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풍천임씨시조(蘴川任氏),임온(任溫),풍천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7 18:03 수정일 : 2018-08-29 10:52

풍천임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풍천임씨(蘴川任氏) 시조(始祖)의 휘(諱)는 온(溫)이시다. 혹운(或云) 말하기를 중국(中國) 소흥부자계현인(紹興府慈溪縣人)이라고들하나 무가고(無可考)라 고증(考證)할 수 없다.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의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구을현(仇乙縣)이었는데 고려(高麗) 초기에 풍주(豊州)로 고쳤고, 성종(成宗)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킨 것을 현종(顯宗)이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 본조(本朝 조선) 태조(太祖) 6년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는 병마사(兵馬使)로서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던 것을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 그리고는 은율현(殷栗縣)을 병합하여 풍율군(豊栗郡)으로 호칭하다가 얼마 안되어 이를 혁파하고 각각 구명으로 회복케 하였다. 세종(世宗) 5년에 병마사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하였던 것을 예종(叡宗) 원년에 중궁(中宮)의 외조(外祖)의 관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관원으로 부사(府使) • 교수(敎授) 각각 1인씩을 두었다.

군명(郡名)은 구을(仇乙) • 굴천(屈遷) • 풍주 • 서하(西河) • 성해(成海) • 안주(安州) 등으로 불러왔다.

지방(地方)은 동쪽으로는 은율현계(殷栗縣界)까지가 25리(里)이고 남쪽으로는 장연현계(長淵縣界)까지 23리, 송화현계(松禾縣界)까지 27리이며, 서쪽으로는 업청강(業淸江)까지 10리, 북쪽으로는 허사포(許沙浦)까지 42리이며, 경도(京都)와의 거리는 562리이다.

산천(山川)으로는 사인암(舍人巖)이 본부 동쪽 20리에 있고 박석산(博石山)이 본부 남쪽 30리에 있으며 송화현(松禾縣)도 또한 보인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풍천임씨는 전국에 143,8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풍천임씨조상인물

임가규(任可珪) 제술업진사

임비(任 備) 고려조에 상의국 봉어(尙衣局奉御)를 역임하였다.

임도(任 徒) 고려 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임천유(任天裕) 고려(高麗)에서 병충분의동덕찬화공신(秉忠奮義同德贊化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門下侍中)․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판병부사(判兵副事) 겸 팔위 상호군(八衛上護軍)을 지내고 경연사(經筵事)로 풍해군(豊海君)에 봉해졌다.

임주(任 澍) 1283년(충렬왕 9)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으로 치사(致仕)하였는데, 풍천임씨는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백파(伯派:자송(子松))와 중파(仲派: 자순(子順))으로 크게 나뉘며 두 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임자송(任子松) 호(號)는 허재(虛齋), 대장군(大將軍) 주(澍)의 맏아들. 1321년(충숙왕 8)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324년 익찬정난일등공신(翊贊靖亂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다. 이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1330년 원(元)나라에 있는 세자 (世子) 정(禎 : 충혜왕)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원나라 객성 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이 국인(國印)을 가져갈 때 따라갔다 돌아와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1등공신(一等功臣)으로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임자순(任子順) 호는 화재(和齋), 자송(子松)의 아우. 이재(彛齋) 백이정(白頣正)의 문인(文人). 고려때 통헌대부(通憲大夫)로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임진(任 瑨) 고려에서 원융부 좌사윤(圓融府左司尹)을 역임하였다.

임향(任 珦) 고려 때 장령(掌令)을 거쳐 정승(政丞)을 지냈다.

임산보(任山寶) 고려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다.

임경유(任景儒) 고려조에 성균제주(成均祭酒)를 지냈다.

임덕유(任德儒) 호(號)는 문간(文簡). 고려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임군보(任君輔) 1352년(공민왕 1) 밀직사 지신사(密直司知申事)가 되어 1355년(공민왕 4) 천추사(千秋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책록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임효신(任孝信) 조선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임효인(任孝仁) 중선(仲善)의 아들. 전직(殿直)으로서 1427년(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거쳐 1444년에 장령(掌令)이 되고, 1451년(문종 1) 우사간(右司諫), 1454년(단종 2) 판통례원사․첨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했다.

이해 관압사(管押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1458년(세조 4) 이조 참의(吏曹參議), 다음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역임하고, 1460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충청도 도관찰사, 1462년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임효명(任孝明)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임효돈(任孝敦)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정(任 楨) 자(字)는 백간(佰幹). 조선 때 시정(寺正)을 지냈다.

임원준(任元濬) 1423(세종 5)~1500(연산군 6) 자(字)는 자심(子深), 호(號)는 사우당(四友堂), 판밀직사사 군보(君輔)의 증손(贈孫), 견(肩)의 아들. 1445년(세종 27) 시(詩)로써 왕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찬서국(集賢殿 撰書局)에 발탁, 1447년 부사정(副司正)이 되고 1453년(단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이해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서 명나라 영종(英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표전문(表箋文)을 찬진(撰進)하여 왕으로부터 명문장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1462년(세조 8) 호조 참판(戶 曹參判)으로 승진, 이듬해「의약론(醫藥論)」을 주해(註解)했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각각 2등으로 급제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아들 사홍의 죄로 관직이 삭탈(削奪)되었다. 경사(經史)에 발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의학(醫學)에 정통했다.

임사홍(任士洪) 1445(세종 27)~1506(중종 1) 자(字)는 이의(而毅), 좌찬성(左贊成) 원준(元濬)의 아들.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의 사위가 되었다.

성종(成宗) 초에 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으며, 1489년 왕명으로 월산대군(月山大君) 정(女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고, 이듬해 한어(漢語)와 한훈(漢訓)에 정통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다가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줄기찬 대간의 탄 핵을 막기 위해 왕은 간관(諫官)을 모두 갈아치운 뒤 다시 등용하였다. 1490년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가 되었으며, 이해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글씨는 촉체(蜀體)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임한(任 漢) 자(字)는 종해. 조선 때 군수를 지냈다.

임유겸(任由謙) 1456(세조 2)~1527(중종 22) 자(字)는 숙양(淑讓), 시호(諡號)는 소간(昭簡), 옥(沃)의 아들.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이 되고 감찰(監察)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부교리(副校理)․정언(正言)을 역임, 1498년 부응교(副應敎)로 노상에서 대신을 만나 하마(下馬)하지 않아 무례하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削職), 이듬해 부사용(副司勇)으로 등용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다.

1505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조선표류민을 데려 왔으며, 1506년(중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이해 청승습사(請承襲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8년 대사헌(大司憲)에 오르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거쳐 1510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514년(중종 9)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1516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어 1521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우빈객(右賓客)을 겸하고 공조 판서를 거쳐 152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임희재(任熙載) 1472(성종 3)~1504(연산군 10) 자(字)는 경여(敬輿), 호(號)는 물암(勿菴),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사홍(士洪)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6년(성종 17) 진사(進士)가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해 집안의 병풍에 써 놓은 시에 왕을 비방한 내용이 있다는 죄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 나왔으나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수(斬首)되었다. 글씨는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임숭재(任崇載) 1491년(성종 22) 휘숙옹주(徽淑翁主)와 결혼하여 풍원위(豊原尉)에 봉해졌고, 가무(歌舞)에 능하여 1504년(연산군 10)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가 되었다.

임유손(任由遜) 자(字)는 사렴(士廉). 조선조에 감찰을 지냈다.

임주(任 柱) 자(字)는 문경(文卿). 조선 때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추(任 樞) 1482(성종 13)~1534(중종 29) 자(字)는 사균(士均), 시호(諡號)는 정헌(貞憲), 판서(判書) 유겸(由謙)의 아들. 1507년(중종 2)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1513년 지평(持平), 1515년에 헌납(獻納)․교리(敎理) 등을 지냈다.

이듬해 천문예습관, 1519년 장령(掌令)이 되고 이어 전한(典翰)․우승지(右承旨)․대사간(大司諫)․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낸 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31년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1533년 호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도중 병사했다.

임권(任 權) 1486(성종 17)~1557(명종 12) 자(字)는 사경(士經), 호(號)는 정용재(靜容齋), 시호(諡號)는 정헌(貞憲), 공조 판서 유겸(由謙)의 아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직되었다가 검열(檢閱)․저작(著作)․교리(校理)․이조정랑(吏曹正郞)․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이어 지평을 거쳐 필선(弼善)․사인(舍人)․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 등을 역임, 1527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1530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이조 판서 장순손(張順孫)의 미움을 사서 사섬시정(司贍寺正)으로 좌천, 그뒤 다시 집의가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폐정(弊政)을 논박하다가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되자 등용되어 예조 참의(禮曹參議)․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 1539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고,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 다시 이조 참판이 되어 우부빈객을 겸했다.

전라도 관찬사를 거쳐 1542년 병조 판서, 1544년 예조 판서가 되고, 1546년(명종 1) 지춘추관사를 겸임, 이어 추참찬에 오르고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임병(任 柄) 자(字)는 사강(士岡)․사칙(士則),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겸(由謙)의 아들.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고, 152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정자(正字)․저작(著作)․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역임, 1526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뒤에 교리를 거쳐 이조 좌랑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호신(任虎臣) 1506(중종 1)~1556(명종 11) 자(字)는 무백(武伯), 호(號)는 지족암(知足庵), 관찰사(觀察使) 추(樞)의 아들. 1528년(중종 2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이 되고, 대교(待敎)․설서(說書)를 지냈다.

1533년 동지사인 아버지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봉교(奉敎)가 되었으나 권신 김안로에 의해 황간 현감(黃澗縣監)으로 쫓겨 났다가 전적(典籍)․헌납(獻納)․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등을 거쳐 1550년(명종 5) 동지중추부사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5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555년(명종 10)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로 죽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임열(任 說) 1510(중종 5)~1591(선조 24) 자(字)는 군우(君遇), 호(號)는 죽애(竹崖),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참봉(參奉) 명필(明弼)의 아들. 1531년(중종 26) 사미시에 합격, 15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가 되어 사관(史官)을 겸했다.

1536년 수찬(修撰)으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1538년 이조 좌랑으로 발영시(拔英試) 을과(乙科)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그후 부교리(副校理)․집의(執義)․전한(典翰)을 거쳐 1548년 직제학(直提學), 이듬해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고 승 지(承旨)로 승진했다.

명종 때 대사간(大司諫)․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예조 참의(禮曹參議)․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역임, 뒤에 한성부 좌․우윤을 지내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 등을 겸하였다. 1567년(명종 22) 한성부 판윤이 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보신(任輔臣) ?~1558(명종 13) 자(字)는 필중(弼仲), 호(號)는 초포(樵圃), 관찰사 성(誠)의 아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저작(著作)․박사(博士)를 거쳐 1547년(명종 2) 부수찬(副修撰)․이조 정랑(吏曹正郞), 1550년 부교리(副校理)를 지냈다.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수안 군수(遂安郡守)․교리(校理)․지평(持平) 등을 거쳐 1554년 장악원정(掌樂院正)․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를 지내고, 1557년 형조 참의가 되었다.

임내신(任鼐臣) 1512(중종 7)~? 자(字)는 조원(調元), 호(號)는 어은(漁隱), 현감 주(柱)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을 거쳐 사인(舍人)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검열(檢閱)․수찬(修撰)․장령(掌令) 등을 지내고, 1550년(명종 5)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서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이 되어「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후 판결사(判決事)․병조 참지(兵曹參知)․병조 참의(兵曹參議)등을 역임. 1555년(명종 10)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전주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냈다.

임위(任 瑋)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임국로(任國老) 1537(중종 32)~1604(선조 37) 자(字)는 태수(駘叟), 초자(初字)는 태경(駘卿), 호(號)는 죽오(竹塢)․운강(雲江), 황주 목사(黃州牧使) 윤(尹)의 아들.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호조 좌랑(戶曹佐郞)․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했다.

1591년 대사헌(大司憲)으로 기용, 이듬해 임진왜란에 조도검찰사(調度檢察使)․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을 지내면서 3년간 평안도에 머무르다가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왕비를 호위하여 황해도에 피난했고, 1599년 형조 판서에 이어 다시 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이조 판서(吏祖判書)로 죽었다.

임탁(任 鐸) 1544(중종 39)~1594(선조 27) 자(字)는 사진(士振), 목사(牧使) 몽신(夢臣)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이 되고 1583년 이 이(李 珥)가 3사(司)에서 논핵(論劾)을 받자 성균관 장의(掌議)로서 여러 유생과 함께 이에 항의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소모관(召募官)으로 경기․강원․황해 3도를 담당, 많은 성과를 올려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에 오르고 명나라 경략(經略) 송경창(宋慶昌)이 오자 접빈사(接賓使) 윤근수(尹根壽)의 천거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이들을 맞았다. 1593년 환도하여 도감랑(都監郞)으로 명나라 장군을 접대했다.

임현(任 鉉) 1549(명종 4)~1597(선조 30) 자(字)는 사애(士愛), 호(號)는 애탄(愛灘),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목사(牧使) 몽신(夢臣)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1583년(선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가 되고, 1591년 지평(持平)에 재직중 서인 정 철(鄭 澈)의 일당이라는 동인 (東人)들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기용되고, 춘천(春川)에서 왜병을 격파하여 그 공으로 회양 부사(淮陽部使)에 승진, 1594년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부사(南原府使)로서, 함께 성을 수비하던 명나라 장군 양원(楊元)이 도망한 뒤 계속 분전 하다가 전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광해군(光海君) 때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임흘(任 屹) 1557(명종 12)~1620(광해군 12) 자(字)는 탁이(卓爾), 호(號)는 용담(龍潭), 박승임(朴承任)․조 목(趙 穆)․정 구(鄭 逑)의 문인. 1582년(선조 1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종개(柳宗介)와 함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문경(聞慶) 싸움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이 되었으나 동서(東西)의 당론이 격심하여 국정을 문란하게 하는 자들의 발호에 실망, 그들을 규탄하는 소(疏)를 올리고 사퇴 했다. 광해군(光海君)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기용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大北) 일당들이 나라를 망치리라 하여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임몽정(任蒙正) 1559(명종 14)~1602(선조 35) 자(字)는 직초(直初), 호(號)는 운호(雲湖), 황주 목사 윤(尹)의 손자, 이조 판서(吏祖判書) 국로(國老)의 아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듬해 수찬을 거쳐 임진왜란에 병조 정랑이 되었으나 의주(義州)로 피난하는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다 중도에서 도피하여 한때 파직, 1597년 부교리가 되어 선유어사(宣諭御史)로 한산도(閑山島)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간(大司諫)․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 1600년(선조 33) 부제학(副提學)․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며, 다음해 병으로 치사(致仕)했다. 시에 뛰어났고 문장에 능했다.

임전(任 錪) 1560(명종 15)~1611(광해군 3) 자(字)는 관보(寬甫), 호(號)는 명고(鳴皐). 성 혼(成 渾)의 문인. 조선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江華)에 주둔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권신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의 농단을 항의했다.

경학(經學)에 밝았고, 권 필(權 )과 함께 시명(詩名)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지은 우국시(愚國詩) 한편이 전한다.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추록(追錄), 집의에 추증되었다.

임희지(任義之) 자(字)는 일사(逸沙). 조선 때 사예(司藝)를 지냈다.

임준(任 晙) 자(字)는 백승(伯升). 조선(朝鮮)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임원(任 謜) 자(字)는 신여(愼餘). 조선조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임영(任 映) 자(字)는 명보(明甫).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임취정(任就正) 1561(명종 16)~1628(인조 6) 자(字)는 진화(進和), 이조 판서(吏祖判書) 국로(國老)의 아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가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초(史草)를 부태우고 도망한 죄로 삭직(朔職)되었다.

1599년 병조 좌랑(兵曹佐郞)․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1604년 서산 군수(瑞山郡守), 1608년(선조 41) 원주 부사(原州府使), 1613년 형조 참의(刑曹參議), 1616년 좌승지(左承旨)를 역임, 1620년 이조 참판(吏曹參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1621년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임석령(任碩齡) 1565(명종 20)~1628(인조 6) 초명(初名)은 학령(鶴齡), 자(字)는 여수(汝壽), 호(號)는 석강(石江), 우승지(右承旨) 여관(呂官)의 손자, 계로(繼老)의 아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0년(광해군 2) 지평(持平)․헌납(獻納)․문학(文學)을 지내고, 1613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1616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 뒤에 필선(弼善), 평해(平海)와 신천(信川)의 군수를 지내고, 1621년 병조 참의(兵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곧 병으로 사직했다.

임숙영(任叔英) 1576(선조 9)~1623(인조 1) 초명은 상(湘), 자(字)는 무숙(茂叔), 호(號)는 소암(疎庵), 감역(監役) 기(奇)의 아들. 1601년(선조 3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 대책문(對策文)에서 척신(戚臣)의 무도함을 공박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영의정(領議政) 이항복(李恒福)의 무마로 병과(丙科)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를 지냈다.

이듬해 주서(注書)에 올랐다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 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검열에 등용 되어 사관(史官)을 겸했다.

이어 정자(正字)․부수찬․검토관(檢討官)․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지평(持平)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밝았다. 죽은 후 부제학에 추증,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임광(任 絖) 1579(선조 12)~1644(인조 22) 자(字)는 자정(子瀞),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감찰(監察) 익신(翊臣)의 아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재사(才士)로서 이름났으나 대북(大北)의 난정(亂政)으로 낙향,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순릉 참봉(順陵參奉)이 되었다.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풍저창 직장(豊儲創直長)을 거쳐 주서(注書)․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호조․병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1628년(인조 6) 정언(正言), 1632년 지평(持平)을 지내고, 1636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어사가 되어 삼남(三南)의 수군(水軍)을 순찰한 후 형조 참판이 되어 특진관(特進官)을 겸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안동 부사(安東府使)를 거쳐 1642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김 육(金 堉)과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환국(還國)하게 되 어 이들을 수행하기 위해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1811년(순조 11)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임효달(任孝達) 1584(선조 17)~1646(인조 24) 자(字)는 술지(述之), 광주 목사(廣州牧使) 윤(尹)의 증손. 1603년 (선조 3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박사(博士)․감찰(監察)․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청도 군수(淸道郡守)가 되 었다. 1623년(인조 1)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1629년 장령(掌令) 등을 역임, 종성 부사(鐘城府使)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러 노령으로 치사(致仕)했다.

임선백(林善伯) 1596(선조 29)~1656(효종 7) 자(字)는 경여(慶餘), 이조 정랑(吏曹正郞) 장(章)의 아들. 1623년 (인조 1) 진사(進士)가 되고 162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강화(江華)의 사수(死守)를 주장했다.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거쳐 1644년(인조 22) 장령(掌令)이 되어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 暗行御史)를 지냈으며, 효종(孝宗) 때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임유후(任有後) 1601(선조 34)~1673(현종 14) 자(字)는 효백(孝伯), 호(號)는 만휴당(萬休堂)․휴와(休窩), 시호(詩號)는 정희(貞僖), 교리(敎理) 수정(守正)의 아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 1624년(인조 2) 생원(生員)․진사(進士)․양시(兩試)에 합격,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가주서(假主書)가 되고, 1628년 동생 지후(之後)가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숙부인 판서(判書) 취정(就正)과 그 두 아들이 죽음을 당하자 사퇴했다.

효종(孝宗) 때 다시 기용되어 영해(寧海)․강릉(江陵) 등의 부사(府使)를 거쳐 종성 부사(鐘城府使)로 나가 여진족(女眞族)에 대한 방비를 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쳐 학풍을 진작했다.

1660년(현종 1)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전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승지(承旨)를 거쳐 1670년(현종 11) 공조와 병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이어 도승지(都承旨)․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호조 참판(戶曹參判)․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내고, 은퇴할 때 계산(溪山)에 들어가 정사(精舍)를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목동가(牧童歌)」를 지었다고 전한다. 죽은 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중(追贈), 울진(蔚珍)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임한백(任翰伯) 1605(선조 38)~1664(현종 5) 자(字)는 경익(景翼), 호(號)는 남곡(南谷), 정랑(正郞) 장(章)의 아들. 1642년(인조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지내고, 1644년 사서(司書)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 등 대신과 함께 배종(陪從)했다.

이듬해 돌아와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1644년(효종 즉위) 지평(持平)에 재임, 수찬(修撰)을 거쳐 1659년(효종 10) 교리(敎理)로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여「효종실록(孝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 수찬(修撰)․헌납(獻納)․영남좌도 감시 시관(嶺南左道監試試官)을 역임, 1663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나갔다. 시문에 뛰어난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임의백(任義伯) 1605(선조 38)~1667(현종 8) 자(字)는 계방(季方), 호(號)는 금시당(今是堂), 좌승지(左承旨) 연(兗)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음보(蔭補)로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통천 군수(通川郡守)를 지내고,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직강(直講)이 되었다.

이어 정언(正言)․장령(掌令)․헌납(獻納)․집의(執義)․동래 부사(東來府使) 등을 지내고, 1655년 승지(承旨)․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1657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1659년(효종 10) 형조 참의(刑曹參議)․수원 부사(水原府使)․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謝恩) 겸 진주 부사(陳奏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665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다음해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임숙(任 潚) 1614(광해군 6)~1669(현종 10) 자(字)는 계심(季深), 통덕랑(通德郞) 경우(慶祐)의 아들. 1635년(인조 1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3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이어 전적(典籍)으로 승진, 감찰(監察)․공조 좌랑(工曹佐郞)․진해 현감(鎭海縣監)을 거쳐 전적 (典籍)․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내고, 옥구 현감(沃溝縣監)이 되었다가 관찰사(觀察使)와의 알력으로 파직, 뒤에 개성부 교수(開城府敎授)를 지냈다.

임중(任 重) 조선 때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임규(任 奎) 1620(광해군 2)~1687(숙종 13) 자(字)는 문중(文仲), 호(號)는 석문(石門), 준백(俊伯)의 아들. 1648 년(인조 26) 진사(進士)가 되고 1670년(현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집의(執義)․회양 부사(淮陽府使)․경주 부윤(慶州府尹)․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승지(承旨)를 거쳐 다음해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임좌(任 座) 조선 때 상의원정(尙依院正)을 지냈다.

임홍량(任弘亮) 1634(인조 12)~1706(숙종 32) 자(字)는 사인(士寅), 호(號)는 창주(敞帚), 사예(司藝)의 손자. 1657 년(효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시문(時文)에 능했다.

임홍망(任弘望) 1635(인조 13)~1715(숙종 41) 자(字)는 덕장(德章), 호(號)는 죽실(竹室), 시호(諡號)는 효정(孝貞), 생원(生員) 환(日奐)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66년(현종 7) 별시문과(別時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지평(持平)․정언(正言)을 지내고, 1674년(현종 15) 남인(南人)에 의 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서인(西人)의 과격파인 김석주(金錫冑)를 옹호했으나 그의 오해로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밀려 났다가 병조 참지(兵曹參知)․승지(承旨)․예조 참의(禮曹參議)․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호조 참의(戶曹參議)․충청도관찰사를 역임, 1688년(숙종 14) 진위사(陣慰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병조 참의(兵曹參議)․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714년(숙종 40)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이름이 높았다.

임홍익(任弘益) 자(字)는 덕유(德裕), 호(號)는 죽재(竹齋)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임상원(任相元) 1638(인조 16)~1697(숙종 23) 자(字)는 공보(公輔), 호(號)는 염헌(恬軒), 시호(諡號)는 효문(孝文), 지평(持平) 중(重)의 아들. 1660년(현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66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사서(司書)를 거쳐, 1679년(숙종 5)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684년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1688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공조․형조의 판서(判書), 우참찬(右參贊)․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좌참찬(左參贊)을 역임. 1697년 재 차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

임방(任 埅) 1640(인종 18)~1724(경종 4) 자(字)는 대중(大仲), 호(號)는 수촌(水村)․우졸옹(愚拙翁),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의백(義伯)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俊吉)의 문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1671년(현종 12) 창릉 참봉(昌陵參奉)이 되고, 내외직을 거쳐 1689년 (숙종 15) 호조 정랑(戶曹正郞)이 되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고 송시열이 유배되자 사직했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기용, 이어 군자감정(軍資監正)․단양 군수(丹陽郡守)․사옹원 첨정(司饔院僉正) 등을 역임하고 1702년 63세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이 되고, 그뒤 대사성(大司成)․승지(承旨) 등을 거쳐 1719년(숙종 45)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우참찬(右參贊)에 승진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함종(咸從)에 유배, 후에 금천(金川)에 이배(移配)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신원(伸寃)되었다.

임창(任 敞) 1652(효종 3)~1723(경종 3) 자(字)는 회이(晦而), 호(號)는 강개옹(慷慨翁),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관찰사 내신(鼐臣)의 5대손, 홍정(弘挺)의 아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자 이듬해 장희빈(張禧嬪) 일파의 저주로 죽었으므로 그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고 상소하여 나주(羅州)에 유배, 1723년(경종 3) 배소(配所)로부터 잡혀와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鞫問)을 받았다. 영조(英祖) 즉위 후 신원(伸寃),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임형(任 泂) 1660(현동 1)~1721(경종 1) 자(字)는 중경, 생원 환(日奐)의 아들. 1680년(숙종 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와서 별제(瓦署別提)에 이르고 169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어 사관(史官)에 등용되고, 1718년 전적(典籍)을 거쳐 정언(正言)․장령(掌令)․사간(司諫)․집의(執義)를 지내고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임수간(任守幹) 1665(현종 6)~1721(경종 1) 자(字)는 용예(用譽), 호(號)는 돈와(遯窩), 우참찬(右參贊) 상원(相元)의 아들. 1690년(숙종 16) 생원(生員)이 되고, 169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교리(敎理)․부수찬(副修撰)을 역임했다.

17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토관(檢討官)․수찬(修撰)을 거쳐 1609년 사가독서(賜假讀書)했다. 1711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1721년(경종 1)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음률(音律)․상수(象數)․병법(兵法)․지리(地理)에도 정통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수적(任守迪) 1671(현종 12)~1744(영조 20) 자(字)는 길보(吉甫), 숙영(叔英)의 증손, 참판(參判) 윤원(胤元)의 아들. 1696년(숙종 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 되고, 1725년(영조 1)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3사(三司)의 관직을 거쳐 1742년(영조 18) 형조 참판(刑曹參判)․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고 금의 필법(筆法)을 연구, 그 장점을 취하여 근세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임화세(任華世) 1675(숙종 1)~1731(영조 7) 자(字)는 실혜(實兮), 호(號)는 시옹(是翁), 진사(進士) 인중(仁重)의 아들. 1699년(숙종 2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적(任 適) 1685(숙종 11)~1728(영조 4) 자(字)는 도언(道彦), 호(號)는 노은(老隱), 의백(義伯)의 증손.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1710년(숙종 3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718년 장녕전 참봉(長寧殿參奉)을 거쳐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었다. 문장(文章)․시(詩)에 뛰어났다.

임사경(任思敬) 1686(숙종 12)~1757(영조 33) 자(字)는 여직(汝直), 통덕랑(通德郞) 진영(震英)의 아들. 외조부 윤증(尹 拯)의 문인. 1716년(숙종 42)에 스승 윤 증이 화를 당하게 되자 벼슬을 단념, 학문에만 전심하여「삼분(三墳)」․「오전(五典)」을 깊이 연구했다.

1740년(영조 16)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1745년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시문(詩文)과「사기(史記)」에 밝았고, 성력(星曆)․도수(度數)․병기(兵機)․이치(吏治) 등에도 정통했다.

임징하(任徵夏) 1687(숙종 13)~1730(영조 6) 자(字)는 성능(性能), 호(號)는 서재(西齋),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집의(執義) 형(泂)의 아들. 1713년(숙종 3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정언(正言)을 거쳐, 1721년(경종 1) 지평(持平), 이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사서(司書) 등을 역임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삭직(削職)당했다.

1725년(영조 1)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자 장령(掌令)으로 등용 되어 6개조의 상소문을 올려 탕평책(蕩平策)을 반대, 소론(少論)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순안(順安)에 유배,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등장하다가 다시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 (圍籬安置), 이듬해 소론의 영주 이광좌(李光佐)의 주청으로 투옥된 뒤 고문을 받고 옥사했다. 정조(正祖) 때 관직이 복구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시척(任時倜) 1694(숙종 20)~1764(영조 40) 자(字)는 대재(大哉), 중해(重海)의 6대손. 의주(義州) 출신. 1719년(숙종 45) 무과(武科)에 급제, 총융청(摠戎廳)에서 7년간을 복무, 시사(試射)할 때 특출한 솜씨를 발휘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총융사(摠戎使) 장붕익(張鵬翼)의 명으로 의주(義州)로부터 3일간 쉬지 않고 달려와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후 갈파진 첨절제사(乫坡鎭僉節制使)․기장 현감(機張縣監)․곤양 군수(昆陽郡守)를 역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가 1755년(영조 31)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부임, 전선(戰船)을 만들고 성울 수축하며 군량을 저축하는 등 군비 확장에 노 력했다.

임기가 끝나자 서울에 귀임(歸任), 영조(英祖)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하려 했으나 반대하는 자가 있어 낙향했다가 영조와 동갑이어서 은전(恩典)으로 1763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임정(任 珽) 1694(숙종 20)~1750년(영조 26) 자(字)는 성방(聖方), 호(號)는 치재(巵齋), 참판(參判) 수적(守迪)의 아들. 1719년(숙종 45) 진사(進士)가 되고,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에 뽑혔다가 1728년(영조 4)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후 1734년 까지 교리(校理)․수찬(修撰)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 이듬해 진하(進賀) 겸 진향사(進香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736년 응교(應敎)․집의(執義)를 지낸 후 다음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738년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그후 우부승지(右副承旨)․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175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고금의 시가(詩歌)에 통달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태하(任泰夏) 자(字)는 득중(得中). 효행(孝行)과 학문(學問)이 뛰어나 향당사림(鄕黨士林)이 천거(薦擧)하여 1892년(고종 29)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임진하(任震夏) 자(字)는 기부(起夫). 조선조에 보덕(輔德)을 지냈다.

임사하(任師夏) 자(字)는 사범(士範).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임세복(任世復) 호(號)는 일신재(日新齋). 조선조에 효자(孝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임명주(任命周) 조선(朝鮮)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임성주(任聖周) 1711(숙종 37)~1788(정조 12) 자(字)는 중사(仲思), 호(號)는 녹문(鹿門),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함흥 판관(咸興判官) 적(適)의 아들. 이 재(李 縡)의 문인. 청풍(淸風) 출신. 청주(淸州)에 거주하며 학문을 닦다가 1733년(영조 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50년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시직(侍直)에 승진했으나 연이어 형제가 죽자 사직, 1758년 공주(公州)의 녹문(鹿門)에 은거했다.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불리어 동궁(東宮)을 보도(補導)하고 후에 지방관(地方官)을 지내다가 다시 녹문에 가서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기원로(氣元論)을 발전시켜 조선 성리학(性理學)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임희성(任希聖) 1712(숙종 38)~1783(정조 7) 자(字)는 자시(子時), 호(號)는 재간(在澗), 응교(應敎) 광(珖)의 아들. 1714년(영조 1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되고,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정통했다.

임성(任 珹) 1713(숙종 39)~? 자(字)는 성진(聖振), 호(號)는 수암(羞菴), 시호(諡號)는 충희(忠僖), 수헌(守憲)의 아들. 1755년(영조 31) 진사(進士)로 정시문과(廷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세자 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가 되고, 세자(世子 : 장헌세자) 가 대리청정(代理廳政)하게 되자 그 측근 에서 보필했다.

1762년 사서(司書)로 있을 때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非行)을 상주, 이에 대노한 영조(英祖)가 세자를 죽이려 하자 극력 용서를 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자가 죽은 뒤 보필을 소홀히 한 죄로 파직당했다. 후에 지평(持平)에 기용, 교리(校理)․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임필대(任必大) 자(字)는 중징(重徵), 호(號)는 강와(剛窩).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통달(通達)하였고, 학행(學行)과 덕망(德望)이 당세(當世)에 저명(著名)하였다. 유림(儒林)이 설단(說壇)하여 숭봉(崇奉)하였고 오계사(梧溪祠)에 제향되었다.

임위(任 瑋) 자(字)는 경륜(景潤), 호(號)는 시애(柴厓),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임희중(任希曾) 자(字)는 효언(孝彦), 호(號)는 치암(痴菴). 조선조(朝鮮朝)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임정주(任靖周) 1727(영조 3)~1796(정조 20) 자(字)는 치공(穉恭), 호(號)는 운호(雲號),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함흥 판관(咸興判官) 적(適)의 아들. 1762년(영조 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72년(영조 48) 동몽교관(童夢敎官)을 거쳐 시직(侍直)을 지내고,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세손(世孫 : 정조)을 보필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등 신임이 두터웠으나,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한뒤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世道政治)가 시작되면서 요직에 등용 되지 못하고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온릉령(溫陵令)․청산 현감(淸山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을 역임했다.

형인 성주(聖周)는 학문을 이어 받아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하고, 기를 일원적(一元的) 관념으로 통일하여 성즉기(性卽氣)라고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했다.

임성모(任聖模) 자(字)는 원시(元始), 호(號)는 취죽(醉竹).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임성고(任聖皐) 자(字)는 중안(仲岸)․덕민(德民), 호(號)는 우연옹(偶然翁), 시호(諡號)는 무의(武毅), 충정(忠貞)으로 개시(改諡), 통제사(統制使) 율(嵂)의 아들. 1795년(정조 19) 무과(武科)에 급제,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포로가 되어 인부(印符)를 빼앗기고 항복을 요구받았으나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이를 거절, 100여일간 구금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에 그 충절을 표창받고 우림위장(羽林衛將)에 이어 훈련대장(訓鍊大將)․어영사(御影使)․금위대장(禁衛大將)․총융사(摠戎使) 등 요직을 역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임윤지당(任允摯堂) 호(號)는 윤지당(允摯堂). 임적(任 適)의 딸. 신광유(申光裕)의 부인.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했다. 1796년(정조 20) 동생 임정주(任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가 유고(遺稿)를 정리하여「윤지당 유고(允摯堂遺稿)」 2권을 간행했다.

임태춘(任泰春) 1751(영조 27)~? 자(字)는 자인(子仁), 호(號)는 농옹(聾翁). 효성(孝誠)이 극진하여 부모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권했고 일생을 학문(學問)에 전심했으며, 특히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학문을 배척했다. 사후 효자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임천상(任天常) 1754(영조 30)~? 자(字)는 현도(玄道), 호(號)는 궁오(窮悟), 희익(希翼)의 아들. 화성(華城) 출신. 1777년(정조 1) 진사(進士)가 되고, 1795년(정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이듬해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1806년(순조 6)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고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높았다.

임노(任 魯) 1755(영조 31)~1828(순조 28) 자(字)는 득여(得汝), 호(號)는 영서거사(潁西居士), 대사간(大司諫) 종주(宗周)의 아들. 임성주(任聖周)의 문인. 1777년(정조 1) 아버지가 홍국영(洪國榮)에게 몰려 단천(端川)에 귀양가 죽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했다.

그뒤 여러번 기용되었으나 불응하다가 1809년(순조 9) 제용감 부봉사(濟用監副奉事)가 되었으며,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경모궁령(景慕宮令) 등을 거쳐 신녕 현감(新寧縣監)․충원현감(忠原縣監) 등을 지내면서 간악한 서리(胥吏) 들을 숙청, 토반(土班)의 횡포를 억제하여 질서를 바로 잡았으나 이들이 사감으로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무고하여 진천(鎭川)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석방된 후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임성주(任聖周)의 주기론(主氣論)을 계승했다.

임익상(任翼常) 자(字)는 경문(景文), 호(號)는 청서(靑墅). 조선조(朝鮮朝)에 집의(執義)를 지냈다.

임백경(任百經) 1778(정조 2)~1865(고종 2) 자(字)는 문경(文卿), 호(號)는 하의(荷 ),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참판(參判) 존상(存常)의 아들. 1827년(순조 27)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39년(헌종 5) 충청좌도 암행어사(忠淸左道暗行御史)가 되고, 뒤에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역임, 1856년(철종 7)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858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를 지내고, 1860년(철종 11) 정조 겸 사은사(正朝兼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와 1864년(고종 1)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임백수(任百秀) 자(字)는 치호(穉好). 조선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임헌회(任憲晦) 1811(순조 11)~1876(고종 13) 자(字)는 명로(明老)․중명(仲明), 호(號)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천모(天模)의 아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의 문인. 경서(經書) 공부에 전심, 학자로서의 명성이 알려져 1858년(철종 9) 천거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 나 사퇴, 뒤에 경연관(經筵官)․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내고 1874년(고종 11)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좨주(祭酒)가 되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기(理氣)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하고 기(氣)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인 주기파(主氣派)에 속했고, 천주학(天主學)을 극력 배척했다. 죽은 후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응준(任應準) 1816(순조 16)~1883(고종 2) 자(字)는 재전(在田), 호(號)는 담재(澹齋), 봉조하(奉朝賀) 백수(百秀)의 아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경연관(經筵官)을 지내고, 1852년(철종 3) 홍문관(弘文館)에 등용 되었다가 1858년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로 나갔다. 1882년 (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서 대원군 일파라 하여 민씨 정권(閔氏政權)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임상준(任商準) 1818(순조 18)~? 자(字)는 은경(殷卿), 시호(諡號)는 숙헌(肅憲), 병사(兵使) 백관(百觀)의 아들. 고종(高宗) 때 어영대장(御營大將)․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 하고, 총융사(摠戎使)․지삼군 부사(知三軍府事)를 거쳐, 신군전영사(新軍前營使)를 지냈으며,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使)에 이르 렀다. 후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임태영(任泰瑛) 자(字)는 공간(公澗), 시호(諡號)는 정의(靖毅), 훈련대장 성고(聖皐)의 아들.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 1840년(헌종 6)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재직중에 함경도 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 이은상(李殷相)의 탄핵으로 삭직 당했다가 곧 복직, 이듬해에 경상좌도 순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오르고, 1842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1856년(철종 7)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1858년 금위대장(禁衛大將), 3년 후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등을 역임, 이듬해 총융사를 거쳐 186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내고, 1865년(고종 2)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게 되자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했다.

임선준(任善準) 1860(철종 11)~? 교관(敎官) 백희(百熙)의 아들.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장(成均官長)을 지내고, 1907년(융희 1) 이완용(李完用) 내각에 들어가 내부 대신(內部大臣)이 되었다.

이듬해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전직. 훈일등 태극장(勳一等太極章), 일본의 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旭日桐花大綏章)을 받았다. 한일합방 후 일본정부에 의해 자작(子爵)이 되고 총독부 중추원(中樞院) 고문을 지냈다.

임헌찬(任憲瓚) 자(字)는 옥여(玉汝), 호(號)는 경석(敬石). 한말 때 전우(田 愚) 문하에서 수업(修業), 경서(經書)에 정진(精進)하였고, 이 황(李 滉)․이 이(李 珥) 등 선현(先賢)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여 후진(後進)에게 경서를 강론(講論)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산중(山中)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쓰니 세인(世人)들이 설중고송(雪中孤松)이라 하였다.

임공렬(任公烈) 자(字)는 성무(聖武), 호(號)는 흠재(欽齋). 한말 때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지성(至誠)으로 공양하니 마을 사람들이 효자(孝子)라고 칭찬하였다.

일본 경찰(日本警察)이 효행(孝行)을 포상(褒賞)한다 하며 상금을 주니 "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요, 나라가 없어지고 임금이 망(亡)한 이 마당에 내가 사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상금(賞金)을 받을 수 없소"라고 거절하니 일본 경찰도 감탄(感歎)하 고 돌아갔다. 그는 또한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