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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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12 13:02 수정일 : 2018-01-03 17:13

진주정씨시조의 유래

예로부터 <진주8(晋州八鄭)>으로 불리워졌던 진주 정씨(晋州鄭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세계(世系)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系統)으로 갈라져서 계대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제문헌(諸文獻)에 진주정씨는 12()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다음 5파로 대별(大別)해서 상고(詳考)한다.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경덕왕 16)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가 되었다. 별호(別號)로 진강(晋康)․진양(晋陽) 등으로 불리웠다.

첫째 고려통합삼한벽상공신(高麗統合三韓壁上功臣)으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영절공(英節公) 정 예(鄭 藝)의 계통은,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문익공(文翼公) 정시양(鄭時陽)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으며, 시양의 7세손 수()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좌랑(版圖佐郞)과 좌사간(左司諫)을 역임하고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져 가세(家勢)를 일으켰고, 그의 후손 을보(乙輔)1338(충숙왕 7) 국자시(國子試)에 장원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도감제조(都監提調)를 지내고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2002년 족보 편찬시에 정예(鄭藝)계의 충장공파에서는 <신구당서(新舊唐書)>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그 상계 연원을 중국에서 귀화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한편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던 신중(臣重 : 부사 천덕의 아들)의 아들 이오(以吾)는 조선 태종(太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찬성(贊成)과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정분(鄭苯)이 단종조(端宗朝)의 상신(相臣)으로 유명했다.

1416(태종 1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했던 분()은 세종(世宗)과 문종조(文宗朝)에 걸쳐 조정의 중신(重臣)으로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고, 문종이 죽을 때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어린 단종(端宗)의 보호를 유탁받았으며, 이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일월록(日月錄)>에 의하면 그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음모가 무르익을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영남을 순회하고 충주(忠州)에 이르자 김종서와 황보인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을 잡아 죽이려 관원을 보낼 것이라고 믿고 용안역(用安驛)을 지나가는데 관원이 달려오며 전지(傳旨)가 있다고 외쳤다.

분은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말하기를 노상에서 형을 받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니 역관(驛舘)으로 갈 수 없느냐고 하자, 관원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명을 받아서 공을 적소(謫所)로 압송하는 것이요하였다. 십여 일이 걸려 유배지인 낙안(樂安)에 내려가, 항상 조상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함께 있던 중 탄선(坦禪)에게 네가 밥 한 그릇을 정하게 지어라 내가 우리 조상에게 제사지내겠다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 신주를 모두 불에 태웠는데 조금 후에 관원이 와서 사사(賜死)하였다고 한다.

장빈호찬(長貧胡撰)」에 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관원이 형을 집행하려고 왔을 때 분은 목욕을 하고 관대를 갖추어 조상의 신주에 재배하고 신주를 태운 후 관대를 벗고 우장 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의 아내에게 영결(永訣)하니 아내가 붙들고 통곡을 하자, 그는 달래며조정의 명령이니 항거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 ”하고는 죽음에 임하여 감형관(監刑官)이 형을 집행하려고 목을 얽을 때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名分)이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모여 들고 비가 쏟아져서 감형관이 우산을 받고 성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중종(中宗) 15세로 향시(鄕試)에 올랐던 사현(思顯)은 판관(判官)을 지낸 기()의 아들로서 명종(明宗) 때 형․병조(刑․兵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했으며, 충의공(忠毅公) ()6세손 천경(天卿)은 임진왜란 때 아우 원경(元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임천 군수(林川郡守)와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지낸 후 병조 참판으로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둘째, 고려조(高麗朝)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정자우(鄭子友)의 후손에서는 그의 6세손 신열(臣烈)이 고려 현종(顯宗) 때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친 후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거란(契丹)의 침입을 격퇴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선주지사(善州知事) 임덕(任德)의 아들 유(: 은열공 신열의 현손)는 아우 손()과 함께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부사(判府事)가 되었던 천익(千益 : 효자 유의 아들)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로 돌아가 퇴헌정(退軒亭)을 짓고 자적하다가 사위인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는바 그의 장인인 문충공 정천익이 시배하여 파종에 성공하였고 호승의 도움으로 물래(목화의 씨를 빼는 기구)를 개발하여 제사기술과 의복문화의 혁신에 기여했다.

그외 조선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밀(: 천익의 8세손)과 이연경(李延慶)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곤양(昆陽)에서 전공을 세웠던 대수(大壽)가 유명했으며, 1645(인조 23) 별시문과에 장원(壯元)했던 필달(必達 : 천익의 11세손)은 현종(顯宗) 때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단양 군수(丹陽郡守)와 울진 현령을 역임하여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용()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셋째, 통정대부(通政大夫)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던 ()을 파조로 하는 계통에서는 세종조(世宗朝)의 명신(名臣)인 척()이 뛰어났다.

1414(태종 14)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척()은 교서관 정자(校書舘正字)를 거쳐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와 감찰(監察)을 지내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1463(세조 9)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했다.

특히 그는 청렴하고 효성이 뛰어나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세조가 그를 불러 부왕(父王)께서 일찍이 청직(淸直)이란 두 글자를 경에게 허()하시던 말씀이 나의 귀에 남아 있다고 하며 세조도 계속 우러러 모셨다고 한다.

1474(성종 5)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척의 아들 성근은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소문쇄록(謏聞瑣錄)」에 의하면 그가 성종(成宗) 때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이다. 도주(島主)의 집앞에 이르면 도주가 문밖에 나와서 조선의 왕명을 받게끔 되어 있었는데도 도주가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성근은 밖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통역을 시켜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히 받게 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의 난정에 살면서 개결(介潔)하고 강개(慷慨)하여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아래와 같은 시()로 표시했다.

<내가 님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아 님은 내 마음 같지않도다.

님의 마음이 진실로 같을진대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으리요. 비록 생각은 아니하나 미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만이다. >

효성이 지극했던 성근은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친상에 3년 상을 치렀고 또 성종(成宗)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 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갑사사화 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로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로 있던 주신(舟臣)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굶어 죽었으며, 주신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의 아들 원린(元麟)․원기(元麒)와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孝行)이 뛰어나 4(四代) 6(六名)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晋州城)이 함락되자 80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전남 광양군 골약면 마동리로 피난했다가 중동리(中洞里)에 정착(定着)했던 대유(大有 : 공대공 척의 8세손)는 효성이 지극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현재 광양(光陽)지방에 집중세거하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넷째, 문하시중평장사(文下侍中平章事)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던 정 헌(鄭 櫶)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온()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던 온()은 눈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智異山靑鶴洞)에 숨어살았는데, 조선(朝鮮)이 개국된 후 태조(太祖)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太宗)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온의 아우로 고려말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낸 택()10세손 경세(經世 : 여관의 아들)는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으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자학의 거두(巨頭)로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성리학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금자탑을 세웠다.

다섯째,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파조로하는 계통에서는 그의 15세손 기룡(起龍)1586(선조 19)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초명(初名)인 무수(茂壽)를 선조(宣祖)의 명()을 받아 기룡(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에 올랐던 기룡은 거창(居昌)과 금산(錦山)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고, 곤양수성장(昆陽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으며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상주성(尙州城)을 탈환한 후 이어 성주(星州)․합천(陜川)․초계(草溪)․의령(宜寧)․고령(高靈) 등지의 여러 성()을 탈환하는데 무명(武名)을 떨쳤으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통영(統營) 진중(陣中)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한말(韓末)에 와서 희면(熙冕)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김용구(金容球)와 함께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영광(靈光)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루었고, 현대(現代)에 와서도 훌륭한 인물들이 각계에 진출하여 조국의 번영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바침으로서 진주 정씨를 더욱 빛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진주정씨(晋陽․晋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74,777가구, 238,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정씨조상인물

정선(鄭 侁) 고려(高麗) 때 통례지후(通禮祗候)를 역임하였다.

정신렬(鄭臣烈) ()는 관정(官亭), 시호(諡號)는 은열(殷烈). 고려 현종(顯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하여졌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고 불교(佛敎)를 배척(排斥)하였다.

정천익(鄭天益) ()는 퇴헌(退軒),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객령(典客令)을 역임하였으며 사위 문익점(文益漸)이 중국(中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목면(木棉) 씨앗의 시배(始培)에 성공을 거두고 소사거(繅絲車 : 물레)와 취자거(取子車 : 씨 아)를 개발하여 제사(製絲)기술을 개발하고 의복문화의 혁신을 가져왔다.

정진경(鄭晋卿)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을지냈다.

정임덕(鄭任德)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유(鄭 裕) ()는 학당(學堂),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고려에서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하였다.

정수균(鄭守均) 일명(一名)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고려 때 내급사(內給事)를 지냈다.

정유(鄭 愈) ?1372(공민왕 21)

지선주사(知善州事) 임덕(任德)의 아들. 1372(공민왕 21) 동생 손()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하동군(河東郡)을 지키다가 왜구(倭寇)의 야습을 받자 형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하던 중 왜구 한명이 칼을 빼어 아버지를 찌르려는 찰나에 동생이 몸으로 이를 막아 아버지의 위기를 모면케 한 후 대신 죽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종부승(宗簿丞)에 등용되었다.

정 손(鄭 愻) 고려(高麗) 때 종부시승(宗簿寺丞)을 역임하였으며 왜구를 토벌하다 순절(殉節)하였다.

정중소(鄭仲紹) 고려조(高麗朝)에 내급사(內給事)를 지냈다.

정홍단(鄭洪旦) ()는 절음(節陰), 시호(諡號)는 영밀(英密).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정안사(鄭安社) ()는 죽파(竹坡), 시호(諡號)는 충무(忠務). 고려때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를 역임하였다.

정수(鄭 需) ()는 송죽당(松竹堂), 시호(諡號)는 문영(文英). 고려조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정수규(鄭守珪) ()는 학사당(學士堂), 시호(諡號)는 영밀(英密). 고려(高麗)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정연(鄭 椽) ()는 우암(愚巖).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정을보(鄭乙輔) ()는 면재(勉齋), 시호(諡號)는 문량(文良). 충숙왕(忠肅王)때 국사시(國士試)에 합격, 1345(충숙왕 1)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후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1352(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일파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가 조일신이 주살(誅殺)되자 투옥, 후에 광양 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정석(鄭 碩)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정천덕(鄭天德) 고려에서 삼사 부사(三司副事)를 역임하였다.

정신중(鄭臣重) 고려(高麗) 때 검교찬성(檢校贊成)을 역임하였다.

정온(鄭 溫) ()는 우곡(隅谷). 고려(高麗) 창왕(昌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7도감사(七道監司),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거쳐 사헌대부(司憲大夫)․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나 정계(政界)가 혼란해지자 관직(官職)을 버리고 청맹으로 가장하고 두문동(杜門洞)을 거쳐 지리산(智異山) 청학동(靑鶴洞)에 은거하니 조선(朝鮮) 태조(太祖)가수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양하였다. 경현사(景賢祠),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정이오(鄭以吾) 1354(공민왕 3)1434(세종 16)

()는 수가(粹可), ()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시호(諡號)는 문정(文定). 고려 공민왕때 문과(文科)에 급제, 1410(태종 10)「태조실록(太祖實錄)」수찬(修撰)에 참여,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로서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를 겸임했다. 1413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분(鄭 苯) ?1454(단조 2)

()는 자외, ()는 애일당(愛日堂),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오(以吾)의 아들. 1416(태종 1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1421(세종3)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425년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고, 사인(舍人)으로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이 되어 수재민(水災民)을 구호했다.

1430년 집의(執義)로서 성 개(成 槩)의 노비 사건을 계문(啓聞)하지 않은 죄로 유배되었다. 1432년 풀려 나와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역임, 이듬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44(세종 26) 예조 참판(禮曹參 判)․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후 144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숭례문(崇禮門) 건축공사를 감독했다.

1449년 판이 조사(判吏曹事)를 거쳐, 이듬해 우찬성(右贊成)으로 충청․전라․경상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직하고, 1451(문종1) 좌찬성(左贊成)․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임, 이듬해 문종이 죽을때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과 어린 세자(世子 : 단종)의 보호를 부탁 받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453(단종 1) 전라․충청․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충주(忠州)로 향하던 중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낙안(樂安)에 안치(安置)되어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사사(賜死) 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장흥(長興)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척(鄭 陟) 1390(공양왕 2)1475(성종 6)

()는 명지(名之), ()는 정암(整菴)․창재(暢齋), 시호(諡號)는 공대(恭戴), ()의 아들. 1408(태조 8) 생원(生員)이 되고, 1414(태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 字)를 거쳐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감찰(監察)을 지냈다. 예조 정랑(禮曺正郞)으로 검상(檢詳)을 겸직, 이어 사인(舍人)․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을 거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등을 역임, 1444(세종26)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공조․호조․예조의 참의(參議) 등을 역임, 경창부윤(慶昌府尹)으로 1449(세종 31)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 참판(禮曺參判)으로 양계지도(兩界地圖)를 찬진(撰進), 1454(단종2)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이해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고, 1463년 양성지(梁誠之)와 함께「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해서(楷書)와 전서(篆書)에 뛰어나 많은 새보(璽寶)와 관인(官印)의 글자를 썼으며, 또 전고(典故)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의제(儀制)를 찬()했다.

정은(鄭 垠) 광원(廣元)의 아들. 1453(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1457(세조 3) 해인사(海印寺)에서 불경(佛經)을 인행(仁行)할 때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 1463년 장령(掌令), 1471(성종2) 집의(執義), 1473년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1478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듬해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나 무능한 관리라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정계도(鄭啓道)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역임하였으며 직간(直諫)을하다가 유배(流配)되었다가 세종(世宗) 때 원통함이 풀려져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경도(鄭慶道) 조선(朝鮮)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정대수(鄭大壽) ()는 영로(榮老), ()는 오봉(鰲峯). 조선(祖先)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용(鄭 庸) ()는 자상(子常), ()는 중재(中齋). 조선조(朝鮮朝)에 의병을 일으켰다.

정인상(鄭麟祥) ()는 인백(仁白), ()는 귀계(龜溪). 조선(朝鮮)에서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성근(鄭誠謹) ?1504(연산군 10)

()는 이신(而信)․겸부(兼夫), 시호(諡號)는 충절(忠節), 판윤(判尹) ()의 아들. 1474(성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지평 (持平) 등을 거쳐, 1481년 경기도 경차관(京畿道敬差官)을 지내고 이듬해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487년 시강관(侍講官)으로 쓰시마도 선위사(對馬島宣慰使)가 되고, 이듬해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낸 뒤, 1493년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재직중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낼 때의 부정사실로 탄핵을 받고 파직, 부처(付處)되었다가 후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承旨)․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1494년 성종이 죽자 3년간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고, 호군(護軍)이 되어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효수(梟首)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광주(廣州)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주신(鄭舟臣) 1472(성종 3)1504(연산군 10)

()는 제옹(濟翁), 좌부승지(左副承旨) 성근(誠謹)의 아들. 1501(연산군 7)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아버지가 화를 입고 죽자 통곡하다가 죽었다. 뒤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정광로(鄭光露) 초명(初名)은 원(). ()는 기지(器之), ()는 광노자(狂奴子). 조선(朝鮮) 때 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정형손(鄭亨孫)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정매신(鄭梅臣)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역임하였다.

정은주(鄭殷宙) 조선조(朝鮮朝)에 수사(水使)를 지냈다.

정옥주(鄭玉柱) 조선(朝鮮)에서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랐다.

정밀(鄭 密) 1543(중종 38)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4군의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심(鄭 沈) 조선(朝鮮) 때 헌납(獻納)을 지냈다.

정사량(鄭思亮) 조선(朝鮮) 때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정사현(鄭思顯) 조선조(朝鮮朝)에 지평(持平)을 지냈다.

정원린(鄭元麟) 조선(朝鮮) 때 효자(孝子)로 칭찬을 받았다.

정원기(鄭元麒) 조선에서 효자(孝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정효성(鄭孝成) 조선(朝鮮)에서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광윤(鄭光胤)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정감(鄭 瑊) ()는 옥경(玉磬), ()는 신재(愼齋). 1588(선조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晋州 城)에서 역전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니, 양산숙(梁山璹)․송제민(宋濟民)과 함께 촉석루(矗石樓)에 올라가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였다.

그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1867(고종 8) 충절정려(忠節旌閭)가 세워졌다. 작산사(작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승윤(鄭承尹) ()는 임중(任仲), ()는 남계(南溪). 조선(祖先)때 진사(進士)였다.

정식(鄭 軾) ()는 여정(汝貞), ()는 관제(寬齊). 조선(朝鮮)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정명세(鄭名世) ()는 군수(郡粹).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명원(鄭名遠) ()는 백시(伯時), ()는 독곡(獨谷).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이심(鄭以諶) ()는 신화(愼和), ()는 모헌(慕軒). 조선 때 효자(孝子)로 칭송을 받았다.

정사제(鄭思悌) 1556(명종11)1592(선조25)

()는 유인(幼仁), ()의 아들. 보성(寶城) 출신.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91(선조 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의병장(左義兵將) 임계영(任啓英)의 종사관이 되어 장수(長水)에서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전공을 세우고 남원(南原)에서 전사했다. 부수찬(副修撰)에 추증(追贈)되었다.

정귀세(鄭貴世) ?1592(선조25)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훈(鄭 勛) 조선(朝鮮) 때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

정유성(鄭惟誠) 조선조(朝鮮朝)에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정유경(鄭惟敬) 조선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정경세(鄭經世) 1563(명종18)1663(인조 11)

()는 경임(景任), ()는 우복(愚伏)․일묵(一黙)․하거(荷渠), 초시(初諡)는 문숙(文肅), 개시(改諡)는 문장(文莊), 여관(汝寬)의 아들. 상주(尙州) 출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 1582(선조 15) 진사 (進士)가 되고, 1586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檢閱)․봉교(奉敎)를 거쳐 1589(선조 22)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正言)․교리(校理)․정랑(正郞)․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고,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부제학(副提學)에 발탁되고,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29년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이듬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편찬을 담당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이기설(異氣說)에 있어서 이 황(李 滉)의 설에 반대하고 이 이(李 珥)의 설에 찬동했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리었다.

시문․글씨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追贈),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大邱)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산(慶州)의고산서원(孤山書院), 강릉(江陵)의 퇴곡서원(退谷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정백형(鄭百亨) 1590(선조23)1636(인조 14)

()는 덕후(德後), 시호(諡號)는 충경(忠景), 관찰사 효성(孝成)의 아들. 1623(인조 1) 음보(蔭補)로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1627년 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 1623년 원종(元宗 : 인조의 아버지) 추존(追尊)의 논의가 일어나자이를 반대하여 파직, 1634년 예조 정랑(禮曹正郞)․장령(掌令)을 지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다가 섬이 함락되자 자결했다. 이듬해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정기룡(鄭起龍) 초명(初名)은 무수(茂壽), ()는 경운(景雲), ()는 매헌(梅軒),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1586(선조 19) 무과(武科)에 급제, 임진왜란 때 별장(別將)으로 우방어사(右防禦使)의 휘하에 종군, 거창(居昌)에서 왜군을 격파한 후 곤양수성장(崑陽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다.

이어 유병 별장(遊兵別將)을 거쳐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상주성(尙州城)을 탈환하였고, 1593년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듬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승진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高靈)에서 적군을 대파, 적장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리고, 계속 성주(星州)․합천(陜川)․초계(草溪) ․의령(宜寧)․고령(高靈) 등 여러 성을 탈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승진되어 경주(慶州) ․울산(蔚山)을 수복했다.

1617(광해군 9)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에 올라 통영(統營)의 진중에서 죽었다. 그가 곤양(崑陽) 출신이므로 다른 문헌에 는 곤양 정씨(崑陽鄭氏)의 시조로 되어있다. 상주(尙州)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정백창(鄭百昌) 1588(선조21)1635(인조13)

()는 덕여(德餘), ()는 현곡(玄谷)․곡구(谷口)․대탄자(大灘子)․천용(天容), 관찰사 효성(孝成)의 아들. 1606(선조 39)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고 1611(광해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주서(主書)를 거쳐 검열(檢閱)․봉교(奉 敎)․대교(待敎)등을 지냈다.

1613년 경망(經妄)하고 아첨을 잘 한다는 탄핵으로 파직당했다가 곧 대교로 복직,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으며, 1615년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大北) 일당들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기재하여 다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부수찬(副修撰)에 재등용되어 헌납(獻納)․교리(校理)․수찬(修撰), 1625(인조 3) 보덕(輔德)․사간(司諫)․사인(舍人) 등을 역임.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후 이듬해 집의(執義)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했으나, 국구 (國舅)인 그의 장인 한준겸(韓浚謙)의 덕택이라는 비난을 받고 취임하지 않았다가 1627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다음해 예조 참의(禮曹參議)․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1631년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이해 죄인 이행원(李行遠)의 치죄(治罪)를 태만히 한 죄로 다시 파직, 1632년 대사간(大司諫)에 복직되었으나 척신(戚臣)이라는 논란으로 사직했다.

좌부승지(左部承旨)․부제학(副題學)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1634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재직중 병사했다.

정필달(鄭必達) 1611(광해군3)1693(숙종19)

()는 가행(可行), ()(八松), 준후(俊後)의 아들. 정 온(鄭蘊)․조 경(趙 絅)의 문인. 1633(인조 11) 생원(生員)이 되고 1645(인조 2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재감 참봉 (司宰監參奉)․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거쳐, 1650(효종 1) 전적(典籍)에 올라 서학교수 (西學敎授)를 겸했다.

이어 감찰(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내고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 문성후(文誠後)와 함께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57(효종 8)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다시 등용, 현종 때 단양 군수(丹陽郡守)․사예(司藝)를 거쳐 1691(숙종 17)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도응(鄭道應) 1618(광해군 10)1667(현종 8)

()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無忝)․우복당(愚伏堂), 경세(經世)의 손자. 1649(인조 27)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대군 사부(大君師傅)가 되고 1658(효종 9)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정사현(鄭師賢) ()는 희고(希古), ()는 월담(月潭). 효행(孝行)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고령(高靈)5()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정성(鄭 晟) 조선(朝鮮) 때 설서(說書)를 역임하였다.

정심(鄭 杺) 조선(朝鮮)에서 한림(翰林)을 지냈다.

정기태(鄭期泰)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정민헌(鄭民獻) 조선조(朝鮮朝)에 직강(直講)을 지냈다.

정건주(鄭建周) 조선(朝鮮)에서 사예(司藝)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