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장기정씨시조(長鬐鄭氏),정자여(鄭子輿),장기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11:18 수정일 : 2018-03-15 20:03

장기정씨(長鬐鄭氏) 연원(淵源)

장기정씨시조(長鬐鄭氏 始祖)는 고려(高麗) 현종(顯宗)조에 진사에 입격(入格)하고 국가에 발탁(拔擢)되어 많은 공을 세워 품계(品階)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고 태자(太子)태사(太師)․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 등을 역임하고 추충진국공신(推忠鎭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장기정씨(長鬐鄭氏) 성관사실(姓貫事實)에 의하면 장기정씨 시조(始祖) 정자여(鄭子輿)는 영일정씨(迎日鄭氏) 후손(後孫)으로 고려(高麗)에 출사(出仕)하여 공신(功臣)이 되고 장기백(長鬐伯)으로 피봉(皮封)되어 후손(後孫)들은 그곳에 정착(定着)하여 세거(世居)하면서 장기(長鬐)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장기(長鬐)는 경상북도 동쪽에 위치한 영일군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신라 때는 지답현(只畓縣)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기립현(鬐立縣)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장기현(長鬐縣)으로 고쳐 경주(慶州)에 딸리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장기군(長鬐郡)으로 승격(昇格)하였으나 1914년 주군현(州郡縣) 폐합(廢合)시

군이 폐지되고 내서(內西), 양남(陽南)은 경주군(慶州郡)에 편입(編入)되고 나머지는 영일군에 편입되어 장기면(長鬐面)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장기 정씨(長鬐鄭氏)는 고려 때 시조 이하 수대에 걸쳐 등과(登科)하여 벼슬을 했고 고려말에 이르러 7세손 정천룡(鄭天龍)이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고 천룡(天龍)의 자(子) 을덕(乙德)이 신호위(神號衛) 중낭장(中郎將)을 역임했다.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建國)하자 고려(高麗)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켜 관직(官職)에 불사(不仕)하고 생(生)을 마쳤다. 그후 11세 세영(世榮)이 수원(水原) 정송리(貞松里)로 이거(移居)하여 12세 정승주(鄭承周)는 사마시(司馬試) 4등에 입격(入格)하고 7년 후에 별시(別時) 을과(乙科)에 등과(登科)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한 후 김제(金堤) 군수(郡守)로 제수(除授)되고 재직(在職) 중(中)에 사망하였다.

군수(郡守) 세영(世榮)이 생전(生前)에 형이 거주(居周)가 거주하고 있는 수원(水原) 정송리(貞松里)를 떠나 공주(公州) 정천(鄭川:현 공주 계룡면 금대리)로 이거(移居)하여 그곳에 정착(定着)해 480여 년을 국가(國家)와 지역사회(地域社會)에 공헌(貢獻)했고 종족(宗族)의 번성(繁盛)으로 연면(連綿)히 이어왔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기정씨는 전국에 4,7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집성촌으로는 공주시 계룡면 금대리에 118가두 논산시 벌곡면 한삼천에 36가구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 일원에 31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대전시 일원에 65가구 서울 경기 일원에 80가구가 산거(散居)하고 있다.


역대 인물 - 장기정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정극겸(鄭克兼) : 문과에 등과(登科)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사공(司空) 숭문전(崇文殿) 직학사(直學士), 상서(尙書)를 역임

정희경(鄭希景) :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조정대부(朝正大夫)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

정구(鄭 球) :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봉선대부(奉善大夫) 이부 낭중(吏部郎中)을 역임

정인수(鄭仁壽) :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조열대부(朝列大夫)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

정수(鄭 需) :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도사(都事) 좌사간(左司諫)을 역임

정천룡(鄭天龍) :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하동(河東) 현감(縣監)을 거쳐 봉선대부(奉善大夫)로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 양양(襄陽) 부사(府使)로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고려(高麗)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키며 덕(德)과 학문(學問)을 일으켜 풍속(風俗)을 독려했음

정을덕(鄭乙德) : 정천룡의 아들이며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신호위(神號衛)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선고(先考)와 같이 고려(高麗)에 절의(節義)를 지켰다.

조선시대 인물

정승주(鄭承周)(1484-1538) : 호(號)는 정곡(正谷), 사마시(司馬試) 4위로 입격(入格), 7년 후에 별시(別試) 을과(乙科)에 등과(登科)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제수(除授), 저작(著作) 겸 선전관(宣傳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 회덕(懷德) 현감(縣監),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 진주(晉州) 판관(判官)을 역임 중(中) 외환(外患)을 당해 사임(辭任)하고 3년 복제(服制)를 마치고 김제(金堤) 군수(郡守)로 복귀(復歸)하여 재임(在任) 중에 동헌(東軒)에서 사망(死亡)하여 국가(國家)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 종부시(宗簿寺) 정(正) 겸(兼) 춘추관(春秋館) 편수관에 증직(贈職)되었음.

정장생(鄭長生)(1510-1583) : 장사랑(將仕郞) 양현고(養賢庫) 사직(司直), 승사랑(承仕郞) 의흥위(義興衛) 봉사(奉事) 역임.

정계생(鄭季生)(1526-1600) : 호(號) 사괴정(四槐亭),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향민(鄕民)의 칭송(稱頌)을 받아 효행(孝行)으로 순릉(純陵) 참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효자인자당연작분(孝子人者當然職分)으로 당연한 일이라며 끝내 불사(不仕)하여 평생토록 은거(隱居) 생활을 했다.

정진생(鄭晉生)(1564-1604) : 호(號)는 평량자(平凉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종사랑(從仕郞),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 선생의 의병(義兵) 천거(薦擧)가 있었으나 때 마침 금간산 유담중이라 그 뜻이 좌절되고 그 후 도이와 강화의 부당성을 시를 통해 외치니 충국정신을 사상히 여겨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증직(贈職)되었음

정동엽(鄭東燁)(1603-1685) : 생원시(生員試) 2등으로 입격(入格)하고 3년 후에 명경과(明經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동서중학(東西中學) 교수(敎授),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예조(禮曹) 좌랑(佐郞), 공조(工曹) 좌랑(佐郞),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예안(禮安), 진보(眞寶) 현감(縣監)과 은계(銀溪)와 성환(成歡) 도찰방(都察訪)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가자(加資)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陞進)하여 후(後)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자(加資)되어 중추부(中樞府) 동지(同知事)를 역임했다.

정규환(鄭奎漢)(1751-1824) : 호(號)는 화산(華山) 사마시(司馬試)에 3등으로 입격(入格)하여 세속적(世俗的)인 부귀(富貴)영달(榮達)에 뜻이 없어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 전념(專念)하여 평생(平生)을 바쳤음, 공주지역 향약(鄕約)을 실천(實踐)한 연유(緣由)로 유림(儒林)이 조정(朝廷)에 상소(上疏)해 정조(正祖)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후 유림과 후손의 협력으로 영당(影堂)을 모체(母體)로 하여 화산사(華山祀)를 건립(建立)하고 유림(儒林)에서 봉사(奉祀)하며 현재 진사(進士)교지(敎旨)와 화(華)산(山)집(集) 향약(鄕約)절목(節目) 둥이 보관되어 있음

근대(近代) 인물(人物)

정일성(鄭一性)(1868-1919) : 호(號)는 설죽(雪竹), 기미년 3․1 운동 시 청양군 정산면 주재소를 습격(襲擊)하여 파괴(破壞)하다 순사(殉死)하였음

정일복(鄭一福)(1890-1924) : 기미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 후에 체포되어 악형에 3년동안 불굴(不屈)하다 순사(殉死)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