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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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09 14:06 수정일 : 2019-07-30 12:11

천안전씨시조 본관의 유래

천안전씨(天安全氏)의 관조(貫祖)는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 : 환성군)의 후손(後孫)인 전낙(全樂)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낙()은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를 지냈고 천안군(天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천안(天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천안(天安)은 충청남도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려 태조가 백제(百濟)의 대목악(大木岳)․탕정(湯井)․사산(蛇山) 3고을의 땅을 떼어서 천안부(天安府)를 설치하였다. 성종(成宗) 때 환주(歡州)로 개칭하고, 목종(穆宗) 때 군영(軍營)과 부()를 폐지하였으나, 현종(賢宗) 때에 다시 부로 환원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 영주(寧州)로 개칭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천안부로 환원하였다. 1413(태종 13)에 천안부를 군수도(郡守都)로 책정하여 영산군(寧山郡)이라 개칭하고 1416(태종 16)에 천안으로 다시 고쳤다. 1936년 천안읍으로 승격되고, 1963년에 천안시(天安市)로 승격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홍 술(洪 術)이 고려조(高麗朝)에 서 문하시중 평장사(文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영산군(寧山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충우(忠佑)는 환계군(歡溪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충우(忠佑)의 손자(孫子) 인량(人亮)1211(희종 7)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제수(際授)되고 은 자관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책록되었으며, 귀국 후 천양군(川陽君)에 봉해져서 영평군(寧平君)에 봉해진 아들 단(), 지공거(知貢擧)에 오근 승()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의 아들 신()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숭경부승(崇慶府丞)․대제학(大提學)․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등을 거쳐 충혜왕(忠惠王) 때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올랐으며 상의회의 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지냈다.

한편 충목왕(忠穆王)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낸 윤장(允藏)1348(충목왕 4)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이학도감 판사(二學都監判事)를 겸했으며, () 나라에 가는 강릉대군(江陵大君:공민왕)을 시종한 공()으로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싸움에서 순절한 계종(繼宗)이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몽성(夢星)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아우 몽(夢辰), 김덕흡(金德洽)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수차에 걸쳐 왜적을 무찔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용() 의 아들 상의(尙毅)는 인조(仁祖) 때 좌영장(左營將)을 역임 중 건주(建州)의 야인(野人)이 안주성(安州城)을 포위하자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 준(金 浚)과 함께 이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안주(安州)의 충민사(忠愍祠), 광주(光州)의 충민사(忠愍祠), 경렬사(景烈祠),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용병(用兵)에 능하여 이상진(李尙眞)․소두산(蘇斗山)과 더불어 「삼걸(三傑)」로 불리웠던 동흘(東屹), 현종(顯宗)7(七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두루 역임한 후 숙종(肅宗) 때는 총융사(摠戎使)와 훈련대장(訓練大將)을 지냈는데 여러고을을 잘다스려 칭송을 받았으며, 철산(鐵山)에 부임하여 억울하게 죽은 장화(薔花)․홍련(紅蓮)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오위장(五衛將) 등을 지낸 기윤(基允)<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웠던 봉준(琫準)이 가문을 빛냈다.

1854(철종 4) 전북 태인(全北泰仁)에서 기창(基昶)의 아들로 태어나 봉준(琫準), 아버지가 민란(民亂)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동학(東學)에 입문(入門)하여 접주(接主)가 되어 당시 고부 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백성(百姓)의 고혈을 짜는 것을 보고 분기(奮起)하여 동학난(東學亂)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당시 국가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히고 수차례에 걸쳐 전국(全國)을 돌며 조직 강화에 힘썼으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조선에서의 침략 행위를 더해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 다시 봉기하여 대일전(對日戰)을 확대했으나 일본군(日本軍)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하고 수명의 동지들과 순창(淳昌)에 피신하던 중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수용(垂鏞)이 의병장(義兵將)으로 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하여 무공을 떨쳤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建國功勞勳章復章)이 수여되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천안전씨(天安全氏)는 남한(南韓)176,2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안전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전홍술(全洪述) : 시호(諡號)는 무민(武敏).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평장사(文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영산군(寧山君)에 봉해졌다.

전충우(全忠佑) :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평장사(文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환계군(歡溪君)에 봉하여졌다.

전세주(全世柱) :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고려 때 태상시 소경(太常寺少卿)을 지냈다.

전인량(全仁亮) : 시호(諡號)는 무절(武節). 1211(희종 7)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한림학사(漢林學士)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제수(除授)되었고, 환국(環國)후 천양군(天陽 君)에 봉하여졌다.

전단(全 旦) : 1239(고종 26)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거쳐 판공부상서(判工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영펑군(寧平君)에 봉하여졌다.

전승(全 昇) : 시호(諡號)는 문효공(文孝公). 1297(충렬왕 23) 우부 승지(右副承旨)가 되고, 이듬해 충선왕(忠宣王)이 잠시 집권한 동안 숭문관 학사(崇文館學士)․병조상서(兵曹尙書)와 우부승지(右副承旨)․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지냈으며, 130 0(충렬왕 26)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전참(全 旵) : 고려 때 문하시중평장사(文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전후(全 煦) : 고려에서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전익(全 翊) : 고려(高麗)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전여(全 呂) : 시호(諡號)는 강숙(康肅). 고려(高麗) 때 도평군(도平君)에 봉해졌다.

전신(信) : 1276(충렬왕 2)~1339(충숙왕 복위 8) 자(字)는 이립(而立), 호(號)는 백헌(栢軒), 시호(詩號)는 문효(文孝). 밀직부사(密直副使) 승(昇)의 아들. 1300년(충렬왕 26) 문과(文科)에 급제, 이듬해 숭경부승(崇慶府丞), 이어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339년(충혜왕 즉위)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오르고, 이어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올라 1332년 사직했다.

전영좌(全永佐) : 고려조(高麗朝)에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전희(全 熙) : 고려(高麗)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전성안(全成安)고려에서 수원 부사(水原附使)를 지냈다.

전의(全 義) : 고려조(高麗朝)에 감찰(監察)을 지냈다.

전희안(全熙安) : 고려(高麗) 때 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전문식(全文軾) : ()는 도은(都隱), 시호(諡號)는 문평(文平). 고려(高麗)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전덕방(全德芳)  : 전서(典書)를 역임했다.

 전윤장(全允藏)  : 1341(충혜왕 복위 2) 대호군(大護軍)으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금()․은()을 바쳤고, 이듬해 상호군(上護君)으로 있으면서 앞서 조 적(曹 頔)의 난 때의 공으로 2등공신에 올랐다.

1343년 우상시(右常侍)로 서해 평양도순위사(西海平壤道巡慰使)를 겸임, 1347(충숙왕 3)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교주도 도순문사(交州道都巡問使)가 되어 쌍성(雙城 : 영흥)의 인구를 조사하고, 이듬해 첨의 참리(僉議參理)로서 이학도감 판사(吏學都監判事)를 겸하였다. 1349(충정왕 1) 원나라에 가는 강릉대군(江陵大君 : 공민왕)을 시종한 공으로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전천근(全天近) :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전신민(全新民)  :  (1390-1352)호 서은(瑞隱) 북도 안무사 병마원사로 공을 세워 병부상서에 오르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의군의 층절을 지키기 위하여 서석산(무등산)에 낙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전사민(全思敏)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전근(全 謹) : 군수(郡守)를 지냈다.

전교(全 晈) :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전염(全 念) : 곡산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전호(全 皓) : 동래 부사(東來府使)를 역임하였다.

전순도(全順導) : 평창 현령(縣令)을 지냈다.

전인귀(全仁貴) : 지전의감 호군 정난원종공신3등 책녹되었다.

전순의(全循義)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시대에 이의 전의감(2) 자헌대부 정란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세 종의 왕명으로 김수온 등과 함께 의방유취266(동양최대의 의학보전) 식료찬요, 침구택일 편집, 산가요록(우리나라(最古)의 농서와 조리서로서 국보급 문화재)을 저술하였음. 공은 뛰어난 의학자요, 식품학장요, 침구에 능 한 의사요, 천문학에 능한 조선시대를 통하여 몇 안 되는 위대한 과학자이다

전구생(全俱生)자 성태(聖泰) 호 석천(石泉)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전순생(全順生)자 경순(敬順) 호 우제(愚齊) 등과 후오위부사정을 거쳐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전중해(全仲海)무과에 등과 후 평산도호부사, 항해도 병마절제사를 거쳐 특명권 농사를 역임하고, 환도제조기준을 정하다.

전상례(全尙禮)태안 현감을 역임하였다.

전자명(全自明)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전찬(全 贊)관상감재(상지관)를 역임하였다.

전자완(全自完) : 병마우후와영해부사를 역임하고 정난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전철석(全鐵石) : 정난원종공신 3등에 책록 오위 호군을 역임하였다.

전계원 : 정난원종공신2등에 책록되고 상호군, 첨지주추부사, 절충장을 역임하였다.

전유(全有孫)정난원종공신3등으로 책록되고 홍문관 박사를 역임하였다.

전유선(全有先)정난원종공신2등으로 책록되고 담양현 감을 역임하였다.

전영수 : 정난원종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군수를 역임하였다.

전사민(全思敏) :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전사미(全思美)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전사례(全思禮)세조 때 목천신공록사 재임 중(79세) 천안혹은 온양으로 천도하는 상소를 하였다.

전극례(全克禮) : ()는 낭헌(浪軒).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전자온(全自溫) : ()는 송당(松堂). 사간(司諫)을 지냈다.

전자양(全自讓) : ()는 죽헌(竹軒).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전충제(全忠悌) :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전계종(全繼宗) : ()는 박윤(泊允), ()는 규암(葵菴). 조선조에 시강원 습독(侍講院習讀)을 지낼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우다 순절(殉節)하였다. 그 후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 영계서원(靈溪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전경상(全景祥) : ()는 송포(松圃).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전몽성(全夢星) ?~1597(선조 30) 무과(武科)에 급제, 현감(縣監)에 올랐고 힘이 장사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아우 몽진(夢辰), 첨사(僉史) 김덕흡(金德洽) 등과 의병을 모집, 수차에 걸쳐 왜적을 무찌르던 중 함께 전사했다. 숙종(肅宗)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전상의(全尙毅) : 1575(선조 8)~1627(인조 5)  용(蓉)의 아들.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627년(인조 5)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좌영장(左營將)을 역임, 이때 건주(建州)의 야인 (野人)이 침입, 안주성(安州城)이 포위되자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남이흥(南以興),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 준(金 浚)과 함께 이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병조 판서(丙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안주(安州)의 민충사(愍忠祠), 광주(光州)의 충민사(忠愍詞)․경렬사(景烈祠),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전동흘(全東屹) : ()는 사탁(士卓), ()는 가재(佳齋). 1651(효종 2)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고을을 잘 다스려 많은 표창을 받았고, 부임하는 부사(府使)마다 까닭없이 죽던 철산(鐵山)에 부임하여 억울하게 죽은 장화(薔花)․홍련(紅蓮)의 원한을 풀어 주었더니 다시 변고가 없었다 한다.

현종(顯宗) 때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를 지냈고, 숙종(肅宗)때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올랐다. 통제영(統制營)에 생사당(生祠堂)이 있었다.

 

전응종(全應鍾) : ()는 성원(聲遠), ()는 용재(庸齋).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전응정(全應禎) : ()는 길보(吉甫).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전성유(全聖兪) : ()는 유중(柔仲). 조선 때 영장(營將)을 지냈다.

전순좌(全舜佐) :  ()는 경원(景元).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전순원(全舜元) : ()는 여원(汝元).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전기윤(全基允) : ()는 형중(衡中), ()는 율재. 첨지중추부사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전극공(全克恭), 전사용(全思用) 천안 전씨 정려비각

근대 인물

전봉준(全奉準) : 1854(철종 5)~1895(고종 32) 초명(初名)은 명숙(明淑),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 기창(基昶)의 아들. 전북 태인(泰仁) 출신. 아버지가 민란(民亂)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세경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고부 접주(古阜接主)가 되고 각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 한 편 은거중인 대원군(大院君)과도 접촉하며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8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부임,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근거없는 죄명을 씌워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던 중 수세(水稅)를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힘에 의한 응징을 결심, 이듬해 월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로 궐기,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강탈되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반환하고 부패한 이속(吏屬)들을 감금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 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일단 농민군을 해산,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한 위에 농민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차별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再蜂起)를 결의, 이 기회에 국가정치와 사회제도이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사상을 펼뜻을 굳혔다. 이해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 동학교도를 주도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陣容)을 정비한 후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隊俉)를 편성, 동도대東徒大 將)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拓洋), 부패 한 지배계급의 타파 등 사대강령(四大綱領)을 내새우고 부근의 군읍(郡邑)으로 진격, 관군(官軍)과 싸웠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이어 부안(扶安)․정읍(井邑)․고창(固敞)․무장(戊長) 등을 장악, 4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오고 동시에 천진조약(川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 시정(施政)의 개혁, 노비이 해방 등 12개 조목의 실현을 확약 받고 일단 선유(宣諭)에 응하기로 결정하여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후 20여명의 간부를 인솔,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의 관헌들고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朝鮮)에서의 침략행위를 더해 가는 일본(日本)의 흉계에 격분, 다시 봉기했다. 9월 삼례(參禮)에서 남도 접주(南道接主)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기치를 들고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 11월의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수명의 동지들과 순창(淳昌)에 피신, 재기를 도모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신현(韓信賢)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로리(避老里)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3월 사형당했다.

전수용(全垂鏞) : 1878(고종 15)~1910(융희 4) 자(字)는 기홍(基洪), 호(號)는 해산(海山). 전북 임실(任實) 출신. 1907년(융희 1) 조경환(曺京煥)의 의병군에 참가했다가 조경환이 전사한 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전투를 지휘했고, 참위(參尉) 정원집(鄭元集)이 투항해 오자 선봉장으로 삼아 광주(光州)․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나 정원집의 전사로 전열이 무너져 패전, 1909년(융희 3) 한 때 의병을 해산했다. 이듬해 왜적이 부모를 볼모로 잡아가자 자수하여 사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