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칠원제씨시조(漆原諸氏),제갈영(諸葛嬰),제갈홍(諸葛泓),제갈영(諸葛瀅),칠원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22:06 수정일 : 2019-09-05 10:2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제씨(諸氏)는 본래 제갈씨(諸葛氏)에서 분관(分貫)된 성씨(姓氏)로 전(傳)한다. 「칠원제씨세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칠원제씨(漆原諸氏)의 원조(遠祖)는 제갈영(諸葛嬰)으로 34세손 제갈 홍(諸葛泓)과 제갈 영(諸葛瀅) 형제 대(代)에서 복성(復姓)을 각각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兄)인 홍(泓)은 제씨(諸氏)로 낭야군(瑯揶君)에 봉해졌으며, 아우인 영(瀅)은 갈씨(葛氏)로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져 제씨(諸氏)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되었다.

그후 낭야군 홍(泓)의 9세손 제문유(諸文儒)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될 때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책록되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고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에 봉(封)해 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면서 가문(家門)의 번성(繁盛)을 이어 왔다.


칠원현의 연혁

칠원(漆原)은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안군(咸安郡)에 위치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칠제(漆隄)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지금의 창원)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쳤고 1018(헌종 9) 김해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조(宣祖)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이 되었고 1895년(고종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후에 함안군(咸安郡)에 병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말(沫)이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워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정조(正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낙(洛)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倭敵)을 배둔역(背屯譯)에서 대파한 공(功)으로 참봉(參奉)을 지냈고 한성부 서윤(漢城付庶尹)에 추증(追贈)되어 이름을 날렸다.

그 외 선략장군(宣畧將軍)에 오른 여원(汝元)은 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 경창(慶昌), 호조 참의(戶曹參議) 달룡(達龍), 감찰(監察) 정로(珽魯), 방어사(防禦使) 경욱(景彧) 등과 함께 훌륭한 가문을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칠원제씨(漆原諸氏)는 전국에 20,0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칠원제씨조상인물

제문유(諸文儒) 1266(고려 원종 7 1338(충숙왕 복위 6)자(字)는 공화(公華) 호(號)는 삼성(三省) 관(官)은 평장사(平章事)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 1295년(충렬왕 2)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1311년(충숙왕(忠肅王 3)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에 제수(除授)되고 1320년(충숙왕 7) 동지사(冬至使)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1327년(충숙왕 14)에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가 된 후 1330년(충숙왕 17) 벽상도형1등공신(壁上圖形1等功臣)으로 책록(策錄)되어 사전(賜田) 200결, 노비(奴婢) 20명을 하사(下賜) 받고 자손(子孫)에게 음직(蔭職)이 내렸고 공신녹권(功臣錄券)를 등재(登梓)되고 대전승의원(大殿承義院) 학사(學士)로 자옥대(紫玉帶) 일품(一品)과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구산부원군(龜山:지금 칠원)부원군(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6) 향년 73세로 별세(別世)하여 칠원군 구산면 우두산(牛頭山) 에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칠원윤씨(漆原尹氏)와 합분(合墳)으로 안장(安葬)되었다.

제철손(諸哲孫) 1489년(성종 20)-? 자(字)는 언숙(彦叔)호(號)는 동고(東皐)이며 관직(官職)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충무위(忠武衛) 부사과(副司果) 겸(兼)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에 재임(在任) 중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류(連類)되어 낙향하였고「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2권에 그 사적이 등재(登梓)되어 있으며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제조겸(諸祖謙) 자(字)는 광서(光緖)이고 음직(蔭職)으로 품계(品階)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제호(諸 灝) 자(字)는 청원(淸源)이고 절충장군(折衝將軍) 조겸(祖謙)의 아들이다. 음직(蔭職)으로 공조(工曹)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제낙(諸 洛) 1541(중종 36)-? 자(字)는 청숙(淸淑). 호(號)는 죽림(竹林).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 義兵)을 일으켜 동생 말(沫)과 조카 홍록(弘祿)과 더불어 배둔역(背屯譯) 전투(戰鬪)에서 대승(大勝)하고 당항포(唐項浦) 해전(海戰)에서 적을 물리치고 구만장치(九萬墻峙) 전투에서 왜병의 목을 뱅 공으로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除授)되고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에 추증(追贈)되었고 당항포 현충탑에 전공(戰功)사적(事績)이 기록(紀錄)되어 있고 칠성지(漆城誌)에 행적(行蹟)이 수록되어 있다.

제말(諸 沫) 1544년 중종39)~1592(선조 25).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고성(固城) 출신. 제조겸의 5자(子) 체구가 크고 팔이 길어 영웅호걸의 기상으로 힘이 세고 수염이 무성해 성을 내면 뻣뻣이 하늘로 치솟고 그 가 싸울 때는 마치 우레(雨雷)가 기둥을 깨뜨리고 바람이 강물을 요동하듯 천지가 진동하였음으로 적병이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그를 나는(飛) 장군(將軍)이라 했다. 조카 홍록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을 거쳐 가장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해 적의 예봉(銳鋒)을 무찌르고 군사를 거느려 고성(固城)에서 분연히 몸을 일으켜 진양으로 달려가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웅천, 정암나루, 조령(鳥嶺), 무계(茂溪) 전투에서 대승한 후 성주(星州)를 평정하여 그 공으로 성주 목사가 되어 적병을 많이 섬멸한 후 아군 전투병이 부족하여 성이 함락되자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리는 태산 같이 무겁게 생각하고 목숨은 홍모(鴻毛)처럼 가벼이 여겼다. 1792년(정조 15)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성주와 진주에 제씨쌍충사적비가 정조의 어명으로 건립되어 현존하고 있을 뿐아니라 1812년(순조 12)에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를 다시 받았으며 운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은 갑자기 일어나 적을 토벌하여 향하는 곳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으니 그의 명성(名聲)은 곽재우 정기룡보다 낫다고 말했고, 판윤(判尹) 유최기(兪最基)는 싸울 때마다 용맹한 기상이 하늘을 찌르고 수염이 가시와 같았기에 왜적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두려워했다라고 했으며 관찰사(觀察使) 정익하(鄭益夏)는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며 만고(萬古)충렬(忠烈)이라 했으니 이는 분명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조(吏曹) 판서(判書) 서유린(徐宥獜)은 신도(神道)비문(碑文)을 지어 당나라 현종조에 안록산의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이후에 오직 공이 있을 뿐이라 격찬했고, 당항포 현충탑(顯忠塔)과 대구(大邱)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되고 충남(忠南) 보령(保寧)에 임란공신숭모회(壬亂功臣崇慕會) 공적비(功績碑)가 건립(建立)되었고 각 「도읍지(都邑誌) 및 향교지(鄕校誌)」, 「경상남도(慶尙南道) 유림(儒林)보감(寶鑑)」에 전공(戰功)사적(史蹟)이 등재(登梓)되었다.

제홍록(諸弘祿) 1558(명종 13)~1597(선조 30). 자(字)는 경행(景行), 참판(參判) 호(灝)의 아들. 성품이 강직하고 기계(奇計)가 뛰어나 활소기와 창쓰기를 잘해 24세되는 1581년(선조 1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힉문 연구로 수신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기를 모아 무기를 만들어 삼촌 말(沫)을 따라 의거(義擧)하여 고성에서 기병하여 곤양 등지의 왜적을 소탕한 공으로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이 되어 계속 섬멸하여 이순신(李舜臣)에게 알려져 그 막하(幕下)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군에게 포위된 진주(晉州)를 지원하기 위하여 출전하다 도중에서 적을 만나 전사했다. 1796년(정조 16)에 병조 참판에 추증(追贈)되고 성주(星州)와 진주(晉州)에 제씨쌍충사적비(諸氏雙忠史蹟碑)가 정조(正祖)의 어명(御命)으로 건립(建立)되어 현재(現在)까지 문화재(文化財)로 보존(保存)되고 있으며 1812년(순조 12) 계부(季父) 말(沫)은 충의(忠毅)로 재시(再諡)되고 공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追贈) 받았다. 각도(各道) 읍지(邑誌) 및 선현(先賢)들의 문집(文集)에 전공(戰功)에 대한 사적(史籍)이 기록(記錄)되어 있고 임란공신숭모회(壬亂功臣崇慕會)에서 보령시(保寧市)에 공신비(功臣碑)를 세웠고 대구(大邱) 충의단(忠義壇)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고 당항포(唐項浦) 현충탑(顯忠塔)에 사적(史蹟)이 기록되고 고성(固城)에 신도비(神道碑)가 건립(建立)되고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제만춘(諸萬春) 1560~1635. 자(字)는 성유(成有)이고 호는 해천(海川)이다. 대솔군관(帶率軍官)으로 성석동(成石洞) 박검손(朴檢孫) 등 12명의 군관과 함께 영등포(永登浦:지금의 거제도(巨濟島)대전(大戰)에서 대승(大勝)하여 많은 공을 세워 영부군관으로서 통영세병관 기문에 전적사항이 기록되어 있고 고성 당항포에 군민이 세운 현충탑(顯忠塔)에 그 명성이 기록되어 있고,「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 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억보(諸億輔) 1556~1598. 자(字)는 소훈(素訓)이고 호(號)는 기당(杞塘)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지 고성(固城)에서 거병(擧兵)하여 곤양 하동전투에 참전하여 크게 전공을 세워 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 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광해(諸光海)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 왜적을 섬멸한 공(功)으로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녹(策錄)되었다.

제응립(諸應立) 1550~1597. 자(字)는 도훈(度訓)이고 호(號)는 약당(藥塘)이다. 1592년 임진왜란 시 이운룡 진중에서 왜적과 전투중 전사하여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 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득호(諸得浩) 1550~1592. 자(字)는 광습(廣習)이고 호(號)는 중당(重塘)이다. 1592년 의령 정암전투에서 왜적과 격전 중 전사해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 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득인(諸得仁) 1553~1597. 자(字)는 획계(獲契)이고 호(號)는 약강(約江)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 일족부대(一族部隊)를 편성하여 진주(晉州)에 출전하여 목사(牧使) 김시민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고 정유재란(丁酉再亂) 시 왜적(倭賊)을 추격(追擊)하다 전사(戰死)하였다. 전공에 관한 기록은 충남 보령의 공신비가 건립되어 있고「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여물(諸餘勿) 1554~1597. 자(字)는 임추(林秋)이고 호(號)는 시헌(始軒)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배둔역(背屯驛)을 거점으로 왜적을 막았으며 고성(固城) 현령(縣令) 조응도(趙凝道)와 함께 고성전투에 전과(戰果)를 올리고 정유재란(丁酉再亂) 시 순국(殉國)하여 선무원종2등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과 충남 보령에 있는 공신비(功臣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순복(諸順福) 1554~1597, 자(字)는 송대(松垈)이고 호(號)는 백강(百岡)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糾合)하여 부모님에게 하직하고 김해(金海)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倭賊)을 파영(破營)하고 양응원(襄應元) 강기경(姜起敬) 이몽구(李夢龜) 등과 합세(合勢)하여 영호남 일대에서 노략질하는 왜구(倭寇)를 시살(弑殺)하는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충남 보령의 공신비와「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순수(諸順壽) 1555~1593. 자(字)는 구범(久凡)이고 호(號)는 치강(治岡)이다. 1592년 임진왜란 시 김해 창영을 왕래하면서 침범하는 왜구(倭寇)를 섬멸(殲滅)하였고 왜장(倭將) 가토(加藤淸正)가 무력으로 김해성(金海城)을 함락(陷落)시키자 변응성(邊應星) 갈봉하(葛逢夏) 등이 거느린 관군(官軍)과 합세(合勢)하여 김해성의 왜적을 무찔러 3승1패의 치열한 전투를 하는 중 경상(慶尙) 감사(監司) 김수(金粹)가 원군(援軍) 500명(名)을 보내와 북문으로 돌입하여 화공법(火攻法)을 사용해 김해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창영 영산에 침입한 왜적을 공격하는 선봉장이 되어 전투 중 전사하였다.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고 훈련원(訓練院) 훈련부장(訓練部將)에 추증(追贈)되었다. 충남 보령에 공신비가 수립되고 <공신록권> 및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세봉(諸世鳳) 1556~1593. 자(字)는 계소(界昭)이고 호(號)는 우정(羽亭)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 홍록(弘祿), 응립(應立), 억춘(億春), 순복(順福) 등(等) 여러 종인(宗人)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종중부대(宗中部隊)를 창설(創設)하여 임진(壬辰) 계사(癸巳) 2년에 걸쳐 수십 차례 전투에서 고성, 사천, 진주, 김해, 진해, 등지(等地)를 종횡무진(縱橫無盡) 다니면서 왜적과 전투 중 전사하였다. 훈련원(訓練院) 보인(保人)에 추증(追贈)되고 선무원종3등공신에 책록(策錄)되었고「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억춘(諸億春) 1559~1597. 자(字)는 도준(度濬)이고 호(號)는 수헌(首軒)이다. 1592년 왜적(倭賊)이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이유로 조선을 침범(侵犯)하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서울 개성 평양을 점거하자 공은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켜 부모님에게 하직하고 적의 소굴이 된 거제도에 가 부장(部將) 김득광(金得光)과 혈맹(血盟)하고 왜적을 쳐 사로잡았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시 진주성(晉州城) 전투(戰鬪)에서 전사(戰死)하였다.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에 추증(追贈)되고 선무원종2등공신훈에 책훈(策勳)되었다. 충남 보령에 공신비가 수립되고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수영(諸秀英) 1559~1592. 자(字)는 지경(智境)이고 호(號)는 화강(華岡)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의병을 기병(起兵)하여 적(賊)의 소굴(巢窟)인 정암(鼎岩)에서 고경명(高敬命) 정인홍(鄭仁弘) 류종계(柳宗介) 장사진(張士珍) 등의 군과 연합(聯合)하여 왜적(倭賊)과 접전 중 도망치는 적(賊)을 추격(追擊)하다 매복(埋伏)한 복병(伏兵)을 만나 접전(接戰) 중(中) 전사(戰死)하였다. 훈련원(訓練院) 사복(司僕)에 추증(追贈)되고 선무원종3등공신에 책훈되었다.「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만호(諸晩浩) 1559~1593. 자(字)는 모성(暮性)이고 호(號)는 대정(大貞)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종당(宗黨)과 협의(協議)하여 왜적(倭賊)을 물리칠 계책(計策)을 강구하여 종친부대(宗親部隊)를 조직하여 남해안을 점거하고 있는 왜적들과 수십 차례 전투를 전개해 수십 명의 수급을 베는 전공을 세워고, 곤양전투에서도 전공을 세웠으나 선진(船津)전투(戰鬪)에서 전사했다. 수문장(守門將)에 추증되고 선무원종3등공신에 책록되고「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영인(諸令仁) 1562~1597. 자(字)는 사성(使聲)이고 호(號)는 덕제(德齊)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형(兄) 만호(晩浩)와 함께 출정(出征)하여 고성(固城)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倭賊)을 공격(攻擊)하니 적이 공의 위세(威勢)에 눌려 대항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사천(泗川) 선진(船津)전투에서 형 만호가 전사(戰死)하자 일가들이 합세하여 복수전(復讐戰)까지 전개했다. 이 때 아군의 희생도 많았으나 적은 200명이나 사살되었다. 진주성 전투에 출전하여 적의 포위망에 빠져있는 최경회(崔慶會) 김천일(金千鎰)을 돕다 전사(戰死)하였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장(部將)에 추증(追贈)되고 선무원종3등공신에 책록되었다.「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광금(諸廣金) 1564~1597. 자(字)는 심철(深哲)이고 호(號)는 귀강(貴岡)이다. 청년장군으로 임진왜란 시 풍찬로숙(風餐露宿)으로 떨고 있는 백성을 구제(救濟)하고 국난(國難)을 극복(克服)한 영웅(英雄)호걸(豪傑)이다. 손수 활(弓)과 검(劍)과 창(槍)을 제작하여 종친(宗親)부대(部隊)를 조직하고 기강을 확립하여 동래성으로 가다가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박홍(朴泓)이 왜적(倭賊)과 싸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浦)가 실함(失陷)되어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전사(戰死)하고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역시 이 전투에 패(敗)하였다. 공은 동래성을 탈환하기 위해 왜적과 싸웠으나 일족(一族)의병(義兵) 태반을 잃고 양산으로 퇴진하여 부사(府使) 박진(朴晉)과 함께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배수진을 쳤으나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다시 의병을 창모(倡募)하여 고성 하동 남해 요충지대에 노략(擄掠)질 하는 왜적(倭賊)들을 섬멸(殲滅)하고자 이덕필(李德弼) 변홍달(卞弘達) 심준(沈俊) 어응인(魚應仁) 박몽삼(朴夢三) 등(等)과 합세(合勢)하여 왜적(倭賊)을 쫓아 진격(進擊)하는 중 적(賊)의 복병(伏兵)을 만나 장렬(壯烈)하게 전사(戰死)하였다.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에 추증(追贈)되고 선무원종3등공신에 책록(策錄)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 녹권,「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한국(諸漢國) 1566~1636. 자(字)는 성극(成克)이고 호(號)는 거성(巨星)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창의(倡義)하여 고성(固城), 통영(統營), 거제, 김해 등지(等地)에서 왜적소탕전에 참전하여 이운룡(李雲龍)과 함께 대적하여 전과를 올렸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시 제2차 당황포 승첩이 있었던 3월 3일 공은 관측장교로써 구절산 관측소에서 왜의 선단을 발견하고 날이 밝을 무렵 적의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이 영등포(지금의 거제도)에서 출발하여 그 중 21척은 고성 당항포 방향으로 항진하고 나머지 11척은 고성 저도 방향으로 항진한다고 이순신에 급보(急報)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배복하고 있던 육해군에게 총공격명령을 하여 제2차 당황포 해전에서 34척의 왜선을 격파하는 승리를 이끌었다. 공의 사적은 당항포에 현충탑이 건립되었다. 「임란공신유사지(壬亂功臣遺史誌)」와 「고성향교지(固城鄕校誌)」및「경상남도유림보감(慶尙南道儒林寶鑑)」에 전공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인국(諸仁國)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거제도 해안에 침범하는 왜적을 공격하여 왜선(倭船) 수척을 격침(擊沈)한 공으로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고 산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고 훈련원(訓練院) 부장(部將)에 제수(除授)되었다.

제억(諸 億)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 훈련원(訓練院) 금군(禁軍)으로 왜적(倭賊) 섬멸작전에 선봉장으로써 혁혁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제진(諸 璡)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 수문장(守門將)으로서 형(兄) 억(億)과 함께 왜적을 공격해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대의(大義)로 적병을 참하는 대공을 세워 선무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제여향(諸汝亮) 1614~?. 자(字)는 충정(忠貞)이며 음사(蔭仕)로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지냈다.

제익주(諸翊周) 1619년~?. 자(字)는 숙헌(淑獻). 선교렁(宣敎郞)으로 유곡(幽谷)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제여상(諸汝尙) 자(字)는 숙진(淑眞)이고 호(號)는 운암(雲巖)니다 조선조 선교랑(宣敎郞)으로 자지도(自知道) 찰방(察訪)으로 빈민을 구제한 공적이 있다.

제여회(諸汝恢) 조선조(朝鮮朝) 선교랑(宣敎郞)으로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제여근(諸汝謹) 자(字)는 계진(季眞). 문장이 탁월하여 조선조(朝鮮朝)에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를 지냈다.

제여원(諸汝元) 호(號)는 만회당(晩悔堂). 조선 선조(宣祖)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충무위 부장(忠武衛部將)을 지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왜군(倭軍)을 대파(大破)하는데 공(功)이 컸다. 그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보성(寶城)으로 낙향(落鄕)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며 일생(一生)을 보냈으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제경창(諸慶昌) 자(字)는 선겸(善謙)이고 호(號)는 대은(大隱)이다. 안방준(安邦俊)의 문인으로 1633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時) 의병(義兵)을 창의 결사항전하여 대공을 세웠다.

제명황(諸明璜) 1564(효종 5)~?. 자(字)는 서경(瑞卿), 호(號)는 낙요당(樂要堂). 만휴당(晩休堂) 조사석(趙師錫)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여 예학(禮學), 경학(經學)을 전공하여 학자로서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읍지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제명철(諸明喆) 1672(현종 13) 자(字)는 군보(君保), 호(號)는 읍취헌(挹翠軒). 좌의정(左議政) 조사석(趙師錫)의 문인으로 덕행과 학문이 뛰어나 많은 제자를 배출하엿고 또한 근천지(根天之) 효행으로 세인의 친판이 자자했다.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추증(追贈)되고 정려(旌閭)가 하사되었다. 도지와 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제하욱(諸夏郁) 1700년(숙종 26) 바탕이 순수하고 덕기가 숙성하여 일찍 학문을 연마함에 재조가(才調)가 영민(英敏)하고 문리(文理)가 숙달(熟達)하였다. 자(字)는 자익(自益)이고 호(號)는 성암(誠庵)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그 행적이 도지(道誌)에 기록되어 있다.

제경욱(諸景彧) 1760년(영조 36) 자(字)는 경식(敬植)이고 호(號)는 도암(道庵)이다. 말(沫)의 7세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운총(雲寵) 만호(萬戶), 황해도(黃海道) 우후(虞侯)로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에 청북소모장(淸北召募將)으로 군사를 모집하고 이해우(李海遇) 휘하(麾下)의 병력 200명을 인솔 정주(定州)에 이르러 의병장(義兵將) 현인복과 함께 선봉장(先鋒將)에 승진(陞進)되어 정주성 남문을 공격(攻擊)했고 신도진(薪島鎭)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겸 방어(防禦將)에 임명되어 계속 공격전(攻擊戰)을 수행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삼도수군톤제사에 증직되고 순조의 어명으로 정주 표절서원(表節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정란1등공신에 책록(策錄)되고 1854년(철종 5)에 병조(兵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충양(忠襄)이란 시호(諡號)도 내려졌다.

제정구(諸廷坵) 1944년~1999년. 자(字)는 대로(大路)이고 호(號)는 운천(雲天)이며 충효절의(忠孝節義) 가문(家門)의 후손(後孫) 병근(炳根)의 아들이다. 1944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재학 중 교련(敎鍊) 반대(反對), 민청학련(民靑學聯) 사건(事件)으로 옥고(獄苦)를 치렀다. 1977년부터 서울 양평동 철거민들과 함께 경기도 시흥시 신평동에 복음자리를 마을을 건설하고 천주교 빈민회를 결성하여 1980년도에 목동 상계동 등 판자촌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 빈민 생존권과 인권 운동을 강력하게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로 필리핀 막사이상을 수상하고 사후(死後)에 국민훈장(國民勳章) 모란장(牡丹章)이 추서(追敍)되었다. 1987년 6월 항쟁(抗爭)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 공동대표로 추대(推戴)되어 군사권위주의 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큰공을 세웠다. 1988년에는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고 정당에 투신하여 1992년 경기도 시흥 군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도덕정치를 실천하고자 사생취의를 선언하고 고질적인 파벌정치를 청산하고 개혁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1995년 만주당 분당에 반대하여 구당운동에 앞장서 사무총장에 추대되엇다. 15대 총선에 재선되어 원내총무와 국민통합추진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가짐없는 큰 자유를 신조로 삼아 가난한 이웃과 함께 고락을 나눈 빈민의 벗이자 실천적 종교인이다. 상생의 정신을 역설한 실천가로써 치열한 구도의 자세로 백절불굴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56세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 「신부와 벽돌공」,「가짐없는 큰 자유」,「빈민의 벗 제정구」, 사후에 김지하가 저술한 「나와 제정구」라는 추모시집과 2003년 7월 사단법인 제정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