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일정씨(迎日鄭氏),영일정씨시조,정습명,영일정씨유래,영일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09:49 수정일 : 2018-01-24 17:15

영일정씨시조 및 영일정씨유래(본관)

영일정씨(迎日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斯盧)의 육부촌(六部村) 중 취산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32(신라 유리왕 9) 봄 유리왕(儒理王)으로부터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下賜) 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遠孫) 종은(宗殷)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간관(諫官)으로 직언(直言)을 하다가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에 유배된 후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迎日)로 이거(移居)하여 호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일(迎日)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의 근오지현(斤烏支縣 : 또는 烏良友顯)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임정(臨汀)으로 고쳐서 의창군(義昌郡 : 흥해)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초에 연일(延日)로 고쳐서 현종(顯宗) 때 경주(慶州)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치고 1913년에 지방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이웃 흥해군(興海郡)․청하군(淸河郡)․장기군(長鬐郡)을 병합하여 영일군(迎日郡)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고 소목(昭穆)을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감무(監務)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監務公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지주사공파 습명(襲明)11세손 몽주(夢周)가 뛰어났다.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이며 반만년 한국사를 대표하는 충신(忠臣)으로 일컬어지는 포은(圃隱) 몽주(夢周)1337(충숙왕 6)에 경북 영천(慶北永川)에서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운관(云瓘)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아름다운 난초 화분을 안고 화단으로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화분을 깨뜨리는 꿈을 꾸고 사흘 후에 낳았다고 하여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몽란이 아홉 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대낮에 물레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금빛나는 한 마리의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 위에서 배를 따먹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 나무를 쳐다보니 몽란이 배나무 위에서 용처럼 웃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의 어머니는 몽()자에다 용()자를 붙여 몽룡(夢龍)이라고 고쳐 불렀다.

몽룡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벽 그의 아버지 운관(云瓘)의 꿈에 중국(中國)의 옛 현인(賢人) 주공(周公)이 나타나 이르기를 몽룡은 후세에까지 가문과 명성을 길이 빛내게 할 것이니 소중히 키워라하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주공(周公)의 주()자를 따서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

몽주는 자라면서 충()과 효()와 의()가 남달리 뛰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여위고 3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였으며 당시의 풍습이 부모의 상복을 겨우 백일밖에 입지 않았는데도 묘소 옆에다 여막(廬幕)을 짓고 산중에서 혼자 3년 동안이나 상식(上食)을 올리며 효()를 다하자 세상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했다.

1360(공민왕 9)에 연달아 삼장(三場 : 초장․중장․종장)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몽주는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순충윤도동덕좌명공신(純忠倫道同德佐命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익양군(益陽君) 충의백(忠義伯)에 이르렀고, 일찍이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고려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진충갈력(盡忠竭力)하면서 보수주의자들과 결별하여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친함)의 노선을 따름으로써 이성계(李成桂) 등과 손을 잡고 국제 정세에 순응하여 고려의 나아갈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가 개국위왕(開國爲王)의 뜻을 품게 되자 이에 단연히 결별하여 그의 마지막 일편단충(一片丹忠)까지도 고려를 위해 바치었다. 정도전(鄭道傳)․남 은(南 誾)․조 준(趙 浚) 등을 중심으로 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혁명 모의(革命謀議)가 한창 무르익던 어느 날 밤 몽주는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문병을 구실로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방원(李芳遠 : 이성계의 아들, 후에 태종이 됨)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몽주의 심중을 떠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赤何如 如彼赤何如)

서낭당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

(城隍堂後垣 頹圮赤何如 : 혹은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안 죽으면 어떠리

(我輩苦此爲 不死赤何如)

 

하니, 몽주는 이 시()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술잔을 보내며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것이 유명한〈단심가(丹心歌)〉이다. 몽주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안 방원(芳遠)은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심복 부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군기고(軍器庫)에서 쇠뭉치를 꺼내어 선지교(選地橋) 밑에 숨어 있다가 몽주가 지나갈 때 치라고 하였다. 몽주는 이 모의 사실을 변중량(卞中良)을 통하여 미리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각오한지 오래된 죽음을 조용히 기다렸다.

살해되던 날 아침 조상들의 신위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충효를 숭상하는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한사코 말려도 뒤를 따르는 녹사(錄事) 김경조(金慶祚)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친구 성여완(成汝完)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다시 말을 타면서 수행하는 녹사 김경조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고 하자, 녹사는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하였다.

몽주는 말을 거꾸로 타고 김경조에게 말을 끌라 하면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하며 선지교로 향하였다.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조영규를 비롯한 45명의 괴한이 나타나 쇠뭉치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앞에서 가던 김경조가 먼저 쓰러지고 이어 몽주가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이 때 몽주의 나이는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선지교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고 하여 선지교를〈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되었다. 몽주의 시체는 죄과(罪過)로 몰았기 때문에 내버려두었으나 송악산(松嶽山) 중들이 염습(殮襲)하여 풍덕(豊德) 땅에 묻었다.

통일 신라(統一新羅)에 이어 34대왕(大王)을 거치면서 475년간 지속되었던 고려 왕조(高麗王朝)는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지만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와 새 왕조 창업을 꿈꾸던 이성계의 신흥 세력이 불붙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의()를 살렸던 몽주의 충정과 일편단심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역사의 터전에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조선(朝鮮)이 개국되고 고려의 역사와 인물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어도 태종(太宗)은 권 근(權 近)의 상소를 받아들여 몽주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으로 이장할 것을 허락하였고, 몽주의 관작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회유책으로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 주었다.

몽주의 묘()를 이장할 때 면례(緬禮) 행렬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水枝面)에 이르자 앞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 지금의 묘자리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다 안장하였다고 한다.

몽주의 아들 종성(宗誠)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손자 보()가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된 <8(八賢)〉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일 정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학문이 탁월하여 세종(世宗)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던 보()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한 말이 한명회(韓明澮)를 통해 세조(世祖)에게 알려져 친국(親鞫)을 받을 때 나는 항상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을 성인 군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스스로 자백했으니 처형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이에 세조는 수레로 찢어 죽이라고 명하고 나서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하니, 좌우에서 이는 정몽주의 손자입니다.”하자 급히 명하여 형벌을 그치게 하고는 충신의 후손이니 특히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내라.”고 하였다.


일찍이 보()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차남 윤화(允和)가 장가들기 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창방(唱榜)할 때 잘못해서 좌판(坐板)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에 평생을 애석하게 생각해 오던 보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살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 난에 참여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안도했다고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전한다.

1447(세종 29) 문과에 급제했던 종소(從韶)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병자년(丙子年)의 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했으며, 그의 증손(曾孫) 세아(世雅 : 유량의 아들)는 임진왜란 때 아들 의번(宜藩)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영천(永川)의 적을 격퇴시킨 후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사직하고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 양성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들 의번(宜藩)은 경주(慶州)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혈전 중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조(英祖)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한편 용()의 아들 대임(大任)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伏兵)으로 적을 대파하고 돌격대장이 되어 울산 태화진(太和津)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웠으나 전장에서 순절했으며, 몽주의 9세손 근()의 아들 유성(維城)1627(인조 5)에 등과(登科)하여 현종(顯宗) 즉위 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청빈(淸貧)하기로 명망이 높았다.

1668(현종 9)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던 제두(齊斗 : 유성의 손자)는 당시 혼란했던 정국을 통탄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진력,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을 떨쳤고, 이론에만 치우친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우리 나라 최초로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陽明學)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했다.


고려 때 감무(監務)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의 인맥(人脈)으로는 극유의 6세손 사도(思道 : 자한의 아들)1336(충숙왕 복위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고, 우왕(禑王)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후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孫子) ()이 조선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후 오천부원군(烏川府院君)에 추봉되어 세종(世宗) 때의 명신(名臣) ()과 함께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태종(太宗)의 딸 숙정옹주(淑貞翁主)를 아내로 맞아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던 효전(孝全 : 오천부원군 진의 막내아들)은 단종(端宗)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난(靖難)을 일으켜 중신들을 살해하자 병을 핑계하여 두문(杜門)하고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피를 토하고 죽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의 증손이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완()이다. 1519(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던 남효온(南孝溫)․김 식(金 湜) 등과 함께 교유하였고, 장자풍(長者風)이 있어 항상 사림(士林)의 존망을 받아〈시귀(蓍龜)〉로 불리웠다. 그의 아들 숙()이 절효(節孝)로 명망을 떨쳤는데, 특히 친구 성수종(成守琮)이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처를 평생 동안 먹여 살려 우애의 본보기로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던 순()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후사(後嗣)가 없어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던 운명론자였다. 그의 임종에 딸들이 둘러앉으니 내 딸들은 모두 단정하다.”고만 말할 뿐 후사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않음으로 부인이 당황하자 운명인 것을……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역임했던 유침(維沉)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자()는 명종(明宗)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있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대윤(大尹)인 윤 임(尹 任)의 처남이라 하여 화를 입었고, 둘째 소()는 형인 자가 죄없이 화를 당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순천(順天)에 은거하며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났었다. 유침의 셋째 아들 황()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김제(金堤)․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에 올라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大家)로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시가(韓國詩歌)의 쌍벽으로 일컬어졌던 송강(松江) ()은 유침의 막내아들이다.

1536(중종 31)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던 송강은, 그의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숙의(淑儀)로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 동궁(東宮)에 자주 드나들면서 나이가 비슷한 명종(明宗)과 정답게 지냈으며, 그의 둘째 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의 부인이 되었으나 을사사화에 매부인 계림군이 연루되어 화를 당했고, 송강의 아버지 유침도 관북(關北)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다가 송강이 16세 때 풀려났다.

석방된 송강의 아버지 유침은 가족을 데리고 송강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전남 담양부 창평(昌平)으로 내려갔다. 창평에 내려온 송강은 을사사화의 화를 피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순천(順天)으로 내려가 우거하고 있던 둘째 형인 소()를 찾아가던 도중, 부호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에게 그의 재질을 인정받아 지곡(芝谷 : 지실) 성산(星山 : 별뫼)에 정주하면서 김윤제의 사위인 류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하고 윤제의 조카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과 동문수학(同門修學)했으며,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송강은 그로부터 10년 동안 성산에서 글공부를 하였고, 송강(松江)이라는 호()도 성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시내 죽계천(竹溪川)의 다른 이름인 송강에서 딴 것이다.

1561(명종 16) 26세 때 진사시(進士試)1등이 되었던 송강은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명종(明宗)이 방목(榜目)을 보고 어린 시절의 우정을 생각하여 기뻐하면서 정 철이 급제하였구나.”하고 따로 주찬(酒饌)을 내리어 축하 연을 베풀어주었다.

일찍부터 청백하고 곧은 성품으로〈총마어사(驄馬御史 : 한나라 때 어사 환전이 매우 엄정하였고 항상 총마를 타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총마어사라 불렀다)〉라 불려졌던 송강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을 때, 명종(明宗)의 사촌형인 경양군(景陽君)이 그의 처가의 재산을 약탈하고자 그의 처조카를 죽인 죄로 옥에 갇혀 있었다. 이에 명종은 송강에게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성격이 결백하고 강직한 송강이 법을 고집하여 경양군 부자(父子)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 옥사의 판결로 명종의 뜻을 거슬린 송강은 오랫동안 청선(淸選)이 막히었다가 31세 때 정랑(正郞)․직강(直講)을 거쳐 부승지(副承旨)에 올라 당시 격렬했던 당쟁 속에서 서인(西人)의 영수로 동인(東人)과 대결하며 예조(禮曹)와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는 동안 파란만장한 벼슬길을 걸었다.

송강이 45세 때인 1580(선조 13)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가 금강산(金剛山)과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답사하며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훈민가(訓民歌)」를 지어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1585(선조 18) 치열한 당쟁으로 양사(兩司)로부터 논척을 받았던 송강은 조정을 물러 나와 한 때 고향에 머물러 있다가 이어 창평(昌平)으로 내려가 4년 동안 유유자적하는 전원생활을 하면서 시상을 가다듬어「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과「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한 수많은 가사(歌辭)와 단가(短歌)를 지어 우리 나라 국문학사에 금자탑을 세웠다.

1593(선조 26)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인(東人)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빈곤과 울분으로 신음하다가 둘째아들 종명(宗溟)의 단지(斷指)의 효성(孝誠)도 헛되이 1218일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이듬해 2월 고양(高陽) 신원(新院)에 장사지냈다가 현종(顯宗) 때 진천(鎭川) 지장산(地藏山)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생전에 당쟁으로 반대당인 동인(東人)의 탄핵을 입어 관작의 추탈이 빈번하였던 송강은 죽은 후에도 포폄(褒貶)이 번거로워, 1594(선조 27) 6월에 권 유(權 愉)․김우옹(金宇顒) 등이 상소하여 삭탈관직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되었고, 숙종(肅宗) 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송강의 아들 4형제 중 차남 종명(宗溟)은 인조(仁祖)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으며, 막내 홍명(弘溟)은 부제학(副提學)과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종명의 아들 양()은「어록해(語錄解)」를 간행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영조(英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며 시문(詩文)과 글씨로 명망을 떨쳤던 호()는 노론(老論)의 선봉이 되어 격심한 당쟁 속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청빈한 성품으로 의식주가 서민과 같아서 정치에서 물러나 낙향해 사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재상을 지낸 사람인줄 몰랐다고 한다.

영조(英祖) 때 〈형제정승(兄弟政丞)〉으로 유명했던 우량(羽良 : 판돈령부사 수기의 아들)과 휘량(翬良)이 명문의 전통을 이었고,속대전(續大典)」편찬에 참여했던 하언(夏彦 : 목사 무의 아들)은 좌부승지(左副承旨)와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홍화문(弘化門)의 편액을 썼다.


그 밖의 인물로는 석달(錫達)의 아들로 일성위(日城尉) 치달(致達)에게 입양(入養)했던 후겸(厚謙)이 영조(英祖)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으며, 태락(台樂)의 아들 기원(岐源)은 철종(哲宗) 때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훈련대장(訓鍊大將)을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올라, 순조(純祖) 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지낸 유(), 고종(高宗) 때 법무협판(法務協辦)과 평양부 관찰사(平壤府觀察使)를 역임한 경원(敬源) 등과 함께 충절(忠節)과 학문(學問)의 전통 가문인 영일 정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일정씨(迎日鄭氏)는 남한(南韓)에 65,9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영일정씨조상인물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정습명(鄭襲明) ?1151(의종 5)

()는 동하(東河). 향공(鄕貢)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내시(內侍)에 들어갔고, 인종(仁宗) 때 국자 사업(國子司業)․기거주(起居注)․지제고(知制誥)를 역임, 최 충(崔 冲)․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거부당했다.

1146(인종 24)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어 태자(太子 : 의종)에게 강서(講書)하고, 공예왕후(恭睿王后)가 차자(次子) 대령후(大寧侯)를 태자로 세우려는 것을 저지하여 인종의 신임을 얻어 승선(承宣)에 올랐으며, 1149(의종 3) 한림학사(翰林學士), 그 후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정섭균(鄭燮均) 고려조(高麗朝)에 위위시 주부(衛尉寺主簿)․동정(同 正)을 지냈다.

정겸목(鄭謙牧) 고려(高麗) 때 주부(主簿)․동정(同正)을 역임하였다.

정인신(鄭麟信) 고려(高麗) 때 태학박사(太學博士)를 역임하였다.

정차연(鄭次延) 고려(高麗)에서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를 지냈다.

정지태(鄭之泰) 고려조(高麗朝)에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정사보(鄭師保) 고려조(高麗朝)에 주부(主簿)․동정(同正)을 지냈다.

정종흥(鄭宗興) 고려(高麗) 때 진현관 제학(進賢舘提學)을 역임하였다.

정화룡(鄭化龍) 고려(高麗)에서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정임(鄭 林)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정호(鄭 浩) 고려(高麗) 때 보승 낭장(保勝郎將)에 이르렀다.

정인수(鄭仁壽) 고려(高麗) 때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개성 부윤(開城府尹) 겸 상호군(上護軍)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숙첨(鄭淑瞻) 고려(高麗) 때 보승 중랑장(保勝中郎將)을 역임하였다.

정유(鄭 裕) 고려(高麗) 때 직장(直長)․동정(同正)을 역임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 겸 상호군(上護軍)에 추증(追贈)되었다.

정광후(鄭光厚)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원후(鄭元厚) 고려조(高麗朝)에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정신필(鄭臣弼) 고려조(高麗朝)에 동정(同正)을 지냈다.

정곡(鄭 谷) 고려(高麗) 때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정운관(鄭云瓘) 충신(忠臣) 몽주(夢周)의 아버지. 고려조에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愼德守義誠勤翊祚功臣)에 추록,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정위(鄭 瑋) 조선(朝鮮) 때 사정(司正)을 지냈다.

정희숙(鄭羲叔) 조선(朝鮮) 때 사온서령(司醞署令)을 역임하였다.

정교(鄭 喬) 고려말(高麗末)에 보승 중랑장(保勝中郎將)을 지냈다.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 6)1392(태조 1)

초명(初名)은 몽란(夢蘭)․몽룡(夢龍), ()는 달가(達可), ()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운관(云瓘)의 아들. 영천(永川) 출신. 1357(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한 뒤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3년 낭장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한 후 이해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 으로 여진족(女眞族)의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 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 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 등을 역임하고, 1371년 태상 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寶文閣應敎) 겸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와 사신으로 큐우슈우(九州)의 지방장관 이마가와(今川子俊)에게 가서 왜구(倭寇)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왜 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379년 전공 판서(典工判書)․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예의 판서(禮儀判書)․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전하고, 이어 밀직제학․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 성근익찬공신(誠謹翊贊功臣)에 봉해지고, 1383년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 (對明) 국교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8년 삼사 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지서연사(知書筵事),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 립(迎立)하고,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판도병의사사(判都兵議司事)․병조상서시사(兵曹尙書侍事)․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 가서 조 준(趙 浚)․남 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 (芳遠 : 태종)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방원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擊殺)되었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詩文)에 능하며 시조「단심가(丹心歌)」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태종 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중종(中宗)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 11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종성(鄭宗誠) 조선 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정종소(鄭從韶) ()는 사정(司貞), ()는 정헌(靖軒). 1447(세종 29)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병자사화(丙子士禍)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鄕里)에서 은거(隱居)했다.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정보(鄭 保) ()는 설곡(雪谷), 몽주(夢周)의 손자, 종성(宗誠)의 아들. 학문에 뛰어나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가 있었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1456(세조 2)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한 말이 세조(世祖)에게 알려져 처형의 명이 내려졌으나, 정몽주의 손자임이 밝혀져 연일(延日)에 유배, 뒤에 단성(丹城)에 이배(移配),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숙종(肅宗)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지충(鄭智忠) ()는 도암(道菴). 조선(朝鮮) 때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세건(鄭世健) 조선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되었다.

정세필(鄭世弼) ()는 임헌(林軒). 조선조에 좌도 병마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정세안(鄭世安)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유번(鄭維藩) 조선(朝鮮)에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다.

정유한(鄭維翰) 조선(朝鮮)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정신도(鄭信道)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두형(鄭斗亨) ()는 천장(天章), ()는 낙전당(樂全堂), 참봉(參奉) 충원(忠元)의 아들. 1544(중종 39) 생원(生員)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정세아(鄭世雅) ?1612(광해군 4)

()는 화숙(和叔), ()는 호수(湖叟), 시호(諡號)는 강의(剛義), 윤량(允良)의 아들. 1558(명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규합, 대장이 되어 영천(永川)의 적을 격퇴, 이듬해 서울이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에 돌아갔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추천받아 여러 차례 기용되었으나 사양하다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 준(李 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영천(永川)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의번(鄭宜藩) ?1592(선조 25)

()는 위보(衛甫), ()는 백암(栢巖), 세아(世雅)의 아들. 1585(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永川)에서 승리, 이어 경주(慶州)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 혈 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영조(英祖)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영천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대임(鄭大任) 1553(명종 8)1594(선조 27)

()는 중경(重卿), ()는 창대(昌臺).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伏兵)으로 적을 대파, 이어 영주(永州)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돌격장(突擊將)으로 울산 태화진(蔚山太和津)에서 역전한 공으로 예천 군수(醴 泉郡守)가 되었다. 1594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준(鄭 雋) 조선 때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정부현(鄭傅賢) 조선 때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지냈다.

정명선(鄭明善)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응선(鄭應善) 조선(朝鮮)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정해(鄭 楷) 조선에서 좌도 수군절도사(左道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정즙(鄭 戢) 조선(朝鮮) 때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정찬휘(鄭纘輝) ()는 궁림(窮林).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다.

정찬술(鄭纘述) 조선(朝鮮)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덕징(鄭德徵) 조선(朝鮮) 때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정유성(鄭維城) 1596(선조29)1664(현종 5)

()는 덕기(德基), ()는 도촌(陶村),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박사(博士) ()의 아들. 강화(江華) 출신. 10세 때부터 외조부 황치경(黃致敬)의 문하에서 수학(修學), 1627(인조 5) 강도 정시문과(江都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주서(注書)․필선(弼善)․수찬(修撰)․집의(執義) 등을 지냈다.

1644(인조 22)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된 후 승지(承旨)․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49(인조 27)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고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도승지(都承旨)․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쳐 호조․예조․이조․형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59(효종 10) 우의정(右議政)으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시열(宋時烈) 이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의 상소로 사직하게 되자 그 부당성을 지적해서 왕으로 송시열의 사직을 만류케 했고, 대사성(大司成) 서필원(徐必遠)의 이조 참의(吏曹參議) 취임을 반대하여 이를 사임케 했다.

이때 사간원(司諫院)이 서필원을 적극 논구(論救)하자 사의(辭意)를 표명,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청나라에 다녀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죽었다. 청빈(淸貧)을 가훈으로 삼았다.

정제현(鄭齊賢) 시호(諡號)는 효정(孝貞). 조선(朝鮮) 때 부평위(富平尉)를 지냈다.

정제두(鄭齊斗) 1649(인조27)1736(영조12)

()는 사앙(士仰), ()는 하곡(霞谷),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진사 창징(昌徵)의 아들. 한양 출신. 1668(현종 9)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급제했으나 사회의 혼란을 통탄,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을 닦았다. 1680(숙종6)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684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잠시 지내고 다시 사직했다.

그후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명성을 떨쳐 중신(重臣)들의 천거로 30여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숙종(肅宗) 때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호조 참의(戶曹參議)․회양 부사(淮陽府使)․한성부윤(漢城府尹), 경종(景宗) 때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영조(英祖) 때 우찬성(右贊成)․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을 잠시 동안씩 지냈을 뿐 학문에 전 생애를 받쳤다.

처음에는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했으나 이론에만 치우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20여세 때부터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 (陽明學)에 심취(心醉), 당시 학계(學界)에서 이단시(異端視) 당하면 서도 끝까지 이를 연구 발전시켜 우리 나라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했다.

정상인(鄭象仁) 조선조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정호인(鄭好仁) 조선(朝鮮)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문승(鄭文升) 1788(정조12)1875(고종12)

()는 윤지(允之), ()는 미당(美堂)․초천(蕉泉),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판관(判官) 술인(述仁)의 아들. 1810(순조 1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낸 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서화(書畵)에 능했고, 특히 산수화(山水畵)를 잘 그렸다.

정문계(鄭文啓) 1740(영조16)1781(정조 5)

()는 욱재(郁哉),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후손, 대사간(大司諫) 상인(象仁)의 아들. 1762(영조 3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769년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1775년 구현시(求賢試)에 급제, 이듬해 승지(承旨), 이어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낸 뒤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재임 중 죽었다.

정환익(鄭煥翼) 1819(순조 19)?

()는 성의(聖儀), 교리(校理) 도채(度采)의 아들. 1847(헌종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887(고종 24)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이어 대사간(大司諫)․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儀禁府事)․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1902(광무 6)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이르렀다.

정해복(鄭海復) 1858(철종 9)1940

초명(初名)은 재학(在學), ()는 교선(校先), ()는 우곡(又谷). 한말(韓末)에 상주 군수(尙州郡守)를 지낼 때 국운(國運)이 쇠퇴 하고 친일(親日) 풍조가 거세게 파급될 무렵 나라의 경제적(經濟的) 기반을 세우고자 합동 은행(合同銀行)을 설립한 창설자(創設者)이다.

정운경(鄭雲慶) 1861(철종 12)1939

()는 화백(和白), ()는 송운(松雲).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체결되자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크게 활약하였으며 1977년에 대한민국 건국포장(大韓民國建國褒章)과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정주원(鄭周源) 항일(抗日)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1982815일 대한 민국 건국포장(大韓民國建國褒章)이 수여되었다.

정영택(鄭永澤) 1873(고종 10)1947

()는 안립(安立), ()는 원경(原敬). 한말(韓末)에 진성전문학교(晋成專門學校) 교장을 지내고, 1910년 경술(庚戌) 국치(國恥) 후 중국(中國)에 망명하여 독립투사(獨立鬪士)로 활약하였다.

정운기(鄭雲淇) 1875(고종 12)1946

()는 경종(景終), ()는 성남(醒南).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상주(尙州)에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군자금 모금과 의병을 모집하는데 힘써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80815일 대한민국 건국포장(大韓民國建國褒章)이 수여되었다.

<감무공파(監務公派)

정극유(鄭克儒) 고려(高麗) 때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정창우(鄭昌佑) 고려조(高麗朝)에 감무(監務)․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냈다.

정균지(鄭均之) 고려(高麗) 때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정윤(鄭 潤) 고려(高麗) 때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정유(鄭 侑) 고려조(高麗朝)에 종부서령(宗簿署令)을 역임하였다.

정사도(鄭思道) 1318(충숙왕 5)1379(우왕 5)

초명(初名)은 양필(良弼), ()는 사도(思道), ()는 설곡(雪谷)․역정(櫟亭),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종부령(宗簿令) ()의 아들. 1336(충숙왕 복위 5) 문과(文科)에 급제, 1341(충혜왕 복위2)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고, 후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묘를 지켜 이를 가상히 여긴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지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합포(合浦)를 지킬 때 군사(軍事)․민정(民政)에 모두 업적을 남겼으나 최 영(崔 塋)의 제거를 꾀하는 신 돈(辛 旽)에게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후 다시 밀직(密直)에 복직,동북면 상원수 도순문사(東北面上元帥都巡問使)를 거쳐 우왕(禑王)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서연사(知書筵事)․평리상의(評理商議)를 역임, 오천군(烏川君)에 개봉(改封)되고 공신(功臣)이 되었다. 연일(延日)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홍(鄭 洪)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1377(우왕 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정진(鄭 鎭) 1378(우왕 4)1418(태종 18)

시호(諡號)는 단원(端元).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추증, 오천부원군(烏川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정연(鄭 淵) 1389(창왕 1)1444(세종 26)

()는 중심(仲深), ()는 송곡(松谷), 시호(諡號)는 정숙(貞肅), ()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장인. 1405(태종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1414년 지평(持平)을 거쳐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냈다.

1420(세종 2) 장령(掌令)으로 상왕(上王 : 태종)이 철원(鐵原)에 가려는 것을 간()하다가 진산(珍山)에 유배, 뒤에 풀려 나와 1424년 다시 장령(掌令)이 되고, 선공감정(繕工監正)․집의(執義)․동부대언(同副代言)․형조 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했다.

1430(세종 12)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 참판(吏曹參判)․병조 참판(兵曹參判)․인순부윤(仁順府尹)․형조 판서(刑曹判書)․중추원사(中樞院使)․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442년 사은 겸 주문사(謝恩兼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44년 병으로 사직했다.

정효손(鄭孝孫) 조선조(朝鮮朝)에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역임하였다.

정효순(鄭孝順) 조선 때 원평 부사(原平府使)를 역임하였다.

정효강(鄭孝康) 조선 때 지평(持平)․소윤(少尹)․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지병조사(知兵曹事)를 거쳐 1453(단종 1) 형조 참의(刑曹參議) 에 올랐다.

정효완(鄭孝完)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효전(鄭孝全) ?1453(단종 1)

시호(諡號)는 충경(忠景),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의 손자, 판서 진()의 아들. 태종(太宗)의 딸 숙정옹주(淑貞翁主)를 아내로 맞아 1422(세종 4)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으며, 1433(세종 1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0(문종 즉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판서(兵曹判書)․삼군 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 등을 지냈다.

1453(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중신(重臣)을 살해하자 병을 핑계하여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파면, 집에 돌아와 의분을 참지 못하여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듬해 죄를 추론(追論)당한 끝에 부관참 시(剖棺斬屍)되었으며, 성종(成宗) 때 신원(伸寃)되었다.

정자원(鄭自源) 경상 도사(慶尙都事)를 거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다.

정자양(鄭自洋) 1444(세종 26) 형조 좌랑(刑曹佐郞)․충청도 경력(忠淸道經歷)을 지내고, 1457(세조 3)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중추부 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거쳐 1470(성종 1)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정자제(鄭自濟) 시호(諡號)는 위양(威襄). 조선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이르렀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및 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에 추증되었다.

정자숙(鄭自淑) 조선(朝鮮) 때 증손(曾孫)인 정 철(鄭 澈)의 추은(推恩)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추증되었다.

정신석(鄭臣碩)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재직시 1453(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막내 숙부(叔父) 효전(孝全)이 화()를 당하니 이에 연좌되어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정회(鄭 淮) 147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74(성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이르렀다.

정서량(鄭恕良) ()는 자인(子仁). 조선 때 호군(護軍)을 지냈다.

정종남(鄭終男) 조선 때 훈련원 사정(訓鍊院司正)을 역임하였다.

정석례(鄭錫禮) 조선조(朝鮮朝)에 풍천 부사(豊川府使)를 역임하였다.

정기(鄭 沂) 조선(朝鮮)에서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상(鄭 湘) 조선(朝鮮)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다.

정수봉(鄭壽鳳) 조선 때 율포 수군만호(栗浦水軍萬戶)를 역임하였다.

정병(鄭 汴) 조선(朝鮮)에서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정계종(鄭繼宗) 조선(朝鮮) 때 위원 군수(渭原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자(鄭 滋) 1515(중종 10) 1547(명종 2)

()는 민고(敏古), ()는 청사(淸莎), 판관(判官) 유침(惟沉)의 아들, 우의정(右議政) ()의 형. 1540(중종 35)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1544년 정언(正言)이 되고, 1545(명종 즉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인 윤임(尹任) 의 처남이라 하여 소윤(少尹)에 의해 광양(光陽)에 안치(安置),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다시 죄가 가중되어 경원(慶源)으로 이배(移配)되던 도중에 죽었다. 선조(宣祖) 때 신원(伸寃)되었다.

정소(鄭 沼) ()는 중함(仲涵), ()는 청사(菁莎)․휴암(鵂巖), ()의 동생. 모재(慕齎)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1545(인종1) 을 사사화(乙巳士禍) 때 형() (: 정랑공)가 죄없이 화를 당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순천(順天)에 은거하였으며, 승평사현(昇平四賢)인 배 숙(裵 璹)․정사익(鄭思翊)․정 소(鄭 沼) 중에 학문과 덕행에 으뜸이리고 세인(世人)들이 칭찬하였다.

정황(鄭 滉) ()는 숙함(叔涵). 조선(朝鮮)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김제(金提)․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낸 후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에 올랐다.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후에 아들 승명(升溟)의 추은(推恩)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경(鄭 瓊) ()는 언진(彦珍). ()는 율재(栗齎). 조광조(趙光祖)․김 정(金 淨)의 문인. 조선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이조 조랑(吏曹佐郞)에 천거된 후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고 그의 청렴 결백함이 중국(中國)에 까지 알려져 천조(天朝)로부터 금대수영(今帶綉纓)을 받았으며 기묘사화 (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향리(鄕里)에 내려가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언호(鄭彦浩) ?1531(중종 26)

()는 호호(浩浩), ()의 아들. 1520(중종 1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되고, 이듬해 홍문관 저작(著作)을 거쳐 박사(博士)․전한(典翰) 등을 역임했다. 1524년 정언(正言)․수찬(修撰)이 되고 다음해 평안도 암행어사(平安 道暗行御史), 이어 교리(敎理)․지평(持平)을 지냈다. 1527년 검상(檢詳)․사인(舍人), 다음에 문학(文學). 시강관(侍講官)을 거쳐 1530년 사간(司諫)․집의(執義)에 이르렀다.

정완(鄭 浣) 1473(성종 4)1521(중종 16)

()는 신지(新之), ()는 겸재(謙齋), 병조 판서 연()의 증손, ()의 아들. 1507(중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고, 1514(중종 9) 능참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518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공조․호조의 정랑(正郞)을 지냈다.

이듬해 현랑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이조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가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때 현풍(玄風)에 부처(付處)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정철(鄭 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

()는 계함(季涵), ()는 송강(松江). 시호(諡號)는 문청(文淸), 판관(判官) 유침(惟沈)의 아들.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양응정(梁應鼎)의 문인.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 때문에 궁중에 출입, 어린 경원대원(慶原大君 : 명종)과 친숙해 졌다.

1545(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一族)으로서 아버지가 유배(流配)당할 때 배소(配所)에 따라 다녔다. 1551(명종 6) 특사되어 온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령(昌平)으로 이주, 여기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동안 수학하는 동안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碩學)들에게 사사(師事), 이 이(李 珥)․성 혼(成 渾) 등과도 교유했다.

1561(명종 16) 진사시(進士試), 다음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장원, 지평(持平)․전적(典籍) 등을 역임, 1566(명종 21) 직강 (直講)․헌납(獻納)․지평(持平)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를 지낸 뒤 이 이(李 珥)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68(선조 1) 수찬(修撰)․교리(敎理)를 거쳐 다시 지평(持平)이되었고, 1575(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사간(司諫)․집의(執義)․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 수(李 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선조 13)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등용 그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면서 지방장관 으로서 보다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그의 천재적 재질(才質)을 나타낸 작품을 썼다.

그의 최초의 가사(歌辭) 「관동별곡(關東別曲)」은 금강산(金剛山)을 비롯한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 하고 또한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이며「훈민가(訓民歌)16 수는 백성을 교화(敎化)함에 있어 포고문이나 유신문을 대신하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어 지은 것이다.

1583(선조 16)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고, 이어 형조와 예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58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 (論斥)으로 다음해 사직,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가사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어 정여림(鄭汝立)의 모반사건(謨反事件)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들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적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 진주(晉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일본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 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大家)로서 시조(時調)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 시사사상(詩歌史上) 쌍벽(雙壁)으로 일컬어진다. 죽은 후에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609(광해군 1) 신원(伸寃)되고, 1623(인조 1) 관작이 복구되었다.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정종명(鄭宗溟) 1565(명종 20)1626(인조 4)

()는 사조(士朝), ()는 화곡(華谷), 송강(松江) ()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1590(선조 23) 진사(進士)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1594년 아버지의 죄가 추론(推論)되자 이를 항변하다가 삭출(削黜), 1623년 인종반정(仁祖反正)으로 직강(直講)에 보직되고 보덕(輔德)을 거쳐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어 임지에 죽었다

정홍명(鄭弘溟) ()는 자용(子容), ()는 기암(畸庵)․삼치(三癡),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1616(광해군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이 되고 정언(正 言)․헌납(獻納)․지평(持平)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이어 이조 정랑으로 승진했다.

이듬해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된 역대의 실록(實錄) 재간(再刊)에 참여했으며, 부교리(副敎理)를 거쳐 1607년 다시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초 지령(持平)으로 임숙영(任叔英)의 과방(科榜) 삭탈을 반대, 여러 번 직간(直諫)했다. 1611(광해군 3) 집의(執議)․사간(司諫) 등을 지내고 겸보덕(兼輔德)․사인(舍人)․전한(典翰)을 역임, 1613년 승지(承旨)가 되었다.

1616년「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 1618년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어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쳐 1621년 황연도 관찰사(黃延道觀察使)가 되었으며, 뒤에 강원도와 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도승지 (都承旨)로서 광해군(光海君) 때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던 연흥부인(延興夫人)을 모시고 돌아와 인목대비(仁穆大妃)로부터 보검(寶劍)을 상으로 받았다. 1624 (인조 2)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서 도꾸가와(德川家光)의 습위식(襲位式)에 참가, 이듬해 포로로 잡혀갔던 146명을 데리고 돌아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랐다.

정담(鄭 湛)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헌납(獻納)을 지냈다.

정수(鄭 洙)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눌(鄭 訥)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시성(鄭始成)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시대(鄭始大) 조선(朝鮮)에서 목사(牧使)를지냈다.

정도성(鄭道成)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지냈다.

정양(鄭 瀁) ?1668(현종 9)

()는 안숙(晏淑), ()는 부익(孚翼)․경외(敬畏)․외근(畏近)․포옹(抱翁), 시호(諡號)는 정절(貞節), 문절(文節)로 개시, ()의 손자.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사림(士林)으로서 난을 피하여 강호(江華)에 갔으나 강화성이 적군에게 함락당하자 자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동몽교관(童夢敎官)에 기용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광 흥창 주부(廣興倉主簿)․수은 판관(水運判官) 등을 거친 뒤 지방 수령으로 나가서 치적(治績)을 올렸고, 1662(현종 3)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송시열(宋時烈)․유 계(兪 棨) 등과 가까이 지냈고「어록해(語 錄解)」를 증수 간행(增修刊行)했다.

정존(鄭 洊) 1659(효종 10)1724(경종 4)

()는 장원(長源), ()는 첨의당(瞻依堂), 송강(松江) ()의 현손(玄孫), 보연(普衍)의 아들. 외숙(外叔) 민정중(閔鼎重)에게 학문을 배우고, 1684(숙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기사환국 (己巳煥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廢位)되자 문과(文科)를 단념,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 문학을 닦았다.

송시열이 유배당하자 배소(配所)에까지 따라가 모셨으며, 1696(숙종 22) 장령전 참봉(長寧殿參奉)이 되고, 이어 동몽교관 (童蒙敎官)․영춘 현감(永春縣監)․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금천 현감(衿川縣監)에 이르렀다.

정식(鄭 拭) 1664(현종 5)1719(숙종 45)

()는 경숙(敬叔), 정언(正言) 도성(道成)의 아들. 1687(숙종13) 진사(進士)가되고, 169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1704(숙종 30) 정언(正言)으로 노론(老論)의 거두인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頤命)을 탄핵하다 파직되었다.

이듬해 문학(文學)으로 등용, 안핵어사(按覈御史)를 거쳐, 수찬(修撰)․교리(敎理)를 역임, 1716년 응교(應敎)로「가례원류(家禮源流)」서문(序文)에서 소론(少論)의 영수인 윤 증(尹 拯)을 비난한 권상하 (權尙夏)를 논척(論斥)하여 파면시켰으며, 승지(承旨)를 지낸 후 1719년 현신(賢臣)들을 무고한 혐의로 원주(原州)에 유배, 적소(適所)에서 죽었다.

정수기(鄭壽期) 1664(현종 5)1752(영조 22)

()는 순년(舜年),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인빈(寅賓)의 아들.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699(숙종 25) 36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13년 사서(司書)가 되고 대사간(大司諫)․개성부 유수(開城府劉守) 등을 역임한 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정해(鄭 楷)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부윤(府尹)을 지냈다.

정택하(鄭宅河) 1693(숙종 19)1741(영조 17)

()는 자중(子中), (氵戢)의 아들. 현감(縣監) ()에게 입양(入養). 1715(숙종 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고 설서(設書)․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거쳐 헌납(獻納)에 올랐다.

1721(경종 1) 노론(老論)으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파직되고 1724(영조 즉위) 다시 헌납(獻納)에 기용되어 사간(司諫)에 올랐 다가 1727(영조 3) 정미환국(丁未煥局)으로 소론(少論)이 등용되자 파직, 1729년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 1731(영조 7) 풀려 나와 승지(承旨)로 동래 접위사(東萊接慰使)를 겸직하고, 이어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지냈다.

정광제(鄭匡濟) 1688(숙종 14)?

()는 정숙(正叔), 상길(相吉)의 아들. 1717(숙종 4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정언(正言) 등을 지내고, 1725(영조 1) 장령(掌令)으로서 재결(災結)에 대한 수령(守令)들의 부정(不正)의 엄금과 백골징포(白骨徵布)의 시정을 상 소했다. 1747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정익하(鄭益河) 조선조(朝鮮朝)에 형조 판서(形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홍제(鄭弘濟) 조선(朝鮮)에서 부윤(府尹)을역임하였다.

정호(鄭 澔) 1648(인조 26)1736(영조 12)

()는 중순(仲淳), ()는 장암(丈巖),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좌의정(左議政) ()의 현손, 감찰(監察) 경연(慶演)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2(숙종 8) 생원(生員)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언(正言)을 지 내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煥局)으로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 다가 이어서 경성(鏡瑆)에 유배되었다.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기용될 때 풀려 나와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敎理) 등을 역임. 1698년 집의(執義)․사간(司諫)을 거쳐, 이듬해 동래 부사(洞萊府使)로 나갔다가 1700년 신은(新銀) 12만 냥의 취급 부주의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기용되어 광주부윤(廣州府尹)에 등용, 1702년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 1704년 함경도 관찰사 등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1713년 대사성(大司成)에 재임되어 송시열의 묘정(廟庭) 배향(配享)을 건의했고, 1715년 부제학으로서 유 계(兪 棨)의 유저(遺著)「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에 소론(少論) 윤 증(尹 拯)이 스승 송시열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했다는 내용을 썼다가 파직되었다.

이 사건으로 노론․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었으나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서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노소유고(魯西遺稿)」가 간행되자 효종(孝宗)을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毁板),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追奪)케 했다.

1717(숙종 43) 세자(世子 : 경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의 건의,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케 했고, 다음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1721(경종 1)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서「숙종실록(肅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莘壬士禍)로 파직되어 강진(康津)에 유배당했다.

1725(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 나와 우의정에 특진, 신임 사화로 사사(賜死)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누차 상호했으며,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했다. 송시열 문하의 뛰어난 학자로 일생을 노론으 선봉으로 활약했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모두 솜씨가 있었다. 충주(忠州)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우량(鄭羽良) 1692(숙종 18)1754(영조 30)

()는 자휘(子翬), ()는 학남(鶴南),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판서(判書) 수기(壽期)의 아들, 좌의정(左議政) 휘량(翬良)의 형. 1723(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28(영조 4) 왕의 교서(敎書)를 지어 이를 한글로 번역, 각도에 반포했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임, 왕에게 주청하여 이 황(李 滉)․이 이(李 珥) 등의 문집(文集)을 간행했다.

지평(持平)․대사성(大司成)․좌승지(左承旨)․이조 참판(吏曹參判)․좌참찬(左參贊)을 역임, 1749(영조 25)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글씨에 능했다.

정휘량(鄭翬良) 1706(숙종 32)1762(영조 38)

()는 자우(子羽)․사서(士瑞), ()는 남애(南崖),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수기(壽期)의 아들, 우의정(右議政) 우량(羽良)의 동생. 1733(영조 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3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시독관(侍讀官)․응교(應敎)를 지냈다.

1755(영조 31)「천의소감(闡義昭鑑)」찬집당상(贊輯堂上)이 되었으며, 이듬해 제학(提學)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그후 호조․공조․이조․병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로 나갔다가 1761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왕의 탕평책(蕩平策)을 반대, 소론(少論)의 제거를 주장한 사직,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한직(閑職)에 전직했다.

정실(鄭 宲) 1701(숙종 27)1776(정조 즉위)

()는 공화(公華), ()는 염재(念齋),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송강(松江) ()의 후손, 순하(舜河)의 아들. 이 재(李 縡)의 문인. 충주(忠州) 출신. 1733(영조 9)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1739년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리(敎理)․장령(掌令)․정언(正言)을 거쳐 1748년 세자시강원 보덕(世自侍講院輔德). 응교(應敎). 필선(弼善), 1756년 안동 부사(安東府使), 1761년 좌유선(左諭善). 이듬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764(영조 40) 강화부 유수(江華府劉守)에 이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대제학(大提學)․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767년 호조 판서(戶曹判書)․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 1768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770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하언(鄭夏彦) 1702(숙종 28)1769(영조 45)

()는 미중(美仲), ()는 지당(止當). 옥호자(玉壺子), 목사(牧使) ()의 아들. 1735(영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42년 경상도의 양곡을 중앙으로 운반할 때 경상도 도사 (慶尙道都事)로서 특히 진휼사 종사관(賑恤使從事官)에 선발되어 양 곡 운반에 종사하다가 감진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와의 의견 충돌로 싸워 파직을 당했다.

이듬해 기용되어 사관(史官)이 되고, 천집랑(贊輯郞)으로「속대전(續大典)」의 편찬에 참여했다. 정언(正言)․헌납(獻納)․장령(掌令) 을 거쳐 1747년 의주부유(義州府尹)이 되고,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어 1763(영조 39) 병조 참의(兵曹參議), 뒤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흥화문(弘化門)의 액()을 썼다.

정후겸(鄭厚謙) 1749(영조 25)1776(정조 즉 위)

()는 백익(伯益), 석달(錫達)의 아들. 일성위(日城尉) 치달(致達)에게 입양(入養). 16세 장원 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6(영조4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수찬(修撰)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副敎理). 지평(持平)을 역임, 176820세에 승지(承旨)가 되었고 이듬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호조 참의(戶曹參議). 호조와 공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정방(鄭 枋)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원달(鄭遠達) 조선(朝鮮)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민하(鄭敏河) ()는 달부(達夫), ()는 소은(蕭隱). 가은(歌隱). ()5대손. 1717(숙종 43) 전라도 유생을 이끌고 상경, 소두 (疎頭)로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상호했다. 1746(영조 22)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계속 학문에 전심하다가 80세에 노인직(老人職)으로 오위장(五衛將)․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84세로 죽었다. 창평(昌平)의 지곡사(智谷詞)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이환(鄭履煥) 조선조(朝鮮朝)에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정일겸(鄭日謙) 조선(朝鮮)에서 승지(承旨)를 지냈다.

정의달(鄭義達) 조선(朝鮮) 때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정기원(鄭岐源) 1809(순조 9)?

()는 봉수(鳳叟), 시호(諡號)는 장숙(莊肅), 태락(台樂)의 아들.1849(철종 즉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1851 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1859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1870년 어영대장(御營大將)․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진무사(鎭撫使)로 강화(江華)에 부임하여 강화 손돌목에 침입한 미군 함대의 불법 행위를 항의, 통상교섭을 거절했고, 이어 미군이 무력으로 광성진(工城津)에 쳐들어오자 중군(中軍) 어재연(漁在淵) 등의 군사를 독려하여 이를 수비케 했다(辛未洋擾). 그 후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이르렀다.

정유(鄭 瑬) 1801(순조 1)1864(고종 1)

()는 공려(公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재수(在洙)의 아들. 1831(순조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崇文院副正子)가 되고 이어 효릉 별검(孝陵別檢)을 거쳐 1835 (헌종 10)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 수찬(弘文館水撰)․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850(철종 1)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청나라에다녀와서 사복시정(司僕寺正)․부응교(副應敎)․집의(執義)․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역임한 후 부모 봉양을 위해 광양 현감(光陽縣監)으로 부임했다가 부승지(副承旨)․대사간을 거쳐 1864(고종 1) 부총관(副摠管)이 되고 이어 공조 참판(工曹參判)․대사간(大司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했다.

정경원(鄭競源) 1841(헌종 7)?

()는 염조(念祖), 해안(海晏)의 아들. 충주(忠州)출신. 1890(고종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93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가 되어 육영공원 참리(育英公院參理)를 겸하고, 이듬해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자 회의원(會議員)에 선출되고 이어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법무 협판 (法務協辦)이 되었다.

이해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자 충청도 선무사(忠淸道宣撫使)로 나갔다가 청풍(淸風)에서 한때 동학군에게 체포되었으며, 1895년 평양부 관찰사(平壤府觀察使)가되었다.

정재건(鄭在建) 1843(헌종 9)1910(융희 4)

()는 계주(啓周), ()는 소송(小松). 옥과(玉果) 출신. 1888(고종 2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 1892년 부사과 (副司果)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이듬해 지평(持平)을 지냈다.

1894(고종 31)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 고향에서 학문을 닦다가 옥과(玉果). 곡성(谷城)이 합군되어 향교(鄕校)가 폐쇄되자 군내 유생들을 모아 반대하는 상소를 했으나 실패했다. 1910(융희 4)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