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초계정씨(草溪鄭氏),초계정씨시조,정배걸(鄭倍傑),초계정씨유래,초계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16:43 수정일 : 2018-01-08 14:45

초계정씨시조 및 초계정씨유래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 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는 초계(草溪)로 하였고 1018(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6(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陜川郡)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초(高麗初)에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배걸(鄭倍傑)이다. 배걸은 초계 성산(草溪城山) 출신으로 1017(고려 현종 8) 장원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종(文宗)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사숙(私塾)을 열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인「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어 유가(儒家)의 대가(大家), 백세(百世)의 존사(尊師)라 일컬어졌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초계(草溪)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배걸(倍傑)의 아들 문()이 고려 예종(睿宗)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특히 그는 형조(刑曹)에 있는 동안 명판관(名判官)으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문명(文名)을 날렸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사(進士) 유명(惟明)의 아들인 온()이 성품이 곧고 절개가 높기로 이름났다. 그는 일찍이 정인홍(鄭仁弘)과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광해군(光海君)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설서(說書)․사서(司書)․정언(正言) 등을 거쳐 부사직(副司直)에 올랐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비위에 거슬려

제주도(濟州島)1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며「망북두시(望北斗詩)」․「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吐露)했으며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이 밖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부총관(副摠管)에 이른 윤겸(允謙)이 뛰어났고, 일찍이 김안국(金安國)에게 글을 배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검열(檢閱)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던 숙의 아들인 종영이 가문을 빛냈다.

한편 선조(宣祖)와 인조대(仁祖代)의 명신 엽()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여직(汝稷)은 사도(四道)의 절도사(節度使)와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의 대()를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초계정씨(草溪鄭氏)는 남한(南韓)104,1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초계정씨조상인물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정문(鄭 文) ?1105(숙종 10)

()는 의덕(懿德),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예부 상서 배걸(倍傑)의 아들. 유복자로 태어나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비서 랑(秘書郞)을 거쳐, 1083년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직한림 겸 사문조 교(直翰林兼四門助敎)가 되고, 우습유(右拾遺)․대간(臺諫) 등에 기용되었으나, 외조(外祖)가 부곡(部曲) 출신이므로 다른 대간들의 탄핵 을 받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지제고(知制誥)에 전임되었다.

이어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 등을 역임, 1104(숙종 9) 비서감(秘書監)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와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고, 이해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검교사공(檢校使空)․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더해졌다. 문명(文名)이 높았다.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에 추증되었다.

정복공(鄭福公) ()는 여경(餘慶). 고려(高麗) 때 형부 원외랑(刑部 員外郞)을 지냈다.

정영(鄭 榮) 고려(高麗) 때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다.

정필(鄭 弼) 시호(諡號)는 선희(宣僖).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참지정사(參知政事) 겸 판호부사(判戶部事)를 역임하였다.

정부(鄭 孚) 시호(諡號)는 소회(昭懷).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정지평(鄭至平) 고려조(高麗朝)에 도첨의중찬(都僉義中贊) 겸 판이부사(判吏部事)․전리사사(典理司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태자사(太子師)에 이르렀다.

정기(鄭 頎)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정윤길(鄭允吉) 고려(高麗)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정윤기(鄭允祺) 고려(高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정수도(鄭修道) ()는 물재(勿齋).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였다.

정창(鄭 昌) ()는 죽계(竹溪). 어려서부터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 1432(세종 14) 생원(生員), 1483(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등을 역임하였으나, 단종(端宗) 때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노모 봉양을 핑계로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지내다가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 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중원(鄭仲元) ()는 선경(善卿).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정덕기(鄭德麒) ()는 자인(子仁), ()는 우헌(愚軒).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국주(鄭國柱) ()는 공립(公立). 조선(朝鮮) 때 예빈시정(藝賓寺正)을 지냈다.

정국추(鄭國樞) ()는 공두(公斗).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국량(鄭國樑) ()는 공거(公擧). 조선조(朝鮮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정국로(鄭國櫓) ()는 공제(公濟).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국빈(鄭國彬) ()는 공간(公幹).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비인(庇仁)․무산 현감(茂山縣監)을 지낸 뒤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이르렀으며, 네명의 형()과 함께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세칭(世稱) 5()라 하였다. 도장사(道莊祠)에 제향되었다.

정경례(鄭景禮)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전(鄭 詮)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양(鄭 諒) ()는 윤상(允詳), ()는 경암(敬庵).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즙(鄭 檝) ()는 제숙(濟叔).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지석(鄭之奭) ()는 영보(英甫), ()는 송암(松庵).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정명겸(鄭鳴謙) ()는 지수(之受). 조선(朝鮮)에서 승문박사(承文博士)를 역임했다.

정덕겸(鄭德謙) 조선(朝鮮) 때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정홍좌(鄭弘佐) ()는 자익(子翼). 조선(朝鮮) 때 포도대장(捕盜大將)을 지냈다.

정동륭(鄭棟隆) ()는 길강(吉崗).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정여직(鄭汝稷) 1713(숙종 39)1776(영조 52)

()는 순필(舜弼), 통제사(統制使) 홍좌(弘佐)의 손자, 진사(進士) 도흥(道興)의 아들. 1735(영조 11) 무과(武科)에 급제, 1742(영조 18)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선치(善治)하여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이듬해 공홍도 수군절도사(公洪道水軍節度使)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경기도 수군절도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1758(영조 34)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된 후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을 지냈다. 총융사(摠戎使)가 되고 이듬해 훈련대장(訓鍊大將)이되었다.

정환유(鄭煥猷) ()는 문중(文中). 조선(朝鮮) 때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했다.

정학경(鄭學畊) ()는 경심(景心). 조선(朝鮮)에서 훈련도정(訓練都正)을 지냈다.

정택선(鄭宅善) ()는 서가(瑞可). 조선(朝鮮) 때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였다.

정민수(鄭民秀) ()는 사준(士俊), ()는 송옹(松翁). 조선조(朝鮮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규영(鄭圭永) ()는 명여(命汝), ()는 일옥(一玉). 조선 때 효자(孝子)로 주변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정용준(鄭用俊) ()는 몽뢰(夢賚), ()는 일성(一誠). 부친 효선(孝憲)이 이강년(李康年)과 같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다 1907년 왜병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할 직전에 그가 아버지 대신 죽겠노라고 간청하자 왜병도 그의 효심에 감탄하여 감히 부친을 해치지 못했다.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정행부(鄭幸夫) 고려(高麗) 때 천호장(千戶長)을 지냈다.

정순진(鄭順珍)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정공직(鄭公直) 고려(高麗)에서 만호(萬戶)를지냈다.

정윤(鄭 倫) 고려(高麗) 때 정당문학(政堂文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요(鄭 曜) 시호(諡號)는 호희(胡僖).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화령 부사(和寧府使) 등을 지냈으며, 왜구를 토벌하는데 공이 컸다.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자헌대부(資憲大夫)․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동지절제사(同知節制事) 등을 거쳐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정건(鄭 虔) ()는 자성(子誠), ()는 심촌(深村),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정발(鄭 發) 조선(朝鮮) 때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정승서(鄭承緖) 조선조(朝鮮朝)에 현령(縣令)을 지냈다.

정윤신(鄭允愼) 조선(朝鮮)에서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정전(鄭 詮) ()는 언평(彦平).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유정(鄭惟精) ()는 택중(擇中).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정경륜(鄭景倫) ()는 이중(彝仲). 조선에서 서윤(庶尹)을 지냈다.

정응탁(鄭應鐸) ()는 진백(振伯).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정엽(鄭 燁) 1563(명종 18)1625(인조 3)

()는 시회(時晦), ()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諡號) 는 문숙(文肅), 진사(進士) 유성(惟誠)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이산보(李山甫)의 사위,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송익필(宋翼弼)의 문인. 1583(선조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87년에 감찰(監察)․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내고, 1593년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왜군(倭軍)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수찬(修撰)․장령(掌令)․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역임, 1597년 정유재란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성(司成)이 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이듬해 응교(應敎)로 필선(弼善)을 겸임, 이어 승지(承旨)․형조 참의(刑曹參議)․나주 목사(羅州牧使)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1602(선조 35) 성 혼(成 渾)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

1606년 성주(星州)․홍주(洪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光海君) 즉위 초 예조 참의(禮曹參議)․대사성(大司成)․승지(承旨)․판결사(判決事)․대사간(大司諫)․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1612(광해군 4) 도승지(都承旨)로 왕을 경연(經筵)에 자주 나가도록 했고161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1년만에 사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대사성(大司成) 겸 동지경연(同知經筵)․원자 사부(元子師傅)가 되어 학제(學制)를 상정(詳定)했고, 여러 번 타직에 전임되었으나 언제나 대사성(大司成)을 겸함으로써 이 때부터 대사성을 겸직하게 하는 선례(先例)를 만들었다. 그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좌부빈객(左部賓客) 등을 지냈다.

정문익(鄭文翼) 1571(선조 4)1639(인조 17)

()는 위도(衛道), ()는 송죽당(松竹堂), 첨정(僉正) 응탁(應 鐸)의 아들. 1606(선조 29) 진사가 되고, 1611(광해군 3) 별시문 과(別試文科)에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이조 참의 (吏曹參議)가 되었다.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의 심복이라 하여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던 중, 1616(광해군 8) 한찬남(韓纘男)의 상변사건(上變事件 : 해주옥사)에 그 이름이 들어있어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 나와 1631(인조 9) 사신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정인(鄭 寅) ()는 여정(汝精), ()는 송곡(松谷).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철(鄭 哲) ()는 공소(公素). 조선에서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원석(鄭元奭) ()는 중망(重望), ()는 사담(沙潭).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시망(鄭時望) ()는 상보(尙甫).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창주(鄭昌冑) ()는 사흥(士興), ()는 만주(晩州)․만사(晩沙). 1637(인조 15) 진사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1642년 지평(持平)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46(인조 2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1648년 헌납(獻納)을 지내고 1653(효종 4)에는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당대 문장(文章)이 뛰어나 제일인자로 손꼽혔으며 만사집(晩沙集)을 남겼다.

정시심(鄭時諶) 조선(朝鮮) 때 설서(說書)를역임하였다.

정추(鄭 推) ()는 서경(恕卿).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정헌장(鄭憲章) ()는 여신(汝新). 조선(朝鮮)에서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정계장(鄭啓章) ()는 명중(明仲).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정신(鄭 愼) 고려(高麗) 때 합문 지후(閤門祗侯)를 역임하였다.

정선(鄭 僐) 1251(고종 38)1325(충숙왕 12)

초명은 현좌(賢佐), ()는 거비(去非), ()는 상헌(常軒), 예부상서(禮部尙書) 배걸(倍傑)7대손. 1273(원종 14)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전주 사록(全州史錄)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이부 총랑(吏部摠郞)․병부 총랑(兵部摠郞)․우상시(右常侍)를 역임,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불교를 독신(篤信)했다.

정광조(鄭光祖) 고려(高麗)에서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역임하였다.

정광계(鄭光繼)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문하평리(門下評理)․상호군(上護軍)에 추증되었다

정연(鄭 珚) ?1358(공민왕 7)

()는 맹순(孟淳), 시호(諡號)는 양헌(良獻), 첨의평리(僉議評理) ()의 손자. 1344(충혜왕 5)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서연 시독관(書筵試讀官)이 되고, 1347년 정치도감(政治都監)의 정치관이 되었다.

1356(공민왕 5) 수사공(守司空)․우복야(右僕射)․강릉교주도 도지휘사(江陵交州道都指揮使)를 지내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를 거쳐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러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다. 음률(音律)에 정통하고 예()에 밝아 예관(禮官) 및 후진들을 많이 가르쳤다.

정을생(鄭乙生) ()는 인우(仁祐). 조선(朝鮮)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정영창(鄭永昌) 조선(朝鮮) 때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정영번(鄭永蕃)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원서(鄭原緖) 조선(朝鮮) 때 희천 군수(熙川郡守)를 지냈다.

정예지(鄭禮之)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변함(鄭變咸) ()는 상천(上川). 조선에서 훈도(訓導)를 지냈다.

정백영(鄭白永) ()는 홍백(弘伯), ()는 송담(松潭). 조선(朝鮮) 때 효자였다.

정팔원(鄭八元) ()는 여일(汝一). 조선(朝鮮) 때 부사정(副司正)을 역임하였다..

정편(鄭 便) 조선조(朝鮮朝)에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를 지냈다.

정윤겸(鄭允謙) 1463(세조 9)1536(중종 31)

()는 익부(益夫), 시호(諡號)는 장양(莊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의 아들. 1492(성종 23)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訓鍊院)에 보직되고,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특진되었다.

1519년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지고, 1522년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로 부임, 병선(兵船)을 수리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왕으로부터 은()을 하사받았다.

1526년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상호군(上護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준(鄭 浚) ()는 대원(大源), 윤성(允誠)의 아들, 윤원형(尹元衡)의 첩 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