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장흥임씨(長興林氏),임분(林蕡),장흥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7 15:50 수정일 : 2018-08-28 15:1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장흥임씨(長興林氏)는 도시조(都始祖) 충절공(忠節公) 휘(諱) 팔급(八及)의 후예(後裔)이시다.

六傳하여 시(諡) 충선공(忠宣公) 諱 몽주(夢周)로부터 누대후(屢代後) 장흥관(長興貫) 일세(一世) 諱 언수(彦脩)의 자(字)는 국경(國擎) 호(號) 계헌(桂軒) 諡 충정(忠貞) 벼슬은 벽상삼한중대광태위찬성사동평장사(壁上三韓重大匡太尉贊成事同平章事)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이요 公의 第三子 諱 제미(齊味)는 개성판윤(開城判尹) 관산군(冠山君) 이시다.

삼세(三世) 諱 맹양(孟陽)은 가선대부일내시교관(嘉善大夫逸內侍敎官) 예조참판(禮曹參判)이요 사세(四世) 諱 세은(世殷)의 벼슬은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로 장택군(長澤君)에 봉하셨다 오세(五世) 諱 분(蕡)의 諡는 충정공(忠靖公) 號 만취정(晩翠亭)이시며 長興林氏 득관조(得貫祖)가 되신다.

公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9년 1370庚戌年에 나시어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20세를 전후하여 문과에 올라 전한문하평장사(典翰門下平章事)를 역임 하시고 23세때 충의배문하시중(忠義拜門下侍中)에 이르셨으나 高麗가 망하고 朝鮮이 건국되니 관직을 버리고 송도(松都) 흥국사(興國寺)에 은둔(隱遁)하시며 논도경방(論道經方) 하시다 1397丁丑年 전라남도(全羅南道) 장흥군(長興郡) 억부산(億夫(佛)山) 도림촌(桃林村)에 세거 하실 때 세종 1432壬子年에 정경(正卿)을 증(贈)하고 장흥군(長興君)에 封하니 諡號는 충정(忠靖)이시다.

公은 開城 남문 밖 야자교(也字橋)위에 탄허비(誕墟碑)를 세워 忠臣 林公之碑라 각(刻)하고 書院은 興國寺基에 세우고 액(額)을 사(賜)하였으며 향년 72세로 卒하시니 배위 貞敬夫人 安東權氏와 도림촌에 쌍봉(雙封)하였다.

公은 어려서 자품(姿稟)이 溫仁하시고 의모(儀貌)가 준의(峻疑)하시며 文辭에 능 하시여 桂軒(忠貞公의 號)선생후로 少年名聞이 더 함이 없었다한다.

그러나 高麗가 망하고 天運이 朝鮮으로 옴에 벼슬을 버리고 송도 흥국사에서 은둔하실 때 수차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不就하시다가 湖南으로 世居地를 옮기실 때 한강을 건너 노래로 탄식하기를 “서산지 미혜 백이채지, 동해지 수혜 중련도지(西山之 薇兮 伯夷採之, 東海(南海)之 水兮 仲連蹈之)”라 이것을 의역하면 “고려는 망하였고 이씨왕조가 세워지매 伯夷 叔齋와 같은 지기로 義를 지키고 오직 세 왕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 草根木皮 생활을 할 것이며, 開京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바다 보이는 곳에서 仲連과 같은 은사로 세상의 도를 지키고 隱人으로 여생을 지내리로다” 하시며 억부산 아래 도림촌에서 정자 두어 칸을 짓고 송백(松柏)을 심으신 것은 세한후조(歲寒後凋)의 義를 취함이요, 石川으로 동맹(同盟)하시며 은거(隱居)하시니 세상 사람들은 林處士라 하더라.

분공(蕡公)께서 湖南으로 隱居地를 옮기신 동기를 살펴보면

첫째. 先祖님들의 政治的 사항이다. 高麗 恭愍王 말기에 崔 塋, 李成桂의 정적들에 의하여 祖父 임맹양(林孟陽), 曾祖父 開城判尹 임재미(林齋味), 從曾祖父 門下侍中領三司事 平原府院君 임견미(林堅味)등 친인척들이 1388戊辰年(禑王 14년) 1월 11일 살해(殺害)를 당하였으니 歷史는 이것을 무진사화(戊辰士禍) 또는 무진지화(戊辰之禍)라 하였으며.

둘째. 公께서는 高麗朝에서 등과(登科)하였고 관직에 있으면서 녹을 받으셨으므로 당시의 사회풍조로 보아 두 王朝를 받들려 하지 안했을 것이요.

셋째. 李氏王朝는 고려유신(高麗儒臣)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家門에 위압을 가하였을 것으로 가문을 지키고 家族을 보호하기위하여 開京(開城)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거하는 것이 올 타고 생각되어 北쪽(당시 明나라와 관계가 정립되지 못하여 불안전한 곳이 엇음) 보다는 南쪽을 택하였을 것이다.

넷째. 從曾祖父 조양군(兆陽君) 諱 세미공(世味公)은 大學者로 말년에 보성군(寶城郡) 조성면(鳥城面)에 내려와 世居하셨으므로 그 친척이 잇는 가까운 長興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公께서는 나라의 흥망지중(興亡之中)에도 義와 道로 家門의 本을 보이니 後孫들이 그 큰 뜻을 이어 평택임씨(平澤林氏)에서 長興林氏로 개관(改貫)하였다.

현재 長興林氏는 공조공파(工曹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찰방(사정)공파(察訪(寺正)公派로 나뉘어 全國各地에서 繁榮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임(林)씨는 전국에 7,1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장흥임씨조상인물

고려시대(高麗時代) 인물

임언수(林彦脩) 자는 국경(國擎) 호 계헌(桂軒) 시 忠貞公. 고려 충열왕 20년 서기1294갑오년에 관직이 벽상삼한삼중대광태위찬성사 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太尉贊成事 門下侍中)을 역임하신 현신(賢臣)으로 임씨의 대소본관(大小本貫)이 여기에서 많이 분관(分貫)되었다.

임재미(林齋味) 개성판윤(開城判尹)을 지내시고 관산군(冠山君)에 봉해 젖으며 高麗 禑王14년 서기1388戊辰年 1월 11일 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兄 堅味 아들 孟陽등과 같이 살해당하니 歷史는 무진사화(戊辰士禍)라 한다

임맹양(林孟陽) 고려조에서 문무가선대부(文武嘉善大夫), 내시교관(內侍敎官),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시고 戊辰士禍때 살해당하다.

임세은(林世殷)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를 지네시고 장택군(長澤君)에 봉하였다.

임분(林 蕡) 호 만취정(晩翠亭), 시 충정공(忠靖公) 장흥임씨(長興林氏) 득관조(得貫祖)이다. 관직은 전한문하평장사(典翰門下平章事), 충의배문하시중(忠義拜門下侍中)을 역임하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

임이(林 頤) 시 충의(忠毅), 지제교(知製敎 : 副提學과 같음)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시고 관산백(冠山伯)에 봉하였음.

임유(林 濡) 회(薈)의 子로 官職은 사마문과대사성(司馬文科大司成)

임자중(林自重) 얼(臬)의 자로 관직은 진문관학부당장(進文관학부당장)

임득이(林得荑)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네시고 공조판서공파(工曹判書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임득유(林得蕤) 부수찬(副修撰), 창평현령(昌平縣令),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시다. 공이 광주목사를 지네 실 때 치안을 잘 다스리어 주민이 철비(철비)로 시무투도(市無偸盜 : 성안에 도적이 없어졌다)라 새겨 세웠고, 정상청정(政尙淸淨 : 청빈한 정치)정치로 화(和)로서 혜민(惠民)하시고 청(淸)으로서 자수(自守)하시니 中國에 까지 알려 젓다 한다.

임적문(林適文) 薈의 孫이며 관직은 공조전서(工曹典書)

임우소(林雨所) 문과에 급제하시어 상주판관(尙州判官), 통정대부 상주목사(通政大夫尙州牧使)를 역임

임언경(林彦京) 통덕랑(通德郞), 음가선대부수군절도사(蔭嘉善大夫水軍節度使)를 역임

임영무(林英茂) 薈의 曾孫으로 관직은 삼사좌윤(三司左尹)

임중경(林重敬) 통정대부 부호군(通政大夫 副護軍)을 지네시다.

임무잠(林茂岑) 사정공파(司正公派)의 시원(始原)이시며 관직은 사정(司正)을 역임.

임귀잠(林貴岑) 시정(찰방)공파(寺正(察訪)公派)의 시원이시고 관직은 연원찰방(璉源察訪),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셨다. 公은 佔畢齋 金宗直선생의 門下生으로 新進派에 속하여 勳舊派 즉 保守派인 柳子光에 의하여 燕山君 4년 7월 戊午士禍로 禍를 피하여 長城으로 이거하시다.

임성밀(林成密) 薈의 현손(玄孫)으로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시다.

임귀지(林貴枝) 통정대부홍산현감(通政大夫鴻山縣監)을 역임, 배형(配亨)은 상덕사(尙德祠)

임신지(林信枝) 선무랑(宣務郞)

임수미(林秀美) 통덜랑(通德郞)

임장춘(林長春) 승사랑 후릉참봉(承仕郞 厚陵參奉)

임방회(林芳檜)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임옥석(林沃碩) 증가선대부이조참판(贈嘉善大夫吏曹參判)

임계주(林繼周)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

임계장(林繼璋) 통정대부(通政大夫)

임덕원(林德元) 장사랑 사복시판관(將士郞司僕侍判官)

임중생(林重生) 례빈사참봉(禮賓寺參奉)

임익손(林益蓀) 영덕현감(盈德縣監), 진주목사(晋州牧使),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네시고 母喪때 시묘(侍墓)3년을 지네시다

임원배(林元培) 위용참봉(衛容參奉)

임원서(林元恕) 조봉대부 습독관(朝奉大夫 習讀官)

임원양(林元亮) 의릉참봉 조봉대부(義陵參奉 朝奉大夫)

임원로(林元老) 통덕랑(通德郞)

임태정(林泰貞) 통정대부(通政大夫)

임용개(林用漑) 통훈대부행군자감판관(通訓大夫行軍資監判官)

임용윤(林用潤) 호 삼익당(三益堂) 관직은 봉직랑사복시판관(奉直郞 司僕侍判官)

임용택(林用澤) 장사랑부장(將仕郞部將)

임용협(林用浹) 선무랑(宣務郞)

임손(林 蓀)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

임곤(林 坤) 장사랑제독(將仕郞提督)으로 忠愍公 林慶業將軍이 義州府尹으로 계실 때 朝,淸,明의 싸움에서 순절

임훈(林 壎) 장사랑습독(將仕郞習讀)

임태릉(林太陵) 통정대부(通政大夫)

임옥(林 沃)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

임익(林 瀷) 통덕랑(通德郞)

임식(林 湜) 선무랑세자익위습독(宣務郞世子翊習讀)

임충국(林忠國) 승훈랑공릉참봉(承訓郞恭陵參奉),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임경국(林擎國) 선무랑사헌부감찰(宣務郞司憲府監察

임성국(林成國) 서무랑상의원별좌(宣務郞尙衣院別坐)

임흥국(林興國) 봉훈랑의금도사(奉訓郞 義禁都事)

임시발(林時發) 통정대부(通政大夫)

임수연(林壽延) 선무랑군기사주부(宣務郞軍器寺主簿)

임발영(林拔榮) 장사랑습독(將仕郞習讀)

임자영(林自榮) 부호군(副護軍)

임삼춘(林三春) 어모장군(禦侮將軍)

임우춘(林遇春) 증가선대부공조참판(贈嘉善大夫工曹參判)

임수춘(林遂春) 長興林氏 사현(四賢)으로 계산사(桂山祠) 유허비(遺墟碑)에 모셔있으며 公은 정유재난(丁酉再亂)때 창의(倡義)하여 軍糧과 軍器를모아 高敬命將軍을 돕던 차 賊(日本軍)에게 붙잡히게 되니 婦人과 함께 바다에 빠져 殉節하시니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수성지(守城誌)에 기재되고 倡義碑는 靈光郡廳廣場에 세우시다.

임두춘(林逗春) 公은 壬辰倭亂때 첨정(僉正) 沈友信將軍 副長으로 忠州등지에서 倭賊을 물리치고 晋州城으로 내려와 文烈公 金千鎰제공과 함께 진주성에서 殉職하시니 유의(遺衣)로서 묘장(墓葬)하고 장천사(長川祠)에 배향(配享)되었으나 1837년 桂山祠로 이배(移配)하여 주벽(主壁)으로 모셨다.

임봉수(林鳳壽)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임산해(林山海) 훈련원첨정부호군(訓練院僉正副護軍)

임산식(林山湜)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

임식(林 植) 통정대부부호군(通政大夫副護軍)

임숙(林 橚) 통정대부(通政大夫)

임의(林 檥) 승훈랑의금부도사(承訓郞義禁府都事)

임환(林 桓) 통정대부(通政大夫)

임두(林 杜) 통정대부(通政大夫)

임정발(林廷發) 선전관(宣傳官)

임정기(林廷杞) 통덕랑(通德郞)

임덕수(林德秀) 선무랑주부(宣務郞主簿)

임해(林 海) 통정대부(通政大夫)

임흥진(林興震) 公은 武科에 及第하여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로 왜적과 싸우다 婦人이 賊에게 목숨을 잃게 되였다. 桂山祠 四賢으로 모셨다.

임화진(林華震) 승사랑사옹원봉사(承仕郞司饔院奉事)로 壬辰倭亂과 丁酉再亂때 義兵을 이끌고 伯父 松窩公(興震)을 돕다

임호(林 浩) 통훈대부(通訓大夫)

임용남(林용男) 승사랑(承仕郞)

임형남(林亨男) 통정대부(通政大夫), 증형조참의(贈刑曹參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