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서산정씨시조(瑞山鄭氏),정신보(鄭臣保),서산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2 08:41 수정일 : 2018-02-19 11:04

시 조

서산정씨시조(瑞山鄭氏)는 송(宋)나라에서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정신보(鄭臣保)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원래 중국(中國) 절강(浙江) 사람으로 증조부(曾祖父)인 응충(應冲)이 송(宋)나라에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아버지인 수거(秀琚)는 원외랑(員外郞)을 지냈다 한다.

송(宋)나라가 망(亡)하자 신보(臣保)가 바다를 건너 고려로 망명(亡命)하여 서산(瑞山)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된 것이 서산 정씨의 시초이다.


본관의 유래

신보(臣保)의 아들 인경(仁卿)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장군(大將軍)․상장군(上將軍)․서경유수(西京留守)․첨의중찬(僉議中贊) 등을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1274년(원종 15)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올랐으며, 그의 고향인 부성현(富城縣)이 서주군(瑞州郡)으로 승격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시조(始祖)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서산(瑞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서산(瑞山)은 충청남도 서북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인데 통일신라 때 부성군(富城郡)이라 하였으며 1284년(충렬왕 10)에 서산군으로 개칭하였다. 1308년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하고 1310년(충선왕 2) 서령부(瑞寧府)가 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서산(瑞山)으로 복명하고 군(郡)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913년 태안(泰安)․해미(海美)를 서산에 통합하여 서산군으로 칭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인경(仁卿)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는데, 그중 장남 신유(信柔)가 상서(尙書)를 지냈고, 차남 신화(信和)는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여 전의령(典醫令)을 역임한 동생 신영(信英)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인경(仁卿)의 8세손 희(僖)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글을 배워 연산군(燕山君) 때 과거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曾孫) 인홍(仁弘)은 조 식(曺 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항전(抗戰)하였는데, 류성룡(柳成龍)이 실각되자 정권(政權)을 장악하여 대사헌(大司憲), 우․좌의정(右․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 외 군자감(軍資監)을 역임한 근승(瑾昇)과 판관(判官)을 지낸 사용(士鎔)이 뛰어났고, 의열(義烈)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산정씨(瑞山鄭氏)는 남한(南韓)에 18,61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서산정씨조상인물

정인경(鄭仁卿) 1267(원종 8)~1305(충렬왕 31)

시호(諡號)는 양렬(襄烈), 신보(臣保)의 아들. 고종 말 몽고군이 침입하여 직산(稷山)․신창(新昌) 등지에 주둔하자 야습(夜襲)으로 전공을 세워 제교(諸校)가 되었다.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 때 호종(扈從)했고, 1269년(원종 10) 세자가 귀국하여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 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옹립한 사실을 보고하여 세자로 하여금 다시 원나라에 가게 했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2등공신에 오르고, 고향 부성현(富城縣)이 서주군으로 승격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장군(將軍)으로서 성절부사(聖節副使), 이듬해 정조부사(正朝副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고 1282년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서 요동(遼東)․심양(瀋陽)에 파견되어 백성을 추쇄(推刷)했고 이듬해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요양(遼陽)․북경(北京)에 가서 유민(流民)을 추쇄했다.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가 동녕부(東寧府)를 폐하고 제성(諸城)을 고려에 돌려 줄 때 공을 세워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서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서경 유수(西京留守)가 되었다. 이해 합단(哈丹)의 침입 때는 서경을 버리고 도망해 왔으며, 1292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몽고에 동녀(童女)를 바치기 위한 처녀 금혼령(禁婚令)을 위반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

1299년(충렬왕 25)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중찬(中贊)으로 은퇴했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추성정책안사공신(推誠定策安社功臣)이 되었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정직하여 원나 라 황제로부터 일찍이 무덕장군․정동성 이문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정신유(鄭信柔)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정신영(鄭信英) 고려(高麗)에서 전의령(典醫令)을 지냈다.

정세충(鄭世忠) 고려(高麗) 때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하였다.

정달한(鄭達漢) 고려조(高麗朝)에 수랑장(首郞將)을 지냈다.

정도(鄭 壔) 고려(高麗)에서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정순(鄭 珣) 조선조(朝鮮朝)에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정윤홍(鄭允弘) 조선(朝鮮) 때 군기부정(軍器副正)을 지냈다.

정윤장(鄭允壯) 조선(朝鮮)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정계소(鄭繼韶)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정돈례(鄭敦禮) 조선조에 직장(直長)을 지냈다.

정사인(鄭斯仁)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사신(鄭斯信) 조선(朝鮮)에서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정이검(鄭而儉)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이득(鄭而得) 자(字)는 허경(虛卿). 조선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정방형(鄭邦衡)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 하였다.

정성량(鄭成良)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주(鄭 儔)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성검(鄭成儉)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현(鄭 俔) 조선조에 지평(持平)을 지냈다.

정언좌(鄭彦佐)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정내언(鄭耐言) 조선(朝鮮)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정천언(鄭踐言)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희(鄭 僖)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종하(鄭從夏) 조선(朝鮮)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정희호(鄭希濩) 조선(朝鮮)시대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세충(鄭世冲)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 임하였다.

정진남(鄭振南) 자(字)는 여붕(汝鵬). 조선조(朝鮮朝)에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정민구(鄭敏求) 자(字)는 경달(景達), 호(號)는 묵재(黙齋). 조선(朝鮮)때 현감(縣監) 을 지냈다.

정희렴(鄭希廉) 자(字)는 이간(以簡). 조선(朝鮮)에서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정섬(鄭 暹) 자(字)는 오암(汚庵). 조선(朝鮮)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정임룡(鄭霖龍) 자(字)는 시원(施遠).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정제룡(鄭霽龍) 자(字)는 영호(瀅湖). 조선(朝鮮)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몽설(鄭夢說) 자(字)는 천뢰(天賚), 호(號)는 죽림(竹林). 조선(朝鮮)에서 장군(將軍) 을 역임하였다.

정수(鄭 琇)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 軍)을 지냈다.

정양(鄭 瀼) 자(字)는 사연(士淵). 조선(朝鮮)에서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옥(鄭 沃) 자(字)는 여계(汝啓), 시호(諡號)는 삼옥당(三玉堂). 조선(朝鮮)에서 진사(進士)를 지냈다.

정준(鄭 梭)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인홍(鄭仁弘) 1535(중종 30)~1623(인조 1)

자(字)는 덕원(德遠), 호(號)는 내암(萊菴), 건(健)의 아들. 조 식(曺 植)의 문인.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육품직(六品職) 을 받고, 1575년 황간 현감(黃澗縣監)에 발탁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듬해 지평(持平)을 거쳐 1581년 장령(掌令)에 승진, 이해 서인(西人) 정 철(鄭 澈)․윤두수(尹斗壽)를 탄핵하다 해직(解職)당하고 낙향했다.

1592년(선조 25)에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陜川)에서 김 면(金 沔)과 의병을 모집, 성주(星州)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물리쳤고, 10월 영남 의병장(嶺南義兵將)의 호(號)를 받았다. 이듬해 의병 3천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咸安) 등지를 방어했으며 1602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 事)․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내고, 서인인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사직케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北人)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소북(小北)․대북(大北)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솔했으며, 1601년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해 그는 광해군(光海君)의 즉위를 주장했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讓位)코자 할 때 류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했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이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가던 도중 풀려 나와 대사헌(大司憲)에 기용되어 소북 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한 후, 좌참찬(左參贊)에 특진되고 서인을 두둔했다 하여 거유(巨儒) 이언적(李彦迪)․이 황(李 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청금록(靑衿錄 : 儒 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분란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듬해 이이첨과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폐한 뒤 증살(蒸殺)시키게 했고, 이해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161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참형(斬刑)되고 가산이 적몰 (籍沒) 당했으며 이후 대북은 정계에서 몰락했다.

정인영(鄭仁榮) 자(字)는 덕현(德顯).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정인기(鄭仁耆) 자(字)는 덕수(德綏), 호(號) 는 문암(文庵).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정연(鄭 沇) 자(字)는 영보(榮甫). 조선조(朝鮮朝)에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정엄(鄭 渰) 자(字)는 운수(雲叟).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차주(鄭次周) 자(字)는 희중(姬仲). 조선(朝鮮) 때 효성이 지극한 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정인함(鄭仁涵)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월헌(月軒). 조선조(朝鮮朝)에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정근승(鄭瑾昇) 자(字)는 여백(汝伯). 조선(朝鮮) 때 군자감(軍資監)을 역임하였다.

정사용(鄭士鎔) 자(字)는 군정(君精), 호(號)는 행정(杏亭). 조선조(朝鮮朝)에 판관(判官)을 지냈다.

정승룡(鄭升龍) 자(字)는 현중(見仲). 조선에서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화일(鄭華逸)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정의열(鄭義烈) 자(字)는 인수(仁叟).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