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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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08 13:03 수정일 : 2018-08-30 14:10

울진장씨시조

울진장씨(蔚珍張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정종(靖宗) 때 호부(戶部) 상서(尙書)를 지냈고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中平章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울진부원군(蔚珍府院君)에 봉해진 장말익(張末翼)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울진(蔚珍)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울진(蔚珍)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동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우진야현(于珍也縣 : 일명 古于伊)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울진(蔚珍 : 일명 蔚津)으로 개칭하여 군(郡)을 삼았으며 고려 때 강등하여 현(縣)을 만들어 영(令)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고쳤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말익(末翼)의 아들 천일(天鎰)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를 지냈으며, 손자(孫子) 원흡(元洽)은 병부(兵部) 상서(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동정(同正)을 지낸 한련(漢連)의 아들 양수(良守)는 희종조(熙宗朝)에 문과에 급제한 후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으며, 전리(典理) 판서(判書)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수(郡守)를 역임한 령(翎)․진문(振文)․기문(起文)․응정(應禎)이 이름났고, 학자(學者)로 명성을 날린 만시(萬始)와 한보(漢輔)는 부사(府使)를 지낸 백손(伯孫)․진행(晋行)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울진장씨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진장씨는 전국에 26,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상인물

장양수(張良守) : 1205년(희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으며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전리(典理) 판서(判書)․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그의 과거(科擧) 급제(及第) 패지(牌旨)는 국보(國寶) 181호(號)로 지정되었다. 울진(蔚珍)의 월계서원(月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장천익(張天翼) : 고려(高麗)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장인행(張仁幸) : 1316년(충숙왕 3) 직장(直長)․동정(同正)을 지냈고 고려(高麗) 왕실(王室)이 날로 쇠퇴(衰退)하여짐을 보고, 뜻 있는 동지들과 왕실 회복(回復)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 은거생활로 평생을 마쳤다.

장인숙(張仁淑) : 조선조에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장천영(張天永) : 조선(朝鮮) 때 호조(戶曹)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장천길(張天吉) :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호조(戶曹) 전서(典書)를 역임하였고 1391년(공양왕 2) 대사헌(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거쳐 1396년(태조 5) 고산성(古山城) 수장(守將)을 지냈다. 1398년(태조 7) 경원(慶源)으로 낙향하여 성(城)을 쌓고 변방(邊防)을 굳게 지켰으며 관북파조(關北派祖)가 되었다.

장천말(張天末) :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장대룡(張大龍) : 자(字)는 희서(羲瑞). 1618년(광해군10)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등용된 후 안주(安州) 방어사(防禦使)에 이르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실함(失陷)되자 적(敵)의 화약고(火藥庫)를 둔 심양(瀋陽)에 들어가 방화(放火)하다가 순절(殉節) 하였다.

장서린(張瑞麟) : 자(字)는 성보(聖甫).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장현문(張顯文) : 조선(朝鮮) 때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장진문(張振文) : 자(字)는 여욱(汝郁).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흥문(張興文) :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장기문(張起文) :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장윤문(張允文) : 조선(朝鮮)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장익문(張翊文) : 조선(朝鮮) 때 도찰사(道察使)를 역임하였다.

장만시(張萬始) : 자(字)는 태초(太初). 호(號)는 청피(靑披). 조선(朝鮮)의 학자(學者)로 명성을 얻었다.

장명우(張溟羽) : 자(字)는 비경(飛卿). 조선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장진행(張晉行) : 자(字)는 치강(穉康), 호(號)는 망우와(忘愚窩). 조선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장백손(張伯孫) : 1487년(성종 18) 호방시(虎榜試)에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1491년(성종22) 파저강(婆猪江)에서 야인(野人)을 토벌(討伐)하는데 큰 공(功)을 세웠으며, 강계(江界)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장겸(張 謙) : 조선(朝鮮)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장령(張 翎) : 자(字)는 운봉(雲峰), 호(號)는 월송(月松).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한보(張漢輔) : 자는 자방(子房), 호는 은계(銀溪). 1522년(중종 1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시강관(侍講官)을 역임하였다. 경사(經史)․백가(百家)를 연구,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았다.

장응정(張應禎) : 자(字)는 경서(景瑞).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응기(張應祺) : 1556(명종 11)~1630(인조 8). 자(字)는 경수(景受). 1583년(선조 16) 무과에, 158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연안(延安) 군수(郡守)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해서(海西)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의 명으로 연안(延安)에서 의병 1백여 명을 모아 포위한 왜군과 주야에 걸친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쳐 적장(賊將) 구로다(黑田長政)가 한나라 번장(樊張 :번쾌와 장비)과 같은 장수라 하여 두려워했다. 그후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를 지내고,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공조(工曹) 참의(參議)에 추증(追贈), 연안(延安)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