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남양전씨시조(南陽田氏),전풍(全豊),남양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9 22:21 수정일 : 2018-03-21 20:39

남양전씨의 연원(南陽田氏의 淵源)

남양전씨는 13981차 왕자의 란과 14002차 왕자의 란 때 의흥3군부(義興三軍府)소속 진무소 진무(鎭撫所 鎭撫)로서 절제사 정안군 이방원 휘하군영(節制使 靖安君 李芳遠 麾下軍營)의 도진무(道鎭撫)가 되어 군공(軍功)을 세워 기가(起家)의 발판을 세운 경호공 휘흥 (敬胡公 諱興)1411년 정사, 좌명 원종 1등 공신(定社, 佐命元從一等功臣)에 책록됨으로서, 남양전씨 최초의 가보(家譜)가 비로소 작성되었으며 1434년 공()의 장남 휘가생공(諱稼生公)이 알성방을과2(謁聖榜乙科二等), 차남 휘주생공(諱稠生公)은 을과 3(乙科三等)에 형제가 나란히 급제(及第) 요직에 중용(重用)되면서 1455년 좌익원종2등공신(佐翼原從二等功臣) 으로 각각 책록됨에 따라 태종세조(太宗世祖)때 공신출신훈구가문(功臣出身勳舊家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후 남양전씨 종손가(宗孫家) 후손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세전(世傳) 되어 온 이 가보(家譜)에 선고(先考)의 사적(事績)과 각지파(各支派)의 파조(派祖)만을 가필증보(加筆增補)하여 필기본(筆記本)으로 작성 전래되어왔는데 이 가보가 임진란 병화(壬辰亂兵禍)로 소실(消失)되었다고 한다.

그 후 종파(宗派)와 각지파(各支派)에서 작성한 수본(數本)의 가계보(家系譜)가 있었는데 이 수본의 가계보를 근거로 1774년 영조(英祖) 50년에 편찬(編纂)된 창간 갑오보(創刊 甲午譜)에 의하면 시조공 휘풍(始祖公 諱豊)은 원래 중국한림원학사(中國翰林院學士)였는데 선제(先帝) 실록 편찬시(編纂時) 선제(先帝)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 그 송덕문(頌德文)을 잘못썼다(誤書玉冊)는 모함으로 유배(流配)되었는데 혹독한 탄압에 배소(配所)를 떠나 스스로 고려(高麗)로 건너와 남양(南陽:경기도)땅을 소거지(所居地)로 삼아 살다가 그 곳에서 타계(他界) 하시였다. 기록무전(記錄無傳)으로 생졸년도(生卒年度)를 알 수 없으며 묘()가 경기 남양(南陽) 땅에 있다고 전하나 찾지 못해 실묘(失墓) 되었기에 부득이 후손들이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소재 파진산 남록 (扶餘郡 石城面 鳳亭里 所在 波鎭山 南麓)에 건좌(乾坐)로 설단하여 매년 음 10월에 제향(祭享)해 오고 있다.

한편 고려 조정(高麗 朝廷)에서는 시조공 휘풍(諱豊)이 중국 한림원 학사(中國 翰林院 學士)로서 선제실록편찬시(先帝實錄編纂時) 옥책(玉冊)을 기술한 학자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여 시조공의 소거지(所居地)였던 남양(南陽)을 연고(緣故)로 남양군(南陽君)에 증작(贈爵)하였기에 후손들이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된 연유(緣由)가 되었던 것이다.

남양전씨의 선세와 가문(南陽田氏先世家門)

남양전씨 창간보(創刊譜)에 의하면 시조공 휘풍(諱豊) 이하 고려말의 휘주 공(諱柱公) 의 윗대세계(世系)는 세대(世代)가 멀고 문적(文籍)을 고증(考證) 할 수 없어 분명치 않아 4세대실전(四世代失傳)으로만 기록되어있고 시조공 휘풍(諱豊)의 소거지(所居地)였던 남양(南陽)도 세대를 거치면서 자손들의 이향(離鄕)과 종손가(宗孫家)의 무사(無嗣)로 남양전씨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경호공 휘흥(敬胡公 諱興)이 의흥 3군부(義興三軍府)의 진무소 진무(鎭撫所 鎭撫)로서 절제사 이방원(節制使 李芳遠)의 휘하군영 도진무(麾下軍營 道鎭撫)로 있을 때 군공을 세워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이 등극(登極)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즉위(卽位) 후에는 중군호군(中軍護軍), 순금사장무 겸 대호군(巡禁司掌務 兼 大護軍), 의금부 제조(義禁府 提調)등의 무관직(武官職)에 있으면서 왕권신장(王權伸張)에 충성으로 시종(侍從)한 충의지신(忠義之臣)이 되었다. ()의 이와 같은 공적(功績)1411년 정사, 좌명 원종 1등 공신(定社, 佐命 元從 一等 功臣)에 책록되는 근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공의 부친이신 휘득우공(諱得雨公)1427년 세종 9, 가선대부 한성 부윤(嘉善大夫 漢城府尹)에 증직(贈職) 되어 준예장(準禮葬)으로 치제(致祭) 되었는데 그 묘역(墓域)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충청남도 지방 문화재 기념물 제 25호로 지정 되어 있다.

경호공 휘흥(諱興)을 비롯 공()의 두 아들 휘가생공(諱稼生公) 과 휘주생공(諱稠生公) 삼부자(三父子)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 되어 공신출신 훈구가문(功臣出身 勳舊家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어 좌익원종 2등공신 휘주생공(佐翼原從 二等功臣諱稠生公)의 아들로서 무과(武科)에 올라 1508년 포도대장(捕盜大將) 150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를 역임한 휘림공(諱霖公)은 직무를 집행함에 있어 공정무사(公正無私), 청렴결백(淸廉潔白), 엄핵조율(嚴覈照律)의 강직(剛直)한 인품을 지닌 청백이(淸白吏) 였기에 1509년 중종(中宗)이 시호(諡號)를 위절(威節)이라 내렸으니 훈구가문의 가명(家名)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또한 좌익원종2등공신 휘가생공(佐翼原從二等功臣諱稼生公)의 아들 휘지공(諱漬公)1505년 충순위 어모장군(忠順衛 禦侮將軍) 에 장손 휘우평공(諱禹平公)1515년 충순위 보공장군(忠順衛 保功將軍)에 이르렀으며 전우치전(田禹治傳)의 주인공인 넷째손자 휘우치공(諱禹治公)은 빈민(貧民)을 구제키 위한 자신의 도술행각(道術行脚)이 왕을 속인 죄와 혹세무민(惑世誣民) 죄에 걸려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화가 가문(家門)에 미칠 것이 염려되어 부친의 묘비를 외딴곳에 묻어버렸고 세분 형()들은 비오지지(秘奧之地)에 평장(平葬)되어 수대(數代)를 내려왔기에 실묘실비(失墓失碑) 되는 영락(零落)의 가문이 될뻔한 위기도 있었다. 보공장군 휘우평(保功將軍諱禹平) 의 아들 휘화(諱華)는 진사사마방(進士司馬榜)에 올라 훈도(訓導)였고 훈도공의 장자 휘경업공(諱敬業公)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공조정랑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둘째아들 휘홍업공(諱洪業公)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공조 정랑 휘경업공(諱敬業公)의 장남 휘탄공(諱坦公)은 사재감주부 (司宰監主簿)를 지냈으며 부호군 휘돈(副護軍諱墩)의 장남 한호공 휘석규(閒湖公 諱錫圭)1612년 진사 사마방(進士司馬榜)에 합격 했으나 벼슬에는 뜻이없고 성현지학풍(聖賢之學風)과 학행(學行)을 본 받아 종사하기로 결심 사계 김장생 선생(沙溪金長生 先生)의 문인(門人)이 되어 마침내 대유 (大儒)가 되어 한호정사(閒湖精舍) 를 세워 후학들을 교화훈도(敎化訓導) 하시였다. ()의 학덕(學德)을 앙모(仰慕)하는 유림(儒林)에서는 향현사(鄕賢祠)를 봉호(蓬湖) 북쪽에 세워 공()의 제향(祭享)을 모시였고 공()은 홍유지사(鴻儒志士)가 되었다. 또한 공()의 장남 현감공 휘해(縣監公 諱瀣)1624년 생원 사마방(生員 司馬榜)에 합격한 후 신독재 김집선생(愼獨齋 金集先生)의 문인(門人)이 되어 문장(文章)과 품행을 겸비하였고 통훈대부(通訓大夫) 로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처 1656년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역임하였다. 현감공의 손자 휘치(諱穉) 의 장남 휘수원공(諱遂元公)은 그 아우 휘수형공(諱遂亨公) 과 같이 1740년 영조(英租) 16년 증광생원사마방(增廣生員司馬榜) 에 나란히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학문만을 오로지하여 예학자로서 그 이름이 높았다. 한편 장사랑 휘석형공(將仕郞 諱錫珩公)의 손자 휘만성공(諱晩成公) 휘보성공(諱甫成公) 휘수성공(諱守成公) 3형제는 지극한 효자였는데 그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해 향리(鄕里)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그 효를 표창하였다. 현감공 7대손 휘영환공(諱榮煥公)8대손 휘기봉공(諱基鳳公)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과 용양위 사과직(龍驤衛 司果職)을 장사랑 휘항공(將仕郞諱沆公)7대손 휘장환공(諱章煥公)은 용양위부사과직(龍驤衛副司果職)을 역임한바 있다.

이와 같이 16세기 이래 남양전씨(南陽田氏) 는 조선초엽(朝鮮初葉)처럼 벼슬과 명망이 들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공신출신(功臣出身) 훈구가문(勳舊家門)의 후손으로서 중,소 관직에 이어 문장과 학문으로 대를 이었으며 위친경장(爲親敬長)의 숭조정신(崇祖精神) 을 가문의 근본으로 삼아왔기에 남양전씨 소장 고문서중(南陽田氏 所藏 古文書中) 27종이나 보물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고문서 보호각(保護閣)과 관리사(管理舍)를 건립하여 주었고 여타 부대시설공사는 진행중에 있다. 또한

1985년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성씨 및 본관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남양전씨는 남한(南韓)에서만 3007가구에 13,368명이 살고있어 전씨성(田氏姓) 가운데 2위를 차지하고있는 가문(家門)이 되어 있기도 하다.

추기(追記)

한국족보대전(韓國族譜大典)1989.3.15발행

한국인의 족보(韓國人族譜)1991.5.10발행

성씨의 고향(姓氏의 고향) 1989. 2.28발행

위 서책에 등재 되어있는 남양전씨(南陽田氏) 상계(上系)기록은 사실과 다르게 왜곡 (歪曲)되어있는 허위(虛僞)임을 여기에 첨언(添言) 하여둔다.

남양전씨 대종회(南陽田氏 大宗會)

역 대 인 물

조선시대인물(朝鮮時代人物)

전득우(田得雨) 생졸갑년미상 아들 흥()1411년 정사, 좌명 원종 1등공신(定社, 佐命 元從 一等 功臣)에 책록됨에 따라 원종공신에 대한 포숭법(褒崇法)에 의해 간선대부 한성부윤(嘉善大夫 漢城府尹)에 증직(贈職) 되어 준예장(準禮葬) 되었는데 묘계(墓界)에 설치된 하사비(下賜碑)와 호석(護石), 판석(板石), 석벽(石壁), 석상(石像) 등이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충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