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청주정씨(淸州鄭氏),청주정씨시조,정극경(鄭克卿)청주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15:35 수정일 : 2019-09-03 13:43

  

청주정씨(淸州鄭氏)의 연원(淵源) 

시조는 고려 중엽 인종 때 중랑장인 극경(克卿)이 제1세조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에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주정씨의 기록은 1217년(고려 고종4년) 제3세조인 대장군 의(顗)의 큰 공적과 절의가 고려사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5세조 장경공(章敬公 諱 瑎) 이후로 덕업과 문장이 역사 기록에 끊이지 않았으며, 고려말 목은공(牧隱 李穡)이 鄭氏家傳을 지어 역대를 찬양하고 西原大姓이라고 하였다.


 처음 청주 금성 마암리(충북 청원군 옥산면 동림리)에 터를 잡았으나 고려조에 벼슬하여 개성에서 살다가 조선조의 혁명으로 설헌공(雪軒公 諱 䫨)의 후는 경북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로 은퇴하여 경북 북부지방 각지역에서 거주하였으며, 설곡공(雪谷公 諱 誧)의 후는 한양으로 이거하였다가 그 후 경기도 일원과 경북 성주 경산 및 제주도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시조이하 8세조 까지의 구묘(丘墓)를 失傳하여 1995년 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추원재 후원에 제단을 세워 매년 4월 한식일에 제사를 올린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정씨는 남한에 총 46,419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청주정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人物)
 정극경(鄭克卿) 청주정씨의 시조, 고려 중랑장
 정효문(鄭孝聞) 〔2世〕고려별장 증중랑장
 정의(鄭 顗) 〔3世〕신호위 대장군, 서경선유사 1217년 고려 고종때 최광수의 반란을 진압평정하였으며, 1233년 필현보의 반란때는 선유사로서 순절하여 상장군으로 추증하고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봉향했다.  그 후 조선 선조때 왕의 특명으로 평안도 성천에 새로 사당을 세우고 포충표절사(褒忠表節祠)의 액호를 하사받았다.
 정현(鄭 儇) 〔4世〕고려 감찰어사 증 상서좌복야
 정참연(鄭旵淵) 〔5世〕홍각대선사 석남사 주지
 정해(鄭 瑎) (1254~1305)〔5世〕字 晦之,諡號 章敬,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도첨의 찬성사 연영전 대사학동제수사가 되었다.  특히 오랫동안 지공거로 전선(銓選)을 맡아 유능한 인재를 선발 임용하여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정책(鄭 㥽) (1274~1328)〔6世〕통헌대부 판선공사, 봉중대광 청하군(淸河君)  충주목사 때는 정사를 밝게 다스려 명망이 높았으며, 충숙왕이 참소로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궁궐도감으로서 궁중 경비를 절감하여 연경의 왕에게 보내는 등 충성을 다 했다.
 정이(鄭 怡) 〔6世〕판도판서겸 대제학,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금성(충북 청원군 옥산면 장동리)에서 곡수정(曲水亭)을 세우고 여생을 보냈다.
 정오(鄭 䫨) (1299~1364)〔7世〕字 思謙,號 雪軒, 諡號 文克,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중대광 수사도 주국 도첨의 평리가 되었으며 추충진의 보리 공신으로 책록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하고 서원백(西原伯)을 더했다.
 정포(鄭 誧) (1309~1345)〔7世〕字 仲孚, 號 雪谷,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좌간의 대부 예문관 직제학지제고를 역임하고 수충보절익찬공신으로 책록 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우문관 대제학에 추증되고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다.  직책상 집권자들의 잘못을 자주 논박하여 미움을 사고 태제를 옹립하려 한다는 참소를 당하여 형인 설헌공은 영해로 공은 울주로 귀양 갔다가 후에 복권되었다.
 정침(鄭 賝) (1323~1395)〔8世〕字 公寶, 號 退隱,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주서 등을 거치고 봉선대부 소부 정윤을 역임했는데 이조혁명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부친인 문극공을 따라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김문영공(金恂)의 별장으로 은퇴했다.  야은 길재(吉再) 공이 쓴 야은총화에 퇴은 정침전(鄭賝傳)이 실려 있다.
 정선진(鄭璇軫) 〔8世〕양가대사 연복사 주지
 정운(鄭 賱) 〔8世〕문과에 급제하고 판전교시사 역임.
 정추(鄭 樞) (1333~1382)〔8世〕字 公權, 號 圓齋, 諡號 文簡,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요직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을 역임하고 수충익조공신에 책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일찍이 간관이 되어 신돈의 죄상을 논박하다가 현령으로 강등되었는데 신돈이 처형된 후 복권이 되어 재상이 되었다. 


 조선시대인물(朝鮮時代人物)
 정육(鄭 陸) 〔9世〕판사
 정의룡(鄭義龍) 〔9世〕동정내시 산원, 이조 혁명으로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정총(鄭 摠) 〔9世〕字 曼碩, 號 复齋, 諡號 文愍,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 수문전 태학사를 역임했다.  이태조를 추천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으며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정도전과 더불어 고려사를 찬술하였으며, 1395년 고명 인장 주청사로(誥命印章奏請使)로 명나라에 갔었는데 신년축하 표문이 문제가 되고 신덕왕후 상중이어서 상복을 입고 황제를 알현한 죄로 중국 악주 귀양지에서 별세했다.
 정증(鄭 拯) 〔9世〕한성부윤
 정탁(鄭 擢) 〔10世〕字 汝魁, 號 春谷, 諡號 翼景,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했다.  이태조를 추대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으며,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태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지(鄭 持) 〔9世〕사헌부 지평
 정섭(鄭 攝) 〔9世〕문과 급제 찬성역임.  諡號 文敬
 정약(鄭 若) 〔10世〕중훈대부 형조도관좌랑
 정흡(鄭 洽) 〔10世〕판관
 정효문(鄭孝文) 〔10世〕강원감사
 정효충(鄭孝忠) 〔10世〕용무시위사 상호군
 정호연(鄭浩然) 〔10世〕첨지중추부사, 증호조판서
 정설(鄭 枻) 〔10世〕한성부 소윤
 정집(鄭 楫) 〔10世〕홍문관 교리
 정표민(鄭表民) 〔10世〕상호군
 정안민(鄭安民) 〔10世〕부호군
 정방실(鄭昉實) 〔10世〕문과급제 숙천부사
 정보문(鄭普文) 〔11世〕영순전 진적직
 정사직(鄭師稷) 〔11世〕문과급제 황해감사
 정옥경(鄭沃卿) 〔11世〕문과급제 군수 집의
 정영통(鄭永通) 〔11世〕문과급제 대사성
 정제(鄭 濟) 〔11世〕사헌부 감찰
 정인로(鄭仁老) 〔12世〕현신교위 용양위 사직
 정훈로(鄭勳老) 〔12世〕한성부 주부, 녹사
 정원로(鄭元老) 〔12世〕장수현감, 증이조판서
 정희태(鄭希泰) 〔12世〕무과급제
 정윤증(鄭胤曾) 〔12世〕철산군수, 봉 청성군(淸城君)
 정윤소(鄭允韶) 〔13世〕의영고 직장
 정희주(鄭希周) 〔13世〕무과급제, 훈련원 부정
 정교(鄭 僑) 〔13世〕생원, 증 좌찬성
 정응생(鄭應生) 〔13世〕대호군, 봉 서평군(西平君)
 정응종(鄭應鍾) 〔13世〕부호군
 정응상(鄭應祥) 〔13世〕현감, 증 이조참판
 정응린(鄭應麟) 〔13世〕문과급제, 대사간, 광국원종공신 2등
 정응태(鄭應台) 〔13世〕함창현감
 정선(鄭 善) 〔13世〕중종 때 문과급제
 정언보(鄭彦輔) 〔14世〕진사, 필법이 뛰어남
 정이흥(鄭以興) 〔14世〕삼가현감, 학자
 정이청(鄭以淸) 〔14世〕강계교수, 학자
 정이충(鄭以忠) 〔14世〕증 영의정, 봉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승문(鄭承門) 〔14世〕증 영의정, 봉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정사중(鄭思中) 〔14世〕사맹, 증 이조판서
 정사성(鄭思誠) 〔14世〕부호군, 증 좌승지
 정사경(鄭思敬) 〔14世〕대호군, 증 좌승지
 정사신(鄭思信) 〔14世〕음죽현감
 정두(鄭 枓) 〔15世〕號 竹軒, 첨정, 증 한성부 우윤, 도산서원 곁에 역락서재(亦樂書齋)를 세웠다.
 정린(鄭 獜) 〔15世〕號 百源堂, 생원 빈민구휼
 정강         〔15世〕號 蘇溪, 통훈대부 어모장군
 정연(鄭 璉) 〔15世〕號 松坡, 덕릉참봉, 호성원종공신 3등, 임란호국 영남 충의단에 위패 봉안
 정탁(鄭 琢) 〔15世〕字 子精, 號 藥圃, 諡號 貞簡, 문과에 급제하여 청직과요직을 거의 모두 거치고 특히 이조판서 등 5개 판서를 역임하고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극복의 공훈으로 호성공신 3등에 녹훈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봉조하녹(奉朝賀祿)이 내려졌다.  충훈부에서 그린 초상화(보물 제487호)와 분조(分朝)의 활약상을 기록한 용사일기(龍蛇日記, 보물 제494호)가 있다.  후에 다시 위성공신 1등에 녹훈되고 예천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 되었다.
 정곤수(鄭崑壽) 〔15世〕字 汝仁, 號 栢谷, 諡號 忠翼,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청직과 요직을 두루 거치고 예조판서와 좌찬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청벙진주사(請兵陳奏使)로 중국 조정에 가서 3일간 밤낮으로 청병을 호소하여 정예군을 얻어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으며, 청백리로 녹선되기도 했다.  임란 극복의 공훈으로 호성공신 1등에 녹훈되고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성주 유계서원에 제향 되었다.
 정괄(鄭 适) 〔15世〕號 竹坡, 돈용교위 증 좌참찬
 정구(鄭 逑) 〔15世〕字 道可, 號 寒岡, 諡號 文穆, 강원관찰사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증직은 영의정이다.  일찍이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 병진 의약 풍수에 이르기 까지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나 예학에 관한 저술이 많으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으뜸이 되었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퇴계와 남명의 학맥을 전승케 했으며,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 되고 이외 현풍 도동서원 등 전국 17개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이(鄭 迤) 〔15世〕字 德可, 號 蒼岩, 군자감 주부, 임진왜란 때 충익공을 모시고 중국 조정에 가서 청병에 많은 공을 세웠다.
 정원(鄭 遠) 〔15世〕字 汝明, 號 龍溪, 감찰, 증 대사간, 용계정사를 세워 시를 읊으며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정형(鄭 逈) 〔15世〕무과급제 첨정역임
 정섬(鄭 暹) 〔15世〕부호군
 정사성(鄭士誠) 〔16世〕號 芝軒, 학자, 양구현감, 진사시에 합격 한 후 과거에는 뜻이 없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가하여 대구 망우당공원 내 임란호국 영남 충의단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정사공(鄭士恭) 〔16世〕삼척교수, 학자
 정사신(鄭士信) 〔16世〕號 梅窓, 판결사, 광국원종공신 3등,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헌납, 지제교를 거쳐 장예원 판결사를 역임했다.  경학과 문장력이 뛰어났으며, 하지사(賀至使)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정사의(鄭士毅) 〔16世〕號 勿齋, 대구교수, 학자
 정윤해(鄭允諧) 〔16世〕號 鋤歸子, 학자, 임란호국 영남 충의단에 위패가 봉안 되어 있으며, 함창 청담사(淸潭祠)에 배향 되었다.
 정윤위(鄭允偉) 〔16世〕號 東湖, 통훈대부 사재원 주부
 정윤목(鄭允穆) 〔16世〕號 淸風子 학자, 통훈대부 행소촌도 찰방, 경서와 예악 병형 음양 율력 구류 백가에 이르기 까지 통달했으며, 특히 성리학에 정통했다.  또 필법이 탁월하여 초서에 명필이라고 일컬었으며, 예천 도정서원에 배향되었다.
 정격(鄭 檄) 〔16世〕號 南坡, 맹산현감, 증 좌승지
 정저(鄭 櫧) 〔16世〕통훈대부 와서별제
 정봉(鄭 鳳) 〔16世〕나주훈도, 1586년 제주도에 건너가서 대정면 중문리에서 집안을 일으켰다.  당시 마을 이름을 鄭文里라고 했는데 후에 中文里로 바꾸게 되었다.
 정장(鄭 樟) 〔16世〕號 晩悟齋, 문과급제 예조좌랑 역임
 정숙(鄭 橚) 〔16世〕사용, 부호군 증 이조참의
 정정(鄭 楨) 〔16世〕군수
 정후국(鄭厚國) 〔16世〕무과급제
 정전(鄭 佺) 〔17世〕號 松烏, 학자, 의금부 도사, 문학과 재행이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정억(鄭 億) 〔17世〕號 晩志堂, 악기와 지리 풍수 의학에 통달하고 필법이 뛰어났다.
 정칙(鄭 侙) 〔17世〕號 愚川, 장릉참봉, 증 좌승지
 정숙(鄭 俶) 〔17世〕號 思軒, 학식이 넓고 깊었으며, 생원시에 합격했다.
 정흔(鄭 俒) 〔17世〕號 忍軒, 문장과 필법이 당대에 추앙을 받았으며, 생원시에 합격했다.
 정응복(鄭應福) 〔17世〕무과급제
 정필신(鄭弼臣) 〔17世〕무과급제, 동지중추부사
 정세형(鄭世衡) 〔17世〕號 鶴沙, 성천부사
 정시성(鄭時星) 〔17世〕문과급제
 정응남(鄭應南) 〔18世〕무과급제
 정방시(鄭邦時) 〔18世〕증 공주참의, 학자
 정창순(鄭昌舜) 〔18世〕승정원 좌승지
 정선(鄭 鍹) 〔19世〕號 三棄齋, 학자, 성현의 글을 탐구하여 큰 선비가 되었다.  족보를 수집하여 서문을 지었으며, 예의보유를 편찬했다.
 정탁(鄭 鐸) 〔19世〕號 梅溪, 문과급제 정언 사헌부 장령 역임
 정병래(鄭丙來) 〔19世〕號 梅軒, 문과급제, 밀양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강화조약이 이루어져 뜻을 펴지 못하여 사직했다.
 정삼중(鄭三重) 〔19世〕동지의금부사
 정숙립(鄭淑立) 〔19世〕號 栢庵, 문과급제 병조정랑 역임.  예서를 잘 써서 필원록에 실려 있다.
 정옥(鄭 玉) 〔20世〕號 牛川, 문과급제, 좌승지 황해관찰사 역임.  영주 오천서원에 배향.
 정창걸(鄭世勳) 〔21世〕무과급제
 정창걸(鄭昌傑) 〔21世〕무과급제, 훈련원 판관
 정동리(鄭東里) 〔21世〕직장, 주부, 감찰, 신창현감 역임.
 정동범(鄭東範) 〔21世〕號 蘆庵, 부호군, 무신란 때 창의문을 짓고 성주목사와 함께 합천에서 적의 괴수를 베었다.  나라에서 정충문(旌忠門)을 내렸으며, 대구 노변동에 정충비와 충효재(忠孝齋)를 세웠다.
 정필규(鄭必奎) 〔22世〕號 魯庵, 학자,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으며,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문과 덕망이 높아 유림의 추천으로 혜릉참봉이 되었다.
 정필린(鄭必鱗) 〔22世〕훈련원 첨정
 정로(鄭 魯) 〔22世〕號 蒼坡, 諡號 忠景, 長男 시(蓍)가 가산군수로 있을 때 홍경래 난을 만나 적을 꾸짖으며 관군을 독려하며 싸우다가 아들과 함께 순절했다.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다.
 정신(鄭 藎) 〔22世〕號 白坡, 문과급제, 홍문관교리 역임.
 정지언(鄭之彦) 〔22世〕號 勉庵, 나라에서 정효문(旌孝門)이 내려졌으며, 정효비가 있다.
 정내성(鄭來成) 〔23世〕號 思軒, 문과급제, 한성부 좌윤 역임.
 정영건(鄭永建) 〔23世〕號 竹塘, 통훈대부 정(正)
 정육(鄭 堉) 〔23世〕조봉대부, 전생서 직장
 정위l(鄭 煒) 〔23世〕號 芝厓, 온릉참봉 역임.  예설을 모아 가례휘통을 편찬
 정교(鄭 僑) 〔23世〕號 進庵, 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성리휘찬 및 상변을 편찬.
 정시(鄭 蓍) 〔23世〕號 伯友, 諡號 忠烈, 무과에 급제하고 가산군수로 재임중 홍경래 난을 만나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가산군이 함락되고 끝내 순절했다.  조정에서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가산 정주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제향 했다.  가산순절록(嘉山殉節錄)이 있다.
 정창희(鄭昌熙) 〔24世〕號 鶴溪, 증 이조참판, 봉 서함군(西咸君)
 정창동(鄭昌東) 〔24世〕號 晩圃, 문과급제, 공조참의 역임
 정창휴(鄭昌休) 〔24世〕號 西湖, 문과급제 이조정랑, 지평 역임
 정내석(鄭來錫) 〔24世〕號 顧軒, 돈녕부 도정
 정훈석(鄭勳錫) 〔24世〕문과급제, 승정원 주서
 정주석(鄭冑錫) 〔24世〕號 秋士, 돈녕부 도정
 정범락(鄭範洛) 〔25世〕號 梅軒, 돈녕부 도정, 봉 서흥군(西興君)
 정익영(鄭翼永) 〔25世〕군수 공조참의
 정주표(鄭柱表) 〔26世〕무과급제, 사과
 정주남(鄭柱南) 〔26世〕문과급제, 사헌부 감찰
 정원화(鄭元和) 〔26世〕문과급제, 형조참의
 정두용(鄭斗容) 〔27世〕문과급제,
 정재교(鄭在敎) 〔28世〕문과급제, 홍문관 시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