덕종 (德宗)이 즉위하자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봉산(鳳山 :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지씨(知氏)의 본관(本貫)을 13본(本)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봉주(鳳主 : 봉산)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봉산(鳳山)은 황해도(黃海道) 중앙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 (高句麗) 때 휴암군(鵂巖郡) 또는 조파의(租坡衣) · 휴류성(鵂鏡城) 등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서암군(柄巖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개칭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으나 현종(顯宗) 때 폐하고 황주(黃州)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충렬왕(忠烈王) 때 봉양군(鳳陽郡)으로 고쳐 지사(知事) 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봉주로 개칭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태종(太宗)이 봉산군(鳳山郡)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始祖) 채문(蔡文)의 증손(曾孫) 녹연(祿延)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음보(藤補)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東北面)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고 1104년(숙종 9) 여진(女眞) 정벌에 공(功)을 세워 전중시(殿中寺) 어사(御使)가 되었으며, 예종(睿宗) 때 내시 지후(內侍社侯)를 거쳐 경상도(慶尙道) 안무사(接撫使) · 동북면(東北 面) 병마사(兵馬使) 등을 역임한 후 1125년(인조 3)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宣川) 부사(府使) 기협(奇協)의 별장(別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凌漢山城)에 들어간 뒤 전세록(田世祿) · 김여간(金餘幹) · 계숭로(桂崇老) • 임여택(任如澤)등과 함께 선천(宣川)의 월봉(月峰)에서 천여 명의 의병(義兵)을 모아 적을 대파하였으므로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인 구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봉주지씨(鳳山·鳳州智氏)는 전국에 5,751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봉산봉주지씨조상인물

지맹(智 猛) : 1055(문종 9) 좌복야(左僕射)로 수사공(守司空)을 겸임하였으며 1057년(문종 11) 70세 고령(高齡)으로 사임(辭任)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만년(晩年)에 치사(致仕),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지녹연(智祿延) : ?-1126(인종 4). 상장군(上將軍) 채문(蔡文)의 증손, 음보(藤補)로 내알자되고 동북면병마(東北面兵馬) 판관(判官)으로 나갔다. 1104년 (숙종 9) 여진(女眞) 정벌에 공이 있어 전중시(殿中侍) 어사(御史)로 승진하고, 1105년(예종 즉위) 내시지후(內侍祗侯)로서 동계(東界) 산천(山川)을 순시(巡視)했고, 1107년(예종 2) 시어사(侍御史)로서 경상(慶尙) 진주(晉州道) 안무사(接撫使), 1114년 차호부(借戶部) 시랑(侍郞)으로서 동북면(東北面) 병마부사(兵馬府 使), 1118년 이부(吏部) 시랑(侍郞)으로서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 1120년 서북면(西北面) 병마 부사(兵馬府使)를 역임, 1125년(인조 3) 동지추밀원사 (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지주해(智周海):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지유(智 柔):조선 대 병마 우후(兵馬廣候)를 지냈다.

지득남(智得男) :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선천부사 기협(奇協)의 별장(別將)이 되어 능한산성에 들어가 전세록(田世祿) · 김여간 . 계숭로(桂崇老) · 임여택(任如澤)등과 함께 선천(宣川)의 월봉(月峰)에서 천여 명의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적(敵)을 격파하는데 커다란 공(功)을 세웠다. 그 후 명(明)나라 제독(提督) 모문룡(毛文龍)의 추천으로 첨절제사에 올랐고, 용맹(勇猛)과 지략(智略)을 겸비한 무신(武臣)으로 이름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