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순창조씨시조(淳昌趙氏) 고려조에 순창호장을 지낸 조자장(趙子長)을 시조로 하고

작성일 : 2017-05-15 17:38 수정일 : 2019-09-06 12:06

순창조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순창조씨(淳昌趙氏)는 고려조(高麗朝)에 순창 호장(淳昌戶長)을 지낸 조자장(趙子長)을 시조로 하고, 선조(先祖)의 토착지(土着地)인 순창(淳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씨족사(氏族史) 개요(槪要)

2세 조선현(趙先賢)은 호장(戶長)을, 3세 조온(趙溫)과 4세 조원식(趙元軾)은 향직(鄕職)인 보윤(甫尹)을 지낸 것으로 보아 4세까지는 순창에서 세거(世居)한 것으로 보이며 5세 조인평(趙仁平)은 고려(高麗) 명종(明宗) 7년 계룡산(鷄龍山) 도적(盜賊)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금오위(金吾衛)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 때 순창을 떠나 관직에 따라 이사(移徙)한 것으로 보인다.

6세 조광명(趙光名)은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7세 조문정(趙文琔)은 충렬왕(忠烈王) 31년에 좌우위(左右衛)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으며, 8세 조염(趙廉)은 충숙왕(忠肅王) 2년에 문과에 등과(登科)하고, 충숙왕 15년 원(元)나라 과거(科擧)에 등과(登科)하여 심양등로군민총관(瀋陽等路軍民摠管) 지부사(知府事)를 역임하였고, 고려조에서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밀직사(密直司) 사(事),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

9세 조봉(趙縫)은 손가락을 불태워 약을 타서 아버지를 소생(蘇生)시킨 효자(孝子)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순창군(淳昌君)에 봉해졌고, 신(紳)은 고려가 망하자 송평으로 낙향, 은거하여 피세정(避世亭)을 세우고 그곳에서 종신(終身)토록 충절을 지켰다. 임천군사(林川郡事)를 지낸 조경(趙璥)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충신이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시애난(李施愛亂) 때 선봉장(先鋒將)으로 나가서 난을 토평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른 조종(趙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복(服), 반(胖)과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훈(策勳)된 조덕공(趙德恭), 최여헌난 때 공을 세워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책훈(策勳)된 조덕용(趙德容)과 조기(趙圻), 이들은 모두 조신(趙紳)과 함께 칠충사(七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을 지낸고 임진왜란 시 전재민(戰災民)을 구제하는데 공을 세운 조흔(趙昕),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의 외손자(外孫子)로 경상(慶尙) 감사(監司)로 있을 때 징비록(懲毖錄)을 처음 출간(出刊)하고 이조(吏曹) 판서(判書) 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조수익(趙壽益),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로 천거(薦擧)된 조수항(趙壽恒), 경서(經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20세 때「천명도해(天命圖解)」를 저술(著述)한 조주일(趙冑一) 등은 모두 문중을 빚낸 인물이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창 조씨(淳昌趙氏)는 전국에 총 2,970가구 12,41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서울, 충북, 경기, 전남에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이 조사한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창조씨(淳昌趙氏)는 전국에 총 34,06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순창조씨(淳昌趙氏)와 옥천조씨(玉川趙氏)는 서로가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同祖之孫)이라고 인정되어 양(兩) 문중(門中)에서 합보(合譜)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논의(論議)가 있었으나 어느 때 분파(分派)되었는지 고증할 수 없어 합보(合譜)하지 못하고 있다.(옥천(玉川)은 순창(淳昌)의 별호)


주요 집성촌

평택군 서탄면 내천리(평택).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탑동)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평택). 중원군 이유면 장성리 (성종)

예천군 용문면 방송리(예천). 중원군 노은면 수용리 (팔송)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안촌).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 (삼고)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지곡). 괴산군 문광면 송평리 (행정)

여주군 가납면 금당리(여주).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 (송현, 원충, 갑산)


역대인물(歷代人物)-순창조씨조상인물

조인평(趙仁平) 1177년(명종 7) 19세 때 정세유(鄭世猷)를 따라 남적(南賊) 망 이(亡 伊)․ 망소이(亡所伊)를 청주(淸州)에서 사로잡아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금오위(金吾衛) 낭장(郎將)에 특배(特拜)되고 누진되어 검교(檢校)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조광명(趙光明) 일명(一名) 광숙(光肅).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조문정(趙文琔) 고려에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 1288년(충렬왕 14) 이천(伊川) 감무(監務) 겸 권농사(勸農使)를 지내고 이듬해 승봉랑(承奉郞)으로 중문 지후를 거쳐 130 5년(충렬왕 31) 좌우위(左右衛)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조염(趙 廉) 1290(충렬왕 16)~1343(충혜왕 복위 4). 초명은 영견(永堅), 자(字)는 노직(魯直), 호(號)는 중재(中齋),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1340년(충혜왕 복위 1) 안 축(安 軸) 등과 함께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심양등로총관지부사(瀋陽等路摠管知府事)가 되었다. 귀국 후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지내고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지공거(知貢擧) 한종유(韓宗愈)의 부정사실을 탄핵했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다.

조봉(趙 縫) 시호(諡號)는 양도(良度). 1329년(충숙왕 16)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1361년(공민왕 10) 영복도감(永福都監) 판관(判官)이 되어 금어대(金魚袋)를 받았다. 1363년(공민왕 12) 소부감(小府監) 소윤(少尹), 1365년(공민왕 14) 수원(水原) 부사(府使), 이듬해 감문위(監門衛) 대호군(大護軍), 1367년(공민왕 16) 흥위위(興威衛)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이듬해 전의령(典儀令)에서 단기감(單器監)으로 전임되었고, 1369년 충주(忠州) 목사(牧使)가 되었다. 1379년(우왕 5) 예의(禮儀) 판서(判書)를 거쳐 이듬해 판도(版圖) 판서(判書)가 되고, 1381년(우왕 7) 개성윤(開城尹)․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 1385 년(우왕 11) 성근좌리공신(誠勤佐理功臣)에 책록,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순성군(淳城君)에 봉해졌다. 일찍이 아버지 조염(趙廉)를 수행 중국으로 갈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신고(辛苦)하자 원제(元帝)가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치료토록 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병세가 날로 침중하므로 그가 손가락을 태워 약에 타서 드리고 회생시키니 세상사람들이 소지공(燒指公)이라 했다.

조신(趙 紳) 호(號)는 피세정(避世亭).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고려(高麗)가 망하자 괴산의 송평(松坪)으로 은거하여 정자(亭子)를 세워 피세정(避世亭)이라 이름하고 <춘입서산심고적(春入西山尋古跡) 월종동해문고의(月從東海問高儀)>라 시를 지어 편액(扁額)을 하고 백이․숙제(伯夷叔齊)와 안진경(安眞卿)의 충절을 찬미했다. 괴산(槐山)의 칠충사(七忠祠)에 제향되었다.

조경(趙 璥) 호(號)는 서산(西山). 1374년(공민왕 23)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及第), 전교(典校) 시랑(侍郞)에 기용되고, 1383년(우왕 9)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을 거쳐 1385년(우왕 11) 사재시(司宰寺) 승(承)이 되었다. 1387년(우왕 13)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기복(起復)하여 통례문(通禮門) 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사설서(司設署) 영(令), 이어 전법(典法) 좌랑(佐郞)으로 금어대(金魚袋)를 받고 이조(吏曹) 좌랑(佐郞)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1)에 흥복도감(興福都監) 판관(判官)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아 예조(禮曹) 정랑(正郞) 승진되었다. 그후 병조(兵曹) 정랑(正郞)으로 전임되고 전교(典校) 부령(副令)․지임천군사(知林川郡事)등을 역임했다. 조선 개국(朝鮮開國) 후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했고, 태종(太宗)이 진사에 동방(同榜)한 정의로 순흥(順興) 부사(府使)․공조(工曹) 전서(典書)․광주(光州) 목사(牧使)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 서산지절(西山之節)을 본 받았다.

조욱(趙 頊) 자(字)는 흠지(欽之).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로 출사(出仕)하여 공조(工曹) 좌랑(佐郞)․형조(刑曹) 좌랑(佐郞)․온양(溫陽) 군수(郡守)․제용감(濟用監) 정(正) 등을 역임하고, 1466년(선조 12) 해주(海州) 목사(牧使) 겸 권농사(勸農使)에 이르렀다.

조려(趙 旅) 조선(朝鮮) 때 사정(司正)을 역임하였다.

조이(趙 怡)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조유(趙 愉)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각 성(省)에 재직하다가 만경(萬頃)과 태인(泰仁)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공조(工曹) 참의(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종(趙 悰) 일찍이 진사(進士)에 합격, 낭서(郎署)를 거쳐 동래(東萊) 부사(府使)가 되고 천거로 동래(東萊) 부사(府使)가 되고, 천거(薦擧)로 은성(隱城)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다. 1467년(세조 12) 이시애(李施愛)가 길주(吉州)에서 난을 일으키자 선봉장(先鋒將)으로 수훈을 세우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除授)받고 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괴산(槐山)의 칠충사(七忠祠)에 제향되었다.

조부(趙 傅)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했다.

조연(趙 演) 자(字)는 수약(守約). 1508년(중종 3 알성시 을과(乙科)에 등과(登科)하여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을 역임했다.

조한(趙 澣)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조세구(趙世球) 자(字)는 여조(汝調), 호(號)는 송재(松齋).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학업에 정진하여 문명(文名)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고, 특히 조광조(趙光祖)와 막연한 사이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대윤이 정권을 잡아 단경왕후 신비를 폐출하고 이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것을 보고 벼슬할 것을 단념하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왔다. 1541년(인종 원년)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위(趙 偉)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다.

조노성(趙老成) 품계(品階)가 과의교위(果毅校尉)에 이르다. 성종(成宗)의 여(女) 휘숙옹주(徽淑翁主) 부(夫)인 임숭재(任崇載)의 사위이다.

조인(趙 認) 선전관청(宣傳官廳)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조신(趙 伸) 자(字)는 대이(大伊).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조전(趙 詮)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조맹현(趙孟賢)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조홍기(趙弘基)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조흔(趙 昕) 자(字)는 경빈(景賓).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귀후서(歸厚署) 별좌(別坐)에 천거되었다. 그후 형조(刑曹) 좌랑(佐郞)을 거쳐 과천(果川) 현감(縣監)으로 전출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호조(戶曹) 좌랑(佐郞)이 되었다. 이어 영평(永平) 현령(縣令)․양천(陽川) 현감(縣監)을 지내면서 치적이 있어 한성(漢城) 판관(判官)에 승진되었다. 그후 삼화(三和) 현령(縣令)으로 재직(在職)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의 대비책을 준비(準備)하고 왕이 의주로 안전하게 난을 피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노변의 전재민을 구제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품계를 높여 중책을 맡기려고 했는데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장악원(掌樂院) 정(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승(趙 勝) 자(字)는 극기(克己), 호(號)는 안토당(安土堂). 조선(朝鮮)에서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조성(趙 誠) 자(字)는 성중(省中). 조선(朝鮮) 때 전의감(典醫監) 정(正)을 지냈다.

조복(趙 服) 자(字)는 안중(安仲). 1563년(명종 18) 진사(進士)가 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장(部將)을 거쳐 장연(長連) 현감(縣監)․호남(湖南) 좌수영(左水營) 우후(虞侯)․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사온서(司醞署) 영(令) 등을 역임한 후 홍주(洪州)․해주(海州) 판관(判官)을 지냈다. 그 후 개천(价川) 군수(郡守)를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괴산의 송평(松坪)으로 돌아와 다시 관계(官界)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성안 군수에 임명되어 근무하다 연로하여 퇴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분개하여 병석(病席)에서 분기, 각처로 격문을 보내어 천여 명의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용맹하게 싸우다가 충주(忠州)에서 전사(戰死)하였다. 그후 병조(兵曹) 참의(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괴산의 칠충사에 배향되었다.

조반(趙 胖) 자(字)는 덕윤(德潤)이고 조선조에 음보(蔭補)로 사과(司果)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勃發)해 교남(嶠南)이 함락되자 그가 괴산(槐山)을 지키게 되었다. 후(後)에 중형(仲兄) 복(服)과 함께 천여 명의 의병(義兵)을 이끌고 충주(忠州) 남쪽에 진을 치고 싸웠다. 사후(死後)에 공조(工曹) 참판(參判)에 추중되고 괴산(槐山) 칠충사(七忠祀)에 배향되었다.

조방영(趙邦潁) 자(字)는 중오(仲悟). 1564년(명종 19)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 교하(交河) 현감(縣監)․평안도(平安道) 병마평사(兵馬評事)․중화(中和) 부사(府使) 등을 지내고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특진되었다. 앞서 교하(交河)와 중화(中和)를 다스릴 때 치적이 있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조환(趙 環)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조방순(趙邦順) 우후(虞侯)를 역임했다.

조방록(趙邦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조정현(趙廷顯) 자(字)는 중경(重卿). 조선 때 양지(陽智) 현감(縣監)과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사위는 영의정(領議政) 신경진(申景禛: 신립(申砬) 장군의 아들)이다.

조정순(趙廷純)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조덕유(趙德柔)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조덕관(趙德寬) 자(字)는 경오(敬五).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조덕공(趙德恭) 자(字)는 사원(士愿). 조선(朝鮮) 때 무예와 병법이 뛰어나 천거로 수어감(守禦監) 정(正)에 이르렀으며, 36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호조(戶曹) 정랑(正郞)을 지냈다. 1587년(선조 20)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로 중시(重試)에 급제하고, 양지(陽智) 현감(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려 하자, 주민(州民)이 유임을 청원하여 1년간 더 근무하다 고향으로 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동생 덕검(德儉)과 의병을 규합하여 공을 세웠으며, 숙부(叔父) 복(服)이 의병을 이끌고 충주(忠州)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적진으로 뛰어가 시체더미 속에서 복(服)의 시신(屍身)을 찾아 장사(葬事)를 지냈다. 그 후 병조(兵曹)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조덕용(趙德容) 자(字)는 여윤(汝潤). 이 이(李 珥)의 문인. 1627년(인조 5) 이인거(李仁居)의 역모를 중지시키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재랑(齋郞)에 제수(除授)되어 별좌(別坐)에 전임되었다가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이 되었다. 괴산(槐山)의 칠정사(七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조덕검(趙德儉) 자(字)는 사화(士和).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조덕형(趙德亨) 자(字)는 여수(汝遂).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조덕수(趙德秀) 자(字)는 신경(愼卿)이고 선전관(宣傳官), 삼수(三水) 부사(府使)를 역임팼다.

조덕량(趙德亮) 자(字)는 명경(明卿)이고 품계(品階)가 종사랑에 이르렀다.

조덕립(趙德立) 자(字)는 입경(立卿). 조선조(朝鮮朝)에 공조(工曹)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조익(趙 釴) 자(字)는 국이(國耳). 조선(朝鮮) 광해조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호조(戶曹) 정랑(正郞),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내고 경시관(京試官)으로 호서시(湖西試)를 맡았다.

조철(趙 澈) 자(字)는 사영(士英).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삼척 영장(三陟營將)을 지냈다.

조직(趙 稷) 자(字)는 여형(汝馨). 조선조(朝鮮朝)에서 문경(聞慶) 현감(縣監), 공조(工曹) 좌랑(佐郞)을 역임하고 이조(吏曹)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의 사위이다.

조숙(趙 塾) 자(字)는 서륜(敍倫). 성 혼(成 渾)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충주(忠州)의 남창(南倉)에 진을 쳤는데 모친상의 부음을 받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 후 괴산의 전유형(全有亨)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전공을 세워 선전관(宣傳官)에 제수(除授)되었고,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거쳐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첨정(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 25)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에 이르렀으며,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그후 해주(海州) 판관(判官)에 재임 중 공적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훈련원(訓練院) 판사(判事) 겸 사복시(司僕寺) 내승(內乘)․덕천(德川) 군수(郡守) 등을 거쳐 1614년 가산(嘉山) 군수(郡守)를 지낸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4년(인조 2) 홍주(洪州) 영장(營將)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635년(인조 13) 80세에 수직(壽職)으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겸 충장장(忠壯將)이 되었다.

조기(趙 圻) 자(字)는 자안(子安). 1628년(인조 6) 최여헌(崔汝獻)의 난 때 조덕용(趙德容)과 함께 토평한 공으로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오위장(五衛將)에 이르렀다. 녹권(錄券)과 당시 사용하던 군도(軍刀)가 현재 칠충사(七忠祠)에 보존되어 있고, 괴산(槐山)의 칠충사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식(趙 埴) 자(字)는 자수(子遂), 호(號)는 애춘당(昹春堂).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조훈(趙 塤) 자(字)는 사화(士和). 1616년(광해군 8) 사마(司馬)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사서(司書)․설서(設書)․정언(正言)․교리(校理) 등을 거쳐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서장관이 되고, 가평(加平)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조완(趙 琓) 조선(朝鮮) 때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조급(趙 圾) 자(字)는 백순(伯循). 조선(朝鮮)에서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지냈다.

조지(趙 址) 자(字)는 숙우(叔宇). 조선조(朝鮮朝)에 공조(工曹) 좌랑(佐郞)을 지냈다.

조상우(趙相遇) 자(字)는 회경(會卿). 조선 때 별제(別提)를 역임하고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조장원(趙長源) 자(字)는 계지(啓之). 조선조(朝鮮朝)에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조수익(趙壽益) 자(字)는 사정(士靜), 호(號)는 만한당(晩閑堂),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류성룡(柳成龍)의 외손(外孫). 1624년(이조 2)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한 후 세마(洗馬)가 되었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정언에 재직하면서 남한산성을 지키는 독전어사로 제수받아 수어장대(守禦張臺)에서 성을 지키는 책무를 다하였다. 이어 이조(吏曹) 낭관(郎官)․부제학(副題學)․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이조(吏曹) 참판(參判)을 거쳐 경상(慶尙) 감사(監司)에 재임 중 외조부(外祖父) 유성룡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수난사(受難史) 징비록(懲毖錄)을 출간(出刊)해 비로서 새상에 빛을 보게 하였으며 이어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 감사(監司)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후 이조(吏曹) 판서(判書) 겸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