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동래정씨,동래정씨시조,동래정씨조상인물,정회문

작성일 : 2017-05-11 20:04 수정일 : 2019-08-29 14:1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斯盧)6부촌장(六部村長)으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下賜) 받았던 취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 정회문(鄭繪文 : 안일 호장)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고려(高麗) 초에 보윤(甫尹)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며,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 세거(定着世居)해 온 동래(東萊)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동래(東萊)는 부산직할시와 경남 양산군의 일부지역을 차지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장산국(萇山國 : 혹은 萊山國)인데 신라 때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고치고 경덕왕(景德王) 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현종(顯宗)때 울주(蔚州 : 울산)에 편입시켰다가 1547(명종 2) ()로 승격시키고 1895(고종 32) 관찰부(觀察府)를 설치, 1896년 부윤(府尹)으로 삼았으며, 1903년 군으로 고쳤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부산부에 딸리고, 부산부에 속하지 않는 구역과 기장군(機張郡) 일원을 병합하여 동래군을 이루었다. 그후 대부분이 부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양산군에 편입됨으로써 동래군의 행정구역명칭은 소멸되었는데, 부산직할시에 편입된 대부분은 동래구에 속해 있다.

씨족사 개관

동래정씨는 온화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家統)을 지켜오면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혀온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부산 양정동 화지산(華池山)에 자리잡은 2(二世) 안일공(安逸公) 정문도(鄭文道) 묘소(墓所)에 대한 명당(明堂)의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오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맏아들 목()이 장지(葬地)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가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지내던 고익호(高益鎬)가 일러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이곳에 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복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목()은 밤을 세워 가면 숨어 지켜 보기로 하였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도깨비들이 나타나 또다시 무덤을 파헤치며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건드려, 적어도 금관을 묻어야 할 곳에....”하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목()은 이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염려 마오, 황금빛 나는 보릿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이오하고는 사라졌다.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하였더니 과연 그 후부터는 무사하였다.

()은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제()․점()․택()․항() 4형제를 두었으며, 목의 아우 선조(先祚)는 호장(戶長)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東萊)와 양산(梁山)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좌복야 목()의 셋째 아들 택()이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재능(才能)으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항()은 숙종(肅宗)때 등과 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한 후 인종(仁宗) 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예부 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다.

인종비(仁宗妃) 공예대후(恭睿大后) 동생의 남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서()는 의종(毅宗) 때 폐신(嬖臣)들의 참소로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亭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歌謠)로 읊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우리 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업적(業績)을 남겼다.

13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던 흠지(欽之)는 양도공(良度公) 양생(良生)의 손자(孫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하여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갑손(甲孫)과 창손(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세종(世宗) 때 독격골(獨擊鶻)로 조정이 두려워하였던 갑손(甲孫)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와 예조 판서(禮曹判書)․좌․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내고 중종(中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필월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그의 성격이 청직(淸直)하고 엄준(嚴峻)하여 자제(子弟)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을 못했다고 한다. 일찍이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가 되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漢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이 발표되었음을 보니 그의 아들 오()가 방에 들었으므로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가 학업에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청렴 강개한 성품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임명한 일이 있었다. 세종(世宗)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 조정에서 매일 정례적으로 행하는 조회)을 받을 때 정승 겸 판서 하 연(河 演)과 이조 판서 최 부(崔 府)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더니 갑손이 왕에게 아뢰기를 최 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 연은 조금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으나 조회가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 흐르듯할 때 갑손이 웃으면서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하며 녹사(錄事)를 불러서 두분이 심히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갑손(甲孫)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世宗) 때 부제학(副堤學)으로 춘추관(春秋舘)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고려사(高麗史)」와「세종실록(世宗實錄)」․「치평요람(治平要覽)」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世祖)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 없소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御座)에서 내려앉았으며 술을 못 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발의 연골(軟骨) 뼈가 붙어 일어설 수 없다고 칭병하여 벼슬을 마다했던 구(: 무안 현감 유의의 아들)18년 동안이나 거짓으로 앉은뱅이 노릇을 한 집념의 선비였다.

그의 아들은 난세에 살면서 간신(奸臣)들과 집념으로 항거하면서 기구하게 일생을 마친 희등(希登)이다. 그가 상처(喪妻)하자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김안로(金安老)가 사위로 맞으려 했으나 평생 홀아비로 살지 그 추문(醜門)에 들지 않겠다.”고 면박을 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구수담(具壽聃)이 간신 진복창을 추천하자 이놈은 간사한 자의 괴수다.”고 막말을 하고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거두어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또한 간신 이 기(李 芑)의 탄핵소를 올리고 이 기 일당에게 정정당당하게 그 사실을 고하여 적을 삼았으며, 파당의 거장 윤원형(尹元衡)이 그와 더불어 일을 하고자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도 뜯어보지 않고, 죽을지언정 언평(彦平 : 윤형원의 호)과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전갈을 보내어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용기있는 저항으로 뜻있는 선비들의 존망을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용천(龍川)으로 귀양가기 전야에 별세했다.

가족들이 염습(殮襲)할 재력이 없어 시체 옆에서 울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무명 3백여 자()를 가지고 와서 염습을 하고는 우리가 누구냐고 묻지 말아달라면서 돌아갔고, 영남(嶺南)에서도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백여 명의 선비가 올라와 부조(扶助)만을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직제학(直提學) ()의 아들이 성종조(成宗朝)의 명신(名臣) 난종(蘭宗)이다.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활달하여 일찍부터 세조(世祖)의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세조가 주역(周易)과 원각경(圓覺經)의 우열을 물으니, 세조가 독신하는 임금인 줄 알면서도, “불교의 요사스런 글을 어찌「삼성경(三聖經)」과 비교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세조가 크게 노하여 역사(力士)를 시켜 잡아매어 매질하게 하였으나 난종은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하므로 기가 질려 그만 두었다고 한다.

난종의 아들이 중종조(中宗朝)의 명상(名相) 광필(光弼)이다. 안 당(安 瑭)․김 정(金 淨)․조광조(趙光祖)․김 식(金 湜) 등과 더불어 <팔현(八賢)>으로 일컬어졌던 광필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연산군(燕山君)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기 시작하여 삼흉(三兇 : 조선 중종 때 전권 횡자하다가 사사된 김안로․허 항․채무택의 세사람)에 거슬려 관력의 절반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재기용되었을 때 육식(肉食)을 금하고, “전 임금의 생사를 모르는 처지에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여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회덕현(懷德縣)에 내려가 있었는데, 불의에 금오랑(金吾郞)이 달려들자 사사(賜死)되는 줄 알고 온 집안이 모두 놀래고 두려워 우는데도 광필은 변색도 없이 장기를 두면서 치우지 않았다. 금오랑이 전하기를 감형(減刑)되어 김해(金海)로 귀양보낸다 하니 광필은 임금의 은혜가 지극합니다.”하며 머리를 조아렸고, 김해로 귀양가는 길에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당적보(黨籍譜)」에 전한다.

 

훼방이 산같이 쌓였으나 마침내 용서받았네

이세에 임금 은혜에 보답할 길 없구나.

열번 높은 고개를 넘는데 두줄기 눈물이요.

세 번 장강(長江)을 건너면서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엔 구름이 먹을 뿜고

망망한 들판에는 비가 항아리를 쏟는 듯 하네

저물게 바닷가 동쪽 성밖에 다다르니 초가집이 쓸쓸한데

대나무로 문을 삼았고녀

 

서울 중구 회현동 114번지는 동래 정씨의 옛 기지(基地)였다고 한다. 이곳은 문익공 광필이 살던 터로 약 400여 년간 자자손손(子子孫孫)이 대를 이어 지켜 왔던 유서 깊은 곳이다.

어느 날 광필의 꿈에 선인(仙人)이 나타나 집앞 은행나무에 열두 개의 서각대(犀角帶)를 걸어 놓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후 광필의 손자 유길(惟吉), 증손 창연(昌衍), 현손 태화(太和) 등 열두 명의 상신(相臣)이 배출되어 동래 정씨의 화려한 명맥(名脈)을 이루었다.

광필의 손자 유길(維吉)은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시()에 능했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유길의 아들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창연(昌衍)은 광해군(光海君)의 비()인 류씨(柳氏)가 그의 생질녀였기에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공정한 마음으로 억울하게 옥사(獄事)에 관련되었던 많은 선비를 구해주면서도 본인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창연의 아들로<삼세호당(三世湖堂)> 이라 우러름을 받았던 광성(廣城)과 광경(廣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광성의 아들 태화(太和)는 효종(孝宗)과 현종조(顯宗朝)에서 영의정을 지내며 현상(賢相)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조(朝鮮朝)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현관(名臣賢官)을 배출해낸 동래 정씨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더불어 <삼대상신가문(三大相臣家門)>으로 유명을 떨쳤으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忠義烈士)가 배출되어 도덕과 학문이 뛰어났던 석학(碩學)들과 함께 명문 동래 정씨의 가통(家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래정씨는 남한에 474,5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 대 인 물

정문도(鄭文道) 고려(高麗)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정목(鄭 穆)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문도(文道)의 아들. 고려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정택(鄭 澤) 고려(高麗)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정항(鄭 沆) 1080(문종 34)1136(인종 14) 자(字)는 자림(子臨),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좌복야(左僕射) 목(穆)의 아들,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상주사록(尙州司錄)․ 직한림(直翰林)을 거쳐 예종(睿宗) 때 내시(內侍)로서 주사(奏事)를 맡아보았다. 우정언(右正言)으로 있을 때 직언을 자주하여 중신(重臣)들의 시기를 받아 전주 통판(全州通判)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우사간(右司諫)에 승진, 양광도(楊廣道)․충청도(忠淸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 인종(仁宗) 때 권신 이자겸(李資謙)에게 아부하지 않았고, 이자겸이 실각(失脚)한 뒤 추밀원승선(樞密院承宣)을 거쳐 지주사(知奏事)가 되었다.

1129(인종 7) 묘청(妙淸)의 말을 신임한 인종이 서경(西京)에 머무르자 이를 극간(極諫)하여 개성으로 돌아오게 했고, 1136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예부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이튿날 죽었다.

정서(鄭 叙) 호는 과정(瓜亭),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의 아들. 음보(蔭補)로 내시 낭중(內侍郎中)에 이르렀고, 공예대후(恭睿大后 : 인종비) 여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1151(의종 5) 폐신(嬖臣) 정 함(鄭 諴)․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고향 동래(東萊)에 장류(杖流)될 때 의종으로부터 곧 소명(召命)을 내리겠다는 약속를 받았다. 그 후 오래도록 소명이 없자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歌謠)로 읊었다. 이를「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 「삼진작(三眞勺)」이라 했고 후세 사람들은「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고 이름지었다. 1170(의종 24) 용서를 받고 다시 기용되었다. 묵죽화(墨竹畵)에 능했다.

정호(鄭 瑚) 고려(高麗) 때 봉산군(蓬山君)에 봉해졌다.

정양생(鄭良生) ()는 우곡(愚谷), 시호(諡號)는 양도(良度). 고려조(高麗朝)에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내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정구(鄭 矩) 1350(충정왕 2)1418(태종 18) 자(字)는 중상(仲常), 호(號)는 운학재(雲壑齋), 시호(諡號)는 정절(靖節), 감찰대부(監察大夫) 양생(良生)의 아들. 1377(우왕 3) 문과(文科)에 급제,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394(태조 3) 왕명으로 한이(韓 理)․조서(曺 庶)․권홍(權 弘)․변혼(卞 渾) 등과 함께「법화경(法華經)4()를 금니(金泥)로 썼고, 1397(태조 6)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정안군(靖安君 : 태종)의 막료로서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겸 상서소윤(尙書少尹)을 지냈다.

정종 때 도승진(都承旨)․대사헌(大司憲), 태종 때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를 거쳐 중군총제(中軍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공조 판서(工曹判書)․호조 판서(戶曹判書)․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계림부윤(雞林府尹)․개성 유후(開城留後) 등을 역임했다.

1417(태종 17)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 태조(太祖) 때 만든 각궁(角弓)을 수입해 왔고, 그 뒤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이 되었으나 풍질(風疾)로 사퇴했다. 예서(隸書)․초서(草書)․전서(篆書)를 잘 썼으며 인품이 청렴했다.

정곤(鄭 坤) ()는 복재(復齋). 이 색(李 穡)의 문인. 문과에 급제한 후 조선 때 대사성(大司成)․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다.

정흠지(鄭欽之) 1378(우왕 4)1439(세종 21) 자(字)는 요좌(堯佐),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감찰대부(監察大夫) 양생(良生)의 손자, 부(符)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음보(蔭補)로 지평(持平)이 되고, 1408년(태종 8) 박은(朴 訔)을 민무질(閔無疾)의 일파라 하여 탄핵하다 장흥(長興)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 나와 141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이조와 병조의 정랑(正郞), 좌헌납(左獻納)을 거쳐 1416년 장령(掌令)이 되었을 때, 좌의정(左議政) 박은과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 擢) 사이에 노비(奴婢) 문제로 송사(訟事)가 생기자 다시 박은을 탄핵, 그의 미움을 받아 파직 당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봉상사 소윤(奉常寺少尹)으로 등용, 이어 집의(執義)․지형조사(知刑曹事)․동부대언(同副代言)․지신사(知申事)․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 1430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며, 1433년 황보인(皇甫仁) 등과 「계축진설(癸丑陣說)」을 찬진(撰進), 이어 충청(忠淸)․전라(全羅) ․경상(慶尙) 삼도 도순무사(三道都巡撫使)가 되어 주군(州郡)의 성() 터를 심정(審定)했다.

1435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부임, 새로 설치된 4()의 수비와 민심 안정에 공헌하고, 1437년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다.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천문(天文)에도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했다.

정복주(鄭復周) ()는 사고(師古), ()는 죽당(竹堂), 판사 원의(元義)의 아들. 1406(태종 6)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사(鄭 賜) 1400(정조 2)1453(단종 1) 현감(縣監) 귀령(龜齡)의 아들. 1420년(세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감찰(監察)․정언(正言)을 거쳐 검상(檢詳)․사인(舍人)․집의(執義) 등을 역임했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고 뒤에 진주 목사(晋州牧師)를 지냈다.

정창손(鄭昌孫) 1402(태종 2)1487(성종 18) 자(字)는 효중(孝中), 중추원사(中樞院使) 흠지(欽之)의 아들.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집현전 저작랑(集賢殿著作郞)․교리(校理)를 역임,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하였다.

1444(세종 26)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재직 중에 최만리(崔萬理)․신석조(辛碩祖)와 함께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 파진,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응교로 복직, 1446년 집의(執義)로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했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다음해 용서되어 직예문관(直藝文館)에 등용되고, 이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 되고, 1449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수사관(修史官)을 겸직,「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치평요람(治平 要覽)」편찬에 참여했으며, 1451(문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대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1453(단종 1) 이조 판서를 거쳐 1455(세조 1) 우찬성(右贊成)으로 좌익2등공신(佐翼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위 김 질(金 礩)에게서 들은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복위 음모를 고변(告變)한 공으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 대사성(大司成)․대제학(大提學) 등을 겸직하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457년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승진, 1462년 세자에게 왕위를 양도하도록 상소했다가 삭직(削職), 여산(礪山)에 부처(付處)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부원군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남이(南怡)․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리어 익대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오르고,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고 1471(성종 2) 좌리2등공신(佐理二等功臣)이 되었으며 70세에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했다가 1485(성종 16) 사직했으며,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官斬屍)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伸寃)․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정수홍(鄭守弘) ()는 의백(毅伯), ()는 풍천(楓川), 예의 판서(禮儀判書) 가종(可宗)의 아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군읍(郡邑)의 수령(守領)을 역임,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때 집의(執義)․대사간(大司諫), 세종 때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덕행(德行)․문장(文章)으로 이름 높았고, 권 근(權 近)․하윤(河崙)․성석린(成石璘) 등과 친교가 있었다. 전주(全州)의 학천사(鶴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이한(鄭而漢) ?1453(단종 1) 주(賙)의 아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사관 (史官)을 지낸 뒤 1441년 사복시 소윤(司僕寺少尹)으로 도체찰사(都 體察使) 황보인(皇甫仁)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평안도(平安道)․함 길도(咸吉道)의 변방 경계상태와 축성공사(築城工事)를 감독했다.

1443년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으로서 경상도에 파견되어 포로로 있던 왜인(倭人)들을 임으로 석방, 쓰시마도(對馬島)에 송환한 죄로 투옥당한 안숭직(安崇直)을 국문(鞫問)했다. 이듬해 직예문관(直藝文 館)에 오르고 1448(세종 30)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거쳐 1450년 동 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한성부의 축성공사를 감독, 1451(문종 1)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

정갑손(鄭甲孫) ?1451(문종 1) 자(字)는 인중(仁仲), 시호(諡號)는 정절(貞節), 중추원사(中樞院使) 흠지(欽之)의 아들,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감찰(監察)․병조 좌랑(兵曹佐郞)․헌 납(獻納)․지평 (持平) 등을 거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다.

1435년(세종 17) 세종에게 강직한 성격으로 인정받아 좌승지(左承旨)로 발탁된 뒤 지형조사(知刑曹事)․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고, 1438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었다.

1441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더욱 세종의 신임을 받았고, 경기도와 함길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중추원사(中樞院使)․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예조 판서(禮曹判書)․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450(세종 32) 좌참찬(左參贊) 겸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맏딸이 세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소용(昭容 : 내명부 의 정3)이 되었고,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정종(鄭 種) ?1476(성종 7) 자(字)는 묘부(畝夫), 호(號)는 오로재(吾老齋), 시호는 양평(襄平), 좌찬성(左贊成) 구(矩)의 손자. 1442년(세종 24) 무과(武科)에 급제, 1453년(단종 1) 이징옥(李澄玉)의 난 때 종성 판관(種城判官)으로 이를 주살(誅殺), 1등공신에 책록되고, 1461년(세조 7)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7(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다시 공을 세워 적개 3등공신(敵愾三等功臣)으로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충청도 도절제사(忠淸道都節制使)를 거쳐 1471(성종 2)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렀다. 성주(星州)의 반암사(盤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임(鄭 任) ()는 돈화(遯華).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조선 단종(端宗)의 손위(遜位) 6()의 참화(慘禍)를 볼 수 없이 화산(華山)으로 들어가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난손(鄭蘭孫)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정난종(鄭蘭宗) 1433(세종 15)1489(성종 20) 자(字)는 국형(國馨), 호(號)는 허백당(虛白堂), 시호(諡號)는 익혜(翼惠), 진주 목사(晋州牧使) 사(賜)의 아들, 1456년(세조 2)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검열(檢閱)․대교(待敎)․통례문 봉례랑(通禮文奉禮郞)․감찰(監察)․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내고, 1460년(세조 6) 봉교(奉敎)로 정자청(鄭自淸)과 함께 서얼(庶蘖) 출신의 과거응시를 반대했다.

1463년 시강원 문학(侍講院 文學)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 正郞)․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했다. 그 후 좌부승지(左副承旨)․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낸 뒤 등준시(登俊試)에 급제,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오위장(五衛將)을 겸했다.

1467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군정(軍丁)을 모아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전임, 1469(예종 1)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서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1470(성종 1)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고,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호조 참판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3(성종 14)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조 판서공조 판서호조 판 서 등을 지냈다.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초서(草書)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고 촉체(蜀體)에도 뛰어났다.

정괄(鄭 佸) 1435(세종 17)1495(연산군 1) 자(字)는 경회(慶會), 시호(諡號)는 공숙(恭肅), 영의정(領議政) 창손(昌孫)의 아들. 1456년(세조 2)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蔭補)로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이르러 1465년(세조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사예(司藝)․장령(掌令) 거쳐, 1473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어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1477년 황해도 관찰사에 승진, 대사헌이조 판서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병조 판서 등을 역임, 1485년 좌찬성(左贊成)에 특진되고, 1488년 병조 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149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태자(皇太子)의 책봉을 축하, 이듬해 다시 병조 판서를 지내다가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1495(연산군 1) 우의정(右議政)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칠가령(七家嶺)에서 죽었다.

정자당(鄭子堂) ()는 승고(升高), ()는 청송(靑松), ()의 아들. 직산(稷山) 출신. 1488(성종 19) 생원(生員)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연산군(燕山君) 때는 광인(狂人)으로 행세하여 사화(士禍)를 면했으며, 시에 뛰어나고 해학(諧謔)을 즐겼다.

정광필(鄭光弼) 1462(세조 8)1538(중종 33) 자(字)는 사훈(士勛), 호(號)는 수부(守夫),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좌참찬(左參贊) 난종(蘭宗)의 아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고, 부제학(副 提學)․이조 참의 (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을 극간(極諫)하다가 아산(牙山)에 귀양갔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부제학(副提 學)에 복직, 이조 참판(吏曹參判)예조 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 憲)을 거쳐 1510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전라도 도순찰사(全羅道都巡 察使)가 되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수습한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 쳐 1516(중종 11)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 다가 파직,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으나 실권은 좌의정 심 정(沈 貞)에게 있었고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 직되었다. 1537년 총호사(摠護使)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 회능)을 불길한 땅에 만들었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김해(金 海)에 귀양갔다가 이해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왔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에 의해 영의 정으로 추천되었으나, 과거 영의정으로서 조광조를 구하지 못하고, 심 정(沈 貞)의 죄를 바로잡지 못한 위에 희릉(禧陵)의 땅이 나쁜 줄 알면서 그대로 묵인했다는 이유로 중종이 거절했다. 영중추부사(領中 樞府事)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회덕(懷德)의 숭 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제향되었다.

정강(鄭 崗)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광세(鄭光世) 시호(諡號)는 소평(昭平).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 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정광보(鄭光輔) 조선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장령(掌令)에 이 르렀고 연산군(燕山君) 때 직간(直諫)을 하다가 길주(吉州)에 유배되 었으나 중종(中宗) 때 부사(府使)에 올랐다.

정광국(鄭光國)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참의(禮祖參議)를 지냈다.

정전(鄭 筌) 1475(성종 6)1513(중종 8) 자(字)는 자원(子遠), 사직(司直) 원운(元耘)의 아들. 1498(연산군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 (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대교(待 敎) 등을 역임했다.

정충량(鄭忠樑) 1480(성종 11)1523(중종 18) 자(字)는 숙간(叔幹), 시호(諡號)는 염간(廉簡), 이조 판서(吏曹判 書) 광세(光世)의 아들. 1501년(연산군 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06년(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검열(檢閱) 이 되었다.

이어 봉교(奉敎)헌납(獻納)사간(司 諫)을 역임하고 도승지(都承 旨)가 되었다가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화를 당하지 않고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전직,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정구(鄭 球) ()는 대명(大鳴), ()는 괴은(乖隱), 무안 현감 (務安縣監) 유의(有義) 아들. 1501(연산군 7) 진사시(進士試)에 합 격, 1510(중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 閱) 등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가 일어나자 두문불출했다. 이때부터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정응(鄭 譍) 1490(성종 21)1522(중종 17) 자(字)는 응지(譍之), 호(號)는 소우(素愚), 인후(仁厚)의 아들. 1514 년(문종 9) 진사(進士)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자(正字)․오위 사정(五衛司正)을 지내고 1516년 사가독서(賜暇讀 書)한 뒤 경연사경(經筵司經)을 거쳐 이듬해 정언 (正言)으로 있을 때 대사헌(大司憲) 이 행(李 荇)을 탄핵, 면직케 했다.

1519년 승정원(承政院)에 의해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 講)할 능력이 있는 학자로 뽑혔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었으나 이 해 겨울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의 당으로 몰려 부여 (扶餘)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정사룡(鄭士龍) 1491(성종 22)1570(선조 3) 자(字)는 운경(雲卿), 호(號)는 호음(湖陰), 부사(府使) 광보(光輔)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광필(光弼)의 조카. 1509년(중종 4) 생원 (生員) 이 되고,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14년 사가 독서(賜暇讀書)하고, 1516년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로서 문과중시 (文科重試)에 장원, 사간(司諫)을 거쳐, 1523년 부제학(副提學)이 되 고, 153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다녀왔다.

1542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승진, 1544년 공조 판서로 다시 동 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1554(명종 9) 대제학(大提學)이 되 었으나 1558년 과거(科擧)의 시험문제를 응시자(應試者) 신사헌(愼思 獻)에게 누설하여 파직되었다. 이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복직,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가, 1562년 다시 판중추부사에 전 임, 이듬해 이 양(李 樑)이 제거될 때 그 일당이었다 하여 삭직(削 職)당했다. 시문(詩文)음률(音律)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탐 학(貪學)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원(鄭 源) 1495(연산군 1)1546(명종 1) 자(字)는 중원(仲遠), 문화 현감(文化縣監) 유강(有綱)의 아들. 1519 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이해 기 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등용되지 못했다.

이듬해 검열(檢閱)전적(典籍)강릉 훈도(江陵訓導)를 거쳐 공조 (工曹)와 형조(刑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 김안로(金安老)의 배 척을 받아 곤양 군수(昆陽郡守)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 등 외직 (外職)으로 전전하다가 형조 정랑(刑曹正郞)사간(司諫)보덕(輔德) 을 역임했다.

1544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집의(執義)사간(司諫)직제학(直 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내고, 1545(명종 즉위) 대윤(大 尹)으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삭직(削職), 다음해 창성(昌城)에 안 치(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다.

정희등(鄭希登) ?1545(명종 즉위) 자(字)는 원룡(元龍), 시호(諡號)는 의민(毅愍), 종부시 첨정(宗簿寺 僉正) 구(球)의 아들. 1528년(중종 23) 진사(進士)가 되고,1534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상처(喪妻)하자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 한 김안로(金安老)가 사위로 맞으려 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때부터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광흥창수(廣興倉守)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등의 한직(閑職)에 머물러 있다가 김안로 가 쫓겨난 후 교리(校理)수찬(修撰)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역임, 1541(중종 36) 지평 (持平)을 거쳐 필선(弼善)장령(掌令) 등 요직을 지냈다.

1545년 명종의 즉위로 득세한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대윤(大尹)의 윤 임(尹 任)류 관(柳 灌)류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용천(龍川)으로 귀양가던 도중에 죽었다. 선조 때 신 원(伸寃),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철(鄭 哲) 초명(初名)은 철(). 조선 때 감사(監司)를 지냈다.

정욱(鄭 郁) ()는 종주(從周). 152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晋 州)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지내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곤양(昆 陽)에 유배된 후 죽음을 당했다.

정진(鄭 溱) ()는 구유재(九柳齋). 조선 때 현감(縣監)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문집(文集)을 남겼다.

정대년(鄭大年) 1507(중종 2)1578(선조 11) 자(字)는 경로(景老), 호(號)는 사암(思菴), 시호(諡號)는 충정(忠 貞), 전(筌)의 아들. 1531년(중종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3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거쳐 지평(持 平)․장령(掌令)․부교리(副校理)․집의(執義)․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내고, 1542년 감찰(監察)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오르고 우승지(右 承旨)․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했다.

명종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형조 참의(刑曹參議)병조 참의경기도 관찰사호조 참판(戶曹參判)한성부 우윤(漢城府右 尹)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선조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한 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1578(선조 11)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정유길(鄭惟吉) 1515(중종 10)1588(선조 21) 자(字)는 길원(吉元), 호(號)는 임당(林塘)․상덕재(尙德齋), 영의정 (領議政) 광필(光弼)의 손자, 부사(府使) 복겸(福謙)의 아들. 17세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공조 좌랑(工曹佐郞)․정언(正言)․이조 좌 랑(吏曹佐郞)․중추원 도사(中樞院都事)를 지냈다.

1544(중종 39) 이 황(李 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사가독 서(賜暇讀書)했고,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승 진, 대제학(大提學)을 겸하고 얼마 후 이조 판서가 되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다음해 경기도 관찰 사로 나갔고, 1572년 예조 판서공조 판서(工曹判書) 등을 지냈다.

1581(선조 14) 이조 판서에서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명종(明宗) 때 군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이 양(李 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司憲府)의 맹렬한 반대로 사직, 1583년 예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문장시에 모두 능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로서 이름이 높았다.

정사철(鄭師哲) ?1593(선조 26) 자(字)는 계명(季明), 호(號)는 임하(林下), 동평군(東平君) 종(種)의 증손. 정 구(鄭 逑)의 문인. 대구(大丘) 출신. 1570년(선조 3) 사마시 (司馬試)에 합격,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성 리학(性理學)연구에 힘썼다.

서사원(徐思遠)주 유(朱 惟) 등과 교유(交遊)했고, 1592년 임진왜 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관군(官軍)을 도왔다. 대구의 금호서 원(琴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희홍(鄭希弘)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정표(鄭 彪) ()는 각금정(覺今亭). 조선(朝鮮) 때 옥과 현감(玉 果縣監)을 지냈다.

정복시(鄭復始) 1522(중종 17)1595(선조 28) 자(字)는 이건(以健), 호(號)는 계담(桂潭)․계헌(桂軒), 시호(諡號) 는 충정(忠貞), 천문교관(天文敎官) 화(華)의 아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5년(명종 10)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 副正字)가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567년(명종 22) 고부 군수(古阜 郡守), 선조 초 지평(持平)이 되고 이어 호조 참의(戶曹參議)․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고 1592년(선조 25) 은퇴했다. 시문(詩文) 에 뛰어났다.

정지연(鄭芝衍) 1527(중종 22)1583(선조 16) 자(字)는 연지(衍之), 호(號)는 남봉(南峯), 영의정(領議政) 광필(光 弼)의 증손, 정랑(正郞) 유인(惟仁)의 아들. 일찍이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修學), 이어 서경덕(徐敬德)․성제원(成悌元) 등에게 사사(師事), 사림(士林)에 명망이 높았다.

1549(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6(명종 21) 이 황(李 滉)의 추천으로 왕손 사부(王孫師傅)가 되어 하성군(河成君) (: 선조)을 보도(輔導)했으며,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서 1569(선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이조 좌랑(吏曹 佐郞)이 되었다.

이어 지평(持平)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집의(執義) 등을 거 쳐 경연관(經筵官)부응교(副應敎)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낸 뒤 1574년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승지(承旨)가 되고, 1579년 대사헌(大 司憲)을 거쳐 1581년 우의정에 올랐다. 1583(선조 16) 병이 위독해 지자 왕으로부터 후임의 추천을 의뢰받고 이산해(李山海)와 이 이(李 珥)를 천거(薦擧)함으로써 뒷날 이들을 크게 등용케 했다.

정언신(鄭彦信) 1527(중종 22)1591(선조 24) 자(字)는 입부(立夫), 호(號)는 나암(懶庵), 예조 좌랑(禮曹佐郞) 진 (振)의 아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 제, 검열(檢閱)이 되어「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그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헌납(獻納)․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 1583년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찬성(右贊成)으로서 도순찰사 (都巡察使)를 겸하여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 입(申 砬)김시민 (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무관(武官)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했다.

이어 함경도 관찰사로서 북변을 방비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승진, 1589(선조 22)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殘黨)에 대한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 나 서인(西人) 정 철(鄭 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으로부터 정여 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 아 위관을 사직, 이어서 우의정(右議政)도 사퇴했다.

그후 정 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南 海)에 유배되었다가 투옥(投獄),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 되어 갑산(甲山)에 유배,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문경(聞慶)의 소양 사(瀟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유일(鄭惟一) 1533(중종 28)1576(선조 9) 자(字)는 자중(子中), 호(號)는 문봉(文峯), 첨정(僉正) 난원(蘭元)의 증손, 목번(穆蕃)의 아들. 안동(安東) 출신. 권충정(權忠定)에게 학문 을 배우고 이어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 제자 백 가(諸子百家)에 통하고 시부(詩賦)에 뛰어나 당시 명망이 높았다. 1552년(명종 7) 생원(生員)이 되고, 1558(명종 13) 식년문과(式年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진보(眞寶)․예안(禮安)의 현감(縣監), 영천 군수(榮川郡守) 등을 지냈다.

그후 설서(說書)정언(正言)직강(直講)을 거쳐 지평(持平)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 1570(선조 3)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 고, 이듬해 사인(舍人)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명 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한 후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냈다.한중필록(閑中筆錄)」․「관동 록(關東錄)」․「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등을 저술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 안동(安東)의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창연(鄭昌衍) 1552(명조 7)1636(인조 14) 자(字)는 경진(景眞), 호(號)는 수죽(水竹), 좌의정(左議政) 유길(惟 吉)의 아들. 1579년(선조 12)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식년문과(式年 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해 이 조 좌랑(吏曹佐郞)에 특진, 1588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예조 판서(禮曹判書)․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614(광해군 6)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 으나, 이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사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 正)으로 다시 좌의정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 을 하사받았다. 광해군의 비() 류씨(柳氏)가 그의 조카딸이었으므 로 광해군 때 억울하게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구명(救命)을 호소해 온 많은 사람들을 구해 주어 칭송을 받았다.

정숙하(鄭淑夏) ()는 월호(月湖). 한양(漢陽)출신. 청주 목사(淸州牧 使)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내고, 1594(선조 27)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참지(兵曹參知), 1598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으며 그후 다시 좌승지, 병조와 형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앞서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義兵將)으로 무공(武 功)을 세웠다.

정기원(鄭期遠) 1559(명종 14)1597(선조 30) 자(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현산(見山), 시호(諡號)는 충의(忠 毅), 별좌(別坐) 상신(象信)의 아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式年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호조(戶曹)․형조(刑曹)․공조 좌랑(工曹佐 郞) 등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 중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 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1594년 현감(縣監)을 거쳐 병조 정랑(兵曹 正郞)이 되었으며, 1596년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가 되어 다시 명나 라에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총병(總兵) 양 원(楊 元)의 접반사(接接使)로 남원(南原)에 갔다가 남원성이 함락될때 양 원과 함께 전사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1604(선조 37) 선무3등공신(宣武三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내성군(萊城君)으로 추 봉(追封),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협(鄭 協) 1561(명종 16)1611(광해군 3) 자(字)는 화백(和伯), 호(號)는 한천(寒泉), 우의정(右議政) 언신(彦 信)의 아들. 1585년(선조 1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88년 식년문 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자(正字)를 지냈다. 1589년 아버지가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 남해(南海)의 유배지(流 配地)에서 죽은 뒤로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전전하다 1599년 아버 지가 신원(伸寃)되자 검상(檢詳)에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수찬(修撰)헌납(獻 納)장령(掌令)사인(舍人) 등을 거쳐 교리(校理)사간(司諫)응 교(應敎)사예(司藝) 등을 역임, 1605(선조 38) 동지부사(冬至副 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내고 1608(광해군 즉위) 이조 참판(吏曹參 判)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 1610년 부빈객(副賓客), 이듬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1611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앞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역대 실록(實錄)을 중간 (重刊)할 때는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했다. 시주(詩酒)를 즐기고 노소현우(老少賢愚)를 가리지 않고 교유(交遊)했다.

정보성(鄭輔聖)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공을 세웠고, 벼슬이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정호인(鄭好仁) ()는 소산(蘇山). 참봉 (參奉)을 지낼 때 임진왜란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문종(文宗)의 위패(位牌)를 교동(校洞)으로 안 치(安置)하였으며,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포로로 일본에 끌려가 9년 만에 돌아왔다. 그후 좌랑(佐郞)에 증직되었고, 양산(梁山)의 소로원 (小魯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호의(鄭好義)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호인(好 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각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양산의 소 로원(小魯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유문(鄭惟文) ()는 행촌(杏村).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교위 (校尉)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倭軍) 과의 격전 끝에 순절(殉節)하였다.

정응두(鄭應斗) 조선(朝鮮) 때 판결사(判決事)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아 왜병(倭兵)을 무찌르는데 전공을 세우다 순절(殉 節)하였다.

정광천(鄭光天) ()는 낙애(洛涯).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 亂)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정해택(鄭海澤) 시호(諡號)는 무장(武莊).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유지(鄭維地) ()는 치암(稚巖).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여강(鄭汝康) ()는 행정(杏亭).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 을 세우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운길(鄭雲吉)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도사(都 事)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였으며, 아들 순()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절(殉節)하였 다. 그후 처() 함양 오씨(咸陽吳氏)에게 열녀정려각(烈女旌閭閣)이 세워졌다.

정근(鄭 謹)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1등공신(一等功 臣)에 책록(策錄)되고,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눌(鄭 訥)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수민(鄭壽民) ()는 낙은(洛隱). 조선(朝鮮) 때 호군(護軍)을 역임 하였다.

정언굉(鄭彦宏) ()는 서계(西溪). 조선조(朝鮮朝)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판교(判校)에 이르렀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하는데 공을 세웠다. 옥 동원(玉洞院)에 제향되었다.

정지(鄭 沚) ()는 청원(淸源), ()는 낙빈(洛濱).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정홍익(鄭弘翼) 1571(선조 4)1625(인조 3) 자(字)는 익지(翼之), 호(號)는 휴옹(休翁)․휴헌(休軒), 시호(諡號) 는 충정(忠貞), 시정(寺正) 사신(思愼)의 아들. 1589년(선조 22) 생원 (生員)이 되고,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봉교(奉敎)를 거쳐 이듬해 주서(注書)가 되었다.

사서(司書)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에 올라 정인 홍(鄭仁弘)이 성 혼(成 渾)을 탄핵하자 이를 극력 변호, 정인홍을 공 격하다가 단천 채은관(端川採銀官)으로 좌천, 이어 어천도 찰방(魚川 道察訪)을 지냈다. 1608(선조 41)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 學)수찬(修撰)응교(應敎)를 역임하고, 1612(광해군 4) 성천 부 사(成川府使)를 거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페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 극간(極諫)하 다가 진도(珍島)에 유배, 이어 종성(鍾城)광양(光陽) 등지로 이배 (移配)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풀려 나와 동부승지(同副 承旨)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광성(鄭廣成) 1576(선조 9)1655(효종 6) 자(字)는 수백(壽伯), 호(號)는 제곡(濟谷), 좌의정(左議政) 창연(昌 衍)의 아들. 1601년(선조 34) 진사(進士)가 되고, 1603년 식년문과(式 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 (檢閱)에 발탁되고, 대교(大敎)․ 수찬(修撰)․교리(校理)․지평(持平)을 역임했다. 1608년(선조 41)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이 대두했을 때 부친이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아 탄핵을 받았다.

광해군 말년에 황해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 인조반정(仁祖反 正 : 1623) 후 강원도경상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10여년 은거하다 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나 곧 사 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정영방(鄭榮邦) 1577(선조 10)1650(효종 1) 자(字)는 경보(慶輔), 호(號)는 석문(石門), 진사(進士) 원충(元忠)의 손자. 조(澡)에게 입양(入養).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 學)을 배우고 1605년(선조 3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광해군 이 즉위하여 실정(失政)을 거듭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진성(眞城)에 은퇴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당시(唐詩)에도 뛰어났다. 예천군 용궁면(醴泉郡龍宮面)의 마산리사(馬山里社)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세규(鄭世規) 1583(선조 16)1661(현종 2) 자(字)는 군칙(君則), 호(號)는 동리(東里), 시호(諡號)는 경헌(景 憲), 율(慄)의 아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 (蔭補)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등용, 1628년(인조 6) 화순 현감 (和順縣監)으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안산 군수(安 山郡守)를 거쳐 1636년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에 특진, 이해 겨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포위당한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향해 진격했으나 용인(龍人)에서 패전하였다.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1641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내고, 1644년 공조 판서(工曹判 書)에 승진, 1654(효종 5) 이조 판서로 강화도를 시찰 후 승천(昇 天)연미(燕尾)갑곶(甲串)광성(廣城) 등 여러 진()을 설치케 했다.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뒤 은퇴했다.

정광경(鄭廣敬) 1586(선조 19)1644(인조 22) 자(字)는 공직(公直), 호(號)는 추천(秋川), 좌의정(左議政) 창연(昌 衍)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세자익위사 세 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해 증광문과(增廣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에 등용되고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인조반정(仁曹反正) 후 응교(應 敎)사도시정(司導寺正)사간(司諫)을 지내다가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했던 자책(自責)으로 사퇴를 간청했으나 부친을 위한 행위로 인 정되어 계속 요직에 등용,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 등 을 역임했다.

정언룡(鄭彦龍) ()는 노봉(老峰). 조선 때 사복시 직장(司僕寺直長) 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정언충(鄭彦忠)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언일(鄭彦一)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정한기(鄭漢驥) 조선(朝鮮) 때 절도사(節度 使)를 역임하였다.

정달서(鄭達恕) ()는 석린당(石隣堂). 1936(인조 14) 병자호란(丙 子胡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정지경(鄭之經)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홍원(鄭弘遠) () 만천(晩川). 조선(朝鮮) 때 필선(弼善)을 지냈다.

정시수(鄭時修) 1601(선조 34)1647(인조 25) 자(字)는 경수(敬叟), 호(號)는 금천(琴川), 구(矩)의 후손. 1633년 (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 병(義兵)을 모아 적과 싸웠으나 강화가 이루어지자 시국을 개탄하고 과거를 단념,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거창(居昌)의 영천사(瀯川 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태화(鄭太和) 1602(선조 35)1673(현종 14) 자(字)는 유춘(囿春), 호(號)는 양파(陽坡), 시호(諡號)는 익헌(翼 憲), 충익(忠翼)으로 개시(改諡), 참판(參判) 광성(廣城)의 아들. 1628 년(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1631년 정언(正 言)을 거쳐 이듬해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고, 이어 부교리(副校 理)․헌납(獻納)․사인(舍人)․부응교(副應敎)를 역임, 1635년 사간 (司諫)이 되었다.

이해 북변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자 원 수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패잔병 을 수습하여 시석(矢石)으로 항전, 많은 적을 살해한 공으로 집의(執 義)가 되었다. 1637년 볼모(인질)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심양(瀋陽)에 배종(陪從), 1638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오 르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다음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낸 뒤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사관(査官)을 맞았다.

1640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대사간(大司諫)평안도 관찰 사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644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접반사(接伴使)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호조 판서 (戶曹判書)를 거쳐 대사헌으로 소현세자가 죽자 봉림대군(鳳林大君) 의 세자 책봉을 반대, 소현세자의 아들로서 적통(嫡統)을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646년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고, 1648년 형조 판서에 전임,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후 모친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1650(효종 1)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되어 좌의정에 재임되었으 나 취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어 1657년까지 재직, 다음해 병으로 사직했다.

곧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재등용, 1559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 고, 이해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처결, 당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이를 시행케 했으며, 성품이 모나지 않고 신중하여 정적(政敵)이 별 로 없었다.

1662(현종 3)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왔 다. 영의정으로 재직중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37번의 청원 끝에 허락을 얻어 치사(致仕), 1671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현종의 묘종(廟庭)에 배향되었다.

정지호(鄭之虎) 1605(선조 38)1677(숙종 3) 자(字)는 자피(子皮), 호(號)는 무은(霧隱), 진사(進士) 응원(凝遠)의 아들. 1635년(인조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세마(洗馬)가 되고 163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어 권신(權臣) 김자점(金自點)의 전횡(專 橫)을 탄핵, 이로 인하여 요직(要職)에서 몰려나 종묘서령(宗廟署 令)․황주 판관(黃州判官)․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등으로 전전했다.

1659(현종 즉위) 성절부사(聖節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오고, 형 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676(숙종 2) 대사간이 되어 당쟁(黨爭) 에서 초연, 권세에 아부함이 없이 자기의 소신대로 일을 처리했다.

정치화(鄭致和) 1609(광해군 1)1677(숙종 3) 자(字)는 성능(聖能), 호(號)는 기주(棋州), 판서(判書) 광성(廣成)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태화(太和)의 동생. 1628년(인조 6) 별시문과(別 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暗 行御史)로 나갔다.

1636년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으로서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을 심양(瀋陽)에 호종(扈從)했고, 1642(인조 20) 동래 부사 (東萊府使)로 나갔다. 1657(효종8)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승진, 2 년 후 이조 판서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았고, 이 해 병으로 사직했다가 1667(현종 8) 우의정(右議政)에 특진, 동지 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675(숙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 (西人)이 몰락하자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11번 째의 사직상소로 사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서인(西人)이 었으나 온건하여 화를 입지 않았다.

정태제(鄭泰齊) 1612(광해군 4)? 자(字)는 동망(東望), 호(號)는 국당(菊當)․삼당(三堂), 좌랑(佐郞) 양우(良佑)의 아들. 우의정(右議政) 강석기(姜碩基)의 사위. 1635년(인 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어 1645년(인조 23)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에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환을 허락받았으며 돌아와서 밀양 부 사(密陽府使)가 되었으나, 이듬해 류 탁(柳 濯)의 모반(謀叛)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뒤에 다시 3사(司)의 벼슬을 역임, 이조 참의 (吏曹參議)를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정지화(鄭知和) 1613(광해군 5)1688(숙종 14) 자(字)는 예경(禮卿), 호(號)는 남곡(南谷)․곡구(谷口), 영의정(領議 政) 광필(光弼)의 5대손, 이조 참판(吏曹參判) 광경(廣敬)의 아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7년에 제릉 참봉(齊陵參 奉)이 되고,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이듬해 부수찬(副修撰) 을 거쳐 세자시강원 사서 (世子侍講院司書)로서 볼모로 가는 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갔다.

돌아와 교리(校理)이조 정랑(吏曹正郞)응교(應敎)집의(執義)사인(舍人) 등을 거쳐 원주 목사(源州牧使)로서 선정을 베풀어 송덕 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650(효종 1)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 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삭감시키고, 병조 참의(兵曹 參議)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전라도함경도평안도 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1664(현종 5) 형조 판서에 특진, 1666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 라에 다녀와서 우의정에 올랐다가 1669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전 직하여 평안도 별시(別試)를 관장(管掌), 1674년 좌의정이 된 뒤 병 으로 한직(閑職)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이해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대공설(大 功說 : 9개월)을 주장하던 서인(西人)이 화를 입자 송시열(宋時烈) 의 추죄(追罪)가 논의되자 이를 맹렬히 반대했다. 1679(숙종 5) 영 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승진, 이듬해 다시 좌의정을 지내고, 1685년 병으로 사직,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죽었다.

정기룡(鄭奇龍) 시호(諡號)는 절효(節孝). 조선(朝鮮) 때 선무공신(宣武 功臣)에 책록되었다.

정견룡(鄭見龍) 조선(朝鮮)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병마절도사(兵馬節度 使)를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공(戰功)을 세워 좌찬성(左 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정대업(鄭大業) 1636(인조 14) 병자호란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의병 을 일으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좌랑(左郞)에 추증되었다.

정자(鄭 梓)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려 고 싸우다 이듬해 자부(子婦)와 딸과 함께 강화 영청포(江華英淸浦) 에서 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