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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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16 10:36 수정일 : 2018-01-07 20:00

풍양조씨시조 및 풍양조씨유래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는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陽縣) 사람인 조맹(趙孟)이다. 그는 본래 초명이 바위()였는데 만년(晩年)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상주국삼광문하시중평장사(上柱國三匡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맹()이란 이름을 하사(下賜) 받았다.

그 후 후손(後孫)들이 시조(始祖)의 세거지명(世居地命)풍양(豊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시조 이하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일세조를 각기 다르게 하는 두 계통(系統)으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洲)의 옛 지명(地名)으로,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양(荒壤)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후에 풍양으로 고쳐 양주에 속하였다. 그후 포주(抱州 : 抱川)에 이속되고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다시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6세까지 실전(失傳)전직공파(殿直公派)는 고려 때 전직(殿直)을 지낸 조지린(趙之藺)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몇 대까지 실전(失傳)했는지 상고(詳考)할 수 없는 평장사파(平章事派)조신혁(趙臣赫), 상장군파(上將軍派) 조보(趙寶)를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파()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대(系代)를 알지 못해 대동보(大同譜)에서도 구분(區分)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전직공파(殿直公派)는 다시 호군공파(護軍公派 : 사충) 회양공파(淮陽公派 : ) 금주공파(錦州公派 : ) 3(三派)로 나누어지고, 평장공파(平章公派)는 상장군공(上將軍派)를 합쳐 크게 5(四派)로 분파(分派)되었다.

회양공파(淮陽公派)의 후손에서 다시 한산군파(漢山君派)와 사옹정공파(司饔正公派)로 크게 갈리는데 이들 두 파가 조선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고, 후손도 가장 번창해서 현존(現存)하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운흘(云仡)이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계림부윤(鷄林府尹) 등을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특히 풍양조씨는 조선 말기에 와서 크게 세도를 떨쳐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으며, 그 세력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쌍벽을 이루었다.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익정(益貞)은 공조 좌랑(工曹左郞) 안평(安平)의 손자로 벼슬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공조(工曹)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지진(之鎭)의 아들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중종 때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지낸 종경(宗敬)과 명종 때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안국(安國)은 훈련대장(訓鍊大將) ()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가 되어 추풍령(秋風嶺) 싸움에서 패하고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퇴시켜 1599(선조 32)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올라 선무삼등공신(宣武三等功臣)으로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명문(名門) 풍양조씨를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일으키는데 주춧돌이 된 인물들을 파별(派別)로 보면, 청교파(靑橋派 : 회양공파의 후손)에서 상우(相遇)․문명(文命)․현명(顯命)․재호(載浩) 등의 정승(政丞)과 원명(遠命) 시준(時俊) 정진(鼎鎭) 홍진(弘鎭) 상진(尙鎭) 병필(秉弼) 병창(秉昌) 등의 판서급(判書級)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평장공파(平章公派)에서는 조선 중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인 익()이 효종(孝宗) 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복양(復陽)은 현종(顯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복약(復陽)의 아들 지겸(持謙)은 숙종(肅宗)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만원(萬元)과 함께 헌종(憲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한산군파(漢山君派 : 회양공파의 후손)는 도정(都正)을 지낸 도보(道輔)의 아들 상경(尙絅)․상강(尙綱)․상기(尙紀) 3형제와 8명의 손자(孫子)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영조(英祖)와 정조조(正祖朝)에 걸쳐 확고한 세도의 기반을 닦았다.

상경(尙絅)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 엄()은 영조(英祖) 때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감자를 가지고 들어와 우리 나라에 퍼뜨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칭「조고집」으로 불리웠던 그는 정조(正祖) 때 공조(工曹) 및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에 이르렀으나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 일당의 탄핵으로 김해(金海)로 유배(流配)당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영조(英祖) 때 과거에 급제하여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흥진(興鎭)이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판서(判書) 용화(容和)는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당대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졌다.

이렇게 조선조(朝鮮朝)에서 명성을 날린 풍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한말(韓末)의 격동기에 나라와 가문을 위해 몸 바쳐 충성했다.

그 중에 항일투쟁에 앞장선 정구(鼎九)․완구(琬九)․동석(東奭) 등이 이름났는데, 정구(鼎九)는 고종(高宗) 때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와 기로소 비서장(耆老所秘書長) 등을 지내고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재직중 한일합방이 되자 합방 조서(合邦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고 자결하려다 실패하자 금강산(金剛山)에 입산(入山)하여 중이 되기도 했으며, 그의 종제인 완구(琬九)는 군수(郡守)에 재임중 합방을 당하자 간도(間島)로 가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간부로 활약했고, 동석(東奭)은 경북 상주(慶北尙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순절했다.

현대에 와서 풍양 조씨 종인(宗人)들은 「풍육회(豊育會)」를 설립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선조(先祖)의 묘소 및 유적지 정화사업과 종보 및 족보(族譜)발간 등 다양한 사업목표를 설정하여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모든 종친(宗親)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양 조씨(豊穰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25,894가구, 109,4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남한에 총 124,262명이 살고 있는ㄴ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풍양조씨조상

조온순(趙溫珣) 고려조(高麗朝)에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다.

조 정(趙 晶) 고려조에 감찰사 장령(監察司掌令)을 역임하였다.

조숙령(趙淑鴒) 고려(高麗) 때 사헌부 산랑(司憲府散郞)을 지냈다.

조계령(趙季鴒) 고려에서 상서형부 낭중(尙書形部郎中)을 역임하였다.

조성옥(趙性玉) 고려(高麗) 때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냈다.

조염휘(趙炎暉) 고려(高麗)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겸 좌상시(左常侍)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조찬(趙 瓚) 고려(高麗) 때 전서(典書)를 지냈다.

조선(趙 瑄) 고려조(高麗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조운흘(趙云仡)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는 석간(石磵), 평장사(平章事) ()의 후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인(門人). 1357(공민왕 6) 문과(文科)에 급제. 안동 서기(安東書記)가 되고, 각문 사인(閣門舍人)을 거쳐 1361(공민왕 10)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1363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 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全羅)․서해(西海)․양광(楊廣) 삼도 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내고, 1374(공민왕 23)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 출입할 때에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기우도(騎牛 圖)」․「찬석간가(贊石磵歌)」 등 작품을 지었다.

1377(우왕 3)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80년 광주(廣州) 고원 강촌(古垣江村)에 은퇴, 자은사(慈恩寺)의 중 종림(宗林)과 친교를 맺으며 사평원(沙平院)․판교원(板橋院)을 중건하여 스스로 원주(院主)가 되었다.

1388(우왕 14) 전리 판서(典吏判書)에 기용되고, 이해 창왕(昌王) 즉위 후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로 나가 왜구(倭寇)를 토벌 했으며,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390(공양왕 1)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나갔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로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광주에서 여생을 마치었다.

조운개(趙云价) 고려(高麗)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조운식(趙云式) 고려조(高麗朝)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 하였다.

조사충(趙思忠) 고려(高麗) 때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천우위 중령호군(天牛衛中領護軍)을 역임하였다.

조신(趙 愼) 초명(初名)은 사염(思廉)․고려(高麗) 때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회양도호부사(淮陽道護府使)를 역임하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임(趙 袵) 초명(初名)은 덕인(德麟)․고려(高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조안평(趙安平) 조선조(朝鮮朝)에 승의랑(承議郞)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조개평(趙開平) 조선조(朝鮮朝)에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역임하였다.

조길통(趙吉通) 조선(朝鮮)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조계팽(趙季砰)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조하(趙 夏) 조선조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조추(趙 秋) 1441(세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조겸지(趙謙之) 조선(朝鮮) 때 정랑(正郞)을 지내고,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종부시판관(宗簿寺判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온지(趙溫之) 조선(朝鮮) 때 용진 현령(龍津縣令)을 역임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조후지(趙厚之)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조유(趙 瑜)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조신충(趙信忠) 조선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부정(副正)을 지냈다.

조서경(趙瑞卿)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무과(武科)에 합격, 장기현감(長鬐縣監)을 거쳐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조서정(趙瑞廷) ()는 자부(子符)․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하였다.

조익장(趙益長) 조선(朝鮮) 때 지평 현감(砥平縣監)을 지냈다.

조익정(趙益貞) 1436(세종 18)1498(연산군 4)

()는 이원(而元), 시호(諡號)는 공숙(恭肅),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평(安平)의 손자. 1453(단종 1) 진사(進士)가 되고, 1465(세조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1468(세조 14) 남 이(南 怡)의 옥()을 다스리는 데 공을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 撰官)으로「세조 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어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지고, 1491(성종 22) 대사헌(大司憲)․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했다. 1495(연산군 1)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공조와 이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1497년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조익조(趙益祚) ()는 여경(餘慶).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를 역임하였다.

조현범(趙賢範) ?1538(중종 33)

장사랑(將仕郞) 지진(之鎭)의 아들. 1501(연산군 7) 무과(武科)에 급제, 1506(중종 1) 의주 판관(義州判官), 1512년 평안도 우후(平安道虞侯)를 지내고, 1520년 부평 부사(富平府使)를 거쳐 1528년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재직중 야인(野人)들에게 패한 죄로 파직당했다.

1535년 용서되어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되고, 1537(중종 32)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김안로(金安老)의 부탁으로 금․은․화피(樺皮) 등을 가지고 와서 밀무역(密貿易)을 했다는 혐의로 파직당했다.

조익희(趙益禧)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익상(趙益祥) ()는 서옹(瑞翁).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詞直)을 역임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었다.

조익우(趙益祐) ()는 서흥(徐興). 조선(朝鮮)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조 침(趙 琛) 조선(朝鮮)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 ) ()는 이백(頣伯). 조선(朝鮮)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형조 정랑(刑措正郞)에 이르렀다.

조세문(趙世文)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조세헌(趙世獻) 조선조(朝鮮朝)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조세현(趙世賢) 조선(朝鮮) 때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빙고별좌(氷庫別座)를 지냈다.

조세훈(趙世勛)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이 있어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풍양군(豊穰君)에 봉()하여 졌다.

조세철(趙世哲) ()는 국언(國彦).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조세적(趙世勣) ()는 국노(國老). 조선(朝鮮) 때 개령 현감(開寧縣監)을 지냈다.

조선(趙 璇) ()는 기부(璣夫).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조승호(趙承瑚) ()는 세보(世寶).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詞直)을 지냈다.

조윤녕(趙允寧) ()는 영지(寧之). 조선(朝鮮)에서 춘천 부사(春川府使)를 지냈다.

조종경(趙宗敬) 1495(연산 1)1535(중종 30)

()는 효백(孝伯), ()는 독암(獨庵), ()의 아들. 1516(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2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주서(注書)를 거쳐 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수찬(修撰)을 역임하고, 1524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추천되었으나 김안로(金安魯)의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1526년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이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전임, 이어 장령(掌令)․사간(司諫)․전한(典翰)을 지낸 후 1531년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있을 때 심정(沈 貞)의 일당이라는 김안로의 탄핵으로 파직, 과천(果川)에 내려가 학문을 연마했다. 1537년 김안로가사사(賜死)되자 신원(伸寃)되었다.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종돈(趙宗敦) ()는 숙후(叔厚). 조선조(朝鮮朝)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역임하였다.

조기(趙 磯) ()는 자고(自固).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굉(趙 紘) ()는 강중(剛中).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詞直)을 지냈다.

조희(趙 禧) ()는 경지(慶之). 조선조(朝鮮朝)에 직장(直長)을 지내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다.

조휘(趙 徽) ()는 자미(子美), ()는 송파(松坡). 조선(朝鮮)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조정추(趙廷樞) ()는 응두(應斗). 조선(朝鮮)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사예(司藝)를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풍원군(豊原君)에 봉()해졌다.

조정기(趙廷機) ()는 형선(衡善).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에 올라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하고, 부제학(副題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수익(趙守翼) ()는 시보(時輔), ()는 운애(雲厓).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정랑(吏曹正郞)․홍문관 교리(弘文舘校理)를 역임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제학(提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풍령군(豊寧君)에 봉()해졌다.

조수준(趙守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