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7-05-12 16:43 수정일 : 2019-09-03 15:50
초계정씨시조 및 초계정씨유래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 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는 초계(草溪)로 하였고 1018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陜川郡)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초(高麗初)에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배걸(鄭倍傑)이다. 배걸은 초계 성산(草溪城山) 출신으로 1017년(고려 현종 8) 장원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종(文宗)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사숙(私塾)을 열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인「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어 유가(儒家)의 대가(大家)요, 백세(百世)의 존사(尊師)라 일컬어졌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초계(草溪)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배걸(倍傑)의 아들 문(文)이 고려 예종(睿宗)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특히 그는 형조(刑曹)에 있는 동안 명판관(名判官)으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문명(文名)을 날렸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사(進士) 유명(惟明)의 아들인 온(蘊)이 성품이 곧고 절개가 높기로 이름났다. 그는 일찍이 정인홍(鄭仁弘)과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광해군(光海君)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설서(說書)․사서(司書)․정언(正言) 등을 거쳐 부사직(副司直)에 올랐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비위에 거슬려
제주도(濟州島)에 1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며「망북두시(望北斗詩)」․「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吐露)했으며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이 밖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부총관(副摠管)에 이른 윤겸(允謙)이 뛰어났고, 일찍이 김안국(金安國)에게 글을 배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검열(檢閱)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던 숙의 아들인 종영이 가문을 빛냈다.
한편 선조(宣祖)와 인조대(仁祖代)의 명신 엽(曄)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여직(汝稷)은 사도(四道)의 절도사(節度使)와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의 대(代)를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초계정씨(草溪鄭氏)는 남한(南韓)에 104,1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초계정씨조상인물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정문(鄭 文) ?~1105(숙종 10) 자(字)는 의덕(懿德),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예부 상서 배걸(倍傑)의 아들. 유복자로 태어나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비서 랑(秘書郞)을 거쳐, 1083년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직한림 겸 사문조 교(直翰林兼四門助敎)가 되고, 우습유(右拾遺)․대간(臺諫) 등에 기용되었으나, 외조(外祖)가 부곡(部曲) 출신이므로 다른 대간들의 탄핵 을 받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지제고(知制誥)에 전임되었다.
이어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 등을 역임, 1104년(숙종 9) 비서감(秘書監)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와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고, 이해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검교사공(檢校使空)․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더해졌다. 문명(文名)이 높았다.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에 추증되었다.
정복공(鄭福公) 자(字)는 여경(餘慶). 고려(高麗) 때 형부 원외랑(刑部 員外郞)을 지냈다.
정영(鄭 榮) 고려(高麗) 때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다.
정필(鄭 弼) 시호(諡號)는 선희(宣僖).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참지정사(參知政事) 겸 판호부사(判戶部事)를 역임하였다.
정부(鄭 孚) 시호(諡號)는 소회(昭懷).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정지평(鄭至平) 고려조(高麗朝)에 도첨의중찬(都僉義中贊) 겸 판이부사(判吏部事)․전리사사(典理司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태자사(太子師)에 이르렀다.
정기(鄭 頎)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정윤길(鄭允吉) 고려(高麗)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정윤기(鄭允祺) 고려(高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정수도(鄭修道) 호(號)는 물재(勿齋).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였다.
정창(鄭 昌) 호(號)는 죽계(竹溪). 어려서부터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 1432년(세종 14) 생원(生員), 1483년(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등을 역임하였으나, 단종(端宗) 때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노모 봉양을 핑계로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지내다가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 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중원(鄭仲元) 자(字)는 선경(善卿).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정덕기(鄭德麒) 자(字)는 자인(子仁), 호(號)는 우헌(愚軒).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국주(鄭國柱) 자(字)는 공립(公立). 조선(朝鮮) 때 예빈시정(藝賓寺正)을 지냈다.
정국추(鄭國樞) 자(字)는 공두(公斗).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국량(鄭國樑) 자(字)는 공거(公擧). 조선조(朝鮮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정국로(鄭國櫓) 자(字)는 공제(公濟).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국빈(鄭國彬) 자(字)는 공간(公幹).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비인(庇仁)․무산 현감(茂山縣監)을 지낸 뒤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이르렀으며, 네명의 형(兄)과 함께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세칭(世稱) 5효(孝)라 하였다. 도장사(道莊祠)에 제향되었다.
정경례(鄭景禮)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전(鄭 詮)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양(鄭 諒) 자(字)는 윤상(允詳), 호(號)는 경암(敬庵).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즙(鄭 檝) 자(字)는 제숙(濟叔).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지석(鄭之奭) 자(字)는 영보(英甫), 호(號)는 송암(松庵).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정명겸(鄭鳴謙) 자(字)는 지수(之受). 조선(朝鮮)에서 승문박사(承文博士)를 역임했다.
정덕겸(鄭德謙) 조선(朝鮮) 때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정홍좌(鄭弘佐) 자(字)는 자익(子翼). 조선(朝鮮) 때 포도대장(捕盜大將)을 지냈다.
정동륭(鄭棟隆) 자(字)는 길강(吉崗).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정여직(鄭汝稷) 1713(숙종 39)~1776(영조 52) 자(字)는 순필(舜弼), 통제사(統制使) 홍좌(弘佐)의 손자, 진사(進士) 도흥(道興)의 아들. 1735년(영조 11) 무과(武科)에 급제, 1742년(영조 18)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선치(善治)하여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이듬해 공홍도 수군절도사(公洪道水軍節度使)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경기도 수군절도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1758년(영조 34)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된 후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을 지냈다. 총융사(摠戎使)가 되고 이듬해 훈련대장(訓鍊大將)이되었다.
정환유(鄭煥猷) 자(字)는 문중(文中). 조선(朝鮮) 때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했다.
정학경(鄭學畊) 자(字)는 경심(景心). 조선(朝鮮)에서 훈련도정(訓練都正)을 지냈다.
정택선(鄭宅善) 자(字)는 서가(瑞可). 조선(朝鮮) 때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였다.
정민수(鄭民秀) 자(字)는 사준(士俊), 호(號)는 송옹(松翁). 조선조(朝鮮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규영(鄭圭永) 자(字)는 명여(命汝), 호(號)는 일옥(一玉). 조선 때 효자(孝子)로 주변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정용준(鄭用俊) 자(字)는 몽뢰(夢賚), 호(號)는 일성(一誠). 부친 효선(孝憲)이 이강년(李康年)과 같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다 1907년 왜병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할 직전에 그가 아버지 대신 죽겠노라고 간청하자 왜병도 그의 효심에 감탄하여 감히 부친을 해치지 못했다.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정행부(鄭幸夫) 고려(高麗) 때 천호장(千戶長)을 지냈다.
정순진(鄭順珍)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정공직(鄭公直) 고려(高麗)에서 만호(萬戶)를지냈다.
정윤(鄭 倫) 고려(高麗) 때 정당문학(政堂文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요(鄭 曜) 시호(諡號)는 호희(胡僖).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화령 부사(和寧府使) 등을 지냈으며, 왜구를 토벌하는데 공이 컸다.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자헌대부(資憲大夫)․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동지절제사(同知節制事) 등을 거쳐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정건(鄭 虔) 자(字)는 자성(子誠), 호(號)는 심촌(深村),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정발(鄭 發) 조선(朝鮮) 때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정승서(鄭承緖) 조선조(朝鮮朝)에 현령(縣令)을 지냈다.
정윤신(鄭允愼) 조선(朝鮮)에서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정전(鄭 詮) 자(字)는 언평(彦平).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유정(鄭惟精) 자(字)는 택중(擇中).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정경륜(鄭景倫) 자(字)는 이중(彝仲). 조선에서 서윤(庶尹)을 지냈다.
정응탁(鄭應鐸) 자(字)는 진백(振伯).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정엽(鄭 燁) 1563(명종 18)~1625(인조 3) 자(字)는 시회(時晦), 호(號)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諡號) 는 문숙(文肅), 진사(進士) 유성(惟誠)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이산보(李山甫)의 사위,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송익필(宋翼弼)의 문인.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87년에 감찰(監察)․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내고, 1593년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왜군(倭軍)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수찬(修撰)․장령(掌令)․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역임, 1597년 정유재란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성(司成)이 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이듬해 응교(應敎)로 필선(弼善)을 겸임, 이어 승지(承旨)․형조 참의(刑曹參議)․나주 목사(羅州牧使)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1602년(선조 35) 성 혼(成 渾)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
1606년 성주(星州)․홍주(洪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光海君) 즉위 초 예조 참의(禮曹參議)․대사성(大司成)․승지(承旨)․판결사(判決事)․대사간(大司諫)․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都承旨)로 왕을 경연(經筵)에 자주 나가도록 했고161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1년만에 사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대사성(大司成) 겸 동지경연(同知經筵)․원자 사부(元子師傅)가 되어 학제(學制)를 상정(詳定)했고, 여러 번 타직에 전임되었으나 언제나 대사성(大司成)을 겸함으로써 이 때부터 대사성을 겸직하게 하는 선례(先例)를 만들었다. 그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좌부빈객(左部賓客) 등을 지냈다.
정문익(鄭文翼) 1571(선조 4)~1639(인조 17) 자(字)는 위도(衛道), 호(號)는 송죽당(松竹堂), 첨정(僉正) 응탁(應 鐸)의 아들. 1606년(선조 29) 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 과(別試文科)에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이조 참의 (吏曹參議)가 되었다.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의 심복이라 하여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던 중, 1616년(광해군 8) 한찬남(韓纘男)의 상변사건(上變事件 : 해주옥사)에 그 이름이 들어있어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 나와 1631년(인조 9) 사신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정인(鄭 寅) 자(字)는 여정(汝精), 호(號)는 송곡(松谷).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철(鄭 哲) 자(字)는 공소(公素). 조선에서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원석(鄭元奭) 자(字)는 중망(重望), 호(號)는 사담(沙潭).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시망(鄭時望) 자(字)는 상보(尙甫).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창주(鄭昌冑) 자(字)는 사흥(士興), 호(號)는 만주(晩州)․만사(晩沙). 1637년(인조 15) 진사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1642년 지평(持平)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46년(인조 2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1648년 헌납(獻納)을 지내고 1653년(효종 4)에는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당대 문장(文章)이 뛰어나 제일인자로 손꼽혔으며 만사집(晩沙集)을 남겼다.
정시심(鄭時諶) 조선(朝鮮) 때 설서(說書)를역임하였다.
정추(鄭 推) 자(字)는 서경(恕卿).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정헌장(鄭憲章) 자(字)는 여신(汝新). 조선(朝鮮)에서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정계장(鄭啓章) 자(字)는 명중(明仲).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정신(鄭 愼) 고려(高麗) 때 합문 지후(閤門祗侯)를 역임하였다.
정선(鄭 僐) 1251(고종 38)~1325(충숙왕 12) 초명은 현좌(賢佐), 자(字)는 거비(去非), 호(號)는 상헌(常軒), 예부상서(禮部尙書) 배걸(倍傑)의 7대손. 1273년(원종 14)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전주 사록(全州史錄)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이부 총랑(吏部摠郞)․병부 총랑(兵部摠郞)․우상시(右常侍)를 역임,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불교를 독신(篤信)했다.
정광조(鄭光祖) 고려(高麗)에서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역임하였다.
정광계(鄭光繼)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문하평리(門下評理)․상호군(上護軍)에 추증되었다
정연(鄭 珚) ?~1358(공민왕 7) 자(字)는 맹순(孟淳), 시호(諡號)는 양헌(良獻), 첨의평리(僉議評理) 선(僐)의 손자. 1344년(충혜왕 5)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서연 시독관(書筵試讀官)이 되고, 1347년 정치도감(政治都監)의 정치관이 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수사공(守司空)․우복야(右僕射)․강릉교주도 도지휘사(江陵交州道都指揮使)를 지내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를 거쳐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러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다. 음률(音律)에 정통하고 예(禮)에 밝아 예관(禮官) 및 후진들을 많이 가르쳤다.
정을생(鄭乙生) 자(字)는 인우(仁祐). 조선(朝鮮)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정영창(鄭永昌) 조선(朝鮮) 때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정영번(鄭永蕃)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원서(鄭原緖) 조선(朝鮮) 때 희천 군수(熙川郡守)를 지냈다.
정예지(鄭禮之)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변함(鄭變咸) 호(號)는 상천(上川). 조선에서 훈도(訓導)를 지냈다.
정백영(鄭白永) 자(字)는 홍백(弘伯), 호(號)는 송담(松潭). 조선(朝鮮) 때 효자였다.
정팔원(鄭八元) 자(字)는 여일(汝一). 조선(朝鮮) 때 부사정(副司正)을 역임하였다..
정편(鄭 便) 조선조(朝鮮朝)에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를 지냈다.
정윤겸(鄭允謙) 1463(세조 9)~1536(중종 31) 자(字)는 익부(益夫), 시호(諡號)는 장양(莊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온(溫)의 아들. 1492년(성종 23)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訓鍊院)에 보직되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특진되었다.
1519년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지고, 1522년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로 부임, 병선(兵船)을 수리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왕으로부터 은(銀)을 하사받았다.
1526년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상호군(上護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준(鄭 浚) 자(字)는 대원(大源), 윤성(允誠)의 아들, 윤원형(尹元衡)의 첩 난정(蘭貞)의 오빠. 1533년(중종 28) 음보(陰補)로 검열(檢閱)이 되고, 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4년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46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중종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지평(持平)․정언(正言)․검상(檢詳)․장령(掌令) 등을 역임, 1552년(명종 7)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副題學)을 지내고 1554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듬해 호조 참의(戶曹參議), 1556년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부임했다. 1559년 충무위 상호군(忠武衛上護軍)이 되었다.
정종영(鄭宗榮) 1513(중종8)~1589(선조22) 자(字)는 인길(仁吉), 호(號)는 항재(恒齋), 시호(諡號)는 정헌(鄭憲), 현감(縣監) 숙(淑)의 아들. 감안국(金安國)의 문인. 1530년(중종 2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1547년(명종 2) 호조 정랑(戶曹正郞)․헌납(獻納) 등을 거쳐 뒤에 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1552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공조 참판(工曹參判)․강원도(江原道)와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팔계군(八溪君)을 습봉(襲封)했다. 1562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윤원형(尹元衡)에 아부하여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守令)을 응징하고 요승(沃僧)을 제거했으며,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전임, 평양(平壤)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학문발전에 공을 세웠다.
1567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6조(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사직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원주(原州)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정약(鄭 鑰) 자(字)는 지이(止爾), 호(號)는 사유재(四留齋).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정혹(鄭 豰) 자(字)는 회이(晦爾), 호(號)는 송포(松浦), 1594년(선조 27) 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持平)․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예조 참의(禮曹參議) 등을 지냈다.
동진사(東秦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우승지(右承旨)․병조 참의(兵曹參議)․예조 참의(禮曹參議)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608년(선조 41)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으나 조정이 어수선하여 벼슬을 사양하였다.
정기광(鄭基廣) 자(字)는 자거(子居), 호(號)는 추재(追齋). 1608년(선조 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예조․병조 정랑(禮曺․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집권하여 정치가 어수선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623(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해서(海西)에 나가 민정(民情)을 살폈다.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웠고, 1630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지내고 양전어사(量田御史)로 호남지방(湖南地方)에 나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 한성좌윤(漢城左尹)으로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고 1642년(인조 20) 철원 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정기풍(鄭基豊) 자(字)는 형백(亨伯), 호(號)는 옥곡(玉谷).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정기방(鄭基磅) 자(字)는 자후(子厚), 호(號)는 행은(杏隱).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정기숭(鄭基崇) 자(字)는 계흠(季欽).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석문(鄭錫文) 자(字)는 시경(時經). 조선에서 경력(經歷)을 지냈다.
정석형(鄭錫衡) 자(字)는 평중(平仲).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정윤(鄭 錀) 자(字)는 극념(克恬), 호(號)는 이우당(二憂堂).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정수명(鄭洙明) 자(字)는 도원(道源).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정우주(鄭宇柱) 자(字)는 대경(大卿), 호(號)는 삼순당(三筍堂). 조선에서 좌부승지(左部承旨)를 역임하였다.
정한주(鄭漢柱) 자(字)는 백기(白起), 호(號)는 시한당(是閑堂). 조선조에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정운주(鄭雲柱) 자(字)는 계항(季杭), 호(號)는 남애(南涯). 조선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정위주(鄭緯柱) 자(字)는 응오(應五). 조선(朝鮮) 때 부정자(副正字)를 역임했다.
정희보(鄭熙普) 자(字)는 중욱(仲旭), 호(號)는 퇴성헌(退省軒). 조선에서 우부승지(右部承旨)를 역임하였다.
정희규(鄭熙揆) 자(字)는 숙첨(叔詹), 호(號)는 농곡(農谷). 조선 때 헌납(獻納)을 지냈다.
정진국(鄭鎭國) 자(字)는 용여(用汝). 조선(朝鮮) 때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다.
정원선(鄭元善) 자(字)는 희인(希仁), 호(號)는 호은(壺隱). 조선조에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정홍관(鄭鴻觀) 자(字)는 주언(周彦).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정홍경(鄭鴻慶) 자(字)는 치영(穉永), 호(號)는 운강(雲崗). 조선에서 필선(弼善)을 지냈다.
정홍순(鄭鴻淳) 자(字)는 임종(林宗), 호(號)는 수루(水樓). 조선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정기화(鄭琦和) 자(字)는 남중(南仲), 호(號)는 헐오재(歇五齋). 조선조에 필선(弼善)을 지냈다.
정덕화(鄭德和) 자(字)는 이형(而亨), 호(號)는 산초(仙樵).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기화(鄭夔和) 자(字)는 장일(章一), 호(號)는 극회옹(極悔翁). 조선조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翎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준화(鄭駿和) 자(字)는 문유(文有), 호(號)는 창하(蒼下),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정현덕(鄭顯德) 자(字)는 백순(伯純), 호(號)는 우전(雨田). 1850년(철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862년(철종 13) 서장관(書壯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원군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으로서 1867년 동래부사(東萊府使),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는 동안 배일운동(排日運動)에 앞장섰으나 대원군이 실각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가 대원군이 다시 물러나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으나 곧 신원(伸寃)되었다.
정현석(鄭顯奭) 자(字)는 보가(保加), 호(號)는 박원(璞園). 조선조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현영(鄭顯英) 자(字)는 경실(景實), 호(號)는 유경(留耕).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정현유(鄭顯裕) 자(字)는 경세(景世), 호(號)는 동산(東山). 조선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정현오(鄭顯五) 자(字)는 경규(景奎), 호(號)는 수산(壽山). 조선에서 교리(校理)를 지냈다.
정현철(鄭顯哲) 자(字)는 도여(道汝), 호(號)는 혜전(蕙田). 조선 때 감리(監理)를 지냈다.
정원시(鄭元時) 자(字)는 경천(景天).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헌시(鄭憲時) 자(字)는 성장(聖章), 호(號)는 강재(康齋). 조선조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정창시(鄭昌時) 자(字)는 공기(公期), 호(號)는 난옥(蘭屋). 조선에서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봉시(鄭鳳時) 자(字)는 성소(聖韶), 호(號)는 송리(松理). 조선(朝鮮)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정준시(鄭駿時) 자(字)는 성약(聖若), 호(號)는 동곡(東谷). 조선(朝鮮)에서 유수(留守)를 지냈다.
정호준(鄭鎬駿) 자(字)는 윤성(允聲), 호(號)는 유당(有堂).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박사공파(博士公派)>
정승(鄭 丞) 호(號)는 보진재(葆眞齋), 시호(諡號)는 양평(良平).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정방주(鄭邦柱) 호(號)는 만수암(晩修庵), 시호(諡號)는 경렬(景烈). 고려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화성군(華城郡)에 봉해졌다.
정공신(鄭公愼) 자(字)는 연언(淵言) 호(號)는 경암(敬庵), 시호(諡號)는 강헌(康憲).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 후 비서랑(秘書郞)․한림지제고(翰林知制誥)․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내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사문조교(四門助敎)․우문관 제학(右文館提寧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습상(鄭習常) 고려조(高麗朝)에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정습충(鄭習忠) 고려 때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정습인(鄭習仁) 자(字)는 현숙(顯叔). 고려(高麗) 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정인손(鄭仁孫) 조선조(朝鮮朝)에 신천 군수(信川郡守)를 지냈다.
정의손(鄭義孫) 조선(朝鮮) 때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지손(鄭智孫) 자(字)는 명철(明哲), 호(號)는 보휴재(葆休齋). 조선(朝鮮)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정전(鄭 悛) 호(號)는 팔계(八溪). 조선 때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정철수(鄭鐵壽) 자(字)는 도일(道一), 호(號)는 욱욱재(郁郁齋). 조선 때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승적(鄭承積) 조선(朝鮮)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연종(鄭連宗) 자(字)는 고여(顧汝), 호(號)는 직헌(直軒). 조선조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준(鄭 俊) ?~1467(세조 13) 시호(諡號)는 장양(莊襄).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사도 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 귀성군(龜城君) 준(浚)의 비장(裨 將)으로 출전하여 총통군(銃筒軍)을 거느리고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으로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다. 이 해 대호군(大護軍)으로서 군무(軍務)로 요동(遼東)에 가다가 가산군(嘉山郡) 에 이르러 병사했다.
정종아(鄭從雅) 자(字)는 정숙(正叔).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정이아(鄭以雅) 자(字)는 정보(正甫) 조선에서 교리(校理)를 지냈다.
정연(鄭 演)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옥형(鄭玉衡)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오년(鄭鰲年)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철견(鄭鐵堅)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온(鄭 蘊) 1569(선조2)~1641(인조19) 자(字)는 휘원(輝遠), 호(號)는 동계(棟溪)․고고자(鼓鼓子),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진사(進士) 유명(惟明)의 아들, 정인홍(鄭仁弘)․정구(鄭 逑)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진사(進士)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설서(說書)․사서(司書)․정언(正言) 등을 역임, 1614년(광해군 6) 부사직(副司直)으로 영창대군의 처형이 인륜(人倫)에 어긋났음을 상소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 항(鄭 沆)을 참수하라고 주장, 이로 인해 10년간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귀양살이 했다.
유배생활 중에 「덕변록(德辨錄)」「망북두시(望北斗詩)」「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석방되어 헌납(獻納)으로 등용, 뒤에 사간(司諫)․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 이듬해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숭명주의자(崇明主義者)로서 벼슬을 단념하고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5년 만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정기상(鄭璣相) 자(字)는 경재(敬在), 호(號)는 학암(鶴庵). 조선(祖先)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정연시(鄭然時) 조선조(朝鮮朝)에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정계주(鄭啓周) 자(字)는 희중(熙仲).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식(鄭 軾) 자(字)는 경첨(景瞻).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기윤(鄭岐胤) 자(字)는 석유(錫由), 호(號)는 학정(學汀).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시교(鄭時僑) 자(字)는 성흥(聖興).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안우(鄭安愚) 자(字)는 성여(聖汝), 호(號)는 역계(嶧溪).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로 이름을 떨쳤다.
정세억(鄭世億) 자(字)는 여회(如晦).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정기필(鄭蘷弼) 자(字)는 순해(舜諧), 호(號)는 야옹헌(野翁軒).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재진(鄭在瑱) 자(字)는 윤국(倫國), 호(號)는 이기당(而己堂).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연갑(鄭然甲) 자(字)는 주일(周一), 호(號)는 개석(介石). 조선조(朝鮮朝)에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역임하였다.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정태화(鄭太華) 고려(高麗)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정유(鄭 裕) 고려(高麗)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정국경(鄭國鏡) 고려조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다.
정국선(鄭國鐥) 고려조(高麗朝)에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정검(鄭 儉) 고려(高麗) 때 봉상대부(奉常大夫)로 개성 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
정흥(鄭 興) 고려(高麗)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정사중(鄭師仲) 자(字)는 이로(尼老), 호(號)는 월곡(月谷). 조선 때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정옥윤(鄭玉潤) 자(字)는 곤옥(崑玉), 호(號)는 재정(再亭).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옥량(鄭玉良) 자(字)는 곤보(崑甫), 호(號)는 경재(耕齋). 박팽년(朴彭年)․류성원(柳誠源)․이석정(李石亭)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였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하양 현감(河陽縣監)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그후 승지(承旨)에 추증, 삼가(三嘉)의 평천서원(平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옥진(鄭玉振) 자(字)는 곤경(崑卿), 호(號)는 동정(東亭).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내준(鄭來俊)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정내필(鄭來弼) 조선(朝鮮) 때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역임했다.
정내언(鄭來彦) 자(字)는 필직(必直), 호(號)는 어은(漁隱). 조선(朝鮮) 때 거제 현령(巨濟縣令)을 지냈다.
정창인(鄭昌仁) 자(字)는 창서(昌瑞). 조선(朝鮮)에서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정건(鄭 健) 자(字)는 정익(正益), 호(號)는 삼성당(三省堂). 조선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정진철(鄭震哲) 자는 원숙(元叔).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방준(鄭邦俊) 자(字)는 군필(君弼), 호(號)는 삼송(三松).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국신(鄭國臣) 자(字)는 선여(善汝). 조선에서 사예(司藝)를 지냈다.
정연(鄭 練) 자(字)는 백직(伯直). 조선 때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정필한(鄭弼漢) 조선(朝鮮) 때 정언(正言)을역임하였다.
정편(鄭 遍) 자(字)는 대수(大受). 조선조에 사성(司成)을 지냈다.
정동호(鄭東虎) 자(字)는 노은(露隱), 호(號)는 적성재(赤城齋) 조선 때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정구룡(鄭九龍) 자(字)는 채운(彩雲), 호(號)는 수재(壽齋). 조선조(朝鮮朝)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