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광주정씨시조(光州鄭氏) ,정신호(鄭臣扈),광주정씨조상인물,광산정씨

작성일 : 2017-05-10 20:48 수정일 : 2019-08-28 15:42

광주정씨시조

광주․광산정씨(光州鄭氏)의 시조(始祖) 정신호(鄭臣扈)는 고려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걸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으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광주(光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광주(光州)는 전라남도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주(武州)라 개칭하였다. 고려 건국 이래 940년(고려 태조 23)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개칭하였으며, 그 뒤 996년(성종 15)에 해양현(海陽縣)이라 이름했고, 1259년(고종 46)에 기주(冀州 : 일명 冀陽州)라 했다가 1275년(충렬왕 1)에 다시 무주(武州)라 칭하였다.

그 후 1310년(충선왕 2)에 화평부(化平府), 1362년(공민왕 11)에 무진부(武珍府), 1373년(공민왕 22)에 광주목(光州牧)으로 하였다가 1430년(세종 12) 무진군(武珍郡)으로 강등되었으며, 1451년(문종 1)에 다시 광주목이 되었고, 1489년(성종 20) 광주현(光州縣)으로 격하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광주목으로 회복되었다가 그 후 1624년(인조 2)에 광산현(光山縣)이라 개칭하였다가 1634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환원하고, 1895년(고종 32) 나주부(羅州付)에 속하는 광주군(光州郡)이 되었으며, 1896년 전라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어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911년 기례방(奇禮坊)․공수방(公須坊)․부동방(不動坊)․성내방(城內坊)을 합쳐 광주면(光州面)을 신설하고, 1923년 인근 서목면(瑞牧面)․효천면(孝泉面)․지한면(池漢面)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행정구역을 확장한 후, 1931년 읍면제(邑面制) 실시에 따라 광주면은 광주읍(光州邑)으로 승격되었다. 1935년에 이르러서는 인근 서목면․효천면․지한면의 나머지 부분을 합하여 광주읍(光州邑)은 광주부(光州府)로 승격하고, 광주군(光州郡)은 광산군(光山郡)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광주시(光州市)로 개칭되고, 지방자치제(地方自治制) 실시로 1987년 직할시(直轄市)로 승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말에 무장(武將)으로 이름을 날린 세운(世雲)이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와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이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에 왕을 호종(扈從)하여 총병관(摠兵官)이 되었다.

또한 귀진(龜晋)은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연산군(燕山君)때 목사(牧使)를 역임한 인인(麟仁)과 명종(明宗)때 형조 참판(刑曹參判)과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만종(萬鐘)이 유명했다.

이밖에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올라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이주(以周)가 이름났고, 사호(賜湖)는 선조(宣祖)때 대사헌(大司憲)․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영조(英祖) 때 화가(畵家)로 이름난 선(歚)은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려 강한 농담(濃淡) 대조위에 청색(靑色)을 주조(主調)로 한 새로운 화풍(畵風)을 개척하여 심사정(沈師正)․조영석(趙榮祏)과 함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으며,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춘수(春洙)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과 싸운 용대(用大)가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정씨(光州鄭氏)는 남한(南韓)에 15,6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광주정씨조상인물

정윤부(鄭允孚) 고려(高麗)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한성 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다.

정윤형(鄭允亨) 조선(朝鮮)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정인진(鄭麟晋)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역임하였다.

정귀진(鄭龜晋) 1386년(우왕 12)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조선조(朝鮮朝)에 벼슬하여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조(吏曹)와 형조(刑曹)의 참의(參議), 강원 감사(江原監司)․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았다. 형조판서(刑曹判書)․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정구당(鄭九塘) 조선 때 감사(監司)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존(鄭 存) 조선조(朝鮮朝)에 전중어사(殿中御使)․강원도사(江原都事)․옥과 현감(玉果縣監) 등을 지냈다.

정재(鄭 在)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감사(監司)를 지냈다.

정지당(鄭之唐) 조선(朝鮮) 때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정지하(鄭之夏) 조선조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좌리공신(佐理功臣) 에 올랐다.

정예종(鄭禮從) 조선(朝鮮) 때 전라도 안무사(全羅道按撫使)를 지냈다.

정이충(鄭以忠) 조선(朝鮮) 때 전중어사(殿中御史)․운봉 현감(雲峰縣監)을 지냈다.

정조우(鄭祖禹) 조선에서 용양위 사직(龍驤衛司直)을 역임하였다.

정종우(鄭宗寓) 호(號)는 농암(籠巖). 조선(朝鮮) 때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지냈다.

정찬우(鄭纘禹) 자(子)는 정중(正仲). 조선(朝鮮)에서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역임했다.

정옥산(鄭玉山)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도승지(都承旨)․경기감사(京畿監司)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철(鄭 嚽) 조선(朝鮮)때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를 역임하였다.

정질(鄭 咥) 자(子)는 일지(日至), 호(號)는 동덕재(東德齎). 조선에서 참봉(參奉)․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지냈다.

정승순(鄭承順) 조선 때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지냈다.

정옥(鄭 沃) 조선(朝鮮) 때 집의(執意)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윤공(鄭允功) 조선조에 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순인(鄭純仁) 자(子)는 덕로(德老). 조선(朝鮮)에서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역임했다.

정인인(鄭麟仁) ?~1504(연산군 10) 자(字)는 덕수(德秀), 군수(郡守) 찬우(纘禹)의 아들, 1498년(연산군 4)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이해 지평(持平)이 되고 전한(典翰)을 거쳐 1503년(연산군 9)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적상마(的顙馬)를 진상(進上)하라는 연산군의 명령을 시행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홍문관(弘文館)에 재직 시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하여 참수(斬首)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복관되었다.

정후인(鄭厚仁) 자(子)는 덕원(德元). 조선조(朝鮮朝)에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정처함(鄭處咸)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정임(鄭 琳) 조선조(朝鮮朝)에 용안 현감(龍安縣監)을 지냈다.

정참동(鄭參仝) 조선 때 용양위 부사맹(龍驤副司猛)을 지냈다.

정응종(鄭應鍾) 자는 자행(子行), 호는 퇴은재(退隱齋). 조선 때 시강원자의(侍講院諮義)․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등을 거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정자걸(鄭自傑) 조선(朝鮮) 때 건원릉 참봉(建元陵參奉)을 지냈다.

정대덕(鄭大德) 조선(朝鮮)에서 상원 군수(祥元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정자란(鄭子蘭) 조선(朝鮮) 때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를 역임하였다.

정만종(鄭萬鍾) 자(字)는 인보(仁甫), 호(號)는 조계(棗溪), 윤적(允勣)의 아들,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서(司書)․정언(正言)․지평(持平)․장령(掌令)․사간(司諫)․응교(應敎)․전한(典翰)․우부승지(右副承旨)․형조 참판(刑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1539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한성부 좌윤․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550년(명종 5)에 부총관(副摠管)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 그 후 함경도(咸鏡道)․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소척(疏斥)했다.

정천종(鄭千鍾) 조선조(朝鮮朝)에 청양 현감(靑陽縣監)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이주(鄭以周) 1530(중종 25)~1583(선조 16) 자(字)는 방무(邦武)․유성(由盛). 호(號)는 성재(聖齋), 아산 현감(牙山縣監) 순인(純仁)의 손자, 경(褧)의 아들, 1558년(명종 13) 생원(生員)이 되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1570년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573년 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 경상도 군적경차관(慶尙道軍籍敬差官)으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임, 그 후 정언(正言)․지평(持平)․장령(掌令)을 지내면서 직언(直言)으로 일관하여 권신들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좌천, 뒤에 사직하고 춘천(春川)에 내려가 학문을 닦았다.

정사위(鄭士偉) 1536(중종 31)~1592(선조 25) 자(字)는 홍원(弘遠), 호(號)는 병은(病隱). 질(耋)의 아들,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74년(선조 7)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고, 헌납(獻納)을 거쳐 1577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평안도 경차관(平安道敬差官)이 되어 전염병이 휩쓸고 있는 도내를 순방하며 구호한 뒤 1581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2년 후 사간(司諫)이 되어 이이(李 珥)가 3사(司)의 탄핵을 받자, 항소(抗訴)하여 그 누명을 벗게 했고, 1587년(선조 20)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재직 중 백성의 원한을 쌓고 허락없이 한양에 들어왔다는 죄로 한때 삭직되었다.

이듬해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 1591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왕을 평양에 호종(扈從), 다시 세자(世子)를 따라 강계(江界)로 가던 도중 맹산(孟山)에서 죽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사호(鄭賜湖) 1553(명종 8)~? 자(字)는 몽여(夢與), 호(號)는 화곡(禾谷), 시호(諡號)는 충민(忠敏), 장령(掌令) 이주(以周)의 아들,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 호조 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97년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고, 2년 뒤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구관 당상(勾管當上)을 겸직, 이어 대사헌(大司憲)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참의(吏曹參議)․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등을 역임했다.

1607년(선조 40)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고, 선조가 죽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大司憲)․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내고,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 파직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에 등용, 다음해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다. 청주(淸州)의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두원(鄭斗源) 1581(선조 14)~? 자(字)는 정숙(丁淑), 호(號)는 호정(壺亭)․풍악산인(楓嶽山人), 시 호(諡號)는 민충(敏忠), 정자(正字) 명호(明湖)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생원(生員)이 되고, 161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23년(인조 1)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고 이듬해 관향사(管餉使)로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을 조달,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전향사(管餉使)가 되어 임진강(臨津江)의 군량 수송을 맡았다.

1630년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표(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 등 서양의 기계와,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즈(陸苦漢)로부터 마테오릿치(利馬竇)의「천문서(天文書)」「직방외기(職方外記)」「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천문도(天文圖)」「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등 서적을 얻어 가지고 왔 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정선(鄭 歚) 1676(숙종 2)~1759(영조 35) 자(字)는 원백(元伯), 호(號)는 겸재(謙齋)․난곡(蘭谷), 부사(府使) 설(渫)의 현손, 시익(時翊)의 아들, 약관(弱冠)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 되고 그 뒤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했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했고, 여행을 즐겨 금강산(金剛山)등의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沈師正)․조영석(趙榮祏)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렸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靑色)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巖壁)의 면과 질감(質感)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 두개의 낙관(落款)만 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정의림(鄭義林) 호(號)는 일신재(日新齋).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門人), 학행(學行)과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유학(儒學)에 전심하였고, 칠송리(七松里)에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후진을 양성했다. 능주(綾州)의 칠송사(七松祠)․삼산사(三山祠)․용산사(龍山祠)에 제향되었다.

정춘수(鄭春洙) 1875(고종 12)~1951 독립운동가, 33인의 한 사람, 자(字)는 명옥(明玉), 호(號)는 청오(靑吾), 석준(錫駿)의 아들, 충북 청주(淸州) 출신. 어려서 한문(漢文)을 배우고 함남 원산(元山)에서 영국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 후 상경하여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이바지했다. 3․1운동 때 원산 남촌동 교회(南村洞敎會) 목사로 재직 중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 운동에 종사, 1934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서대문 경찰서에서 105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정용대(鄭用大) 자(字)는 중범(重凡), 호(號)는 의암(毅庵).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규합, 왜군과 싸우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