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동장씨시조(永同張氏),장항(張沆)

작성일 : 2017-05-08 12:43 수정일 : 2018-04-18 20:2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영동장씨(永同張氏)의 시조(始祖)인 장항(張沆)은 고려(高麗)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 5년 동안 억류(抑留)당하였을 때 시종하여 귀국 후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그 후 1327년(충숙왕 14)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충혜왕조(忠惠王朝)에 밀직제학(密直提學)․평양윤(平壤尹)을 역임, 영산군(永山君)에 봉(封)해졌다. 1345년(충목왕 1) 참리(參理)․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1348년(충목왕 4)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과 경사도감(經史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고, 공민왕(恭愍王) 때 예학(禮學)에 밝아 종묘(宗廟)의 예복(禮服)과 악기(樂器)를 수리했다. 영동(永同)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청렴결백하고 문명이 높았다.

영동(永同)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 때 길동군(吉同郡)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때 영동(永同)으로 고쳤으며, 995년(고려 성종 14) 계주(稽州)로 승격시켜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상주(尙州)에 예속시켰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살펴보면 그의 후손(後孫)으로 예빈령(禮賓令)을 지낸 윤신(允愼)과 정랑(正郞)을 지낸 익(翼)이 있으나, 그의 선대(先代)나 후손(後孫)의 소목(昭穆)에 대해서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인 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동장씨(永同張氏)는 남한(南韓)에 총 477가구, 1,4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