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담양전씨(潭陽田氏),담양전씨시조,전득시(田得時),담양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0 15:45 수정일 : 2019-08-28 11:12

시조 본관의 유래

담양전씨(潭陽田氏)의 시조(始祖) 전득시(田得時)는 고려 때 누대(累代)에 걸쳐 담양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 온 고을 향리(鄕吏)의 아들로 태어나 1155(의종 9) 현량(賢良)으로 천거되고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낸후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득시(得時)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담양(潭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6(六世)까지 독자(獨子)로 내려오다가 희경(希慶)의 아들 3형제 대()에서 맏아들 녹생(祿生)은 야은공파(埜隱公派), 둘째 귀생(貴生)은 뇌은공파(耒隱公派), 셋째 조생(祖生)은 경은공파(耕隱公派)로 갈리었다.


그 후 녹생(祿生)이 고려말의 명현(名賢)으로서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문하평리(問下評理) 등을 지내고 문신(文臣)이면서도 무예(武藝)에 뛰어나 문무전재(文武全材)란 칭을 받았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

고려 말에 삼사 좌윤(三司左尹)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한 그의 아우 귀생(貴生)과 참지정사를 역임한 조생(祖生)은 모두 문장(文章)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3형제가 함께 명성을 날렸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開國)하자 귀생(貴生)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며 누차 벼슬할 것을 권유받자 절해고도(絶海孤島)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생(祖生)은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절개를 지킴으로서<두문동 72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올랐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가리켜<삼은전선생(三隱田全生)>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전라남도 담양읍(全羅南道潭陽邑) 향교(鄕校) 앞에 <삼은전선생유허비(三隱田善生遺墟碑)>가 전해지고 있다.


담양 전씨(潭陽田氏)는 이들 3형제 후손에서 많은 인물(人物)이 배출되었는데 야은공파(埜隱公派) 녹생(祿生)의 후손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우()가 이율곡(李栗谷)송시열(宋時烈)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뇌은공파(耒隱公派)에서는 귀생(貴生)의 아들 한()이 중랑장(中郞將), 손자 묘()가 소윤(少尹)을 역임했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가종(可種)이 군수(郡守), 가식(可植)이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으며 구주(九疇)는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춘추관 지제교(春秋館知製敎)까지 지낸 후 문명(文名)을 날렸다.

경은공파(耕隱公派) 조생(祖生)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순()()()()가 뛰어났으며, 세조(世祖)때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로 하음군(河陰君)에 봉해진 균()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역임한 여림(汝霖), 보령 현감(保寧縣監)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삼옥태수(三玉太守)란 칭송을 들은 벽(), 임진왜란 때 아들 득우(得雨)와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된 윤()등이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담양전씨(潭陽田氏)는 남한(南韓)155,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담양(潭陽)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고, 995(고려 성종 14)에는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후에 담양으로 고쳐서 나주(羅州)에 소속시켰다. 1199(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공양왕 3)에는 율원현(栗原縣)을 병합하였다.

1395(태조 4)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399(정종 1)에 부로 승격하고, 1413(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나, 1728(영조 4)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1895(고종 32)에 담양군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1914년에 창평군(昌平郡)이 폐지되자 담양군(潭陽君)에 병합되었다. 1943년에 담양면이 담양읍(潭陽邑)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