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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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06 20:24 수정일 : 2018-08-20 13:37

 

임씨(林氏)의 득성유래(得姓由來)

임씨(林氏)성은 BC천년경 중국의 은()나라 왕자 비간(比干)이 당대의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로 주왕의 폭정을 만류하니 주왕이 예로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염통에 구멍이 아홉 개가 있겠다 하면서 비간을 죽였다. 비간은 은나라 태정대왕(太丁大王)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주왕의 숙부(叔父)이시다. 비간공이 은 말에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정부인 진씨(正夫人 陳氏)는 임신 중에 장림산(長林山)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으시니 천()이라 하였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건국(建國)하자 무왕(武王)이 비간공의 아들 천을 찾아 임씨(林氏)의 성과 견()이라는 이름을 사()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나주임씨 연원(羅州林氏 淵源)

나주임씨는 선세(先世)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대장군 임비(林庇) 위로 여러 대()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 여러분 있었다는데, 세대가 아주 멀고 문적을 증거 할수 없어 지금 상고해서 밝일 수가 없으므로 맨머리에 오르는 할아버지에게 시()자를 쓰는 것이 죄송할 것 같아 족보예규를 참고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시절 대장군을 지낸 임비(林庇)공을 원조(遠祖)로 하고있다.

대장군 임비(林庇)공이 고려의 충열왕이 아직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와 화의(和議)를 위해 갈 때 호종하고 갔다가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임연(林衍)등이 원종(元宗)을 폐하고 그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를 알게 된 세자 일행은 원으로 돌아가 원 황제 세조(世祖)의 힘으로 원종이 복위되고, 귀국하여 세자는 1274년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되었다.

원과 화의할 무렵 혼란기와 무인(武人)의 오랜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끝 까지 충열왕을 시종보좌(侍從輔佐)한 대장군 임비(林庇)공은 그 공로로 12812등공신이 추록되어 토지와 하인, 철권을 하사받았다. 벼슬은 대장군 충청도지휘사판사재시사(忠淸道指揮指使判司宰寺事)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였다.

임비(林庇)9세손 감무공(監務公) 임탁(林卓)이 해남감무(海南監務)를 지낼 때 고려 오백년 사직이 막을 내리고,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1392년 조선이 개국되었다. 공은 충절을 지켜 여러 다른 충의지사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망국의 한을 지닌 채 충절을 지키던 많은 지사. 현사들이 희생되는 과정에서 공은 나주 회진(會津)에 은거(隱居)하였다. 이로서 본관을 회진으로 쓰게 되었으며 회진은 나주에 속하게 됨으로써 나주임씨가 된것이다. 감무공 아후 소윤공 봉(小尹公 鳳) 산원공 시소(散員公 始巢) 시정공 석주(寺正公 碩柱) 참의공 귀연(參議公 貴椽)등 여러 대에 이르기 까지 벼슬길을 멀리하고 세가(世家)의 풍교(風敎)만을 유지하였다. 이후 감무공의 육세 손 우후공 평(虞侯公 枰)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병마우후(兵馬虞候)에 까지 올랐다.

또한 감무공의 7세손 부윤공 붕(; 號 歸來亭)이 문과에 급제하여 옥서(玉署), 좌승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계림부윤(鷄林府尹).광주목사(光州牧使)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의 맏아들 장수공 익(長水公 益). 정자공 복(正字公 復). 절도공 진(節度公 晉). 첨지공 몽(僉知公 蒙) 4형제가 현달하여 가세가 번영하게 되었다. 이 박에도 감무공의 두째 손자인 유소(有巢)공 대에서 비롯되는 도정공파(都正公派)가 있는가 하면 감무공의 5세손 귀량공(貴樑公)을 파조로하는 진사공파, 7세손 학공(鶴公)을 파조로하는 생원공(生員公), 안공(鷃公)에서 동지공파(同知公派)가 파생되어 대별하여 8개 파가 나오게 되었다.

부윤공(府尹公) ()은 기묘사화 때 명신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를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던 태학(太學)의 주동자하였으며 공의 장자 장수공익(益 字 希謙)은 장수 현감(縣監)을 지냈고, 둘째 정자공 복(復 字 希仁)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직에 있을 때 간신들의 모략중상으로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나와 향리 에 돌아와 은둔하였다.

이분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격파하여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데 주력함인 거북선을 설계한 분이라고 대석학자 강항(姜沆)의 수은집(睡隱集) 풍암임공행장(楓岩林公行狀)과 조희일(趙希逸)의 죽음집(竹陰集) 정자공묘갈명(正字林公墓碣銘) 두 분 문집에 밝히고 있다.

셋째 절도공 진(晉 字 希善)은 오도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지내셨는데 평안병사(平安兵使)에 이르러 가선대부(嘉善大夫)가 가자되었으며 청렴하여 왕께서 정절집(靖節集) 이권을 하사하였으며, 재주(濟州)와 영변(寧邊)에 청정비가 수립되었다. 절도공 진의 맏아들인 백호공 제(白湖公 悌)1578년 알성을과(謁聖乙科)에 급제하여 옥당 예조정랑에 이르렀으나 드물게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배격하여 충분강개(忠憤慷慨)함이 널리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탈속한 문장과 호연한 기상을 날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셋째 아들 습정공 환(習靜公 懽)은 임진 정유 양란에 분연히 창의하여 공을 세워 소의장군(昭義將軍) 칭호로 이등록권(二等錄卷) 받고 증좌승지(贈左承旨)이다.

정자공 복의 맏아들 인 감사공서(㥠 號 石村)은 선조 1599년 정시병과(庭試丙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황해감사(黃海監司)에 이괄(李适)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감사공 서()의 맏아들 승지공 연() 호 한호(閒好)1613년 증광병과(增廣丙科)에 급제하여 우승지에 이르렀고, 감사공의 둘째 아들 충익공 담(忠翼公 墰)1635년 증광병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병자호란의 뒷일을 수습하기위하여 접반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가산(嘉山)에서 생을 마치니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정자공 복의 이자(二子) 유호공 협()의 맏아들인 상주공 (尙州公) ()는 인조반정에 공을 새워 정사원종(靖社原從) 2등 공신에 책록 되고 관은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이르러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유호공의 협의 둘째 아들 한() 동리공(東里公)은 도학과 문장으로 당대의 백미(白眉)로 칭송을 받았고 습정공 환의 아들인 월창공(月窓公) ()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새웠다. 나주임문(羅州林門)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신 충신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특히 부윤공 붕의 후손에서 현달한 분들이 많이 나왔다. 중요한 인물로 창계공 영(滄溪公 泳)1671년 정시을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대사헌(大司憲) 부제학(副提學)에 이르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고 성리학에 밝아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편 대석학으로 나주 창계서원(滄溪書院)과 함평 수산사(水山祠)에 제향한다.

부윤공 붕(府尹公 鵬)7세손 교리공(校里公) 상덕(象德)1705년 별시갑과(別試甲科)에서 장원하여 벼슬에 나아가 호당(湖堂)에 올랐고 남평 현감등을 역임하였는가 하면, 부윤공의 8세손 정간공 한호(貞簡公 漢浩)1792년 식년 병과(式年丙科)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에 올랐고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어 서얼(庶孼)의 등용을 주청하여 인재등용의 고질적인 병폐를 혁파 했던 분으로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붕의 9세손 간헌공 시철(簡憲公 蓍喆)1771년 식년 병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간헌(簡憲)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경진(景鎭) 대사간을 지낸 동진(東鎭 ) 참판 희진(喜鎭) 옥당 참판을 지낸 한진(翰鎭) 옥당 대사간 처진(處鎭)등이 모두 그분의 자손들이다.

부윤공의 11세손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효정공 영수(孝靖公 永洙)는 일찍이 1825년 중시병과에 급제하여 여원보략(濾源譜略)을 재 발간하는데 참여하였고 의주의 부윤 강원 함경도 관찰사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기노소(耆老所)에 드는 영광을 얻은 효정공 한수(孝靖公 翰洙)등이 다같이 나주임씨 문중을 떠받들던 인재들이다. 판서공 긍수(肯洙 諡號 文憲)1837년 식년 갑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전라감사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한말에 이르러 충민공 최수(忠愍公 最洙)는 벼슬이 시종(侍從)이었으나 천인 공로할 왜인들의 국모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어 동지들을 규합하여 역적의 괴수와 친일파를 소탕하고 왜인들을 축출함으로서 조정을 혁신하려는 거사를 꾀하다가 간당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이렇듯 나주임씨는 부윤공 붕 이후 11.12대에 이르기 까지 문장과 도학은 물론 조정에서 뛰어난 재능를 발휘하였다. 특히 환로(宦路)에 있어서 문과 급제하신 분이 57인이나 되고 시호를 받으신 분이 7. 문행으로 서원이나 사우(祠宇)에 배향된 분이 7위에 이른다.

근세에 들어와서 나라의 운명이 급기야 풍전등화 같았을 때 나주 임문은 다시 한번 그 기계를 발휘하였다. 그중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분으로 의사(義士) 용상(龍相)이 있다.

공은 치욕스러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왜적에게 대항 결연히 창의하여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 지휘하였고 그 후 광복단체인 대동단을 조직 대구 지역 책으로 활약하였으며 현재 대구 대명동 시립공원에 그분의 동상이 세워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조직적인 조선어학화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옥고를 치룬 계산공 혁규(溪山公 爀圭) 또한 뺄 수 없는 분이다. 그런가하면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할 때인 1930년대 중반에 자주정신의 확립으로 잃어버린 주권을 찾기 위하여 회진개혁청년회(會津改革靑年會)를 결사한 분들이 대부분 나림의 청년들인데 국민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전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옥고로 주동자 임우택(林禹澤)은 희생당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면서 국제외교 주역으로 한국외교관의 대부가된 소죽(小竹)공 임병직(林炳稷)19131010일 고국을 떠나 유학길에 오르면서 가족과 해어져 1949128일 귀국 비행기에서 외무부 장관의 임명을 받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35년간 한번도 가족과 상면을 못하였다. 미국 오하이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취임하여 이승만 박사를 도아 독립운동을 하였다. 외무부 장관을 거쳐 사변 후에는 주UN대사로 국익과 국위선양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외교관과 후손들의 모범이 되신 분이다.

나주임문은 문과 57명 무과 33명 생원 진사가 147명을 배출되었으나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번영을 만을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여말 선초 혼란기에 충의의 절개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위기도 있었고, 회진으로 낙향한 후에도 백여 년간 벼슬길에 나가지 안하여 기개 높은 문중의 얼을 이어 한미하기도 하였다.이렇게 나주임씨의 혈통 속에는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가훈인 청고근졸(淸高謹拙)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봉사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임씨는 전국에 277,699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조사되었다.

역 대 인 물

고려시대 인물

임비(林 庇) 충열왕 세자 시절 원나라에 가서 화의하고, 무관의 세도를 종식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시종보좌(侍從輔佐)한 공훈으로 1281년 충렬왕 7년에 이등공신(二等功臣) 추록(追錄)되어 전민(田民)과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다. 관은 대장군 충청도도지휘사판사사사(大將軍忠淸道都指揮使 判司寺事)이다.

임영발(林永拔) 직장동정(直長同正)

임량간(林良幹) 정용장군 증봉익대부이부상서(精勇將軍 贈奉翊大夫吏部尙書)

임박(林 朴) 봉익대부행호군(奉翊大夫行護軍)

임영문(林永文) 보승중랑장(保勝中朗將)

임돈세(林敦世) 보승별장(保勝別將)

임수(林 秀) 별장 증봉익대부판도판서(別將 贈奉翊大夫版圖 判書)

임선(林 宣) 봉익대부행호군(奉翊大夫行護軍)

임탁(林 卓) 봉순대부(奉順大夫) 젊어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더니 벼슬에 임하여도 첨렴검소 하였다. 일직이 외직으로 해남감무(海南監務 從六品) 해주감목(海州監牧 從五品)등을 역임하고 내직으로 소윤(小尹 從四品)을 역임하다가 이성계 일파의 혁명으로 인하여 여흥왕(麗興王)과 윤왕(允王)이 시해되고 최영(崔塋) 변안렬(邊安烈) 정몽주(鄭夢周)등 고려 충신들이 잇따라 참화를 당함에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이 고려의 종사를 슬퍼하며 원주 치악산(雉岳山) 에서 단사(壇祀)를 모심에 임탁도 망복동지(罔僕同志)들과 더불어 참사하고 기울어가는 고려의 운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마침내 간성왕(杆城王) 마저 찬탈(簒奪) 당하고 조선조가 건국함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괘관현(掛冠峴)에 올라 관복을 걸고 통곡하면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임봉(林 鳳) 봉선대부 군기소윤(奉善大夫 軍 器少尹) 불훵재(不諼齋) 문정공(文貞公) 신현(申賢)의 문하생이다. 여말에 벼슬이 군기소윤(軍器少尹 從4)이다. 일찍이 이색() 정몽주 (鄭夢周) 김제(金濟) 김혁(金革) 이석(李碩) 최원개(崔元凱) 신덕린(申德隣)김주(金澍) 탁신(卓愼) 구영검(具榮儉) 김중방(金仲滂)송인(宋寅)등 신자문인(申子文人)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교유(交遊)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건국됨에 찬역(簒逆)의 무리와 하늘을 같이 할 수 없어 부친을 모시고 두 아들 시소(始巢) 유소(有巢)를 대리고 고향에서 절의를 지키었다.

임시소(林始巢) 보승산원(保勝散員)

임유소(林有巢)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

 

조선시대 인물

임준(林 峻) 자 자후(字 子厚) 전의현감(全義縣監)

임평(林 枰) 자 균보(均甫) 전라병마우후(全羅兵馬虞候)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

임대동(林大仝) 자 정숙(字 貞淑) 호 회헌(號 晦軒) 임실현감 점필제 김종직(佔畢齊 金宗直)의 문인.

임종인(林宗仁) 자 미원(美源) 호 회암(會岩) 148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88년 식년(式年) 을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고 외직으로 현감을 역임하였다 점필제(占畢齊)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임붕(林  鵬) 자 충거(沖擧) 호 귀래정(歸來亭) 1510년 문과에 오르기전 반궁(泮宮)에 거할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관학재생(館學諸生)이 공을 추대하여 소두(疏頭)가 되어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를 구원운동을 하였다. 1521넌 별시(別試) 병과에 급하여 한옥(翰玉) 좌승지(左承旨) 오조참의(五曹參義) 동지사(冬至使) 전라충청병사(全羅忠淸兵使) 경주부윤(慶州府尹)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핬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임익(林 益) 자 희겸(希謙) 장수현감(長水縣監)이다.

임복(林 復) 자 희인(希仁) 호 풍암(楓巖) 154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46년 증광 을과(增廣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에 등용 되였는데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사건에 연루 되여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順懷世子)의 탄생으로 특사로 풀려나 고향 회진으로 돌아왔다.

선조(宣祖)초에 박사(博士)에 임명 되였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공은 시문(詩文)과 학행(學行)뿐만 아니라 무략(武略)에도 뛰어났다. 1574년에 왜()가 쟁단(爭端)을 만들자 변사(邊事) 십여책(十餘策)을 상소(上疏)하니 상()께서 비답(批答)을 내려 그중 전선(戰船 鐵甲船)의 제도(制度)를 가납(嘉納) 비변사령(備邊司令)과 각도수사(各道水使)로 하여금 그 설계에 따라 장조(裝造)하여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을 장려하였다. 과연 10여 년 후 1592년 임진년에 난이 일어나 통제사 이순신(統制使 李舜臣)등이 이것을 이용하여 대승(大勝)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가 증직되었다.

임진(林 晉) 자 희선(希善) 154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練院正)을 거쳐 전라수사(全羅水使) 제주목사(濟州牧使) 영남(嶺南) 호남(湖南) 호서(湖西) 북계(北界) 오도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고 청백이(淸白吏)로서 영변(寧邊)과 제주에 청정비(淸政碑)가 있다.

임몽(林 蒙) 자 희정(希正) 첨지중추부사(僉 知中樞府事)

임희무(林希茂) 자 언실(彦實) 호 람계(濫溪) 1558년 세자별시 병과(世子別試 丙科)에 급제하여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에 올랐고 외직으로는 순창 금산 밀양 울산부사와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조남명(曹南冥)의 문인이다.

임홍(林 鴻) 자 익지(翼之)성주목사(星州牧使)

임제(林 悌) 자 자순(子順) 호 백호(白湖) 겸재(謙齋) 풍강(楓江) 소치(嘯痴) 1576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77년에 알성을 과(謁聖乙科)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曹正 朗)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동서양당의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마쳤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이 날렸고 호방쾌활(豪放快活)한 시풍(詩風)으로 작품이 널리 애송되었다. 저서로는 화사(花史) 수성지(愁城志) 백호집(白湖集)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남명소승(南溟小乘)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용성수창집(龍城酬唱集)등이 있다.

임순(林 恂) 자 자침(子忱) 호 해은(海隱)은 무과에 급제하여 강계부사(江界府使) 방어사(防禦使)에서 남도절도사(南道節度使)에 발탁되었다.

임환(林 懽) 자 자중(子中) 호습정(習靜)1590년 진사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事官)이 되고, 이어 사포별제(司圃別提)가 되어 적중에 들어가 묘주(廟主)를 모시고 나왔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보화도(寶化島)에 주돈한 이순신(李舜臣)에게 가장(家藏)양곡 수백섬을 군량에 제공하고 팔도(八道)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예교전투(曳橋戰鬪)에서 전공(戰功)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되고, 1604년 문화현감(文化縣監)이 되었으나 이듬해 무고로 파직되었다정유란에 왜적이 나주을 공략하니 나림 전 종원은 배를 타고 해로로 피란 가는데, 돌연 왜선이 나타나 전원이 나포 되니 임환의 별실 제주양씨가 왜장을 찾아가 전 종원을 풀어주면 몸을 주겠다고 하여 왜장이 수락하고 종원의 배가 멀어져 가자 바다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키여 정려가 하사되었다.

임서(林 㥠) 초휘 업(初諱 業) 자 자신(子愼) 호 석촌(石村) 1590년에 진사가 되고 1599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고 주서(注書)가 된 뒤 이너 봉상사직장(奉常寺直長) 공조좌랑(工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지평(持平) 봉산군수(鳳山郡守) 승지(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 함양군수(咸陽郡守)등을 역임했으나 대북(大北)의 전횡을 피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안동부사(安東府使)가되고 이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어 적폐(積弊)를 시정하고 농사의 장려, 군사의 조련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을 도와 군량을 보급하고 군사를 보내어 이를 평정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좌찬성 (左贊成)이 증직되었다.

임연(林 堜) 자 동야(東野) 호 한호(閒好). 1610년에 진사가 되고. 1613년 증광병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으로부터 태상(太常)에 옮겨 공조정랑(工曹正郞) 정언(正言) 직강(直講) 지평(持平) 문학(文學) 장영(掌令) 필선(弼善) 사간(司諫) 집의(執義) 보덕(輔德) 사도(司徒) 종부(宗簿) 사복정(司僕正)들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한 공로로 통정(通政)으로 승진 되였다. 한편 형조참의(刑曹參議)가되었고 은대(銀臺)에 여러 번 들어가 차차 우승지(右丞旨)에 이르고, 영맘 진주 원주 남원등 부사로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오다. 시종(侍從)으로써 나라의 부름을 받으매 병중이라고 상주하고 나가지 안했다. 식영정(息營亭)을 짓고 후진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인조 갑술 원종입묘(元宗入廟)시 대사헌 강석기(大司憲 姜碩期) 장영 임연(掌令 林堜) 지평 안시현(持平 安時賢)등이 종묘소목(宗廟昭穆)에 법제는 지엄하고 중하여 그 위에 오르지 못하면 종묘(宗廟)에 들어가지 못하는 의리를 주달하매 강석기는 면직되고 임연과 안시현은 사직되었다고 점원일기에 기록되어있다.

임충서(林忠恕) 자 국인(國仁)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천총(千摠)이 되어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이 증직되었고 안주충민사(安州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임담(林 墰) 자 재숙(載叔) 호청구(淸臞)1616년 생원이 되고 1635년 증광 병과(增廣丙科)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에 지평(持平)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총융사(摠戎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남격대(南格臺)를 수비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후 진휼어사(賑恤御使)로 호남지방에 내려갔다가 1639년 좌승지(左承旨)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644년 경상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서원(書院)이 사당화(私黨化) 하는 폐습을 상소하였다. 1646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결하고 그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 뒤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丞旨)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1652년 우참찬(右參贊)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승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로 의주(義州)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가산()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임타(林 㙐) 자 실지(實之) 호 몽촌(夢村) 1618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시문이 탁월하여 과거보다는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다. 기상(氣象)이 간엄(簡嚴)하고 식량(識量)이 높아 당시 이름이 높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어 금오랑의금부도사(金吾郞義禁府都事)를 제수 받고 1625년 내첨주부(內瞻主簿)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호조정랑(戶曹正郞) 사복시정(司僕寺正) 첨정(僉正) 오위장(五衛將)으로 승진하여 정사종훈일등(靖社從勳一等)에 추록(追錄)되었고, 파주목사(坡州牧使) 상주목사(尙州牧使)등을 구군쉬행(九郡倅行)을 했다. 1644929일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피집(被執)되어 심양(瀋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 쉬지 않고 풍산(豊山)까지 달려가 눈물로 송별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고 록권(錄卷)이 있다.

임한(林 㙔) 자 평중(平仲) 호 무민당(無悶堂)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항상 이이(李珥0선생의 학문을 연구했다. 현종(顯宗)때 위일(遺逸) 추천받고 지평(持平)에 등용되어 부임 차 서울에 올라가서 갑자기 병사하였다.

임게(林 垍) 자 맹견(孟堅) 호 월창(月窓) 학문에 뛰어나 천문(天文) 지리(地理) 산수(算數) 율려(律呂) 복술(卜術)에 이르기 까지 정통했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공신(功臣) 원두표(元斗杓)를 도와 공을 세우고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난과 1636년 병자호란 양란에 조행립(曺行立) 임기영(林起榮)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었으나 진압이 되어 영암(靈岩)에 돌아와 은거했다. 영당(影堂)은 영암에 보존 되어있다.

임숙(林 埱) 자 이후(而厚) 기장현감(機張縣監)

임제민(林濟民) 자 인백(仁白) 호 의암(義庵) 학문이 높았고 또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아 만념에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 되였다.

임하유(林夏儒) 자하경(夏卿) 장흥부사(府使

임상유(林商儒) 자상경(商卿) 김해부사(府使

임한유(林漢儒) 자한경(漢卿) 부령부사(府使

임종유(林宗儒) 자 백진(伯眞) 빙고별제(氷庫別提) 선공직장(繕工直長)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

임굉유(林宏儒) 자 중직(仲直) 청암찰방(靑岩察訪) 증 이조판서(吏曹判書)

임일유(林一儒) 자 노수(魯叟) 한성부윤(漢城府尹)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임속(林 涑) 자 도원(道源) 도원찰방(桃源察訪)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증직되었다.

임반(林 般) 자 증보(澄甫) 장흥부사(府使)

임장(林 漳) 자 장숙(長淑) 선전관(宣傳官)

임세온(林世溫) 자 직경(直卿) 호 이호(梨湖) 1683년 생원이 되어 도원찰방(桃源察訪)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벼슬이 진실로 좋은 것이나 밭 갈고 강에서 고기 낚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하겠느냐 하시였다. 아들 상덕(象德)의 시종추은(侍從推恩)으로 통정(通政)에 승진되어 부호군(副護軍)되었다.

임세량(林世良) 자 필경(弼卿) 1684년에 생원이 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아 되었다. 외직으로 용안 함열현감(龍安 咸悅縣監)과 안산군수(安山郡守) 장성부사(長城府使)를 역임하였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장성과 시흥에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임세공(林世恭) 자 예경(禮卿) 1684년에 진사(進士)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했음

임세검(林世儉) 자 절경(節卿) 1684년에 진사되어 1705년에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별시병과(別試丙科)에 급제하여 내직(內職)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郞)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외직(外職)으로 고산현감 진위현령(振威縣令)단양군수(丹陽郡守)를 역임 하였다.

임세양(林世讓) 자 득지(得之) 1696년 생원이 되어 선공부정(繕工副正)과 남평현감(南平縣監) 금구현령(金構縣令)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임세겸(林世謙) 자 겸지(謙之) 1702년에 생원 되어 직산현감(稷山縣監)을 거쳐 옥천군수(沃川郡守)재직 시 1728(영조4) 이인좌(李麟佐)10만대군의 반란을 평정에 참여하여 분무원종일등공신(奮武原從一等功臣)으로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승진하였다. 증 가선대부이조참판(贈 嘉善大夫吏曹參判)

임시원(林時遠) 초휘(初諱) 시만(時萬)호 구암(龜巖) 겸사복(謙司僕)으로 1728년 이인좌 란(李麟佐 亂) 진압(鎭壓)에 참여하여 분무원종삼등공신(奮武原從三等功臣)훈록을 받고, 록권(錄券)은 후손이 보존하고 있다

임세즙(林世諿) 자 계화(季和) 1713년 진사가 되어 내직으로 호조정랑(戶曹正郞)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을 지냈고 외직으로 한산군수(韓山郡守) 재령부사(載寧府使)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좌찬성(贈左贊成)이 증직되었다.

임세환(林世讙) 자 후일(厚日) 호 천보(天寶) 군자감정(軍資監正)

임환(林 渙) 자 문보(文甫) 호 관곡(寬谷) 1660년에 생원이 되고 1681년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알성을과(謁聖乙科)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능주목사(陵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임영(林 泳) 자 덕함(德涵) 호 창계(滄溪)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1665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1671년 정시을과(庭試乙科)에 급제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그 후 이조정랑(吏曹正郞) 대사헌(大司憲)등을 역임하고, 1694년 대사간(大司諫)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처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나, 병으로 눕게 되어 약물(藥物)을 하사 받았고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에게도 수학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자였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는 이이(李珥)의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나주에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배향(配享)되였다.창계집14

임정(林 淨) 자 도중(道仲) 호 매계(梅溪) 1682년에 생원이 되어 화순현감(和順縣監) 청도군수(淸道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강화유수(江華留守)등을 역임하였다. 영당(影堂)이 지금까지 나주회진에 보존되어 있다.

임활(林 活) 무과에 올라 방답첨사(防踏僉使)를 거처 곤양군수(昆陽郡守)를 지냈다.

임학(林 㶅) 자 여함(汝涵) 무과에 올라 임뇌첨사(臨腦僉使)를 지냈다.

임호(林 濩) 자 차소(次韶) 호 늘헌(訥軒) 1666년에 생원 되고 1683년에 증광병과(增廣丙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 동벽(東壁)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영광군수(靈光郡守)에 발탁되어 단신으로 부임하였다. 군수재임 시 자제가 면회 오면 민폐가 된다고 당일로 군계까지 가서 송별하는 등 청백리로 선정(善政)을 베푸시어 맥수가(麥穗歌)가 향방(鄕坊)에 충만하였고 이임 시 군민들이 방을 돌려 놋그릇을 성출하여 一心公正 萬古淸白이라는 청백리 거사비(去思碑)를 동으로 만들어 새웠다.

임수춘(林壽春) 자 원노(元老) 무과(武科) 첨사(僉使)

임귀춘(林貴春) 자 달경(達卿) 무과(武科) 부호군(副護軍)

임창택(林昌澤) 자 대윤(大潤) 호 숭악(崧岳)1711년 진사가 되었으나 백운동에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증 지평(持平)되고, 숭남사(崧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임상덕(林象德) 자 윤보(潤甫) 이호(彛好) 호 노촌(老村) 1699년에 진사가 되고 1705년에 별시 갑과(別試 甲科)에 장원하여 문학 수찬(修撰)을 거쳐 1709년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그후 교리(校理)를 거쳐 진산군수(珍山郡守) 전라우도경차관(全羅右道敬差官) 능주목사(陵州牧使)를 하였다. 일직이 경악(經幄)에 있을 때 강론(講論)함이 격절(激切)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상()에게 권하여 성중 사찰(寺刹)을 철거토록 하니 상하가 경악하였다. 저서에 노촌집(老村集)4권 동사회강(東史會綱) 27권이 있다.

임상태(林象台) 자 휘삼(輝三) 1713년에 진사(進士)가되어 연기현감(燕岐縣監)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역임하였다.

임상규(林象奎) 자 휘문(輝文) 1713년에 생원(生員)이 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냈고 증 이조참판(吏曹參判)이다.

임상익(林象翼) 자 휘보(輝輔) 1714년 진사(進士)에 올라 포천(抱川) 평택(平澤) 양현감(縣監)을 거쳐 익산군수(益山郡守)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내고 함흥판관(咸興判官) 인천부사(仁川府使)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했다. 수직(壽職)으로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이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증직되었다.

임상노(林象老) 자 휘천(輝天) 1723년 진사가 되고 1747년 통천군수(通川郡守)시 정시을과(庭試乙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을 거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현감(縣監)과 부사겸방어사(府使兼防禦使)를 지냈다.

임상극(林象極) 자 성언(聖彦) 현감(縣監)

임상정(林象鼎) 자 덕중(德重)1699년 진사가 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과 장악원정(掌握院正)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현령(縣令) 군수 부사를 거처 강화유수(江華留守)를 지냈다. 문행(文行)과 학자(學者) 로서 저서(著書)를 많이 남겼다. 저서로 자오록(自娛錄) 4권 사통(史統) 33권을 남겼다.

임상원(林象元) 자 언춘(彦春) 1733년 진사가 되어,1735년 증광병과에 급제하고 옥당(玉堂)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를 지냈고 현령(縣令) 군수(郡守) 부사(府使) 목사(牧使)를 거처 가선대부행 의주부윤(嘉善大夫行 義州府尹)을 지내고 증 영의정(領議政)이다.

임상익(林象翊) 자 묵동(黙東) 호 광사(廣沙)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하였다.

임훈(林 薰) 자 형백(馨伯) 1683년 진사가 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내고 외직으로 현감(縣監) 군수(郡守)를 지냈다.

임거(林 蘧) 자 경옥(景玉)부평부사(富平府使).

임욱(林 煜) 자 휘원(輝遠) 부사(府使).

임도(林 燾) 자 공보(公普) 첨지(僉知).

임훤(林 萱) 자 낙경(樂卿) 현감(縣監).

임택하(林澤夏) 자 시우(時雨) 만호(萬戶)

임양호(林養浩) 자 군직(君直) 현감(縣監)

임지호(林志浩) 자 희익(希益) 1729년에 진사하고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였고 외직으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증이조판서(吏曹判書)가 증직되었다.

임지호(林之浩) 자 무양(無養) 도사(都事)

임득호(林得浩) 자 정보(正甫) 1763년에 생원이 되고 1771년에 봉사(奉事)로서 정시 병과(庭試丙科)에 급제하여 동벽(東壁)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대사간(大司諫)이 되였으며 외직으로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지냈다.

임정호(林正浩) 자 사득(士得) 현감(縣監)

임원호(林元浩) 자 사장(士長) 현감(縣監)

임도호(林道浩) 자 자유(子由) 1775년에 정시 갑과(庭試 甲科)에 급제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을 지냈고, 외직으로 무장현감(茂長縣監) 광주유수(廣州留守) 이천부사(伊川府使)를 역임하였다.

임장호(林長浩) 자 양능(養能) 1783년에 생원이 되고 영덕현령(盈德縣令) 금산군수(金山郡守)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임한호(林漢浩) 자 경소(景昭) 시호(諡號) 정간(貞簡)이다. 1783년에 생원이 되고1792년에 식년병과(式年丙科)에 급제하여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냈고, 1800년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되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803년 대사간(大司諫) 재직 중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논의하다가 파직 안주에 유배 되였다. 이듬해 등용되어 대사간(大司諫)으로 복직 1805년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 대사헌(大司憲)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수원유수(水原留守) 이조판서(吏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우빈객(右賓客)을 지냈으며, 1821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1823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되어 서얼(庶孼)들의 등용을 주청하여 서자(庶子)도 벼슬을 할 수 있게 했다.

임준호(林俊浩) 자 경심(景深) 부사(府使)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임연호(林淵浩) 자 경약(景躍) 현감(縣監)

임순호(林淳浩) 자 경질(景質) 현감(縣監)

임면호(林沔浩) 자 경조(景朝) 현감(縣監) 첨추(첨추)

임정호(林靜浩) 자 임금(壬金) 호 죽정(竹正) 오위도청부부총관(五衛都廳府副摠管)

임인호(林仁浩) 자 사원(士元) 1768년 생원이 되고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었고 수직(壽職)으로 종이품동추(從二品同樞)

임득명(林得明) 자 자도(子道) 호 송월헌(松月軒) 정선(鄭敾)의 문인이며 시 서 화(詩 書 畵)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으며 특히 글씨는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뛰어났다.

임성헌(林聖憲) 자 여시(汝時) 군수(郡守) 증 참판(參判)

임석헌(林錫憲) 자 여삼(汝三) 1723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744년 식년을과(式年乙科)에 급제하여 삼사(三司)를 거쳐 정삼품(正三品)이 되었다 외직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임낙철(林樂喆) 자 원천(遠天) 현감(縣監) 증 이조참의(吏曹參議).

임시철(林蓍喆) 자 성종(聖從) 시호(諡號) 는 간헌(簡憲)이다. 1766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1771년 식년병과(式年丙科)에 급제하여 한원 동벽(翰苑 東壁)을 거처 내직으로 승지(承旨)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고 외직으로 양양(襄陽) 김해(金海) 청송(靑松)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제주(濟州) 양주목사(楊州牧使) 그리고 강계방어사( 江界防禦使) 의주(義州) 경주부윤(慶州府尹)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강화유수(江華留守)를 역임하였다.

임하철(林夏喆) 자 화숙(華淑) 군수(郡守)

임주철(林周喆) 자 자정(子楨) 군수(郡守)

임운철(林雲喆) 자 중달(仲達) 증광병과(增廣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지냈다.

임석철(林錫喆) 자 군범(君範) 1775년 참봉(參奉)으로 정시병과(庭試丙科)에 급제하여 한원동벽(翰苑東壁)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증 이조참판(吏曹參判)하였다.

임안철(林顔喆) 자 극가(克四) 1816년 별시갑과에 급제하여 동서벽(東西壁)을 거처 승지(承旨)가되고 외직으로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임영철(林穎喆) 자 영노(永老) 군수(郡守)

임현철(林顯喆) 자 문세(文世) 부사(府使)

임무원(林懋遠) 자 정적(政績) 무과부사(武科府使)

임홍원(林弘遠) 자 규백(逵伯) 현감(縣監)

임취원(林冣遠) 자 여양(汝良) 군수(郡守)

임정원(林鼎遠) 자 사수(士受) 1762년 증광갑과(增廣甲科)에 급제하여 한원동벽(翰苑東壁)을 거처 승지 대사간(承旨 大司諫)을 지냈고 외직으로 기린찰방(麒麟察訪) 여주목사(驪州牧使) 동래(東萊)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하였다.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임중원(林重遠) 자 사의(士毅) 목사(牧使)

임병원(林秉遠) 자 사문(士文) 부사(府使)

임제원(林濟遠) 자 상용(商用) 1762년에 진사 되고 1771년 식년 병과(式年 丙科)에 급제하여 한원 옥당(翰苑 玉堂)을 거처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였고 외직으로 흥양현감(興陽縣監) 초산 부령(楚山 富寧) 양 군수(郡守) 제주목사(濟州牧使) 경주부윤(慶州府尹)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등을 역임하였다.

임기진(林箕鎭) 자 성용(聖用)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증 이조판서(吏曹判書)

임형진(林衡鎭) 자 경서(景瑞) 1819년 진사되고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부호군(副護軍)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지냈고 외직으로 현풍(玄風) 창령(昌寧)비인현감(庇仁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정진(林貞鎭) 자 성의(聖義)무과(武科)현감

임이진(林頤鎭) 자 백양(伯養) 현감(縣監)

임동진(林東鎭) 자 춘경(春卿) 1732년 진사하고 1741년 식년을과(式年乙科)에 급제하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외직으로 서산군수(瑞山郡守) 자산부사(慈山府使)를 역임하였다.

임경진(林景鎭) 자 순서(舜瑞) 1792년 식년병과(식년丙科)에 급제하고 1815년 중시병과에 급제하여 한원 동벽(翰苑 東壁)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고 외직으로 은산(殷山) 무안(務安) 화순현감(和順縣監)과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역임하였다.

임두진(林斗鎭) 자 원서(轅瑞) 현감(縣監)

임용진(林容鎭) 자 규삼(圭三) 현감(縣監)

임교진(林喬鎭) 자 백신(白臣) 군수(郡守)

임형진(林逈鎭) 자 군계(君屆) 군수(郡守)

임상진(林庠鎭) 자 순흥(順興) 호 월촌(月村)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임선진(林善鎭) 자 성지(性之) 해주판관(判官)

임희진(林喜鎭) 자 희경(熙卿) 1835년 에 진사되고 1859년에 진안현감(鎭安縣監)으로 증광병과(增廣丙科)에 급제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임정진(林正鎭) 자 초직(初直) 현감(縣監)

임용진(林龍鎭) 자 양여(養汝)호 화수당(花樹堂) 1816년에 식년병과(식년병과0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되고 전라도사(全羅道事)를 역임하였다.

임한진(林翰鎭) 자 계응(季鷹) 1807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816년 별시을과(別試乙科)에 급제하여 옥당 동벽(玉堂 東壁)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고, 외직으로 은산현감(殷山縣監)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였다.

임처진(林處鎭) 자 거인(居仁) 1805년에 증광별시병과(增廣別試丙科)에 급제하여 옥당 동벽(玉堂 東壁)을 거처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임기진(林璂鎭) 1840년에 무과(武科)하고 부호군 오위장(副護軍 五衛將)을 하였다.

임낙진(林樂鎭) 1847년 정시을과(庭試乙科)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持平 正言) 양산군수( 梁山郡守)를 역임하였다.

임면수(林勉洙) 자 성조(聖勗) 현감(縣監)

임건수(林謇洙) 자 성신(聖臣) 1850년 증광을과(增廣乙科)에 급제하여 옥당 동벽(玉堂 東壁)을 거처 승지(承旨) 병조참판(兵曹參判)을 하고 외직으로 광양현감(光陽縣監) 영덕현령(盈德縣令)을 하였다.

임기수(林基洙) 자 최성(稡聲) 1831년 중시갑과(重試甲科)에 급제하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북청부사(北靑府使)를 역임하였다.

임태수(林泰洙) 자 노원(魯源) 목사(牧使)

임영수(林永洙) 자 영지(泳之) 1825년 식년을과(式年乙科)에 급제하여 옥당 동벽(玉堂 東壁)을거처 부정자(副正字)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선전관(宣傳官)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응교(應敎) 장악원정(掌樂院正) 병조참의(兵曹參議) 돈영도정(敦寧都正)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좌승지(左承旨) 대사간(大司諫)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 병조참판(兵曹參判) 춘추관사(春秋館事) 동지중추부의금부사(同知中樞府義禁府事)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승문원제학(承文院提學) 호공 이조참판(戶工吏曹參判) 입기노사(入耆老社) 한성판윤(漢城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도총관지(都摠管知) 돈령부사(敦寧府使)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외직으로 북청부사(北靑府使) 영흥부사(永興府使) 동래부사(東萊府使) 강계부사 겸방어사(江界府使 兼防禦使) 암행어사(暗行御史)등을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효정(孝靖)이다.

임한수(林翰洙) 자 익여(翼汝) 호 송석(松石) 1846년 식년병과(式年丙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교리(敎理) 지평(持平) 사간원집의(司諫院執義)를 거처 병조정랑(兵曹正郞) 종부시정(宗簿寺正) 예조참의(禮曹參議) 승정원부승지(承政院副承旨)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부좌우윤(漢城府左右尹) 1886년에 기노사(耆老社)에 들어가고. 그 후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고 겸하여 경연춘추지의금부사(經筵春秋知義禁府事)등에 임면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외직으로는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양부사(南陽府使) 경주부윤(慶州府尹) 의주부윤(義州府尹) 강원 함경도관찰사(江原 咸鏡道觀察使)등을 역임하였다. 1861년 종부태복시정(宗簿太僕寺正)으로 있을 때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재간(再刊)에 참여하였으며 양주군(楊州郡)에 선정비(善政碑)가 여러 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서울 도봉구 창동 동회사무소에 1기가 남아있다. 시호(諡號)는 효정(孝靖)이다.

임최수(林最洙) 자 사원(士元) 호 동양(桐陽) 1895년 국모시역(國母弑逆)의 변을 당하여 시종(侍從)으로서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격문을 내외에 발하고 정부관료(政府官僚) 및 동이(同吏) 수백과 군관(軍官) 천 여 명을 규합 지휘하여 역적괴수와 친일당(親日黨)을 소탕하고 왜인(倭人)을 축출하여 내각(內閣)을 혁신하려고 거사에 만전의 준비를 다하였는데, 간당(奸黨) 이진호(李軫鎬)의 밀고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도 연루자(連累者)를 대지 않고 공()이 자담하여 형별을 받아 18951115일에 충민공(忠愍公) 이도철(李道澈)과 같이 옥중에서 순절(殉節)하였다. 그 이듬해에 칙명(勅命)으로 관작(官爵)이 복귀되고 나라에서 지사(知事)를 보내 치제(致祭)하고 비석(碑石)과 내탕금(內帑金)을 하사하고 충민(忠愍)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임면수(林冕洙) 자 치성(稚成) 현령(縣令)

임성수(林星洙) 자 치회(稚繪) 군수(郡守)

임정수(林正洙) 자 치양(稚養) 현령(縣令)

임필수(林馝洙) 초휘 만수(初諱 晩洙 자 기경(器卿) 1831년에 기과(耆科) 에 급제하여 중추부첨지(中樞府僉知)를 거처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임문수(林文洙) 자 성호(聖浩) 호 오암(鰲岩) 1849년 식년병과(式年丙科)에 급제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를 하였다.

임응수(林膺洙) 자 원용(爰龍) 현감(縣監)

임긍수(林肯洙) 자 치구(稚搆) 호 현거(玄居) 1825년 에 진사하고 1837년에 식년갑과(式年甲科)에 급제하여 동서벽(東西壁)울 거처서 이조참판(吏曹參判) 양관직제학(兩館直提學)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를 역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숭배되었다.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임승수(林勝洙) 자 치경(稚敬) 부사(府使)

임철수(林澈洙) 자 주백(周百) 부사(府使)

임인수(林仁洙) 자 인여(仁汝) 1846년 식년병과(式年丙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지평(司諫院 正言 持平)을 역임하였다.

임란수(林蘭洙) 자 영지(靈芝) 선공감역(繕工監役)

임성수(林性洙) 무과(武科) 오위장(五衛將)

임창수(林昌洙) 양지군수(陽智郡守)

임익상(林翼相) 자 경주(景周) 무과(武科) 군수(郡守)를 하였다.

임희상(林羲相) 초휘(初諱) 경부(敬夫) 자 세경(世卿) 1882년 별시병과(別試丙科)에 급제하여 옥당 동벽(玉堂 東壁)을 거처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임원상(林爰相) 초휘(初諱) 헌상(軒相) 자 경집(景執) 1886년 정시병과(庭試丙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 사학교수(四學敎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임건상(林健相) 자 용건(用乾) 又松 군수

임원상(林元相) 자 윤선(允善) 현감(縣監)

임명상(林命相) 자 백구(伯求) 현감(縣監)

임한상(林漢相) 자 원명(元明) 筱梧 서화가

임영상(林永相) 자 경념(景念) 호 연석(然石) 1879년 식년병과(式年丙科)에 급제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하였다.

임연상(林淵相) 자 비경(斐卿) 군수(郡守)

임용상(林瑢相) 자 치중(致仲) 1871년 정시병과(庭試丙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장영(司憲府掌令)을 하였다.

임구상(林龜相) 무과 중추부사(中樞府事)

임우상(林雨相) 자 낙중(洛仲) 무과(武科)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임용상(林龍相) 자 충서(忠瑞) 호 중호(中虎) 1882년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이 되고 민응용( 悶應龍) 아래서 사사(師事)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병서(兵書)에 조예가 깊었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 후 창의군(倡義軍)을 편성하였다. 1907년 유격장 좌포장이 되었고 후에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하였다. 동지 우재용(禹在龍)과 광복단체(光復團體)인 대동단(大同團)을 조직 대구연락책(大邱連絡責)을 맡았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고, 대구 대명동 앞산공원에 공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임병익(林炳翼) 현감(縣監)

임병도(林昺道) 초휘(初諱) 병묵(炳黙) 자 응오(應吾) 호 남강(南岡)1847년 정시병과에 급제하고 현감(縣監)

임병항(林炳恒) 자 성시(聖時) 비서승(秘書丞) 군수(郡守)

임병길(林炳吉) 자 한경(漢卿) 무과(武科) 군무위문주사(軍務衛門主事)

임병효(林炳孝) 무과.군무참위(軍務參尉)

 

근대인물

임병직(林炳稷) 호 소죽(小竹) 1913년 도미하여 1920년 미국 오하이오 대학을 졸업하다. 대학재학중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시()재미교포대회에 서기장이 피선되어 3.1운동 촉진회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비서관을 역임하였다. 워신턴에서 이승만과 함께 구미위원부를 개설 하고 미국 19개 도시에 한민친선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獨立運動)에 헌신하였고, 1945UN창립총회에 옵서버로 참석하였고 이승만 후임으로 구미위원부 의장이 되고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가 수립하여 1948년부터 1951년 까지 외무부 장관(外務部 長官)을 하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 10년간 주 UN대사를 하시고, 그 후 재건국민운동 본부장 주 뉴델리 총영사.본부대사. 해외선전문제 연구 명예회장. 국토통일원고문등을 역임하였다. 청조소성훈장. 수교훈장 광화장이 수훈되었고,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임병직회고록.

임혁규(林爀圭) 자 영화(永化) 호 시은(柿隱) 일제 에 한국언어말살정책(韓國言語抹殺政策)에 대항 전북에서 장현식(張鉉植)과 더불어 조선어학회(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우리말 수호에 힘쓰다가 1942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채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독립유공 표창(獨立有功 表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