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결성장씨시조(結城張氏),장사(張楒),결성장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7 19:31 수정일 : 2019-07-22 15:22

시 조

결성장씨시조(結城張氏 始祖) 장사(張楒)는 930년(고려 태조 13) 후백제(後百濟) 견훤군(甄萱軍)을 크게 무찔러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太師)에 오른 정필(貞弼)의 14세손이며 중랑장(中郞將)․병부(兵部) 상서(兵部)를 지낸 상겸(尙謙)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조(高麗朝)에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推誠輔理贊化安社功臣)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삼한벽상삼중대광문하시중판전리감찰사사(三韓壁上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監察司事)를 역임하였고,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사(楒)를 시조로 삼고 본관(本貫)을 결성(結城)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결성(結城)은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의 결기현(結己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결성군(結城郡)으로 개명하였고, 1018년(현종 9) 운주(運州 : 洪州)에 예속하였으며, 1172년(명종 2)에 결성현(結城縣)으로 개명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폐하고 현감(縣監)을 두었으며 1733년(영조 9) 보령(保寧)에 편입시켰다가 1736년(영조 12) 현(縣)으로 복구하였고, 1895년(고종 32)에는 결성군이 되어 홍주부(洪州府)에 예속, 1914년 홍성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홍성군에 속한 결성면(結城面)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그의 현손(玄孫) 하(夏)가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토평하여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결성군(結城君)에 봉(封)해졌으며, 1388년(우왕 14)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고려왕조(高麗王朝)의 국운(國運)이 다함을 느껴 치사(致仕)하고 결성(結城)에 내려와 은둔(隱遁)하였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수 차례의 부름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언호(彦浩)와 부호군(副護軍) 서익(瑞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후중(後中) 등이 유명했고, 혼(混)은 학자(學者)로 효성(孝誠)이 극진하여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또한 시문(時文)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정조조(正祖朝)에 감인소(監印所) 사준(司準)으로 서적 편찬에 전력하여 「몽유편(蒙喩篇)」․「시종당률(詩宗唐律)」등을 저술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정치가(政治家)인 덕수(德秀)와 덕진(德震)이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에서 광복(光復)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업적을 남겨 결성장씨의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결성장씨(結城張氏)는 전국에 24,92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 대 인 물 - 결성장씨조상인물

장갑(張 甲) :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장용문(張用文) : 고려조(高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하(張 夏) : 1316(충숙왕 3)~?. 호(號)는 청계(淸溪).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한 공으로 1363년 전의주부(典儀注簿)로서 2 등공신에 오르고, 밀직부사(密直副使)․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1383년(우왕 9)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서 의성(義城)에서 왜구(倭寇)를 격파한 후, 평양(平壤) 부윤(府尹)이 되고, 전라도(全羅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를 거쳐 1389년(창왕 1) 문하평리( 門下評理)가 되었다. 이해 공양왕이 즉위하여 이성계(李成桂)가 전제개혁(田制改革)을 할 때 경상도(慶尙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로 있었고, 이듬해 이초(彝初)의 옥(獄)에 연루, 우현보(禹玄寶)등과 함께 원배(遠配)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결성군(結城君)에 봉해졌다.

장계로(張季魯) : 조선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장유인(張有仁) : 조선(朝鮮) 때 부윤(府尹)을 역임하였다.

장유의(張有義) : 조선조(朝鮮朝)에 수찬(修撰)을 지냈다.

장유온(張有溫) : 조선 때 형조(刑曹) 참의(參議)를 지냈다.

장효상(張孝祥) : 조선(朝鮮)에서 덕천(德川)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명덕(張明德) : 조선조에 황해도(黃海道) 도사(都事)를 지냈다.

장익선(張益善) : 조선 때 영광(靈光)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장명근(張命根) : 조선에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록되고, 판결사(判決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장석근(張碩根) : 조선(朝鮮) 때 담양(潭陽) 부사(府使)를 지냈다.

장세문(張世文) : 자(字)는 자화(子和). 조선(朝鮮) 때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에 추증(追贈)되었다.

장성개(張成漑) : 자(字)는 득일(得一).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장언호(張彦浩) : 조선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장희수(張希壽) : 조선조에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장필수(張必壽) : 조선에서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장계남(張繼男) : 자(字)는 효백(孝伯).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장천기(張天紀) : 조선조(朝鮮朝)에 평시서(平市署) 직장直長)을 지냈다.

장의립(張義立) : 조선 때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장효원(張孝源) : 자(字)는 신원(信元). 조선에서 형조(刑曹)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장처경(張處敬) : 자(字)는 직경(直卿), 호(號)는 국헌(菊軒).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장시서(張時瑞) : 조선조(朝鮮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兵曹) 참판(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 되었다.

장득선(張得善) : 자(字)는 자용(子容). 조선에서 호조(戶曹)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장서익(張瑞翼) : 조선(朝鮮)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장후중(張後仲) : 조선조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장혼(張 混) : 1759(영조 35)~1828(순조28). 자(字)는 원일(元一), 호(號)는 이이(而已)․공공자(空空子), 우벽(友璧)의 아들. 빈한한 집에 태어났으나 효성이 지극했고, 1790년(정조14) 감인소(監印所) 사준(司準)이 되어 서적 편찬에 종사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장취오(張聚五) : 조선(朝鮮) 때 병조(兵曹)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장성좌(張聖佐) :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장진일(張振一) :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장복현(張復鉉) :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장세용(張世容) :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장규홍(張逵鴻) : 조선 때 개성(開城) 도위(都尉)를 지냈다.

장윤신(張允紳) : 조선조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장덕오(張德五) : 조선에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장기련(張基鍊) :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장석응(張錫膺) : 조선 때 경력(經歷)을 역임하였다.

장덕량(張德良) :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士)였다.

장덕준(張德俊) : 1891(고종 28)~?. 호(號)는 추송(秋松), 덕수(德秀)의 형.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 1920년 김성수(金性洙)․이상협(李相協) 등과〈동아일보(東亞日報)〉를 창간, 발기위원 겸 논설위원으로 있다가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건너가 미국 의원단(議員團)의 중국 방문을 취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데 힘썼다. 그후 만주에서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한 훈춘사건(琿春事件)이 발생하자 이를 취재코자 단신으로 출발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장덕수(張德秀) : 1895(고종 32)~1947. 호(號)는 설산(雪山).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를 졸업하자 상해(上海)에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 1918년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국내 지사(志士)들과 연락을 취하러 국내에 들어오다가 검거되었다. 이듬해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일본 정부를 방문,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역설했고, 1920년「동아일보(東亞日報)」의 초대주간(主幹)이 되어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했으며,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 간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교수를 역임했다. 그후 미국에 건너가 1928년 콜롬비아대학에서 수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을 지냈다. 해방 후 송진우(宋鎭禹)․김병로(金炳魯) 등과 한국 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 동당(同黨) 외교부장(外交部長)․정치부장(政治部長)을 역임하며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좌익분자인 종로서(鐘路署)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 당했다.

장덕진(張德震) :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 1920년 광제청년단장(廣濟靑年團長) 오동진(吳東振)의 밀령을 받고 미의원단(美議員團)의 내한 (來韓)을 계기로 박태열(朴泰烈) 등과 황해도 일대의 일제 기관들을 파괴, 독립사상을 내외에 선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후 문일민(文一民) 등과 평남 경찰부(平南警察部)에 폭탄을 던져 순사 2명을 살해하고 상해(上海)로 도주했는데 궐석(闕席) 재판(裁判)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2년 강석훈(姜錫勳) 등 10명의 연서로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를 후원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했고, 이어 상해교민단(上海橋民團)의 경호대원을 지냈으며, 1925년 그의 자서전「장덕진전(張德震傳)」을 집필, 평양부청(平壤府廳)및 기타 관공서 폭파 사건을 기술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