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옥야임씨 시조(沃野林氏),임윤손(林允遜),옥야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7 15:18 수정일 : 2018-07-31 11:4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옥야임씨(沃野林氏)는 임윤손(林允遜)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옥야(沃野)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옥야(沃野)는 전라북도 전주(全州) 서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百濟)의 소력지현(所力支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옥야(沃野)로 개명하였고 고려 초에는 전주(全州)에 속하였으며 1551년(명종 1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내속(來屬)시켰다. 지금은 익산군(益山郡)에 속해 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윤손의 아들 중로(重老)가 고려(高麗) 때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중손 춘무(春茂)가 조선(朝鮮)에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현손 천수(千壽)가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살아있는 문화재라 일컬어진 천(泉)이 고고미술학(考古美術學)이 권위자로서 이름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옥야임씨(沃野林氏)는 전국에 1,38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歷代人物)-옥야임씨조상인물

임중로(林仲老) 자(字)는 충수(忠搜).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임만령(林萬齡)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임춘무(林春茂) 조선에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架線貸付)에 올랐다.

임천수(林千壽) 자(字)는 수길(壽吉).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임지백(林之柏) 자(字)는 여직(予直). 조선(朝鮮) 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임달백(林達柏) 자(字)는 공직(公直). 조선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임지회(林之檜) 자(字)는 선직(善直). 조선조(朝鮮朝)에 부사직(副使直)을 지냈다.

임학래(林鶴來) 자(字)는 봉서(奉瑞).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임윤택(林潤澤) 자(字)는 덕빈(德彬). 조선 영조(英祖) 때 문과(武科)에 급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임진채(林震埰) 자(字)는 세장(世章). 조선조(朝鮮朝)에 부사직(副詞直)을 지냈다.

임진호(林震壕) 자(字)는 윤호(潤浩). 조선(朝鮮) 때 수직(壽職)으로 가의대부(嘉儀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올랐다.

임천(林 泉) 1908(융희 2)~1965 본명(本名)은 화봉(化鳳). 개성(開城) 출신. 간도(間島)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에 건너가 1927년 도오꾜오 미술대학(東京美術大學) 동양화과에 입학, 2년간 수학했다.

고고미술에 관심이 깊었고, 1933년 관음사 대웅전(觀音寺大雄殿)․평양 대동문(大同門)․화엄사 각황전(華嚴寺覺皇殿)․개심사 대웅전(開心寺大雄殿) 등의 보수공사에 채색 조사원이 되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소속되어 계속해서 문화재의 복원(復元)․보수(補修)․실측(實測) 공사를 맡아 이 방면의 우일한 권위자로서 살아 있는 문화 재라 일컬어졌다.

그 동안 불국사 대웅전(佛國寺大雄殿)․경복궁(景福宮)․수원 팔달문(八達門)․촉석루(矗石樓)․보신각(普信閣)․남한산성(南漢山城) 등국보급 건축물의 보수․중수(重修) 공사를 직접 맡아 했고, 국립박물관 학예관․문화재 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62년 임천 고건축설계사무소(古建築設計事務所)를 창설, 후진을 양성 했다. 특히 단청(丹靑) 관계에 조예가 깊었고 많은 모사작품(模寫作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