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홍주이씨(洪州李氏),홍주이씨시조,이유성(李維城),홍주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6 15:07 수정일 : 2018-07-23 14:44

시 조

홍주이씨시조(洪州李氏 始祖) 이유성(李維城)은 고려(高麗)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한(翰)의 아들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9세손인 기종(起宗)이 내시연경궁제학(內侍延慶宮提學)을 지내고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홍주(洪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홍주(洪州)는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운주(運州)인데 고려(高麗) 성종(成宗) 때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12년(현종 3) 지홍주사(知洪州事)로 고치고 후에 홍주(洪州)로 개칭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 목(牧)이 되고 조선 세종(世宗) 때 진(鎭)을 두었으며 현종조(顯宗朝) 때에는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시켰다가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 1913년 군을 폐하여 일부는 청양군(靑陽郡)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결성군(結城郡) 일원과 합하여 홍성군(洪城郡)이 되어 지금은 홍성군에 속한 홍성면(洪城面)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유성(維城)의 아들 천소(倩笑)가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손자 권(鬈)도 평장사(平章事)를, 증손(曾孫) 응송(應松)은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역임하는 등 3대(代)에 걸쳐 벼슬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연수(延壽)는 응송(應松)의 아들로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수태보주국(守太保柱國)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연수의 아들 지청(之靑)도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조선(朝鮮)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서(舒)는 공민왕(恭愍王) 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헌납(右獻納)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취임하지 않고, 뒤에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옹립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안평군(安平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명망높은 홍주 이씨(洪州李氏) 가문을 빛냈다.

무관(武官)으로서 명성을 떨친 희건(希建)은 이괄(李适)의 난 때 공(功)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홍양군(洪陽君)에 봉해 졌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용골산성(龍骨山城) 전투에서 분전 끝에 전사하였으며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어 명문인 홍주이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주이씨(洪州李氏)는 남한(南韓)에 15,9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홍주이씨조상인물

이천소(李倩笑) 시호(諡號)는 문강(文剛).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권(李 鬈)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응송(李應松)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고려 때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지냈다.

이연수(李延壽)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1216년(고종 3) 우승선(右承宣), 1221년(고종 8) 판리부사(辦理部事)를 거쳐 이듬해 수태보주국(守太保柱國)을 지내고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이득자(李得滋) 고려 때 태학 소윤(太學少尹)을 지냈다.

이영분(李永芬) 고려(高麗)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냈다.

이기종(李起宗) 호(號)는 행촌(杏村). 고려 때 연경궁 제학(延慶宮提學)을 역임하고,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성(李 晟) 호(號)는 오촌(梧村). 일찍이 문과에 급제, 삼척 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를 거쳐 좨주(祭酒)를 역임하였는데,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고 안평백(安平伯)에 추봉되었다.

이서(李 舒) 1332(충숙왕 복위 1)~1410(태종 10) 자(字)는 맹양(孟陽), 호(號)는 송강(松岡),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시중(侍中) 연수(延壽)의 6세손, 연경궁 제학(延慶宮提學) 기종(起宗)의 아들. 1357년(공민왕 6)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군부 좌랑(軍簿佐郞) 때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376년(우왕 2) 우헌납(右獻納)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거절하고 1388년(우왕 14) 내부 소윤(內府少尹)에 다시 등용, 이어 효자로서 정문(旌 門)이 세워졌다.

1392년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옹립, 조선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이 되어 안평군(安平君)에 봉해지고 형조 전서(刑曹典書)가 되었다. 1394년(태조 3) 대사헌이 되고 1396년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죽자 3년간 수묘관(守墓官)이 되었으며, 1398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올랐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시랑(侍郞)․찬성사(贊成事)에 이어 우의정(右議政)으로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고 명사(誥命使)로 명나라에 다녀온뒤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02년 함흥(咸興)에 갔던 태조를 중(僧) 설오(雪悟)와 함께 안주(安州)에 나가 맞아 귀경, 1404년 다시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이듬해 치사(致仕)했다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뒤 만년을 향리에서 보냈다.

이첨(李 詹) 1345(충목왕 1)~1405(태종 5) 자(字)는 중숙(中叔), 호(號)는 쌍매당(雙梅堂),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증 참찬의정부사(贈參贊議政府事) 희상(熙祥)의 아들. 1365년(공민왕 14) 감시(監試)에 합격, 136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고, 이듬해 우정언(右正言)에 이어 1375년(우왕 1) 우헌납(右獻納)에 올랐다.

1388년 내부 부령(內府副令)․예문 응교(藝文應敎)를 거쳐 우상시(右常侍)에 전직, 1391년(공양왕 2) 좌대언(左代言)이 되고, 이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감시(監試)를 맡아보았으나 이해 장류(杖流)된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연루, 결성(結城)에 유배당했다.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 7) 이조 전서(吏曹典書)에 등용, 1400년(정종 2) 첨서 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로 전위사(傳位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2년(태종 2)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내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하윤(河崙)과 함께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어 하윤 등과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撰修)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소설「저생전(楮生傳)」을 지었다.

이신유(李愼猷) 자(字)는 대중(大仲), 호(號)는 두암(杜菴). 조선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고, 학문과 효행이 뛰어나 정려가 세워졌다.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이계조(李繼祖) 자(字)는 계술(季述).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기용되었다.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익혀 무예에 뛰어났으므로 대호군(大護軍)에 오른 후 안악 군수(安樂郡守)․경흥 부사(慶興府使) 겸 진주 목사(晋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승조(李承祖) 조선 때 목사(牧師)를 역임하였다.

이업조(李業祖) 조선 때 목사(牧師)를 지냈다.

이길종(李吉從) 자(字)는 사순(士順).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이경종(李慶從)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이인종(李仁從)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희종(李義從) 조선조(朝鮮朝)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이공준(李公俊) 자(字)는 사영(士英), 호(號)는 송파(松坡). 조선(朝鮮) 때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이종규(李宗奎) 조선(朝鮮) 때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이종장(李宗張) ?~1592(선조 25) 자(字)는 문경(文卿), 시호(諡號)는 무강(武剛). 첨절제사(僉節制使) 한(漢)의 아들. 1569년(선조 2)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충주 목사(忠州牧師)로 도원수(都元帥) 신입(申砬)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참전, 충주의 달천(㺚川) 싸움에서 패전하여 아들 희립(希立)과 함께 전사했다.

충신 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아들 희건(希建)의 공(功)으로 공신(功臣)에 추록(追錄)되고, 홍평군(洪平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이희건(李希建) 시호(諡號)는 장열(壯烈), 무과에 급제, 1624년(인조 2) 용천 부사(龍川府使)로서 이괄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으로 홍양군(洪陽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전사,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용천(龍川)의 충렬사(忠烈祠), 안주(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