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충주지씨시조(忠州池氏),지경(池鏡),충주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0 15:04 수정일 : 2018-04-13 12:05

지씨의 연원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의 지명) 땅에서 나서 그 산 곳(居住地)의 이름으로 성(姓)을 삼으니 치음(徵音:五音의 하나)에 속(屬)한다』하였고 또 성씨비고(姓氏備考:책이름)에는「서하(西河)는 경치 좋은 곳으로 계속하여 물이 맑게 흐르는데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으뜸인 고장으로 지자화(池子華)는 지(秦)나라 승상(丞相)이었고, 지몽리(池夢鯉)는 송(宋)나라 함순(咸淳:南宋-1265~1574)년간에 특별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으며, 한(漢)나라 지원(池瑗)은 중모령(中牟令)으로 어진이(賢人)로 이름이 낫고, 송(宋)나라 지광정(池光庭)은 진사(進士)로 문학(文學:글과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는바 모두 『장계(長溪) 사람이다』하였다.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충주지씨시조 (始祖)

충주지씨(忠州池氏)는 중국(中國) 홍농(弘農:河南省靈寶地方) 출신인 선의공(宣懿公) 지경(池鏡:903~1003)을 시조(始祖)로 한다. 선의공은 당소종(唐昭宗) 3년(903)에 홍농 기주 주락산 아래(岐周 周樂山下)에서 출생하여 960년에 송(宋) 단명전(端明殿) 태학사(太學士)로 고려국(高麗國:光宗11年 庚申)에 오셔서 금자광록대부 태보평장서(金紫光祿大夫 太保平章事)의 벼슬을 지내며 신생(新生) 고려국의 제도 정비에 크게 공헌하였고 계속 고려에 정착하여 중화 당악(中和 唐岳:현 中和郡 唐井面 唐村里)에서 만년을 보냈으며 수(壽)가 101歲로 사주(四柱)가 四癸亥라고 전한다.

그 후 6세손(六世孫) 지종해(池宗海:1032~?)가 충주(忠州)로 취거(聚居:장가가서 살았음)하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문종 25년(1071)에 충원백(忠原伯)에 봉하여 자손이 세거(世居) 하였기에 충주로 본관(本貫)을 삼았다.

또 6세손(六世孫) 지중익(池重翼)은 고려 정종(靖宗) 문종(文宗) 년간에 평장사(平章事)로 낳아서부터 상모(狀貌)가 기이(奇異)하여 겨드랑이에 물고기 비늘이 있는 신기(神奇)한 일이 있으니 임금이 보고 매우 이상히 여기며 성(姓)을 어씨(魚氏)로 하사(下賜)하니 충주어씨(忠州魚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하며, 후손(後孫)인 예성군(蘂城君) 어유소(魚有沼)는 조선 세조때 대장군(大將軍)으로 야인(野人) 토벌에 공이 있고 우찬성(右贊成), 원수(元帥) 겸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를 역임하였고 시호(諡號)는 정장공(貞莊公)이다.

관 향 (貫鄕)

충주(忠州)는 중원(中原), 충원(忠原) 예성(蘂城) 중앙탑(中央塔) 한반내(正半川) 등 지명(地名)이 말하듯 한반도(韓半島)의 중심(中心)에 위치한 요지(要地)로서 삼국시대부터 서로 차지하려는 곳인바 본시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으로 미을성(未乙省) 완장성(薍長省)이라고 하다가 신라(新羅)에 귀속되면서 진흥왕(眞興王)때는 소경(小京)을 두고 귀족(貴族)과 6부 호족(豪族)을 이주시켰고, 경덕왕(景德王)때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치었고, 고려(高麗) 태조때 충주(忠州)로 개칭(改稱)하고 성종은 목사(牧使),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중원도(中原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때 안무사(按撫使)로 하였다가 8목(八牧)중 하나로 정하고 그 후 고종(高宗) 41年 국원경(國原京)으로 올리였다가 다시 목사(牧使)로 하였고, 조선조에서는 그대로 충주목사(忠州牧使)를 두었다가 高宗 32年 전국을 23부(府)로 개편(改編)할 때 충주부(忠州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를 두어 충청좌도(忠淸左道)의 수부(首府)였으나 1908년 도청이 청주(淸州)로 이전하고, 1956년 충주시(忠州市)로 현재에 이른다. 위치는 충청북도의 북부이나 우리나라의 중앙지점에 있으며 한강(漢江)과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곳에 있어 평야가 넓고 비옥하며 인심과 풍속이 순후(淳厚)하고, 교통(交通)과 수리(水利)가 매우 편하다. 사적(史蹟)으로는 탄금대(彈琴臺), 중앙탑(中央塔), 고구려 중원비(高句麗 中原碑), 충열사(忠烈祠)와 여러곳의 山城과 수안보(水安堡), 능암(陵岩) 온천(溫泉) 등이 있고 국내 최대의 충주댐(忠州댐), 그 외에 많은 문화재(文化財)가 있다.


씨족사 개요

지씨(池氏)는 충주(忠州) 단일본(單一本)으로 일부는 단양(丹陽) 광주(廣州) 등을 쓰고 있으나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다. 충주지씨는 고려초(光宗 11年:960)부터 중앙(中央)의 지배계급(支配階級)으로 정착(定着)하여 대대(代代)로 많은 人物을 배출하고 고려말(高麗末)까지 세록구신(世祿舊臣)으로 벼슬이 끊이지 않아 고려조(高麗朝)에만 36평장사(平章事)와 24대장군(大將軍)을 배출한 명문(名門)으로 특히 지씨려말사걸(池氏麗末四傑)이라 일컬는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李成桂의 長男 鎭安大君의 丈人)과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 지환(池桓)의 아들 상원수(上元帥) 지용도(池龍圖-忠懿公), 상원수 지용수(池龍壽-忠武公) 형제 그리고, 판호조사(判戶曺事) 지복룡(池福龍)의 아들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장군 등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지윤(池奫)은 우왕때 찬성사(贊成事)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 都元帥)가 되어 북원(北元)을 방비하였고 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심왕(瀋王) 모자의 반역을 방비하였으며 중앙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정방제조(政房提調)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판 판도사사(判 版圖司事)의 직무를 겸하면서 재상에 올랐다.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는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다.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는 공민왕 12년(1363)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안우(安祐)와 같이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경성(京城)을 수복한 1等공신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임명되였고, 순무사(巡撫使)로 덕흥군(德興君) 최유(崔濡) 등 반적(叛賊)을 토벌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이 되고 밀직사(密直事) 지도첨의(知都僉議), 상원수(上元帥) 겸 평양윤(平壤尹)을 역임하고 공민왕 19년(1370) 서북면 상원수로서 이성계(李成桂) 양백안(楊伯顔) 등과 원(元)의 동령부(東寧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는 공민왕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이르렀고 우왕(禑王)때 예의판서(禮儀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후 양광도 부원수(楊廣道 副元帥),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 都巡問使) 도원수(都元帥) 등을 역임(歷任)하면서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왜적(倭賊)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장흥(長興), 보성(寶城) 정읍(井邑) 나주(羅州) 등지의 전투에서 적 수십급(數十級)을 베고, 우리 백성 수백명을 포로에서 구출하였고, 응령역(應嶺驛)전투에서 적의 화살을 맞기도 하였다. 우왕 14년 위화도 회군때는 안주도 도원수(安州道 都元帥)로 이성계의 회군에 공을 세우고 찬성사(贊成事)로서 이성계 등과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 흥국사(興國寺) 모임에 참가한 9功臣의 한분으로 중흥공신(中興功臣) 충의군(忠義君)에 다시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에 봉(封)하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나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 당으로 지목, 탄핵을 받아 삼척(三陟)에 귀양갔다가 풀려나 충남 면천(沔川)에서 졸(卒)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의 아들 지유용(池有容)은 세종(世宗)때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와 충청안무사(忠淸按撫使), 판경성부사(判鏡城府事), 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능력과 용맹을 갖추어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로 卒하니 왕이 부의를 보냈다.

지유용(池有容)의 아들 지개(池開)는 진사(進士),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官職에 나아갔으며, 이어 그 자손이 8代에 걸쳐 연속(連續)하여 進士, 生員에 급제 함으로서 무려 일문에 사마(司馬)가 22명이 배출되는 명문(名門)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도 좌승지(左承旨) 지세함(池世涵:進士)과 그 아들 교관(敎官) 지달해(池達海) 도사(都事) 지달문(池達汶)형제, 그리고 지달해의 아들 왕자사부(王子師傅) 지봉휘(池鳳輝:進士) 부처(夫妻) 등이 삼세(三世)에 오효(五孝)로 정려(旌閭)와 사복십결(賜復十結)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지달해(池達海)는 생원(生員)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나서 中國에서까지 詩를 구하고자 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때 시학교수(詩學敎授)로 추천되였으나 폐모론(癈母論)이 일자 일체의 관직을 멀리하고 충청도로 숨어버려 문장(文章)과 기절(氣節)뿐만 아니라 孝行으로 세상에서 추앙을 받았고,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이항복(李恒福), 유근(柳根) 등과 교의(交誼)가 두터웠다.

지덕해(池德海)도 생원(生員)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강직한 인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충청도 소모관(忠淸道 召募官)으로 의병(義兵)과 군량미(軍糧米) 모집에 공이 컸으며 용강(龍岡) 령해부사(寧海府使) 등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지여해(池汝海)는 덕해(德海)의 재종제(再從弟)로 지용(智勇)이 뛰어난 무관(武官)으로 용천(龍川), 철산부사(鐵山府使) 등을 지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위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별장(別將)으로 300명 결사대(決死隊)를 이끌고 城을 나아가 싸우다 순절(殉節)하니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추증 되었다

지봉수(池鳳遂)는 효자(孝子) 증참판(贈叅判) 지달문(池達汶)의 아들로 진사(進士)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종묘봉사(宗廟奉事)로 묘주(廟主)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는데 체찰사(體察使)가 亂中에 풍류를 갖추고 술을 권하니 公이 정색(正色)을 하고 제찰사를 꾸짓었으며, 신주(神主)를 안전히 모실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더니 마침내 강화가 적에게 함락 되여서는 모든 관원(官員)이 다 도망하되 혼자 묘주(廟主)를 지킨 의리로 적도 감히 해(害)하지 못하였다. 후에 회덕현감(懷德縣監)을 지내고 인조의 항복을 憤하게 여기고 槐山에 落鄕하여서 다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