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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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09 16:09 수정일 : 2022-04-26 16:18

옥천전씨시조 및 옥천전씨유래(본관)

옥천 전씨(玉川全氏)의 관조(貫祖) 전유(全侑)는 환성군(歡城君) 전 섭(全 聶 : 전씨의 도시조)의 27세손(世孫)으로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판도판서(版圖判書)․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관성(管城 : 옥천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정선 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옥천(沃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기에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불렸으나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관성군(管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예속되었다가 인종(仁宗) 때에 현(縣)이 되었다. 1181년(명종 12)에 일시 폐현되기도 하였으나 1313년(충선왕 5) 주(州)로 승격, 옥주(沃州)라 했고 경산부의 소속인 이원(伊源)․안읍(安邑)․양산(陽山)의 3현(縣)을 받아들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옥천으로 개칭하고 관할도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변경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는 군이 되었고, 1914년에는 신라시대에 굴산현(屈山縣)․기산(耆山)으로 불리었던 청산군(靑山郡)을 병합하고, 학산면(鶴山面)․용화면(龍化面)․양산면(陽山面)은 영동군(永同郡)에 이관하였다. 1929년에는 이내(伊內)․이남(伊南) 두 면을 합하여 이원면(伊院面)으로 하고 청서(靑西)․청남(靑南) 두 면을 합하여 청성면(靑城面)으로 개편하였으며 1949년에는 옥천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高麗)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지()와 판도판서(版圖判書) ()이 유명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는 희철(希哲) 과 청백리(淸白吏)에 팽령(彭齡), 여림(汝霖)의 아들 식()이 뛰어났다.

 

희철(希哲)은 조선 세종(世宗) 때 생원(生員)으로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단종(端宗)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였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에서 죽자 삼년상(三年喪)을 지냈으며, 임종(臨終) 때에는 자손(子孫)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영월에 찾아가 단종릉(端宗陵)에 참재하라고 유언(遺言)했다고 한다.

 

그 뒤 인조(仁祖) 때에 와서 익희(益禧)가 그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방산서원(方山書院)과 공주(公州)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하였다.

 

팽령(彭齡)은 조선조 명종(明宗) 때에 청백리(淸白吏)에 선정 되었다. 1504(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24(중종 19)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와 공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한 뒤, 이어서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성균관사성· 통례원우통례· 평안평사· 단천군수, 삼척과 밀양의 부사를 역임 하 였다. 1550(명종 5)에 상주목사로 나가 청렴한 치정을 하여 청백리의 별칭인 염근(廉謹)에 선발되어 통정(通政)에 특승되었다. 1559년에 가선(嘉善)에 승직, 부호군이 되었으며, 1765(영조41) 지역의 유림(儒林)과 옥천전씨(沃川全氏) 후손들이 목담서원(鶩潭書院)에 배향하였다.]

 

()은 류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고 1603(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의 실정(失政)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 준(李 埈) 등과 산수(山水)를 유력(遊歷)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등용되어 기주관(記注官)지제교(知製敎) 등을 겸했으며, 병조 참의(兵曹參議)병조참지(兵曹參知)에 이르러 이 귀(李 貴)와 장 만(張 晩)의 실책을 논책한 후 낙향(落鄕)했다가 1628(인조 6)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되었으나 번번히 사퇴하였는데, 뒤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충간(忠簡)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배향되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인조(仁祖) 때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 뛰어났던 명룡(命龍)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며, ()의 아들인 익희(益禧)는 인조(仁祖)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있으면서 권신(權臣) 김자점(金自點)의 죄를 탄핵하다가 외직(外職)으로 물러났으나, 당시 왕에게 올린 상소문(上疏文)은 조선조(朝鮮朝) 정치사(政治史)에 백미(白眉)를 이루었다.

 

1641(인조 19)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장흥(長興)선산 부사(善山府使) 등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고 서예(書藝)에도 능통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殉節)한 극항(克恒)은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李曹參判)을 역임한 황()은 부사(府使)를 역임한 유담(有淡), 목사(牧使)를 지낸 룡(), 도사(都事) 충립(忠立)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옥천전씨(沃川全氏)는 남한(南韓)에 총 47,6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천전씨(沃川全氏)-옥천전씨조상인물

옥천전씨(沃川全氏)-옥천전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전유(全 侑) (13141330) : 봉인대부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版圖)판서(判書)를 역임하였으며 나라에 크게 공업(功業)이 있어 관성군(管城君)에 피봉(皮封)되었다. 관성(管城)은 지금의 옥천(沃川)으로 후손(後孫)들이 관향(貫鄕)으로 정하고 분관지(分貫地)로 삼았다.

전광운(全光韻) (1345) : 정의대부 판비서감사 이부전서(吏部典書)를 역임했다.

전숙(全 淑) (13451393) :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관성군(管城君)에 피봉(皮封)되었다.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다함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성(管城:옥천)으로 낙향하여 문선동에 은거(隱居)하면서 고절(高節)을 지켰으며 향수(享壽) 101세로 별세하여 세인들이 공이 기거(起居)하던 기사천(棄仕川)을 기사천(耆士川)으로 지명의 이름을 바꾸었다.

전비(全 備) : 봉산대부 사수시 소경(小卿)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인물

전도(全 都) : 조봉대부 전의 첨정을 역임했다.

전오이(全五二)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호군(護軍)을 역임했다.

전오례(全五禮)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했다.

전오용(全五用) : 남해(南海)현령(縣令)을 역임했다.

전례(全 禮) (13971428) : 선차지인 가각부록사를 역임했다.

전지(全 智) (13991465) : ()는 성함(聖涵)이고 호()는 농수(農叟)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 후 여러 관직(官職)을 거처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전림(全 林)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사직(司直)을 역임했다.

전효순(全孝順) (14331508) :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청석현감(靑石縣監)을 역임했다. 재임중 선정을 배풀어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져 있다.

전희문(全熙文)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전희식(全希軾)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전희로(全希輅) : 함열(咸悅)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전희철(全希哲) (14251521) : ()는 원명(元明)이고 호()는 휴계(休溪)이다. 세종조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사직(司直) 등 여러 관직을 거처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상호군(上護軍)과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수양대군 이유(李瑜)가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성삼문 등 사륙신(死六臣) 등과 뜻을 같이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해 영천(榮川:영주)으로 이거(移居)하여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단종이 승하(昇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인 영월쪽으로 향하여 3년간 조복(弔服)을 향배(向拜)하였다. 계룡산(鷄龍山) 동학사 내() 숭모전(崇慕殿)과 방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전명형(全命亨)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전원말(全元末)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전현(全 玹) :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전호(全 琥) (1495) : ()는 국진(國珍)이고 내자시(內資寺)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전팽수(全彭壽) (14781538) : ()는 중노(仲老)이고 호()는 송오(松塢)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 () 여러 관직(官職)을 거처 사섬시(司贍寺) ()과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과 숙천(肅川)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전팽령(全彭齡) (14801560) : ()는 숙노(淑老)이고 호()는 송정(松亭)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 후 형조(刑曹) 좌랑(佐郞) () 여러 관직을 거처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과 밀양 및 상주 목민관을 거쳐 예조참판을 역임했다.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어 00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져 있다.

전황(全 煌) : 문과(文科)에 등과(登科) ()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역임했다.

전엽(全 燁) (15051583) : ()는 용회(用晦)이고 호()는 쌍암(雙岩)이다. 공조좌랑 이산현감을 역임했다.

전주(全 宙) (1501) : ()는 태허(太虛)이고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홍원현감을 역임했다.

전빈(全 賓) (15281573)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전승업(全承業) (15471596) : ()는 효선(孝先)이고 호()는 인봉(仁峰)이다.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동몽(童蒙)교관(敎官)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과 함께 보은 청주 당진 금산 등지에서 격전(激戰)분투(奮鬪)하다가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전유담(全有淡) (15411610) :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한 후() 여러 관직(官職)을 거처 정주목사를 역임했다.

전대형(全大珩) : ()는 명보(明甫)이고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전오륜(全五倫) :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한 후() 파주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전관(全 寬) : 공산(公山) 현령(縣令)을 역임했다.

전식(全 湜) (15631642) : ()는 정원(淨遠)이고 호()는 사서(沙西)이다. 임진왜란 시 창의(倡義)하여 공이 많았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예조정랑,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교리(敎理), 응교(應敎), 부제학(副提學)을 거처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6조의 참의(參議) 참판(參判)을 역임하였으며 기로소(耆老所) 당상(堂上)에 올랐다. 임진왜란 원종공신으로 책록되고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전익희(全益禧) (15981659) : ()는 자유()이고 호()는 설월당(雪月堂)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 ()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형조(刑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정랑(正郞), 당진 봉산 현감, 전라 충청 도사(都事)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거쳐 장흥 선산부사를 역임했다.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고 00에 거사비가 세워젔다.

전룡(全 龍) : 정주목사를 역임했다.

전극경(全克慶) (15771657)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전충립(全忠立) (15821654) ()는 행우(行佑)이고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전극태(全克泰) (16401696) : ()는 형숙(亨叔)이고 호()는 퇴헌(退軒)이다.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와 삼가(三嘉) 현감(縣監), 의성(義城) 현령(縣令)을 역임했다.

전극항(全克恒) (15901636) : ()는 덕고(德古)이고 호()는 규천(虯川)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 () 예문관(禮文館) 검열(檢閱),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예조참판 재임시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대왕을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할 때 호종(扈從)을 하였으며 왕명(王命)을 받들고 한성(漢城)으로 입성(入城)할 때 적과 싸우면서 입성을 완료한 후 왕 앞에서 순절하였다. 상주(尙州)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전재관(全在寬) (16201692) : ()는 유필이고(裕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전욱(全 煜) : ()는 중회(中晦)이고 이천 도호부사를 역임했다.

전명량(全命亮) (16401668) : ()는 자룡(子龍)이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호군(護軍)을 역임했다.

전명룡(全命龍) (16061667) : ()는 백유(伯兪)이고 호()는 영서(西)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 () 평양(平壤)서윤(庶尹), 영해(寧海)부사(府使), 공조(工曹)정랑(正郞)겸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공조(工曹)참판(參判)을 거쳐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로 녹선(祿選)되었다.

전명기(全命夔) (16171676) : ()는 계유(季兪)이고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전명원(全命元) (6271713) ()는 군거(君擧)요 호()는 죽림(竹林)이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전종옥(全宗沃) (16561745) : ()는 조백(朝伯)이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호군(護軍)을 역임했다.

전상순(全相舜)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전명환(全明煥) (18601907) : ()는 윤문(允聞)이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