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해주정씨(海州鄭氏) 시조는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 중현대부 전객서령 시중평장사를 지낸 정숙(鄭肅)이다

작성일 : 2017-05-12 17:59 수정일 : 2019-09-04 15:0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해주정씨(海州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신종(神宗) 때 전법정랑(典法正郞) 중현대부 전객서령(中顯大夫 典客署令)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를 지낸 정 숙(鄭 肅)이다. 그러나 숙()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는 상고(詳考)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조상(祖上)이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던 사족(士族)이었으므로 후손들이 숙()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으로 소부 소윤(小府少尹)을 지낸 언(王言)과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초()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두파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해주(海州)는 황해도(黃海道) 남해안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내미홀(內米忽)이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개명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고, 현종(顯宗)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睿宗)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진()을 설치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고종 32) ()가 되어 16()을 다스렸으며 1913년 군이 되었고 1938년 부()로 승격, 1940년 해주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시()로 승격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언(王言)의 맡아들 윤규(允珪)가 정용낭장(精勇郎將)을 지냈으며, 차남 윤경(允卿)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여 당대에 뛰어났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호조 판서(戶曹判書)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지낸 역()과 그의 아들 충경(忠敬)이 세종(世宗)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과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고, 문종(文宗)의 딸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하여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진 종()은 단종(端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가깝다고 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해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부인 경혜공주(敬惠公主)는 순천관비(順天官婢)가 되었는데, 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공주(公主)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公主)비록 귀양은 왔지만 나는 왕의 딸이다. 수령(守令)이 어찌 내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느냐하므로 끝내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미수(眉壽)는 종()의 아들로 연산군(燕山君) 때 우찬성(右贊成)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에 오르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부사(府使) 연경(延慶)의 아들인 희량(希良)은 역()의 현손(玄孫)으로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연산군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호당(湖堂)에 뽑힌 수재였다.

특히 희량은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음양학(陰陽學)에 밝았으며 왕에게 간언(諫言)하다가 미움을 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예견한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세인(世人)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그 외 철견(鐵堅)의 아들 붕()과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한성부 좌윤 등을 역임한 언각(彦慤)이 이름을 날렸고, 문부(文孚)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활약하고 영흥 부사(永興府使)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거쳐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올랐으며, 시명(詩名)이 높았고 시호가 층의(忠毅)이다,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효준(孝俊),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석() 등이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정씨(海州鄭氏)는 남한(南韓)에 45,1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정언(王言) 고려(高麗) 때 소부 소윤(少府少尹)을 지내고 정헌대부(正憲大夫)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윤규(鄭允珪) 고려 때 정용 낭장(精勇郎將)을 지냈다.

정윤경(鄭允卿) 고려조(高麗朝)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정윤진(鄭允珍) 고려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역(鄭 易) ?1425(세종 7) 자(字)는 순지(順之), 호는 백정(栢亭), 시호(諡號)는 정도(貞度)이다. 낭장(郎將) 윤규(允珪)의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장인. 1383년(우왕9) 문과(文科)에 급제, 좌정언(左正言)․교주도안렴부사(交州道按廉副使)․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했다.

1411(태종 11)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정조 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414(태종 14) 충청도도관찰사(都觀察使), 이듬해 예조형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416(태종 16)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1419(세종 1)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정성(鄭 晟) 고려조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증직되었다.

정여(鄭 餘)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역임하였다.

정초(鄭 初) 일명(一名) (). 조선(朝鮮) 때 전라도 도진무사(全羅道都鎭撫使) 겸 도절제사(都節制使)를 거쳐 진서 대장군(大將軍)을역임하였다.

정충경(鄭忠敬) 조선(朝鮮)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판중추원사(判中樞院使)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정충석(鄭忠碩) ()는 효부(孝夫). 조선에서 천령 현감(川寧縣監)공주 목사(公州牧使)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정인로(鄭仁老) 1443(세종 2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감찰장령(監察掌令)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정종(鄭 悰) ?1461(세조 7) 시호(諡號)는 헌민(獻愍), 참판(參判) 충경(忠敬)의 아들, 문종의 사위. 1450년(세종 32)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결혼, 영양위 (寧陽尉)에 봉해지고 단종(端宗) 초 형조판서(刑曹判書)로서 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1455년(단종 3)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제거를도모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친교가 있었다 하여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이해 수양대군이 즉위,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는 점이 참작되어 양근(楊根)에 양이(量移)되었으나 1456(세조 2) 사육신 (死六臣)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수원(水原)을 거쳐 통진(通津)에 안치(安置)당했다. 뒤에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가 1461년 중 성탄(性坦) 등과 모반을 꾀했다 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영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정침(鄭 忱) ()는 불기(不欺), ()는 정안재(靜安齋). 조선조(朝鮮朝)에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정흔(鄭 忻)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정담(鄭 憺) 조선조(朝鮮朝)에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다.

정염(鄭 恬) 조선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낭천 현감(狼川縣監)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정을경(鄭乙卿) ()는 선보(善輔), ()는 해정어수(海亭漁叟). 조선에서 남양 부사(南陽府使)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정희언(鄭希彦) 조선조(朝鮮朝)에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정미수(鄭眉壽) 1456(세조 2)1512(중종 7) 자(字)는 기수(耆叟), 호(號)는 우재(愚齋), 시호(諡號)는 소평(昭 平), 형조 참판(刑曹參判) 종(悰)의 아들, 어머니는 문종(文宗)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 아버지의 유배지 광주 (光州)에서 출생.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소환, 잠저(潛邸) 때의 성종(成宗)을 시중하다가 돈령부 직장(敦寧府直長), 형조 정랑(刑曹正 郞) 등을 역임, 죄인의 자식으로 임관되었다 하여 수차 탄핵을 받았으나 세자의 무마로 무사했다.

1476년 중부 참봉(中部參奉),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1504년(연산군 10) 참찬(參贊)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냈으며, 1506년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박 경(朴 耕)의 옥사(獄事)에 연루,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 나왔다. 문정에 능했다.

정연경(鄭延慶) 조선조에 철원부사를 지내고 청렴으로 유명하였다.

정문명(鄭文明)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문우(鄭文遇) 조선에서 흥덕 현감(興德縣監)을 역임하였다.

정흥경(鄭興慶) 조선 중종조에 청도(淸道)군수를 지냈다

정수경(鄭守慶) 조선(朝鮮) 때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역임하였다.

정희경(鄭熙慶)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윤경(鄭胤慶) ()는 향수(鄕數).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후경(鄭後慶) ()는 세유(世裕). 조선에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직장(直長)을 지냈다.

정강(鄭 崗) 조선(朝鮮) 때 검교(檢校)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희량(鄭希良) 1469(예종 1)? 자(字)는 순부(淳夫), 호(號)는 허암(虛庵), 부사(府使) 연경(延慶)의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92년(성종 23) 생원(生員)이 되고,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1497년 대교(待敎)로 왕에게 경연(經筵)에 충실할 것과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일 것을 상소하여 미움을 받았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나 이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의주(義州)에 유배, 이어 김해(金海)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501년에 풀려나온 뒤, 모친상으로 복을 입던중 1502년(연산군 8) 행방불명 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음양학(陰陽學)에 밝았으며, 갑자년(甲子年)에 는 큰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언했다.

정견(鄭 堅) ()는 옥지(玉至).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홍도(鄭弘道)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정종형(鄭從衡) ()는 평숙(平叔). 조선에서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일각(鄭一覺) 조선(朝鮮) 때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정기(鄭 旗) 조선 때 선공부정(繕工副正) 겸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를 지냈다.

정려(鄭 旅)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정철견(鄭鐵堅) ()는 강수(剛叟), ()는 송정(松亭).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석견(鄭錫堅) ?1500(연산군 6) 자(字)는 자건(子健), 호(號)는 한벽재(寒碧齋), 유공(由恭)의 아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예안 현감(禮安縣監)을 거쳐 1485년에 이조 정랑 (吏曹正郞)으로「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이어 장령(掌令)․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사인(舍人)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고, 1493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495(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다음해 대사간(大司諫), 1497년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앞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편찬했다 하여 투옥당했으나 나이가 많아 파직에 그쳤다.

정원희(鄭元禧) ()는 경수(景綬). 조선(朝鮮)에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정붕(鄭 鵬) 1469(예종 1)1512(중종 7) 자(字)는 운정(雲程), 호(號)는 신당(新堂), 현감(縣監) 철견(鐵堅)의 아들. 선산(善山) 출신.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486년(성종 17) 진사(進士)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고, 정자(正字)․지평(持 平)․정언(正言)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校理)로 갑자사화 (甲子士禍) 때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교리에 복직, 상경 도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후에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했다.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정언각(鄭彦慤) 1498(연산군 4)1556(명종 11) 자(字)는 근부(謹夫), 진사(進士) 희검(希儉)의 아들,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이 되고,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박사(博士)․교리(校理)․장령(掌 令)․응교(應敎)․사간(司諫)을 지내고, 명종 초 사옹원정(司饔院 正)․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했다.

1547년(명종 2) 부제학(副提學)으로 양재역(良才驛)에서「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 기(李 芑) 등이 권세를 농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匿名)의 벽서(壁書)를 발견, 윤인경(尹仁鏡)․이 기(李 芑)․정순붕(鄭順朋)등에게 알려 벽서사건(壁書事件)을 일으켰다.

그후 도승지(都承旨)판결사(判決事)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552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한성부 좌윤 등을 지냈으며, 선조 때 관작(官爵)이 추탈(追奪)되었다가 복관(復官)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수호(鄭壽豪) ()는 기로(耆老).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사겸(鄭仕謙) ()는 수행(守行). 조선(朝鮮)에서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언의(鄭彦懿)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분(鄭 汾) 조선(朝鮮)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숭의(鄭崇義) 조선 때 희천 군수(熙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정흠(鄭 欽) 초명은 득몽(得夢), ()는 흠재(欽哉), ()는 송천(松泉). 조선에서 대흥 현감(大興縣監)양천 현령(陽川縣令)을 거쳐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으며 해성군(海城君)에 봉하여졌다.

정척(鄭 惕) ()는 군길(君吉), ()는 행촌(杏村). 조선조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정신(鄭 愼) ()는 군성(君省).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문영(鄭文英) 조선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문부(鄭文孚) 1565(명종 20)1624(인조 2) 자(字)는 자허(子虛), 호(號)는 농포(農圃), 시호(諡號)는 충의(忠 毅), 부사(府使) 신(愼)의 아들. 1588년(선조 21) 생원(生員)이 되고, 이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하여 적에게 투항하자, 산속에 숨었다가 관민 합작의 의병대장이 되어 경성(鏡城)을 수복, 회령(會寧)에 진격하여 2왕자를 왜군에게 넘긴 반란자 국경인의 숙부 세필(世弼)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듬해 영흥 부사(永興府使), 1597년에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고, 이후 전주부윤을 지냈다. 1624(인조2)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로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 받던 끝에 죽었다. 뒤에 함북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의해 신원(伸寃)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경성 (鏡城)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