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횡성조씨시조(橫城趙氏),조익(趙翌),횡성조씨조상인물,조충(趙沖)

작성일 : 2017-05-19 12:12 수정일 : 2018-03-06 21:3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횡성조씨시조(橫城趙氏 始祖) 조익(趙翌)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첨(瞻)의 아들로 958년(고려 광종 9)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횡성(橫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횡성(橫城)은 강원도(江原道) 남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라 부르다가 신라 때에 황천(黃川)이라 고치고 삭주(朔州 : 춘천)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다시 횡천이라 일컫고 종전대로 삭주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원주(原州)의 속현(屬縣)으로 하였고, 1389년(공양왕 1)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현감(縣監)을 두고, 1414년 횡천과 홍천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횡성으로 개칭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원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다시 현이 되었고, 1760년(영조 36)에는 원주로부터 토포사(討捕使)가 이설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횡성군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익(翌)의 아들 승린(承藺)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손자(孫子) 윤익(潤益)은 집현전(集賢殿) 태학사(太學士)를, 증손(曾孫) 주조(周祚)는 중서 승(中書丞)에 이르렀다. 영인(永仁)은 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를 거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사(守太師)․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했다.

한편 영인의 아들 충(沖)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한림학사(翰林學士)로 동지공거(同志貢擧)를 겸임하고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친 거란군(契丹軍)의 침입을 물리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른 변(抃)은 충(沖)의 손자이며, 평장사(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로 동생 해(晐)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지근(支瑾)의 아들 무(茂)가 벼슬을 지내고 공(功)이 있어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으며, 후손 인(遴)은 부호군을 지냈다.

선조(宣祖)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목(穆)은 대춘(大椿)의 아들로 벼슬이 공조(工曹)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나 청빈하여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일생을 학문(學問)에만 힘써 대학자(大學者)로 존경을 받았고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 외 인물로는 성립(誠立)이 공주(公州) 목사(牧使)․대사간(大司諫)․수찬관(修撰官) 등을 역임했으며, 식(湜)은 공조(工曹) 참의(參議)․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등을 지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석동(錫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횡성조씨(橫城趙氏)는 전국에 6,685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 - 횡성조씨조상인물

조승린(趙承藺):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조윤익(趙潤益):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조주조(趙周祚): 고려조(高麗朝)에 중서성(中書省) 승(丞)을 지냈다.

조정신(趙正臣): 고려조(高麗朝)에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이르렀다.

조시언(趙時彦):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조영인(趙永仁): 1133(인종 11)~1202(신종 5).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의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주(全州)의 서기(書記)를 지내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태자(太子)의 보도(輔道)를 맡았다.

1174년(명종 4) 좌사 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1191년 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가 되고, 1194년 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 1196년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 1197년(명종 27) 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평자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 1201년(신종 4) 특명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신종(神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충(趙 沖): 1171(명종 1)~1220(고종 7). 자(字)는 담약(湛若),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시중(侍中) 영인(永仁)의 아들.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랐다가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여 명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1211년(희종 7) 대사성(大司成)․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고,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예부(禮部) 상서(尙書)를 거쳐 1216년(고종 3) 문무(文武)를 겸비했다 해서 추밀부사․한림학사 승지로서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하였다.

문관으로서 상장군(上將軍)을 겸한 일은 문극겸(文克謙) 이후 처음 이었다. 이해 거란병(契丹兵)이 북부에 침입하자 행영중군(行營中軍)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정숙첨(鄭叔瞻)의 휘하에서 출정, 이듬해 염주(鹽州 :연일군)에서 정방보(鄭邦寶)와 함께 거란병을 격퇴했으나 이어 태조탄(太祖灘)에서 대패하여 한때 파면되었다가 이듬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인주(麟州)에 침입한 여진족(女眞族)을 대파하여 파면전의 관작(官爵)을 다시 받았다.

이해 수사공․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에 임명되어 귀경(歸京)하였으나 곧 서북면 원수가 되어 김취려․정통보 등을 출정하여 거란군을 대파, 이듬해에는 몽고군(蒙古軍)과 연합하여 거란군이 웅거하는 강동성(江東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이어 합진(哈眞)과 우호를 맺은 후 개선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판예부사(判禮部事)에 오르고, 곧 수태위(守太衛)․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가 더해졌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었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조계순(趙季珣): 시호(諡號)는 광정(光定).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예부사(判禮部事)등을 역임하였다.

조식(趙 植):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조오(趙 峿): 고려조(高麗朝)에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조숙창(趙叔昌): ?~1234(고종 21). 평장사(平章事) 충(沖)의 아들. 1231년(고종 18) 몽고의 살리타이 (撒禮塔)의 침입에 방수장군(防戍將軍)으로 함신진(咸新鎭)을 지키다가 항복, 적을 도와 삭주(朔州) 선덕진(宣德鎭)도 항복하게 했다.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으나 1234년 반란한 필현보(畢賢甫)의 진술에 의해 연루자로 효수(梟首)당했다.

조변(趙 抃): ?~1288(충렬왕 14). 문하시중(門下侍中) 충(沖)의 손자,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 원종(元宗) 때 낭장 겸 감찰사(郎將兼觀察使)가 되고, 1271년 (원종 12) 김방경이 진도(珍島)의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할 때 장군(將軍)으로 기용, 1274년 여원(麗元)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대장군(大將軍)으로 천호(千戶)가 되어 김방경을 따라 출전, 공(功)을 세웠다.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정벌 때 원제(元帝)로부터 소신교위(昭信校尉)․관군총파(官軍摠把)에 임명되고, 1284년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전고(典故)에 통달했다.

조지백(趙支伯): 고려(高麗) 때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이르렀다.

조문근(趙文瑾): 고려(高麗) 때 태학사(太學士)를 지냈다.

조신단(趙臣旦):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조무(趙 茂): 조선(朝鮮) 때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조선(趙 瑄): 조선조(朝鮮朝)에 장령(掌令)을 지냈다.

조홍도(趙弘道): 조선(朝鮮) 때 부윤(府尹)을 역임하였다.

조수정(趙壽貞): 조선(朝鮮)에서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조형(趙 荊):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랐다.

조민(趙 敏): 조선(朝鮮) 때 중서성(中書省) 승(丞)을 역임하였다.

조온보(趙溫寶):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조효례(趙孝禮):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조장(趙 璋): 조선조(朝鮮朝)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지냈다.

조철수(趙哲守): 조선(朝鮮)에서 교위(校尉)를 역임하였다.

조윤손(趙胤孫): 조선(朝鮮)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조준(趙 俊) 조선조(朝鮮朝)에 서윤(庶尹)을 지냈다.

조응세(趙應世): 조선(朝鮮) 때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조진(趙 進): 조선(朝鮮)에서 별제(別提)를 지냈다.

조인(趙 遴): 호(號)는 은은당(隱隱堂).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조대진(趙大秦):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조응영(趙應榮): 1627년(인조 5) 이인거(李仁居)가 횡성(橫城)에서 변란(變亂)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평한 공으로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목(趙 穆): 1524(중종 19)~1606(선조 39). 자(字)는 사경(士敬), 호(號)는 월천(月川)․동고(東皐), 대춘(大椿)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52년(명종 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고, 1571년(선조 4) 이조의 추천을 받아 동몽(童蒙) 교관(敎官)․공릉(恭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후에 성균관(成均館)의 천거로 집현전(集賢殿)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했다. 1576년 봉화(奉化) 현감(縣監)을 거쳐 1594년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이듬해 장악원(掌樂院) 정(正)으로 전임, 1601년(선조 34) 사재감(司宰監) 정(正)을 거쳐 공조(工曹)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일생을 학문에만 뜻을 두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예천(醴泉)의 정산서원(鼎山書 院),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봉화(奉化)의 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신인(趙臣仁):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전생서(典牲署) 직장(直長)이 되었고 그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조성립(趙誠立): 자(字)는 여명(汝明), 호(號)는 일소헌(一笑軒). 1599년(선조 32) 문과에 급제한 후 공주 목사(公州牧使)․대사간(大司諫)․수찬관(修撰官)등을 역임하였다.

조정립(趙正立): 1560(명종15)~1612(광해군 4). 자(字)는 여직(汝直), 호(號)는 송호(松湖),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 진(進)의 아들. 정경세(鄭經世)․한백겸(韓百謙)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닦았다. 1589년(선조 22) 진사(進士)가 되고,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저작(著作)․병조(兵曹) 좌랑(佐郞)․직강(直講)을 지내고, 1598년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1606년 사인(舍人)이 되었다. 광해군 초 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그후 응교(應敎)․집의(執義)․사성(司成) 등을 모두 거절,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 때 그가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이유가 김직재의 일당인 때문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어 부득이 직제학(直提學)에 취임했다가 이해 병사했다.

조식(趙 湜): 1673년(현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1686년(숙종 12)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공조(工曹) 참의(參議)․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및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 등을 지냈다.

조홍국(趙鴻國): 조선(朝鮮) 때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였다.

조석동(趙錫東): 조선조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