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평창이씨平昌李氏, 유래와 시조 이윤장李潤張

평창이씨 시조 윤장 재실 입구(평창군 평창읍 유동리)

작성일 : 2017-05-06 10:27 수정일 : 2020-02-16 01:21

평창이씨平昌李氏由來유래와 시조 이윤장李潤張

평창이씨 시조 윤장 재실 전경 -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유동리32

 

경주이씨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37세손 휘 거명居明이 신라조 중서령을 지냈고, 거명의 아들 38세 금현金現은 병부령을 지냈다. 금현의 아들 39세 이금서李金書는 벼슬이 중원태수 호부랑중을 지내셨고, 신라 56대의 경순왕 금부金傅의 셋째 딸 신난공주를 맞아 부마가 되어 장자 윤홍潤弘, 차자 윤장潤張을 낳았다. 표암공의 40세손 윤홍은 경주이씨 선조가 되고, 차자 윤장이 평창이씨의 시조가 되니 한뿌리에 나서 성은 같으나 관향은 달리하여 경주이씨의 구보와 평창이씨의 구보 및 여러 상고 기록과 역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평창이씨의 시조 휘 윤장(潤張)은 천우(天佑)라고도 하고 호는 백아(白雅), 시호(溫號)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이윤장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의 초기에 나라에 공훈을 남겨 백오부원군을 봉작을 받음으로써 비로서 관향을 경주로부터 평창으로 분적, 평창이씨의 시조가 되었고, 문성공의 시호를 받았다.

 

즉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적종分籍宗으로서 1500년대 우리나라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1524년 평창이씨 갑신보를 시작으로, 1640년 경진보, 서기 1684년 갑자보가 발간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보되어 찾아 볼 수가 없다.

평창이씨 구족보 서문

 

다만 경진보를 발행한 저자 휘 수원壽鵷은 족보의 서문에 경주이씨 휘 거명居明4세손 금서(남계南係)의 세 아들이 각각 관향을 가졌다고 기록하였다. 장자 휘 윤홍은 경주, 차자 휘 윤장은 평창, 3자 윤원은 가평을 뜻한다. "남계선생유삼자개이문장대관각사잉관언칙오대인(南係先生有三子皆以文章大官各賜仍貫焉焉吾大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740년 경신보(영조16)1770년 경인보(영조46)는 익평공파 28세손 휘 광부(光傅)가 발간하였는데, 평창이씨구보서(平昌李氏舊譜序)라는 서문에 "유아이씨재어해동삼대성도급여지지합기저현어라려지재기래원의(維我李氏載於 海東三大姓圖及與地誌盖已著顯於羅麗之際基來遠矣)” 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풀이하면 우리 평창이씨는 해동삼대성도와 여지지에 등재되어 있고 신라와 고려부터 나타나서 내려온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해동삼대성도와 여지지는 신라와 고려 즈음의 문헌으로 이미 신라 경주이씨에서 고려 평창이씨로 유래가 되어서 나타나 내려온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평창平昌은 강원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국시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해있어 욱오현郁烏縣 일명 于烏縣이라 하였는데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757)에 백오현으로 개칭하고 내성군 영월군에 속하였다. 고려 태조 23(940)에 평창현으로 개칭하고 원주의 속현屬縣으로 되었다가 충열왕 25(1299)에 현령을 파견하고 원주로부터 분리되었고, 우왕 13(1387) 때 지군사(知郡事) 평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뒤에 다시 다시 평창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조선 태조원년(1392) 태조의 5대조인 목조비(穆祖妃)의 고향인 관계로 평창군으로 다시 승격되었는데, 18955월 충주부(忠州府) 평창군으로 되었다가 189613도제(道制) 실시로 다시 강원도(江原道)로 편입되었다.

 

평창이씨 세계도

 

 

평창이씨 항렬자표

평창이씨 역대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15세 천기의 증손 18세 영서(永瑞)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생원(生員)으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했다. 특히 영서는 글씨에 뛰어나서 강희안(姜希顔) 등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불경(佛經)을 쓰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아들 19세 익평공 계남(季男)은 성종(成宗) 때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을 떨쳤고, 그후 연산군(燕山君) 때 호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2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세칭 <국조명장(國朝名將)>으로 불리웠던 계동(季仝 : 계남의 아우)은 연산군 때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를 다녀와 왕명(王命)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광()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르렀고 학문(學問)과 글씨에 뛰어나서 <관동천재(關東天才)>로 일컬어졌으나 23세로 요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정조(正祖)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했던 동욱(東郁)의 아들 승훈(承薰)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어 교세(敎勢) 확장에 공헌했고, 정규(正奎)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스승 류인석(柳麟錫)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일본군(日本軍)과 항쟁하고 항일운동 기록인 종의록(從義錄)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하여, 독립운동에 신명(身命)을 바쳤던 병식(炳植)현근(炫瑾) 등과 함께 평창 이씨를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창이씨(平昌李氏)는 남한(南韓)80,6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조의 인물

 

이중인(李仲仁) ()는 중사(仲思),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 약관으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태좌(台座)에 올랐다.

 

이작림(李作林) 고려(高麗) 때 전리 총관사록(典理總管司錄)을 역임하였고 1220(고종 7) 횡성군(橫城君)에 봉()하여 졌다.

 

이극관(李克寬) 고려(高麗) 때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이견(李 堅) ()는 군보(君寶),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이어 대과(大科)에 세 차례 응시, 사록(司錄)을 역임하고, 추성보사공신(推誠保 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전서랑(典書郞)에 이르렀다.

 

이인미(李仁美) 고려(高麗)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승연(李承衍)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소윤(少尹)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이조(李 稠)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사(密直使)로 원자(元子)와 함께 원나라에 갔다. 충선왕(忠宣王) 때 추충익대좌리공신(推忠翊戴 佐理功臣)에 책록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숙(李 肅) 고려(高麗) 때 천오위 장사(千午衛長史)를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후노산부원군(魯山府院 君)에 추봉되었다.

 

이태(李 台)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 통사랑(通仕郞)으로 염서령(染署令)동정(同正)을 역임하고, 문과(文科)에 급제, 중부 감사(中部監事)에 이르렀다

 

이천기(李天驥) 초명(初名)은 간(), ()는 백하(白河). 1355(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나라가 건국되고 난 후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황제(皇帝)로 부터 대장(大將)의 인수(印綏)를 받고 남만(南蠻)을 토벌한 공으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으며 수년 후에 귀국하니 이성계(李成桂)가 개국(開國)하였으므로 장단(長湍)에 낙향하여 아들 륙()()() 삼형제와 함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며 문밖을 출입하지 않고 충절(忠節)을 지켰다.

 

이유(李 瑜)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조선시대의 인물

 

이영서(李永瑞) ?1450(문종 즉위) ()는 석류(錫類), ()는 노산(魯山)희현당(希賢堂), 판관 종미(宗美)의 아들. 1434(세종 16) 생원(生員)으로 알성문과(謁聖文 科)에 급제, 1446년 수찬(修撰)주부(主簿)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내고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48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1450(문종 즉위) 예조 정랑(禮曹正郞)교리(校理) 등을 역임,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서예(書藝)에 뛰어나 강희안(姜希顔)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쓴 불경(佛經)에 특출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이명철(李明哲) 1460(세조 6) 평양(平壤) 별시문과(平壤別試文科)에 급제,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이지(李 芝) 시호(諡號)는 정숙(靖肅).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을 버리고 평창(平昌)에 은거하였다.

 

이계남(李季男) ?1512(중종 7) ()는 자걸(子傑), ()는 휴휴당(休休堂), 시호(諡號)는 익평(翼平). 성종 때 음보(蔭補)로 풍덕 군수(豊德郡守)가 되어 토호(土 豪)들의 횡포를 막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1492(성종 2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종직(金宗直)의 추천을 받아 승진을 거듭,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01(연산군 7) 공조 참판(工曹參判), 1504년 호조판서(戶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다.

익평공 이계남 선조 묘역과 신도비각

 

이계동(李季仝) 1450(세종 32)1506(연산군 12)

()는 자준(子俊), ()는 동호(東湖), 시호()는 헌무(憲武). 1470(성종 1) 겸사복(兼司僕)으로 무과(武科)에 장원, 훈련원 판관 (訓鍊院判官)이 되고, 147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 존친부 전첨(宗親府典籤)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1479(성종 10) 선전관(宣傳官)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오고., 이 해 윤필상(尹弼商)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483년 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야인(野人)의 언어(言語)지세(地勢)에 밝음으로써 그들을 성심껏 회유하여 변경을 침범하지 않게 했으며, 그 공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하였다.

1487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가 되고, 그뒤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 1491(성종 22) 부원수(副元帥)로 도원수(都元帥) 허 종(許 琮)과 함께 야인(野人) 니마차(尼麻車)를 토평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어서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오르고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뒤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1495(연산군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99년 왕명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 제번기(西北諸蕃記)」․「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撰進)했다. 이 해 병조 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새로 설치된 비융사 제조(備戎司提調)를 겸직하여 갑주(甲冑)를 만들었으며, 우참찬(右參贊)우찬성(右贊成)을 지낸 뒤 1505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이계동 선조 묘역

 

이광(李 光) 1474(성종 5)1496(연산군 2) ()는 명원(明遠), 형조 참판(刑曹參判) 계남(季男)의 아들. 1491(성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여 죽은 성종을 위해 불재(佛齋)를 올리자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반대하는 소()를 올려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뒤에 용서받고 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르렀으나 23세로 요절했다. 글씨를 잘 섰다.

 

이창(李 敞)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아버지인 계남(季男)과 함께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평천군(平川君)에 봉()해졌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추증(追譄)되었다.

 

이진보(李珍寶) 조선(朝鮮)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택(李 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전사하여 머리를 잃으니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초상화(肖像畵)를 내려주어 장례하였다. 그를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하고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이정충(李廷忠) ()는 사신(士信), ()는 퇴조(退朝).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전라 수군우후(全羅水 軍虞侯)로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이순신(李舜臣 : 충무공)의 휘하(麾下)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숙(李 琡) 1574(선조 7)1628(인조 6) ()는 치규(穉圭), ()는 만취(晩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천거되었으나, 광해정란(光海政亂)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성리학 연구에 힘스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이지병(李之屛) 1597(선조 30)1660(현종 1) 1624(인조 2) 문과에 급제한 후 회양 부사(淮陽府使)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이창환(李昌煥) ()는 회원(晦元), ()는 해은(海隱). 학행으로 세마(洗馬)에 천거(薦擧)되고 익찬(翊贊)에 이르렀다초예서(草隸書)와 매죽도(梅竹圖)로 유명하였고, 사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창현(李昌炫) 1609(광해군 1)1671(현종 12) ()는 회경(晦卿), ()는 용은(龍隱). 1651(효종 2)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이시담(李時橝) 1654(효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희명(李希明) ()는 언회(彦晦). 조선(朝鮮) 때 도호부사(都護府事)를 역임하였다.

 

이희문(李希文)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양(李 瀁) 조선 때 사예(司藝)를 역임했다.

 

이광직(李光溭) 조선시대에 참판(參判)에 올랐다.

 

이광익(李光瀷) 조선조(朝鮮朝)에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이인변(李仁釆) 조선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유(李 愈) ()는 숙겸(叔謙). 조선 때 우윤(右尹)을 역임하였다.

 

이상휘(李祥) 1696(숙종 22)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이광부(李光簿) 1694(숙종 20)1773(영조 49) ()는 자연(子淵). 부친 이명석(李命錫) 모친 조창구의 딸, 1715(숙종 41) 문과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1766(영조 42)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98(정조 22)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이동욱(李東郁) 1739(영조 15) ? ()는 유문(幼文), ()는 소암(蘇巖), 광직(光溭)의 아들. 1766(영조 4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1783(정조 7)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갈 때 아들 승훈(承薰)을 동반, 북경(北京)에 들어가 천주교회 북당(北堂)에서 최초로 영세(領洗)를 받게 했다.

귀국 후 사직(司直)참판(參判)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하고 정조 때 죽었다. 1801(순조 1) 아들이 천주교도로 사형되자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이승훈(李承薰) 1756(영조 32)1801(순조 1) 교명은 베드로, 참판(參判) 동욱(東郁)의 아들, 가환(家煥)의 생질,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1780(정조 4) 진사지(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 벽(李 蘗)을 만나 입교(入敎)를 결심.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북경 남천주당(南天主堂)에서 교리를 익힌 후 이듬해 북경(北京) 북천주당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領洗)을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이해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갖고 귀국, 1785년 명례동(明禮洞)의 김범우(金範禹) 집에 조선교회를 건립, 주일(主日)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했다. 이듬해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했다.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했으며, 1789년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 천주교의 자치 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祭祀)도 철폐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밀령(密令)을 받고 오자 제사문제로 두번째 배교, 그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1791(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한 후 투옥, 옥중에서 세번째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으나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윤유일 등이 피체,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의 취조를 받고 권 엄(權 欕) 등의 상소로 이해 2월 서소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56(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1868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 1871년 증손 연귀(蓮龜)균귀(筠龜)가 각각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이치훈(李致薰) 1765(영조 41)1822(순조 22) ()는 자화(子和), 승훈(承薰)의 아우. 1792(정조 16)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형 이승훈(李承薰)1801(순조 1) 신유대사옥(辛酉大邪獄)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할 즈음에 상소하여 사면을 호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했다.

 

이무엽(李茂葉) 1782(정조 6)1860(철종 11) ()는 감숙(監叔).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어사(御史) 이기계(李夔癸)에 의해 저정에 천거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이재의(李在誼) 1785(정조 9)1868(고종 5) 교명은 도마, 승훈(承薰)의 손자, 택규(宅逵)의 아들. 정선(旌善) 출신. 천주교에 입교하여 앵베르 신부에서 영세(領洗)를 받았으며 1839(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홍주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화를 면했다.

1842년 김대건(金大建)의 권유로 현석문(玄錫文) 등과 함께 상해(上海)에 가서 3개월간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가 조선교구(朝鮮敎區) 3대 교구장이된 페레올 주교를 동반하여 귀국, 전도운동을 폈다. 1846(헌종 12) 체포되어 배교(背敎)할 것을 서약하고 석방되었으나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68년 다시 체포, 교우 이신규(李身逵)권 복(權 複) 등과 서소문(西小門)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신규(李身逵) 1793(정조 17)1868(고종 5) 교명은 도마, 승훈(承薰)의 아들, 어머니는 정약용(丁若鏞)의 누이. 1801(순조 1) 아버지가 순교하자 인천(仁川)에 이사하여 교리 전파에 힘썼다1838(헌종 4) 조선교구(朝鮮敎區) 교구상인 앵베르 주교가 속성과(速成科) 신학교육을 실시하자 정하상(丁夏祥)이문우(李文祐)등과 함께 수학,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자 중단되었다. 이 후 경향 각지를 숨어 다니며 현석문(玄錫文)을 도와 순교자 사료(史料)를 수집, 교리 서적 간행에 힘쓰고, 1841년 체포되었다가 석방, 1868년 다시 체포되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순권(李順權) 1900(고종 37)1954년 신계 군수(新溪郡守)를 지냈으며 광복(光復) 후 민정관(民政官)이 되었다.

 

이정규(李正奎) ()는 장규(章奎), ()는 옥산(玉山).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스승 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충북(忠北) 제천(提川)장담(長潭)에서 호좌창의군(湖左倡義軍)을 편성 항쟁(抗爭), 1896년 의병장 유인석과 함께 만주로 갔으며 수시로 국내 잔류(國內殘留)의 병과 연락을 유지하며 독립의식을 높였다.

1914년 의병장의 서거 후 환국하여 항일활동기록인 종의록(從義錄)과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종하(李鍾河) 19851950197531일 강원도지사(江原道知事)로부터 공로패(功勞牌)를 받았다.

 

이영춘(李永春) 190319401937년 군산(群山)에서 진료소를 개설하여 극빈자에게 무료로 치료하는 등, 농촌 보건(農村保健)에 공헌하니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이병식(李炳植) 18961933년 자()는 해동(海東), 191931독립운동가로 대구 감옥(大邱監獄)에 복역하였고 춘추사(春秋社) 한국 지사장을 지냈다.

 

이현근(李炫瑾) 19121940년 함남(咸南) 북청군(北靑郡)에서 출생하였고 서울 경신고보(儆新高普) 2학년 때 광주 학생사건(1929113)이 일어나자 반일(反日) 투쟁과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퇴학을당하였으며, 동경(東京)으로 도피하여 나가노 중학(中學)에 편입하였으나 일본학생 구절사건(日本學生 歐切事件)으로 19314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1931년 일본 탄압정치에 한()을 품고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 남화한인청년연맹(上海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고 1933년 중국 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에 입학하여 졸업 후 동교 교관(同校敎官)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日戰爭)이 일어나자 출전(出戰)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무찔렀으나 대대장(大隊長) 당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일본 제국(日本帝國)에 항거하였다는 죄로, 19402229세의 나이로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본군은 판결문과 유골함(遺骨函) 및 유품을 보내와 하차서면(下車書面) 임자동리(荏子洞里) 직동(直洞) 사미혈(蛇尾穴)에 안장(安葬)되었다.

 

이한림(李翰林)(1921~2012) 호는 정암(汀庵). 일제 강점기 조선 함경남도 안변 출생 ~ 2012. 향년 92.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한국사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영세자이기도 한 이승훈의 방계 후손이다. 육군 제1군사령관·건설부 장관·한국관광공사 사장 겸 총재 등을 지낸 대한민국 군인, 기업가, 정치가, 외교관. 대한민국 육군 중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예편 후 특히 한국해양대학교 재개편에 기여하여, 영도와 아치섬을 잇는 제방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따서 한림제로 명명되었다

 

평창이씨중앙종친회를 이끄는 사람들

평창이씨 파종회 구성

전국의 평창이씨 일가 여러분께 드리는 글

 

우리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발원發源되어 선계를 이어 왔으며 경주이씨 시조인 휘 알평謁平37세손 휘 거명居明4세손 휘 윤홍潤弘의 아우 휘 윤장潤張 할아버님의 후손입니다.

 

이 사실은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 과 여러 족보 및 분적 분관도, 대전뿌리공원의 조형물 등에 수록되어 있고, 또 평창이씨 구보 및 서문 기타 문헌 등에도 실려 있음은 물론, 국내 각종 고전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러한 고전과 관련 자료 수집을 위해 서울국립도서관과 여타지역을 수차례 방문하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노력한 결과 우리 평창이씨는 경주이씨로부터 분적되었고 시조는 윤자潤字장자張字 할아버님임이 확실한 근거 자료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다른 뜻을 가진 평창이씨 몇몇 분들이 이러한 확실한 증빙자료에 근거한 사실을 왜곡하여 경주이씨에서 분적 분관된 사실이 없다고 하며, 분적이 등재된 족보나 문헌은 다 날조, 조작, 오록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휘 윤장(潤張) 시조는 실존인물이 아닌 가공인물 이라면서 시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휘 윤장이 시조라면 근거가 확실한 자료를 내놓으라, 그 자료를 자기들이 인정할 수 없게 되면 다음의 4가지 사항을 실행하라고 겁박을 하면서, 이행하지 않으면 3자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답의 판결" 을 받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하고 혹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더라도 양해하라고 하였습니다.

 

1) 인터넷에 휘 윤장 시조에 관한 기록 일체 삭제

2) 백오서재(사당)에 부착한 평창이씨 종친회 현판을 평창이씨 정숙공파 종친회로 교체

3) 백오서재 입구의 평창이씨 시조 재실 입구란 표지 제거

4)시조 백오부원군 평창이공 윤장지 신도비 제거

 

위의 4개항의 요구사항을 그들은 2011325일부터 81일까지 6회에 걸쳐 내용증명 서신을 보내고 위의 4가지 사항을 20111031일까지 철거나 삭제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평창의 중앙종친회에서는 그들이 내용증명으로 보내온 사항을 확실한 근거 자료를 들어 증빙자료로 삼아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가지 시조에 관한 몇몇 사람들만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으며, 3자의 힘을 빌려 판결을 받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평창이씨 일가들에게 중앙종친회가 평창을 조상의 고향이라고 찾아오는 종친들을 기만하고 오도한다는 그들의 말은 지각이 없는 상식 밖의 언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년 음력 99일 중양절에 휘 윤장 시종의 제향을 올리는 것은 종친간의 불화를 심화시키는 일이라고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고향 평창을 찾아 시조를 정중하게 모시려는 전국의 평창이씨 일가 여러분의 성의와 열정 그리고 정성으로 존경스런 숭조의 마음을 평창에서 거주하는 종친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을 보고 기만하고 오도한다고 하는 비웃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고귀한 우리 선조님들의 역사적인 기록을 근거로 상식을 가진 종인들이 순리와 사리에 맞게 종사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하는데 조언은 못할망정 일가친척을 비방하는 일은 우리 일족의 피를 물려받은 후인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평창이씨는 광복 후 전국의 종친들이 합심 참여하여 <평창이씨 종친회>를 결성하였고, 나름 적극적인 종사를 추진하여 왔습니다. 18개파 중 16개파가 열성적으로 함께 참여하여 백오서재(사당) 건축, 시조 윤장 신도비 건립, 위토 구입, 정문 입구 돌기둥(시조 백오부원군 재실 입구 - 현무공파 봉모 종인 건립) 건립 등 시조에 관한 위선사업에 전국 종인들이 화합하여 출역과 헌성금 출연 등으로 모든 종사가 원만히 잘 진행되어 왔었습니다.

 

관향지 평창에 자리하고 있는 평창이씨 중앙종친회는 18개 파 중 14개 파와 함께 하고 있는 나름의 상호 합의된 종론을 바탕으로 종사를 원만하게 정상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만, 1980년대에 평창이씨 종친회장의 부재로 익평공파 일부 종인들이 주도하여 경기 서울지역에서 평창이씨대종회가 출범하면서 8세 선조 휘 광을 시조로 하는 희한한 사건이 발생되었고, 이어진 1984년도 족보에 아주 이상한 일이 등재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일이기에 이 자리에 언급을 않겠습니다.

 

시조 윤장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측에서는 “1900년 경자보와 그 이후에 발행한 족보의 선계록과 본원 선계록은 역사를 모르는 사람의 기록이니 증거 할 수 없다. 1900년 이전에 휘 윤장이 등재된 문헌이나 기록물을 보자고 주장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시조 윤장의 기록이 수록된 "존의록"의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여 증거로 삼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각고의 노력 끝에 "존의록"의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 경남 사천시 곤명면의 무용 종친과 연락이 닿아 201655일에 중앙종친회장과 정숙공파회장 등 5명이 무용 종친을 방문, 그 곳 종친들도 한참 바쁜 모내기철인데도 일손을 중단하시고 여덟 분의 종친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고, 모처럼 우리들의 시조 윤장 할아버님에 관한 환담을 정겹게 나누고 <존의록> 기타 문헌을 받아왔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사천 문중의 종친 여러 어르신들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우리 평창이씨 전 종인은 관향지 평창에 자리하고 있는 <평창이씨중앙종친회>를 중심으로 시조 윤장을 비롯한 조상들의 업적을 함께 이해하고 생각을 함께하며 힘을 한곳에 모으며 서로 화목함으로써 평창이씨의 후손들이 글로벌 경쟁시대에 꿋꿋이 무궁한 번영을 이루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2017. 10

 

평창이씨 중앙종친회장 이병연,

평창이씨 정숙공파종친회장 이재도 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