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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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10 19:48 수정일 : 2019-08-28 15:18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시원(始源)을 이룬 경주정씨(慶州鄭氏)는 진한국(辰韓國) 사로(斯蘆)6() 취산진 지촌장(嘴山診支村長) 지백호(智伯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동경지(東京誌)」에 의하면, 지백호(智伯虎)는 기원전 117(한무제 원수 6) 경주 화산(慶州花山)에 강림(降臨)하여 부족국가(部族國家)이던 사로(斯盧)의 여섯 고을 중 취산진지촌을 다스리면서 신라건국(新羅建國)에 모체(母體)를 이루었고, 서기 32(신라 유리왕 9) 그의 현손대(玄孫代)에 와서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改稱)되면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下賜)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문화(文和)로 시호를 받았고, 656(태종무열왕 3)에 감문왕에 추봉되었다.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 (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 하였다.

서기 65(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현종 21) 삼경(三京) 제도가 실시되면서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첫째 문헌공파에서는 시조의 42세손 진후(診厚 : 검교첨

의평리 극중의 맏아들)가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호부 상서(戶部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증손으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위()의 아들 현영(玄英)은 호부 상서와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거쳐 벽상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후 문헌(文獻)으로 시호(諡號)를 받았으므로 문헌공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정헌대부로 이부 상서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종철(宗哲)의 둘째 아들 인조(仁祚)는 공양왕 때 길주 목사(吉州牧使)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한 맹장(孟將)으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군 장군 아지(阿只)를 격퇴시켜 더욱 무명을 떨쳤다.

조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홍덕(弘德 : 사간원 정언 인량의 아들)은 단종(端宗)이 손위하고 죽음을 당하자 팔순노모(八旬老母)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隱居)하며 단()을 만들고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忌日)에 분향하고 곡()을 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의 아들 지년(知年)1438(세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을 거치면서 관직을 역임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으며, 단종(端宗)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文宗)의 수탁 고명신(受託顧命臣)으로서 단종이 손위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종숙(從叔)인 홍덕(弘德)과 함께 남원 교룡산에 은거하였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효항(孝恒)은 성종(成宗) 때 서거정(徐居正) 등과 더불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및「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撰修)했다.

한편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했던 효상(孝常 : 지년의 둘째 아들, 효항의 아우)은 예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남 이(南 怡)와 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익대 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책록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통덕랑(通德郞) 인필(仁弼)의 아들 지운(之雲)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조화(造化)의 이()를 규명한「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을묘 왜변(乙卯倭變)에 추자도(楸子島)에서 수 차례 전공을 세워 함흥 판관(咸興判官)에 제수되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던 승복(承復)의 아들 사준(思竣)과 사횡(思竑)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워 헌종(憲宗) 때 창의비(倡義碑)와 대첩비(大捷碑)가 세워져서 가문에 절맥(節脈)을 세웠으며, 호조 참의(戶曹參議) 윤근(允謹)의 아들 창문(昌文)은 부친이 임진왜란에 진주성(晉州城)에서 순절하자 원한을 마음 속에 새겨 정유재란 때 10촌 형() 원길(元吉)과 함께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명을 사로잡았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서 적의 계략에 휘말려 순절하였다.

양경공파(良景公派)의 인맥(人脈)으로는 공민왕(恭愍王) 때 일기도주(一岐島主)의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휘()의 아들 희계(熙啓)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朝鮮創業)에 훈공을 세워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그의 현손(玄孫) 승조(承祖)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검열(檢閱)에 재직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은 사사(賜死)되고, 그는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진력했다.

주자학(朱子學)의 충효양전(忠孝兩全)을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때에 효()를 버리고 충()을 택했던 발()은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로 나가면서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에게 허락을 청했다. 이에 어머니 남궁씨(南宮氏)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충() 속에 효()가 들어있다면서 개념말고 나라를 위하라고 타일렀다.

기재잡기(寄齋雜記)」와「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의하면 임진년에 왜군이 늑병(勒兵) 25만 명과 병선 4만여 척을 거느리고 부산을 쳐들어왔다. 이에 아군은 혼비백산하여 거의 도주하였으나 발()을 중심으로 한 정예군만이 용기를 내어 활을 쏘아 무수한 적을 죽여 세곳에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화살이 다하자 한 비장(裨將)이 발()에게 도주할 것을 종용하자 도망갈 것을 종용하는 자는 중벌하겠다.”하고 백병전에 돌입했다가 발은 총에 맞아 장렬하게 순절했다.

()의 아들 흔()은 정유재란 때 조정(朝廷)에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젊은 장정(壯丁)을 모집하자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집에 응하고는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힘썼으며, 사량 만호(蛇梁萬戶)가 되어 왜군을 섬멸하여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승진되었고 첨정(僉正)과 정선 현감(旌善縣監) 등을 역임했다.

그외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돌격대장이 되어 당포(唐浦)․노량(露梁) 해전에서 적선 300여 척을 대파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던 호()와 인조(仁祖)때 강화(講話)에 항거하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어 화원(花源)에 살았던 응신(應莘), 숙종(肅宗) <오사인(五士人)>의 한 사람으로 4대신(四大臣 : 조태채․김창집․이건명․이이명>과 더불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수호했던 인중(麟重),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시휘(時輝)와 동윤(東潤)등이 양경공파(良景公派)를 대표했다.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금실(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던 이기(頣奇)의 후손에서는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올랐던 구()의 아들 광업(光業)과 홍업(弘業) 형제가 유명했다.

선조(宣祖) 때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했던 광업(光業)은 임진왜란 때 숙부 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홍업(弘業)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었다.

1581(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공청(公淸)은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신(好臣)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안강(安康)․경주(慶州)․울산(蔚山)․동래(東萊)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을 떨쳤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손경(遜卿)의 둘째 아들 극온(克溫)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판삼사 참지정사(判三司參知政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필()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와 한림학사(翰林學士)․평장사(平章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사후(死後)에 계림군(鷄林君)에 추봉되었다.

한편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유일로 천거되어 과천(果川)․의성(義城)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했던 기()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고 봉렬대부(奉列大夫)로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에 추증되었으며, 슬하에 아들 5 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평장공파(平章公派)의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조선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언양 현감(彦陽縣監)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던 차온(次溫)은 상주 판관(尙州判官)을 거쳐 권농병마절도사(勸農兵馬節度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평양 판관(平壤判官)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생강학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우 차량(次良)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의 셋째 아들 차공(次恭)은 세종(世宗) 때 등과(登科)하여 영천 군수(永川郡守)와 평산 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봉직되었으며, 기의 넷째 아들 차검(次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청백수절(淸白守節)은 정()이요 정직무사(正直無邪)는 간()이라 하여 정간(貞簡)으로 시호(諡號)를 받았던 차양(次讓)1452(문종 2)에 학행으로 봉직랑(奉直郞)에 천거되어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으며,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형()들과 더불어 5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랐다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함께 다리를 건너 왔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영교(五榮橋)>라 불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견()의 아들 대영(大英)이 임진왜란 때 사촌동생 대방(大方 : 후의 아들)과 더불어 망우당(忘優堂) 곽재우(郭再우) 휘하에서 창의(倡義)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대방(大方)은 대구 팔공산(八空山)에서 권 제(權 濟)․최 입(崔 笠)․조호익(曺好益)․정경세(政經世) 31명과 회맹(會盟)하고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대영(大英)과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선조 때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냈던 구()와 함께 경주 정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정씨는 남한에 350,5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 인 물

정년(鄭 年) 신라(新羅) 때 무장(武將)으로 826(흥덕왕 1) 좌복야(左僕射)로서 뛰어났고 특히 잠수술(潛水術)에 능하였다. 장보고(張保皐)와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무예(武藝)로 이름을 떨치다 귀국, 먼저 귀국하여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로 있는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838(민애왕 2) 장보고(張保皐)의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아찬(阿湌) 김우징(金佑徵 : 신무왕)을 도와 금명(金明)의 관군을 무찌르고 신무왕(新武王)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후 장보고의 뒤를 이어 청해진(淸海鎭)을 지켰다.

정문(鄭 文) 청렴검소(淸廉儉素)․공평정직(公平正直)하였으며, 벼슬은 대아찬(大阿湌)을 지냈고, 기자묘(箕子廟)를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정우성(鄭友聖) 신라에서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다.

정사맹(鄭師孟)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정유천(鄭遊天)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고려에서 도관찰사(都觀察使) 겸 안무 지휘사(按撫指揮使)를 역임하였다.

정현성(鄭玄成) 시호(諡號)는 경렬(景烈). 고려조(高麗朝)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금오위 장군(今吾衛將軍)을 역임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정심(鄭 審) 고려(高麗) 때 전객서령(典客署令)․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역임하였다.

달강(鄭達康) 고려도(高麗朝)에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좌복야(左僕射) 등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오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정경문(鄭景文) 고려(高麗) 때 흥위위 상장군(興威衛上將軍)을 지냈다.

정성지(鄭性之)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정균지(鄭均之) 고려(高麗)에서 좌복야(左僕射)․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정손경(鄭遜卿) 초명(初名)은 원녕(元寧), ()는 동양(東陽). 고려 예종(睿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이부상서(吏部尙書)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고, 판밀직원사(判密直院使)․응양 대장군(應揚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정극중(鄭克中) 고려(高麗)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광록대부(光祿大夫)로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정극온(鄭克溫) ()는 익렬(翼烈).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재직 시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어사대부(御使大夫)․참지정사(參知政事)등을 역임하였다.

정필(鄭 弼) ()는 송포(松圃). 고려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정진후(鄭珍厚) ()는 매포(梅圃),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예부상서(禮部尙書) 극중(克中)의 아들.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정당문학(政堂文學)․병부 상서(兵部尙書)․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이학(理學)과 문장(文章)으로 유명했다.

정금실(鄭金實) 고려(高麗)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오르고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으로 치사(致仕)했다.

정재(鄭 材) 고려조(高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라 한림학사(翰林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정보기(鄭寶奇) 시호(諡號)는 창렬(昌烈), 고려(高麗) 때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를 거쳐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역임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대장군(大將軍)으로 치사(致仕)했다.

정이기(鄭이奇) 고려조(高麗朝)에 월성위(月城尉)에 봉() 해졌다.

정원좌(鄭元佐)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우복야(友僕射)․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강주군(康州君)에 봉()해졌다.

정위(鄭 偉)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호부 상서(戶部尙書)․문하시중(門下侍中)등을 역임하였다.

정교(鄭 僑) 1309(충선왕 1)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사재경(司宰卿)을 지냈다.

정을린(鄭乙麟)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추증(追贈)되었다.

정현영(鄭玄英) ()는 추강(秋江),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郞)․호부 상서(戶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정공단(鄭公但) 1313(충선왕 5) 문과에 급제한 후 판형부상서(判刑部 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본명은 공단(公旦)인데 조선 태조(太祖)의 휘()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인자(人字)를 붙여 서 단() 자로 하였으며, 김주정(金周鼎) 31()과 함께 10운시(十韻詩)를 모았다.

정광한(鄭光漢) 고려조(高麗朝)에 단성 군수(丹城郡守)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정진(鄭 璡) ()는 옥봉(玉峯).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중 현대부(中顯大夫)에 올랐다.

정주(鄭 珠) 고려(高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힘하였다.

정종철(鄭宗哲)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헌대부(政憲大夫)로 이조 전서(吏曹典書)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정종보(鄭宗輔) 고려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정자초(鄭子楚)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유비창승(有備倉承)을 역임하였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 學)에 증직, 월성군에 봉해졌다.

정기( ) ()는 자군(子君). 조선초(朝鮮初)에 은일(隱逸)로 종묘서 주부(宗廟署主簿)를 거쳐 의성 현감(義城縣監)․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다.

정극부(鄭克扶) 고려조(高麗朝)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정인용(鄭仁龍) ()는 송재(松齋). 고려 때 보승 중랑장(保承中郞將)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하였고,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고려조에 절개를 지켰다.

정사지(鄭思智) ()는 경재(敬齋). 고려 때 춘추관 대제학(春秋館大提學)으로 중국에 들어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그는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과 더불어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여 후세 유학(儒學)의 정립에 기틀이 되었다.

정사우(鄭思友) 고려조(高麗朝)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정사계(鄭思啓) 고려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예조 참의(禮曹參議)․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정휘(鄭 暉) 1332(충숙왕 1)?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大提學)․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등을 거쳐 1358년(공민왕 7)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1360년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를 지내고, 그 후 문하시중(門下侍 中)․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1363(공민왕 12) 일기도주(一岐島主)가 모반할 때 도원수(都元帥)로서 이를 토벌하여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후에 아들 희계(熙啓)가 조선 개국(朝鮮開國)에 커다란 공을 세우자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정인조(鄭仁祚)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고려(高麗) 때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 대장군(大將軍)으로 진산(珍山) 동쪽 석문(石門) 벌판에서 왜적을 대파하였으며, 조선 태조(太祖)와 같이 일본 장군 아지(阿只)를 죽이는데 공을 세웠다. 누차 대공(大功)을 세우고 순절(殉節)하니 조정에서 진산의 동편 인근 산()에 장사지내고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

정인온(鄭仁溫) 조선조(朝鮮朝)에 보문각(寶文閣)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정인량(鄭仁良) 1399(정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및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하였다.

정인공(鄭仁恭) 조선 때 군수(郡守)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정차온(鄭次溫) 1399(정종 1)? 자(字)는 공후(孔厚),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조산대부(朝散大夫)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으나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선위(禪位)하자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며 평양판관(平壤判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정차양(鄭次讓) 1424(세종 6)? 1452년(문종 2) 학행(學行)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봉직랑(奉直郞)을 거쳐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다.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하자 형(兄)과 더불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형제 5명이 관직에 올랐다가 일시에 다같이 돌아와 세칭(世稱) 5영교(五榮橋)라고 하였고 지금까지도 전하여지고 있다.

정차공(鄭次恭) 1432(세종 14) 문과에 합격한 후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정차검(鄭次儉) 1427(세종 9)? 조선 때 수의 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정홍덕(鄭弘德) ()는 팔송(八松). 1419(세종 1) 무과에 급제한 후 병조 판서(兵曹判書)․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등을 역임하였고, 1454(단종 2)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단종(端宗)이 퇴위하고 죽음을 당하자 신하(臣下)의 절개를 지켜 순절(殉節) 하려했으나, 팔순 노모(八旬老母)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하며 2개의 단()을 쌓아 단종(端宗)의 기일(忌日)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에 분향하고 곡()을 하였다.

정희계(鄭熙啓) ?1396(태조 5) 시호(諡號)는 양경(良景), 문하평리(門下評理) 휘(暉)의 아들.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大護軍)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이 살해된 뒤 최 영(崔 瑩)의 막하가 되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 使)를 거쳐 공양왕(恭讓王) 초에 판자혜 부사(判慈惠府事)로 있다가 1390년(공양왕 1) 이 초(彝 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왔다.

1392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이어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응양위 상호군(應陽衛上護軍)을 겸임했고, 이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헌,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팔위 상장군(八衛上將軍)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판팔위사(判八衛事)․좌참찬(左參贊) 등을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죽었다.

정진(鄭 震) ()는 기원(器元), ()는 운옹(耘翁).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 夫)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경운(耕耘)에 뜻이 있어 호()를 운옹(耘翁)이라 하였다. 정극인(丁克仁)과 동서(同婿) 사이로 함께 태인(泰人)으로 낙향하여 고현내(古縣內)를 개척하였다.

정임(鄭 霖) ()는 남은(南隱). 조선 태조(太祖)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태종조(太宗朝)에 무안에서 유학(儒學)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정제(鄭 霽) ()는 일청(一淸).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상산 현감(商山縣監)을 거쳐 이조 전서(吏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정상덕(鄭尙德) 고려말(高麗末)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정한기(鄭漢磯) 조선(朝鮮)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정염(鄭 廉) 조선 때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무안(務安)에서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하(鄭 夏) 조선(朝鮮) 때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지냈다.

정길상(鄭吉祥) 1368(공민왕 17)1421(세종 3) 자(字)는 하서(賀瑞). 1391년(공양왕 2) 문과에 급제한 후 동북병마사(東北兵馬使)․6도 안무지휘사(六道按撫指揮使) 등을 지내고 조선조에 호조 참의(戶曹參議)․좌승지(左承旨)․호분위 상호군(虎賁衛上護軍)을 역임하였으나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總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정효상(鄭孝祥) 1372(공민왕 21)1424(세종 6) 자(字)는 백원(百源), 시호(詩號)는 문간(文簡). 1395년(태조 4) 문과에 합격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사망 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 등에 추증되었다.

정계안(鄭繼安) ()는 태중(泰重), ()는 현호(鉉湖). 조선 때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고 태인(泰仁)의 무성리(武誠里)에 은거하였다.

정종은(鄭從殷)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의영고 교수(義盈庫敎授)를 지냈다.

정종상(鄭從商)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으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지냈다.

정성순(鄭成順) 일명(一名) 함순(咸順). 조선조(朝鮮調)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통덕랑(通德郞)으로 사옹원 별좌(司甕院別坐)를 거쳐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판의금 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성순(鄭成順)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정랑(吏曹正朗)을 지냈다.

정유의(鄭由義)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 음사(蔭仕)로 진잠 현감(鎭岑縣監)을 거쳐 봉산 군수(鳳山郡守)를 역임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에 이르렀다.

정석(鄭 碩) 조선 때 호조 전서(戶曹典書) 겸 낭중(郎中)을 지냈다.

정지년(鄭知年) 1395(태조 4)1462(세조 7) 자(字)는 유영(有永). 호(號)는 노송정(老松亭). 1438년(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거 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다.

정흥방(鄭興邦) ()는 자거(子擧). 조선(朝鮮)에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사(蔭仕)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정인손(鄭仁孫)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순흥(順興)․여산 부사(礪山府使)를 지냈다.

정의손(鄭義孫) ()는 추파(秋波).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단성 군수(丹城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예손(鄭禮孫)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함경우후(咸鏡虞候)를 지내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정지손(鄭知孫)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신손(鄭信孫) 조선(朝鮮)에서 통훈대부(通訓大 夫)로 죽산 도호부사(竹山都護府使)를 지냈다.

정성손(鄭誠孫)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래 부사(東來府使)를 역임하였다.

정경손(鄭敬孫) ()는 자이(子頣). 조선 때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를 지냈다.

정귀방(鄭貴邦) 조선(朝鮮)에서 장사랑(將仕郞)으로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역임하였다.

정귀정(鄭貴廷) ()는 치재(耻齋).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지냈다.

정빈(鄭 贇) 조선(朝鮮)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유인(鄭惟仁)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목사(牧使)․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정숙형(鄭叔亨) ()는 성도(聖道), ()는 용계(龍溪). 조선(朝鮮)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 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양광 혐감(陽光縣監)에 이르렀다.

정상후(鄭尙厚) 조선(朝鮮) 때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거쳐 좌윤(左尹)을 지냈다.

정효항(鄭孝恒) 지년(知年)의 아들. 1451(문종 1)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부교리(副校理)를 역임, 좌익원종2등공신(左翼原從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1467(세조 13)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481(성종 12)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50권을 편찬했으며, 1485년 서거정 등과「동국통감(東國通鑑)57권을 편수했다. 뒤에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정효상(鄭孝常) 1432(세종 14)1481(성종 12) 자(字)는 가구(可久), 시호(詩號)는 제안(濟安), 증좌찬성(贈左贊成) 지년(知年)의 아들. 1451년(문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454년(단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내고, 1466년(세조 12)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68년(예종 즉위) 동부승지 (同副承旨)로 남이(南 怡)․강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封)해졌다.

1469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도승지(道承旨)가 되고,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오른 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공조 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476년 이조 판서(梨棗判書)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가 되었다.

정효종(鄭孝終) ()는 가정(可貞).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거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다.

정효본(鄭孝本) ()는 가윤(可允).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 예안 현감(禮安縣監)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황해감사(黃海監司)를 지냈다.

정인필(鄭仁弼)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정유필(鄭裕弼) 조선조(朝鮮朝)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정지례(鄭之禮) 1398(태조 7)1465(세조 11) 자(字)는 숙부(肅夫). 1438년(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홍문관(弘文館)․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정지지(鄭之智) 1400(정종 2)1475(성종 6) 자(字)는 서부(瑞夫).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지신(鄭之信) 조선(朝鮮) 때 세마(洗馬)를 지냈다.

정성(鄭 晟)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청양 현감(靑陽縣監)․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정흠(鄭 欽) 1433(세종 15)1503(연산군 9) 1471년(성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신창 현감(信昌縣監)․봉산 군수(鳳山郡守)․문화 현령(文化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정수덕(鄭守德) 1435(세종 17)1507(중종 2) 자(字)는 군행(君行).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역임하였으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문덕(鄭文德) 1438(세종 20)1509(중종 4) 1461년(세조 7)에 사마시(司馬試) 급제후 40년간을 병이 들어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이르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활인서 별제(活人暑別提)를 지냈다.

정숭덕(鄭崇德) 1439(세종 21)1507(중종 2) 1462년(세조 8) 둘째 형인 문덕(文德)과 함께 나란히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477년(성종 8) 문천 군수(文川郡守) 및 북청진관 병마절제사(北靑鎭管兵馬節制使)에 이르렀다.

정견(鄭 堅) 1427(세종 9)1514(중종 9) 자(字)는 자유(子柔), 호(號)는 죽당(竹 堂).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62년(세조 8) 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6촌 승조(承祖)가 부고죄(不告罪)로 화를 당하자 호남 능주(湖南綾州)로 피하여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정승조(鄭承祖) ()는 술이(述而), 문덕(文德)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94(성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감찰(監察)이 되고, 검열(檢閱)에 재직중 1498(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1501(연산군 7) 풀려나와 은퇴, 학문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정지운(鄭之雲) 1509(중종 4)1561(명종 16) 자(字)는 정이(靜而), 호(號)는 추만(秋巒), 인필(仁弼)의 아들.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의 문인.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 뒤에 한성(漢城)에서 이 황(李 滉)을 만나 수정(修正)을 받았다. 이것이 뒤에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고양(高揚)의 문봉서 원(文峰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정구(鄭 龜) ()는 서로(瑞老).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용양위 좌부장군(龍驤衛佐部將軍)을 역임하고, 선무 2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정진업(鄭振業) ()는 백흥(伯興), ()는 국송당(菊松堂). 조선(朝鮮)에서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지냈으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였다.

정광업(鄭光業) ()는 중흥(仲興). 조선 때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켰다.

정홍업(鄭弘業) ()는 계흥(季興). 조선조에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지냈으며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정방경(鄭邦經) 조선(朝鮮)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을 역임하였다.

정방강(鄭邦綱) 조선조(朝鮮朝)에 진사세마(進士洗馬)에 합격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황주진관 병마첨절제사(黃州鎭管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방적(鄭邦績) ()는 공보(功甫). 조선(朝鮮)에서 거창 부사(居昌府使)를 역임하였다.

정방기(鄭邦紀) ()는 언보(彦甫). 조선조에 음보(蔭補)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정방광(鄭邦絖)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정방적(鄭邦績)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정세호(鄭世豪) 1536(중종 31)1567(명종 22)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내자시(內資寺)․사복시(司僕寺)․군자감(軍資監)의 주부(主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삭녕 군수(朔寧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정세현(鄭世賢) 1478(성종 9)1547(명종 2) 1524년(중종 19) 문과에 급제한 후 공조 좌랑(工曹佐郞)․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館)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돈령부 도정(敦寧釜都正)을 역임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언충(鄭彦忠) 1491(성종 22)1557(명종 12) 조선 중종(中宗) 때 후릉 참봉(厚綾參奉)을 역임하고, 역학(易學)을 연구하여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저술, 이 항(李 恒)․김인후(金麟厚)․김약묵(金若黙)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여 학문의 깊이를 더 했으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정종호(鄭從濩) 1528(중중 23)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禮曺)․병조정랑(兵曹正郞)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主官)을 역임하였다.

정희교(鄭希僑) ()는 정대(貞大), ()는 노은(魯隱).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윤근(鄭允謹) ()는 신수(愼叟), ()는 설송(雪松). 정언충(鄭彦忠)의 문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군 김천일(金千鎰), 현령(縣令) 민여운(閔汝雲)과 함께 진주(晋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역전 분투했으나 성()이 함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그후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에 추증되었다.

정명호(鄭鳴濩) ()는 아숙(雅叔), ()는 삼우당(三友堂). 조선(朝鮮) 때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정승복(鄭承復) 1520(중종 15)1581(선조 14) 1555년(명종 10) 선전관(宣傳官)에 재임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추자도(楸子島)에서 수차례 커다란 공을 세워 방백(方伯) 박충원(朴忠元)과 수사(水使) 최희효(崔希孝)의 장계(狀啓)로 함흥 판관(咸興判官)․함흥 진관 병마절제사(咸興鎭管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그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정유선(鄭惟善) ()는 응지(應之). 1528(중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명선(鄭明善) 1517(중종 12)1566(명종 21) 1534년(중종 29) 진사 세마(進士洗馬)에 합격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하였다.

정발(鄭 撥) 1553(명종 8)1592(선조 25) 자(字)는 자고(子固), 호(號)는 백운(白雲),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군수(郡守) 명선(明善)의 아들. 1579년(선조 12)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강섬(姜 暹)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특진되었다.

1592년 부산진 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가 되어 이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을 점령당하고 전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동래(東來)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탁(鄭 擢) 1579(선조 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정백령(鄭栢齡) 1532(중종 27)1601(선조 34) 조선 때 충좌위 대호군(忠佐衛大護軍)을 역임하였고,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어모장군(禦侮將軍)에 추증되었다.

정사준(鄭思竣) 1553(명종 8)? 자(子)는 근초(謹初), 호(號)는 성은(城隱).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수차례에 걸쳐 대공(大功)을 세웠으며, 1599년(선조 32) 결성 현감(結成縣監)을 지낸 후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 후 1812(순조 12)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追贈)되었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병조 참판(兵曹參判)에 가증되었으며 순천 옥계사(順天玉溪祠)에 배향되었다. 1842(헌종 8) 광주(光州)에 창의비(倡義碑), 금산(錦山)의 금곡(金谷)에 대첩비(大捷碑)를 세웠다.

정사횡(鄭思竑) ()는 여인(汝仁), ()는 매헌(梅軒),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로 들어가 노량 해전(露粱海戰)에서 공을 세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연천(連川)․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역임하였고,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801(순조 1)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1842(헌종 8) 광주(光州)에 창의비(倡義碑), 금산(錦山)의 금곡(金谷)에 대첩비(大捷碑)를 세웠다.

정사정(鄭思靖) 1565(명종 20)? 자(字)는 유강(幼康).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무과에 합격한 후 봉사(奉事)를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을 따라 전공을 세웠고, 형(兄) 사준(思竣)․사횡(思竑), 조카 빈과 더불어 곡식을 모아 왕에게 수송한 충절(忠節)로 은직(恩職)을 받았 다.

정사립(鄭思立)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通正大夫)로 태인 현감(泰仁縣監)을 지냈다.

정빈(鄭 忄賓) 1566(명종 21)1640(인조 18) 우산 안방준(安邦俊)의 문인. 임진왜란 때 숙부들을 따라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3백여 리에서 곡식을 왕(王)에게 전하니 충절(忠節)에 감복한 선조(宣祖)가 사온서봉사(司醞署奉事)에 임명하였다.

그 후 직산(稷山)․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역임하고, 1801(순조 1)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1842(헌종 8) 순천(順天)의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정노(鄭 魯) ()는 치도(致道), ()는 동곡(東谷). 조 식(趙 植)의 문인. 조선 때 음보(蔭補)로 보충찬위(補忠贊衛)에 이르렀다.

정대영(鄭大英) 1565(명종 20)? 자(字)는 극화(克和), 호(號)는 매헌(梅軒).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곽재우(郭在祐)의 휘하에서 사촌 동생 대방(大方)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 등 방어에 공이 많았다. 그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대방(鄭大方) 1565(명종 20)1613(광해군 5)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제(權濟)․최간(崔簡)․조지산 (曺芝山)․정우복(鄭愚伏) 등 군자(君子) 31인(人)이 달성(達成) 팔공산(八空山) 상암(上菴)에서 회맹(會盟)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사촌 형(兄)인 대영(大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창문(鄭昌文) 1593(선조 26)? 자(字)는 장헌(章獻), 호(號)는 성암(省菴), 윤근(允謹)의 아들. 부친(父親) 윤근(允謹)이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진주(晋州) 전투에서 순절하자, 부친의 원한을 마음속에 새겨 정유재란(丁酉 再亂) 때 10촌 형(兄)인 원길(元吉)과 함께 출전하여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 명을 사로잡아 죽이고 정기원(鄭期遠)․이항남 (李恒南) 등과 합세하여 사기를 드높였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서 적이 세운 계략에 휘말려 순절(殉節)하였다.

정호(鄭 浩) 1550(명종 5)1595(선조 28) 자(字)는 원중(遠中), 호(號)는 안곡(安谷).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한 후 좌부장(左部長)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돌격대 대장(突擊隊大將)으로 당포(唐布)․노량(露梁)․발포(鉢浦) 전투에서 적선(敵船) 300여 척을 격파하는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정응룡(鄭應龍) ()는 이견(而見), ()는 동강(東岡). 1592(선조 25)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전력분투하다 1604(선조 37) 순절(殉節)하였다.

그후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에 추증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가증(加增)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서(追叙)되었다. 후에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의령(宜寧)의 충익사(忠翊司)에 배향되었다.

정구(鄭 構) ()는 긍보(肯甫), ()는 영모암(永慕庵). 조식(趙植)의 문인.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음성(陰城)․산음 현감(山陰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인남(鄭仁男) 조선조(朝鮮朝)에 사옹원 봉사(司甕院奉事)를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정신남(鄭信男) 1572(선조 5)1670(현종 11)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보령 현감(保寧縣監)을 역임하였으나 재임 중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순석(鄭順錫) 1546(명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정승훈(鄭承勳) 조선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흔(鄭 昕) 1578(선조 11)1626(인조 4) 발(撥)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거쳐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정에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전국의 장정(壯丁)을 모집하니, 공(公)은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모집에 응하여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힘썼다.

1604(선조 37)에 사량 만호(蛇梁萬戶)가 되어 왜군(倭軍)을 격퇴시키니 전라수사(全羅水使)로 승진되었고 첨정(僉正)․정선 현감(旌善縣監)․삼도 주사정리사(三道舟師整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정득교(鄭得蛟) 1593(선조 26)1652(효종 3)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정봉남(鄭鳳男) 신잡(申磼)의 문인. 1591(선조 24) 진사(進士)에 합격된 후 율봉 찰방(栗峰察訪)을 역임하였다.

정황남(鄭凰男) 신잡(申 磼)의 문인. 조선조(朝鮮朝)에 은일(隱逸)로 선공감영(繕工監役)에 천거(薦擧)되었다.

정공청(鄭公淸) ()는 수백(守伯), 시호(諡號)는 충의(忠義).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도 군수(珍島郡守)에 역임하였으며,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부자(父子)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안강(安康)․경주(慶州)․울산(蔚山)․동래(東來)․태천(態川)․부산(釜山) 등지에서 많은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정윤성(鄭胤成) ()는 원술(元述), ()는 양성당(養性堂). 조선(朝鮮)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도어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정운망(鄭雲望) 1617(광해군 9)1676(숙종 2) 득교(得嶠)의 아들. 조선 때 남포 현감(藍浦縣監)․순천진관 병마(順天鎭管兵馬)․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보성 군수(寶城郡守)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정연(鄭 淵) 1640(인조 18)1706(숙종 32) 운경(雲卿)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명천 도호부사(明川都護府使)를 지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정백기(鄭伯基) 1608(선조 41)1708(숙종 34) 자(字)는 사흠(士欽), 호(號)는 용암(龍岩). 흔(昕)의 아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회인 현감(懷仁縣監)․목운 판관(木運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원기(鄭遠基) ()의 아들.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혁(鄭 爀) ()는 회부(晦夫), ()는 긍구당(肯搆堂). 조선조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정지화(鄭之和) ()는 유경(有敬).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 書)를 역임하였다.

정희충(鄭希忠) 조선(朝鮮)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정구(鄭 球) ()는 경좌(卿佐), ()는 죽사(竹沙). 조선에서 학자(學者)로서 이름을 떨쳤다.

정두언(鄭斗彦) ()는 사정(士貞), ()는 취호재(鷺湖齎).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정응신(鄭應莘) ()는 야수(野叟), ()는 화은(花隱). 조선조(朝鮮朝)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임형(鄭林亨) ()는 향삼(享三), ()는 성석재(星石齋),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조선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정내경(鄭來慶)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지냈다.

정상헌(鄭尙獻) 조선 때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정상겸(鄭尙謙)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좌랑(禮曹左郞)을 지냈다.

정승빈(鄭升賓) 조선(朝鮮)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정선장(鄭瑄章) 조선에서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정하경(鄭河慶) ()는 만영(萬榮), ()는 망와(望窩). 1669(현종 10)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응교(應敎)․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정상업(鄭相業) ()는 지원(之元), ()는 백당(栢當).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칠순(七旬)인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3일이나 생명을 연장시켰으므로 향인(鄕人)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정문례(鄭問禮) ()는 화백(和伯). 조선조에 음보(蔭補)로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올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정석도(鄭碩道) 시호(諡號)는 무양(武揚),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첨사(僉使)를 역임하였으며, 무양공신(武揚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정이상(鄭爾尙) 백기(伯基)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서부 참봉(西部參奉)을 지냈다.

정이량(鄭爾亮) 백기(伯基)의 아들. 송시열(宋詩烈)의 문인.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지냈다.

정이원(鄭爾援) 백기(伯基)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수군 판관(水軍判官)을 지냈다.

정이회(鄭爾誨) 백기(伯基)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수군 판관(水軍判官)을 지냈다.

정두일(鄭斗一) 1652(효종 3)1738(영조 14) 자(字)는 천추(天樞), 호(號)는 수헌(睡軒). 선친(先親)의 뜻을 이어 받아 최초로 족보를 정리하고자 전국의 모든 종친(宗親)을 남원(南 原) 광한루(廣寒樓)에 모아 족회(族會)를 열고, 8도(道)에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송광사(松廣寺)에서 제유사(諸有司)로 추대되어 3권의 보(譜)를 간행하였다.

정제규(鄭齊奎) 1674(현종 15)1731(영조 7) 1693년(숙종 19) 통덕랑(通德郞)에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해미 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충무위 부호군(忠武衛副護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고, 1730년(영조 6)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덕진 수군첨절제사(加德鎭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정동악(鄭東岳) 1633(인조 11)1689(숙종 15) 자(字)는 차산(次山), 호(號)는 죽당(竹堂). 허목(許穆)의 문인. 성균관 장의(成均館掌儀)에 천거되어 김천도(金泉道)․경양도 찰방(景陽道察訪)을 지냈다.

정숙(鄭 璹) ()는 중기(重器), ()는 성재(省齋). 조선 인조(仁祖) 때 종사랑(從仕郞)으로 의령 훈도(宜寧訓導)를 지냈다.

정시휘(鄭時輝) 당대(當代)에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이 뛰어났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인중(鄭麟重) 1675(숙종 1)1721(경종 1) 자(字)는 숙수(叔脽). 이량(爾亮)의 셋째 아들. 남달리 총명하여 성년(成年)이 되기 전부터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며 19세에 경악(經幄)의 석보(碩輔)가 되었다. 1720년(숙종 46)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이르렀으며, 4대신(大臣) 조태채(趙泰采)․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이이명(李頣命)과 이홍술(李弘述)․이우항(李宇恒)․윤각(尹 殼)․이취장(李就章)․백시구(白時耈)․김시태(金時泰) ․심진(沈搢)과 사인(士人) 김용택(金龍澤)․이희지(李喜之)․이천기(李天紀)․심상길 (沈尙吉) 등과 함께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보호함에 생사를 가리지 않고 오직 의리(義理)로써 항거하다 화(禍)를 당했다.

1725(영조 1) 4대신(大臣)의 충절과 5사인(士人)의 절개(節槪)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 칭송을 받았고, 1802(순조 2)대사간(大司諫) 백사근(白師謹)의 상소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意)에 추증되었다.

정동윤(鄭東潤) 1696(숙종 22)1782(정조 6) 자(字)는 윤경(潤卿), 호(號)는 송재(松齎). 1735년(영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였으며,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정윤필(鄭潤弼) 1739(영조 15)1817(순조 17) 효성이 지극하고 친족(親族)에게 우애가 깊어 경주 영장(慶州營將)을 지낼 때 백운대(白雲臺) 시조(始祖 : 지백호)의 묘소 및 신라시대 열위(新羅時代列位) 묘소와 중시조(中始祖 : 문정공)의 묘소를 개봉(改封)하였으며 표석(表石)을 세웠고, 재실(齋室)을 건립하여 매년 10월 10일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였다. 후에 풍덕 도호부사(豊德都 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성현(鄭星炫) 1747(영조 23)1833(순조 33) 초명(初名)은 윤와(允萵), 자(字)는 준양(埈養).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빈(鄭 贇) 1747(영조 23)1810(순조 10) 백부(伯父) 인하(仁廈)에게 입양. 효성이 지극하여 손가락을 잘라 양부모님의 병환이 호전되게 하였으며, 미강서원(眉江書院)을 중수(重修)하였다.

고을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효행을 영읍(營邑)에 올리니 순찰사(巡察使) 한경이(韓競履)가 조정(朝廷)에 알려서 특별히 동몽교관 (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정무(鄭 珷) ()는 자윤(子潤), ()는 성재(省齋).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성현 찰방(省峴察訪)을 지냈다.

정준교(鄭俊僑) ()는 준언(俊彦).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익현(鄭益炫) 1745(영조 21)? 자(字)는 군양(君養), 호(號)는 칠성재(七星齋). 조선 때 문명(文名)이 높은 학자(學者)였다.

정대현(鄭大鉉) 1830(순조 30)1914 자(字)는 군중(君中), 호(號)는 성재(醒 齋). 이순영(李純榮)의 문인. 학문이 뛰어났으며 후배 양성을 위하여 서재계(書齋契)를 설립하여 훌륭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정진해(鄭鎭海) 1839(헌종 5)1907(순종 1) 초명(初名)은 진행(鎭行), 자(字)는 여오(汝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인동 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대구진관 병마동절제사(大邱鎭管 兵馬同節制使) 등을 지낼 때 청렴결백한 관직생활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정대섭(鄭臺燮) 1868(고종 5)1943 초명(初名)은 대훈(臺薰), 자(字)는 치수(致壽), 1902년(광무 6) 승훈랑(承訓郞)으로 평안도 관찰부주사(平安道觀察府主事)를 거쳐 판임관(判任官) 6등에 올랐다.

정규해(鄭糺海) 1890(고종 27)1970 초명(初名)은 종해(宗海), 자(字)는 치정(致正)․한조(漢朝), 호(號)는 명와(明窩) 윤응선(尹膺善)의 문인.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주경(主敬)․거송(去松)․구인(求仁) 세가지 안법(安法)을 깊이 체험한 대학자(大學者)이다. 음성(陰城)의 충룡사(忠龍祠)에 배향되었다.

정찬해(鄭纘海) 1899(광무 3)1970 자(字)는 치선(致善), 호(號)는 계은(溪隱). 정규해(鄭糺海)의 문인. 평생을 맹자(孟子)를 통독하고 대학(大學)의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정양재(鄭養齋)를 지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