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문경전씨시조(聞慶錢氏),전유겸(錢惟謙),문경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0 17:19 수정일 : 2019-08-19 15:0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전씨(錢氏)는 중국(中國) 팽성(彭城) 전욱(顓頊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임금)의 후예로 전(傳)하며, 「조선 씨족 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진(晉)나라 효제(孝帝) 때 사람인 전 단(錢 端)과 민제(愍帝) 때 사람인 전 봉(錢 鳳)의 지손(支孫)인 전 류(錢 鏐)가 오월국(吳越國 : 중국 오대 십국 중의 하나)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원(元)나라 순제(順帝) 때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 전유겸(錢惟謙)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행(陪行)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명성을 날림으로서 왕이 평장사(平章事)를 제수하였고, 최 영(崔 瑩) 장군의 누이와 혼인(婚姻)을 맺고 개성(開城)의 천장교(天章橋) 옆에 정착(定着)하여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전유겸(惟謙)은 그후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산(冠山 : 지금의 경북 문경 조령남쪽)에 들어가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자손(子孫)들이 그 곳에서 세거(世居)하면서 문경(聞慶)을 본관(本官)으로 하여 세계를 이었다.

문경(聞慶)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서쪽 끝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 이전에는 고사갈이(高思葛伊)라 하였으며 신라 초기에 관문현(冠文縣)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관산현(冠山縣)이라 고쳤다. 고려(高麗)초기에 문희(聞喜)라 하고 현종조(顯宗朝)에 상주(尙州)에 편입시켰다가 후에 문경(聞慶)으로 고쳤으며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문경현이 되었고, 1895(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인물로는 유겸(惟謙)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 현(玹)은 고려 말에 전서(典書)를 지내다 이성계(李成桂)가 우왕(禑王)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우며 최 영(崔 瑩)을 살해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만주(滿洲)로 유배되었으며, 둘째 진(珍)은 학문(學文)에 진력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고려의 유민임을 자처하여 문달(聞達)을 바라지 않았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진(珍)의 손자(孫子) 중재(仲才)가 무예에 뛰어나고 절의(節義)가 비범했으며,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금성대군(錦城大君 :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 단종(端宗)의 복위를 계획하는데 가담하였다가 탄로되어 함께 화(禍)를 입었다.

그 외 참판(參判)을 지낸 문헌(文獻)과 참의(參議)를 역임한 초독(初督)․취만(取萬) 그리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방윤(邦潤) 등이 훌륭한 업적을 남겨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문경전씨(聞慶錢氏)는 전국에 3,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문경전씨조상인물

전현(錢 玹) 고려말(高麗末)에 벼슬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는데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禑王)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우며 최영(崔 瑩)을 살해하는 난을 일으킬 때 아버지인 유겸(惟謙)이 이에 항거하다 유배되고 그도 연좌되어 만주(滿洲)로 유배 되었다.

전진(錢 珍) 자(字)는 중양(重陽). 학문을 닦아 문장이 뛰어났고, 고려(高麗)의 유민임을 자처하고 문달(聞達)을 바라지 않으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전유(錢 庾) 전서(典書) 현(玹)의 아들. 조선(朝鮮) 초에 벼슬하여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에 이르렀다. 양천진(陽天震)과 함께 중국(中國)에 사신(使臣)으로 들어갔는데 시조(始祖) 유겸(惟謙)의 형 호겸(好謙)의 아들 전수해(錢受海)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황제에게 아뢰어 그를 양자로 삼았다.

전중재(錢仲才) 자(字)는 일종(一宗). 무예에 뛰어나고 절의가 비범했다. 일찌기 순흥(順興)에 귀양갔었는데 무술로써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에게 인정을 받아 때마침 단종(端宗)의 복위를 계획하다 순흥(順興)으로 귀양온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처소의 물긷는 일을 맡겼다. 이유(李 瑜) 또한 그의 기개와 무예를 아껴 속죄시키고 순흥부(順興府)의 기관 (記官)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이보흠(李甫欽)이 회책하던 단종(端宗)복위에 가담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어 마침내 화를 입었다. 장릉별단(莊陵別壇)에 제향되었다.

전문헌(錢文獻) 자(字)는 영지(永之).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전세적(錢世積) 자(字) 처일(處一). 조선(朝鮮)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전약수(錢若洙) 자(字)는 심원(深遠).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전의민(錢宜民) 자(字)는 시보(施甫). 조선에서 사직(司直)을 지냈다.

전치우(錢致友) 자(字)는 교우(交友). 조선(朝鮮) 때 사복시사(司僕시事)를 역임했다.

전수직(錢守直) 조선(朝鮮)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전인좌(錢仁左) 자(字)는 절사(節士). 가화(家禍)로 서울에서 전전하다 김창집(金昌集) 문하에 의탁하였다. 그후 이수민(李壽民)을 따라 통영(統營)의 막중(幕中)에 있었는데 때마침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김창집(金昌集)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자, 이수민(李壽民)이 그를 시켜 배소까지 배웅을 했는데 탄로되어 이수민(李壽民)은 하옥되고 그도 붙잡혀 배후를 대라고 친국 (親鞫)을 당했으나 “오직 죽음이 있을 뿐 어찌 살기를 바라고 착한 사람을 무고하겠습니까?”하고 혀를 깨물어 자결했다.

전상곤(錢象坤) 조선(朝鮮)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전초독(錢初督) 자(字)는 석휘(錫輝).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전취만(錢取萬) 조선(朝鮮)에서 참의(參議)를 지냈다.

전방윤(錢邦潤) 조선(朝鮮) 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였다.

전승천(錢承天)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전선석(錢善石) 조선(朝鮮)에서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전종록(錢鍾錄) 자(字)는 대흥(大興).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전영록(錢永錄) 자(字)는 원흥(元興). 조선(朝鮮) 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전동일(錢東一) 자(字)는 문조(文兆). 조선조(朝鮮朝)에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전동익(錢東翊) 자(字)는 약산(若山).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전방원(錢方圓)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전부옥(錢富玉) 자(字)는 성수(聖壽).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전익민(錢益珉) 자(字)는 관일(貫一). 조선(朝鮮) 때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다.

전귀성(錢貴成) 자(字)는 치성(致成). 조선(朝鮮)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전우백(錢佑伯) 자(字) 명직(明直). 조선조(朝鮮朝)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전익지(錢翼之) 자(字)는 응심(應心).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전진문(錢進文) 자(字)는 덕현(德賢).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전진한(錢鎭漢) 1928년 일본(日本)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경제과(經濟科)를 졸업, 대한민국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내고, 1, 2, 3, 4, 6 민의원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