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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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17 17:21 수정일 : 2019-09-09 15:40

함안조씨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시조(始祖) ()은 자()를 우보(禹寶), ()를 모당(慕唐),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며,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新羅) 말기(末期)에 두 아우 부()와 당()을 데리고 절강인(浙江人) 장길(張吉)과 함께 동래(東來)하였다.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등과 교의(交誼)가 두터웠고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陜川)에서 기의(起義) 태조(太祖) 14(931) 고창성(古昌城:지금의 안동)에서 견훤(甄萱)을 대파(大破)하고 동경주현(東京州縣)을 항복(降伏)받아 고려통일(高麗統一)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함안(咸安)에 세거(世居), 본관(本貫)을 함안(咸安)으로 하였다. 안동(安東)의 칠현사(七賢祠), 동수(桐藪)의 충열사(忠烈祠)에 제향(祭享)한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안조씨(咸安趙氏)는 남한에 282,8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 대 인 물

고려시대 인물

조열(趙 悅) (생몰년 미상) : 금은(琴隱) 고려말에 태어나 관직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올랐으나 생년월일, 관직, 이력은 세대가 멀어서 고증(考證)할 수 없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다시 공조전서에 보하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고려에 충절을 지킨 충신이다.

조안경(趙安卿) (생몰년 미상) : 경밀(景謐호 : 고죽재(孤竹齋) 고려 충정왕 3년(135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해주 천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벼슬을 내려도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이다.

조승숙(趙承肅) (1357~1417) : 경부(敬夫호 : 덕곡(德谷) 시호 : 문경(文敬) 고려 우왕 2년(1376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길재(吉再)와 친교가 있었으며, 1377년 문과에 급제. 원나라 저작랑(著作郞) 1391년 부여감무(扶餘監務).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며 숙종 27년(1701년)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배향되고, 문집으로 덕곡집(德谷集)이 있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이다.

조거(趙 琚) (1340~1413) : 영보(永寶호 : 송강(松岡) 우왕 4년(1378년) 사마(司馬)에 합격. 우왕 6년(1380년)에 문과에 급제. 청주목사(淸州牧使) 역임. 우왕 11년(1385년)에는 황조(皇朝)에서 특별히 금계(金鷄)벼루를 하사. 조선태조 7년(1398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 제수. 왕지(王旨) 삼장(三章)이 유전(遺傳)한다.

조선시대 인물

조여(趙 旅) (1420~1489) : 주옹(主翁)  호 : 어계(漁溪) 시호 : 정절(貞節) 단종 1년(145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으니 함안으로 귀향(歸鄕)하여 종신(終身)토록 세상에 나가지도 않고 벼슬도 아니 하였다. 단종 복위 후 숙종 9년(1703년) 증가선대부이조참판(贈嘉善大夫吏曹參判), 정조 5년(1781년) 증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를 가증(加贈)하였다. 평소 기거하시던 백이산 밑 원북동에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 등 생육신(生六臣)과 함께 병향(並享)하고 서산서원(西山書院)이라 사액(賜額)되었다.

조욱(趙 昱) (1432~ ? ) : 자명(子明)  단종 1년(1453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이 안동부유학교수(安東府儒學敎授),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조동호(趙銅虎) (1441~1517) : 정부(貞符) 예종 1년(1469년) 진사시 합격, 성종 7년(1476년) 호위부장에 제수, 성종 11년(1480년)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에 이임(移任),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천임(遷任). 거창군수, 무주군수,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 사옹원(司饔院) 판관(判官), 진산군수, 중종 3년 (1508년) 영덕현령에 선임.

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하였다.

조금호(趙金虎) (1445~1533) : 수옹(壽翁)  세조 11년(1466년) 무과에 급제, 세조 12년 서정(西征)에 종사하여 공을 세웠다.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水軍) 우후(虞候) 제수, 장기, 고성, 거제의 삼현감(三縣監). 영흥부통판(永興府通判), 단청군수,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 양주목사, 광주, 서흥에 전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내금위장(內禁衛將). 중종 19년(1524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조순(趙 舜) (1465~1527) : 요경(堯卿)  호 : 옥봉(玉峰)  성종 17년(1486년)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1492년 문과에 합격. 승문원(承文院)에 선임. 홍문관교리, 의정부 사인(舍人), 사헌부 장령(掌令) 집의(執義), 군기시정(軍器寺正),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충청부사, 김해부사, 중종 17년(1522년) 도승지(都承旨)에 배명.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예조참판. 중종 19년(1524년) 이조참판에 배명.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그후 개성부(開城府) 유슈(留守)를 제수받았다.

조삼(趙 參) (1473~ ? ) : 노숙(魯叔)  호 : 무진정(無盡亭) 성종 20년(1489년)에 진사. 1507년 문과에 급제. 함양, 대구, 성주, 창원, 상주 등 다섯 고을의 관장과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 등을 역임하였다.

조임도(趙任道) (1585~1664) : 덕용(德勇)  호 : 간송당(澗松堂) 인조조(仁祖朝)에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능참봉(恭陵參奉). 대군사부(大君師傅). 효종(孝宗) 때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증통선랑사헌부지평(贈通善郞司憲府持平)하였다. 경종 원년(1721년) 함안군 산인면 송정리 송정서원(松汀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13()

함조 13(咸趙13)이란 정절공(貞節公. 諱 旅)의 후손 가운데 선조(宣祖)때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당하자 의()로서 왜적을 토벌하다가 살신순국(殺身殉國)하신 (), (), (), 종도(宗道), 신도(信道), 민도(敏道), 응도(凝道),의 일곱 선조와 인조(仁祖)때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을 당하자 선등격전(先登激戰)하여 훈공(勳功)을 세우고 혹은 실진역갈(失盡力竭)하여 순국(殉國)하신 익도(益道), 선도(善道), 계선(繼先) 세분의 선조, 그리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에 녹(錄)해진 수천(壽千)과 정유재란 시 자문(自刎)하신 준남(俊南), 병자호란 때 분사(憤死)하신 형도(亨道) 세분의 선조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 13() 조선(祖先)

1)조수천(趙壽千) : (1482~1553) : 중수(仲叟) 호 : 북계(北溪) 연산군 9년(1503년) 무과에 급제, 1506년 선전관(宣傳官)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원종일등훈(靖國原從一等勳)의 녹권전지(錄券傳旨)가 내렸으며, 함흥, 밀양부사와 내금위장(內禁衛將),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2)조붕(趙 鵬) : (1534~1598) : 대익(大翼) 무과에 급제.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때 훈련부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순절(殉節)하였다.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 증가선대부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兵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로 가증(加增) 하였다.

3)조탄(趙 坦)) : (1552~1612) : 극평(克平) : 도암(韜巖) 선조 36년(1603년)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에 의병을 그느리고 곽재우 선생을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왜적을 수없이 무찔렀다. 임진왜란 후 녹권전지(錄券傳旨)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이등공신(二等功臣)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겸 절충조방장군(折衝助防將軍)이라고 쓰여 있다.

4)조방(趙 垹) : (1557~1638) : 극정(克精) : 두암(斗巖) 임진왜란때 가형이신 탄(坦)어른과 조카인 형도(亨道), 동도(東道) 공들과 같이 화왕산성에 들어가 곽재우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쳤다. 증가선대부호조참판(贈嘉善大夫戶曹參判) 하였다.

5)조종도(趙宗道) : (1537~1597) : 백유(伯由) 호 : 대소헌(大笑軒)  명종 13년(1558년) 생원시에 합격.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장례원사평 등을 역임. 선조 16년(1583년) 양지현감 . 1587년 금구현령 . 선조 29년(1596년) 함양군수 역임.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가또(加藤淸正)가 인솔한 왜군과 싸우다가 정부인(貞夫人)과 함께 순절하였다. 증자헌대부이조판서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贈資憲大夫吏曹判書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하고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6)조준남(趙俊男): (1547~1597) : 사언(士彦) 효행(孝行)으로 추천되어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 무진정(無盡亭) 위에서 자결. 숙종 32년(1706년) 부자(父子)정려(旌閭)를 명하여 부자(父子) 쌍절각(雙節閣)이라 하여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무진정 왼편에 세워졌다. 고종 5년(1868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7)조신도(趙信道) : (1554~1595) : 중유(仲由) 무과에 급제. 온양군수로 지내던 공은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피난 가던 선조대왕의 수레를 호위하여 적과 싸우면서 무사히 피난하게 하고, 다시 적과 싸우다가 순절(殉節) 하였다.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하고 호성원종훈(扈聖原從勳) 일등훈(一等勳)과 선무원종삼등훈(宣武原從三等勳) 하였다.

8)조민도(趙敏道) : (1556~1592) : 계유(季由)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벼슬을 가지지 않았으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진중에 나아가 전투에 참가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특증하고 녹훈(錄勳)과 함께 정려(旌閭)하고 조세감면의 은전을 주었다.

9)조응도(趙凝道) : (1565~1597) : 사성(士成) : 송오(松塢) 선조 17년(1584년) 무과에 급제. 선조 25년(1592년) 고성현령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맞아 끝까지 성을 사수. 정유재란때 중과부적으로 자결. 그후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 되었다.

10)조형도(趙亨道) : (1567~1637) : 대이(大而) : 동계(東溪)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선조 27년(1594년) 무과에 합격 선전관 겸 비국랑(宣傳官 兼 備局郞)에 임명, 통정대부, 경산현령. 광해군 14년(1622년) 가선대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恥辱)을 듣고 울분이 폭발 등창이 터져 분사(憤死)하였다.

11)조익도(趙益道) : (1575~1647) : 여행(汝行) : 도곡(道谷) 선조 8년(1575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이괄의 난(李适의 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원종훈(原從勳)에 올랐으며, 인조 2년(1624년) 악왕정충록(岳王精忠錄)을 특사하고 녹훈권(錄勳券)을 하사하였다. 증통정대부병조참의(贈通政大夫兵曹參議) 하였다.

12)조선도(趙善道) : (1580~1640) : 이순(而順) 호 : 묵곡(黙谷) 광해군 10년(1618년) 무과에 급제. 어모부장(禦侮部將). 1624년 이괄의 난(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안현(서울 무악재)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 하였다. 녹진무원종(錄振武原從) 1등훈(一等勳)을 받았다.

13)조계선(繼先) : (1570~1627) : 효백(孝伯 13충신의 한분인 준남(俊男)의 아들로서 선조 36년(1603년) 무과에 올랐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시 중과부적으로 적에 패하자 불에 타 자살했다. 철종 5년(1854년)에 병조참의. 고종 5년(1868년) 병조참판으로 증증(增贈)되었다.

숙종 32년(1706년) 부자 정려(旌閭)를 명하여 함안에 부자 쌍절각이 세워졌다.

조평(趙 平) (1569~1647) : 형중(衡中) 호 : 운학(雲壑)  1609년 진사시에 합격. 인조3년(1625년) 정사원종일등공신의 녹권이 내려졌다. 인조5년(1627년) 세자(世子)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에 제수. 1632년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으로 있을때 금산군수․ 김성발과 협력하여 칠백의사총을 만들고 종용사(從容祠)를 지어 고경명 등을 배향했다. 병자호란때는 초모도유사로서 의병들의 군량을 조달했다. 숙종45년(1919년) 임실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문집 3책이 있다.

조영복(趙榮福) (1672~1728) 자 : 석오(錫五)  호 : 이지당(二知堂) 문예가 숙성하여 15세에 방시(榜示)에 합격. 1705년 생원시험에 합격 전설사 별검. 의금부도사. 전생서 주부. 호조좌랑. 사복시 판관. 예천군수.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동래부사. 병조참지. 경상도관찰사. 첨지중추부사. 개성부유수. 한성부 우윤 등을 배명하였다.

조영석(趙榮祏) (1686~1761) : 종보(宗甫)  호 : 관아재(觀我齋) 석계산인(石溪山人)이다. 세칭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화단을 대표하는 삼재(三齋)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문장서화(文章書畵)에도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조중회(趙重晦) (1711~1782) : 익장(益章)  시호 : 충헌(忠憲) 영조 12년(1736년) 정시문과(廷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 교리. 수찬. 헌납을 거쳐 사은 겸 동지사. 대사간. 대사성. 병조참의를 거쳐 영변부사. 양주목사. 개성유수. 도승지. 이조판서. 예조판서. 함경도관찰사. 공조판서를 지냈다. 45년간 관직 생활을 기록한 『입조일기(入朝日記)』는 희귀한 자료이다.

근 대 인 물

조정규(趙貞奎) : (1853~1920) : 서천(西川) 경남 함안 태생. 함안 인산재(仁山齋)와 한천재(寒天齋)에서 학구에 전념, 문하생을 배출. 한천육현(六賢)의 명유.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倂呑)하자 통곡, 자강의 방책강구, 1914년 중국 망명. 독립운동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