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평창이씨(平昌李氏),평창이씨시조,이광(李匡),평창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6 10:27 수정일 : 2018-07-24 11:38

평창이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평창이씨(平昌李氏)의 시조(始祖) 이광(李匡)은 고려(高麗) 명종(明宗 : 19대 왕, 재위기간 : 11701197) 때 태사(太師)를 역임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올라 백오군(白烏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천기(天驥)가 고려 말에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태조(太祖:이성계)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광(李 匡)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평창(平昌)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평창(平昌)은 강원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 ; 일명 천오현)인데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때에 백오현(白烏縣)이라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 ; 영월)에 속했다. 고려 때에 평창으로 개칭하여 원주(原州)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1299(충렬왕 25)에 현령(縣令)을 두고, 우왕(禑王) 때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으나 뒤에 다시 현령으로 하였다. 1392(태조 1)에 목조(穆祖) 효비(孝妃)의 고향이라고 하여 군()이 되었고, 18955월 충주부(忠州府) 평창군으로 되었다가 189613도제(道制) 실시로 다시 강원도(江原道)로 편입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천기의 증손 영서(永瑞)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생원(生員)으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역임했다. 특히 영서는 글씨에 뛰어나서 강희안(姜希顔) 등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불경(佛經)을 쓰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아들 계남(季男)은 성종(成宗) 때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을 떨쳤고, 그후 연산군(燕山君) 때 호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2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레 일으켰다.

세칭 <국조명장(國朝名將)>으로 불리웠던 계동(季仝 : 계남의 아우)은 연산군 때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를 다녀와 왕명(王命)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광()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르렀고 학문(學問)과 글씨에 뛰어나서 <관동천재(關東天才)>로 일컬어졌으나 23세로 요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정조(正祖)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했던 동욱(東郁)의 아들 승훈(承薰)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어 교세(敎勢) 확장에 공헌했고, 정규(正奎)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스승 류인석(柳麟錫)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일본군(日本軍)과 항쟁하고 항일운동 기록인 종의록(從義錄)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하여, 독립운동에 신명(身命)을 바쳤던 병식(炳植)현근(炫瑾) 등과 함께 평창 이씨를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창이씨(平昌李氏)는 남한(南韓)80,6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평창이씨조상인물

이중인(李仲仁) ()는 중사(仲思),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 약관으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태좌(台座)에 올랐다.

이작림(李作林) 고려(高麗) 때 전리 총관사록(典理總管司錄)을 역임하였고 1220(고종 7) 횡성군(橫城君)에 봉()하여 졌다.

이극관(李克寬) 고려(高麗) 때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이견(李 堅) ()는 군보(君寶),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이어 대과(大科)에 세 차례 응시, 사록(司錄)을 역임하고, 추성보사공신(推誠保 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전서랑(典書郞)에 이르렀다.

이인미(李仁美) 고려(高麗) 교리(校理)를 지냈다.

이승연(李承衍)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소윤(少尹)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이조(李 稠)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사(密直使)로 원자(元子)와 함께 원나라에 갔다. 충선왕(忠宣王) 때 추충익대좌리공신(推忠翊戴 佐理功臣)에 책록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숙(李 肅) 고려(高麗) 때 천오위 장사(千午衛長史)를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후노산부원군(魯山府院 君)에 추봉되었다.

이태(李 台)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 통사랑(通仕郞)으로 염서령(染署令)동정(同正)을 역임하고, 문과(文科)에 급제, 중부 감사(中部監事)에 이르렀다

이천기(李天驥) 초명(初名)은 간(), ()는 백하(白河). 1355(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나라가 건국되고 난 후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황제(皇帝)로 부터 대장(大將)의 인수(印綏)를 받고 남만(南蠻)을 토벌한 공으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으며 수년 후에 귀국하니 이성계(李成桂)가 개국(開國)하였으므로 장단(長湍)에 낙향하여 아들 륙()()() 삼형제와 함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며 문밖을 출입하지 않고 충절(忠節)을 지켰다.

이유(李 瑜)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영서(李永瑞) ?1450(문종 즉위) ()는 석류(錫類), ()는 노산(魯山)희현당(希賢堂), 판관 종미(宗美)의 아들. 1434(세종 16) 생원(生員)으로 알성문과(謁聖文 科)에 급제, 1446년 수찬(修撰)주부(主簿)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내고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48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1450(문종 즉위) 예조 정랑(禮曹正郞)교리(校理) 등을 역임,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

서예(書藝)에 뛰어나 강희안(姜希顔)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쓴 불경(佛經)에 특출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이명철(李明哲) 1460(세조 6) 평양(平壤) 별시문과(平壤別試文科)에 급제,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이지(李 芝) 시호(諡號)는 정숙(靖肅).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을 버리고 평창(平昌)에 은거하였다.

이계남(李季男) ?1512(중종 7) ()는 자걸(子傑), ()는 휴휴당(休休堂), 시호(諡號)는 익평(翼平). 성종 때 음보(蔭補)로 풍덕 군수(豊德郡守)가 되어 토호(土 豪)들의 횡포를 막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1492(성종 2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종직(金宗直)의 추천을 받아 승진을 거듭,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01(연산군 7) 공조 참판(工曹參判), 1504년 호조판서(戶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다.

이계동(李季仝) 1450(세종 32)1506(연산군 12)

()는 자준(子俊), ()는 동호(東湖), 시호()는 헌무(憲武). 1470(성종 1) 겸사복(兼司僕)으로 무과(武科)에 장원, 훈련원 판관 (訓鍊院判官)이 되고, 147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 존친부 전첨(宗親府典籤)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1479(성종 10) 선전관(宣傳官)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오고., 이 해 윤필상(尹弼商)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483년 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야인(野人)의 언어(言語)지세(地勢)에 밝음으로써 그들을 성심껏 회유하여 변경을 침범하지 않게 했으며, 그 공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하였다.

1487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가 되고, 그뒤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 1491(성종 22) 부원수(副元帥)로 도원수(都元帥) 허 종(許 琮)과 함께 야인(野人) 니마차(尼麻車)를 토평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어서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오르고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뒤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1495(연산군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99년 왕명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 제번기(西北諸蕃記)」․「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撰進)했다. 이 해 병조 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새로 설치된 비융사 제조(備戎司提調)를 겸직하여 갑주(甲冑)를 만들었으며, 우참찬(右參贊)우찬성(右贊成)을 지낸 뒤 1505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이광(李 光) 1474(성종 5)1496(연산군 2) ()는 명원(明遠), 형조 참판(刑曹參判) 계남(季男)의 아들. 1491(성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여 죽은 성종을 위해 불재(佛齋)를 올리자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반대하는 소()를 올려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

뒤에 용서받고 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르렀으나 23세로 요절했다. 글씨를 잘 섰다.

이창(李 敞)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아버지인 계남(季男)과 함께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평천군(平川君)에 봉()해졌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追譄)되었다.

이진보(李珍寶)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택(李 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전사하여 머리를 잃으니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초상화(肖像畵)를 내려주어 장례하였다. 그를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하고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이정충(李廷忠) ()는 사신(士信), ()는 퇴조(退朝).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전라 수군우후(全羅水 軍虞侯)로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이순신(李舜臣 : 충무공)의 휘하(麾下)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숙(李 琡) 1574(선조 7)1628(인조 6) ()는 치규(穉圭), ()는 만취(晩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천거되었으나, 광해정란(光海政亂)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성리학 연구에 힘스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이지병(李之屛) 1597(선조 30)1660(현종 1) 1624(인조 2) 문과에 급제한 후 회양 부사(淮陽府使)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이창환(李昌煥) ()는 회원(晦元), ()는 해은(海隱). 학행으로 세마(洗馬)에 천거(薦擧)되고 익찬(翊贊)에 이르렀다.

초예서(草隸書)와 매죽도(梅竹圖)로 유명하였고, 사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창현(李昌炫) 1609(광해군 1)1671(현종 12) ()는 회경(晦卿), ()는 용은(龍隱). 1651(효종 2)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이시담(李時橝) 1654(효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희명(李希明) ()는 언회(彦晦). 조선(朝鮮) 때 도호부사(都護府事)를 역임하였다.

이희문(李希文)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양(李 瀁) 조선 때 사예(司藝)를 역임했다.

이광직(李光溭) 조선시대에 참판(參判)에 올랐다.

이광익(李光瀷) 조선조(朝鮮朝)에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이인변(李仁釆) 조선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유(李 愈) ()는 숙겸(叔謙). 조선 때 우윤(右尹)을 역임하였다.

이상휘(李祥) 1696(숙종 22)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이광부(李光簿) 1694(숙종 20)1773(영조 49) ()는 자연(子淵). 1715(숙종 41) 문과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1766(영조 42)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98(정조 22)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이동욱(李東郁) 1739(영조 15) ? ()는 유문(幼文), ()는 소암(蘇巖), 광직(光溭)의 아들. 1766(영조 4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1783(정조 7)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갈 때 아들 승훈(承薰)을 동반, 북경(北京)에 들어가 천주교회 북당(北堂)에서 최초로 영세(領洗)를 받게 했다.

귀국 후 사직(司直)참판(參判)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하고 정조 때 죽었다. 1801(순조 1) 아들이 천주교도로 사형되자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이승훈(李承薰) 1756(영조 32)1801(순조 1) 교명은 베드로, 참판(參判) 동욱(東郁)의 아들, 가환(家煥)의 생질,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1780(정조 4) 진사지(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 벽(李 蘗)을 만나 입교(入敎)를 결심.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북경 남천주당(南天主堂)에서 교리를 익힌 후 이듬해 북경(北京) 북천주당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領洗)을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이해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갖고 귀국, 1785년 명례동(明禮洞)의 김범우(金範禹) 집에 조선교회를 건립, 주일(主日)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했다. 이듬해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했다.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했으며, 1789년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 천주교의 자치 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祭祀)도 철폐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밀령(密令)을 받고 오자 제사문제로 두번째 배교, 그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1791(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한 후 투옥, 옥중에서 세번째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으나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윤유일 등이 피체,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의 취조를 받고 권 엄(權 欕) 등의 상소로 이해 2월 서소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56(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1868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 1871년 증손 연귀(蓮龜)균귀(筠龜)가 각각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이치훈(李致薰) 1765(영조 41)1822(순조 22) ()는 자화(子和), 승훈(承薰)의 아우. 1792(정조 16)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형 이승훈(李承薰)1801(순조 1) 신유대사옥(辛酉大邪獄)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할 즈음에 상소하여 사면을 호소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했다.

이무엽(李茂葉) 1782(정조 6)1860(철종 11) ()는 감숙(監叔).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어사(御史) 이기계(李夔癸)에 의해 저정에 천거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도었으며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이재의(李在誼) 1785(정조 9)1868(고종 5) 교명은 도마, 승훈(承薰)의 손자, 택규(宅逵)의 아들. 정선(旌善) 출신. 천주교에 입교하여 앵베르 신부에서 영세(領洗)를 받았으며 1839(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홍주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화를 면했다.

1842년 김대건(金大建)의 권유로 현석문(玄錫文) 등과 함께 상해(上海)에 가서 3개월간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가 조선교구(朝鮮敎區) 3대 교구장이된 페레올 주교를 동반하여 귀국, 전도운동을 폈다. 1846(헌종 12) 체포되어 배교(背敎)할 것을 서약하고 석방되었으나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68년 다시 체포, 교우 이신규(李身逵)권 복(權 複) 등과 서소문(西小門)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신규(李身逵) 1793(정조 17)1868(고종 5) 교명은 도마, 승훈(承薰)의 아들, 어머니는 정약용(丁若鏞)의 누이. 1801(순조 1) 아버지가 순교하자 인천(仁川)에 이사하여 교리 전파 에 힘썼다.

1838(헌종 4) 조선교구(朝鮮敎區) 교구상인 앵베르 주교가 속성과(速成科) 신학교육을 실시하자 정하상(丁夏祥)이문우(李文祐)등과 함께 수학,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자 중단되었다.

이 후 경향 각지를 숨어 다니며 현석문(玄錫文)을 도와 순교자 사 료(史料)를 수집, 교리 서적 간행에 힘쓰고, 1841년 체포되었다가 석 방, 1868년 다시 체포되어 서소문 밖 형장에서 군교했다.

이순권(李順權) 1900(고종 37)1954년 신계 군수(新溪郡守)를 지냈으며 광복(光復) 후 민정관(民政官)이 되었다.

이정규(李正奎) ()는 장규(章奎), ()는 옥산(玉山).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스승 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충북(忠北) 제천(提川)장담(長潭)에서 호좌창의군(湖左倡義軍)을 편성 항쟁(抗爭), 1896년 의병장 유인석과 함께 만주로 갔으며 수시로 국내잔류(國內殘留)의 병과 연락을 유지하며 독립의식을 높였다.

1914년 의병장의 서거후 환국하여 항일활동기록인 종의록(從義錄)과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종하(李鍾河) 19851950197531일 강원도 지사(江原道知事)로부터 공로패(功勞牌)를 받았다.

이영춘(李永春) 190319401937년 군산(群山)에서 진료소를 개설하여 극빈자에게 무료로 치료하는 등, 농촌 보건(農村保健)에 공헌하니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이병식(李炳植) 18961933년 자()는 해동(海東), 191931독립운동가로 대구 감옥(大邱監獄)에 복역하였고 춘추사(春秋社) 한국 지사장을 지냈다.

이현근(李炫瑾) 19121940년 함남(咸南) 북청군(北靑郡)에서 출생하였고 서울 경신고보(儆新高普) 2학년 때 광주 학생사건(1929113)이 일어나자 반일(反日) 투쟁과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퇴학을당하였으며, 동경(東京)으로 도피하여 나가노 중학(中學)에 편입하였으나 일본학생 구절사건(日本學生 歐切事件)으로 19314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1931년 일본 탄압정치에 한()을 품고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 남화한인청년연맹(上海南華韓人聯盟)에 가입하였고 1933년 중국 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에 입학하여 졸업 후 동교 교롼(同校敎官)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日戰爭)이 일어나자 출전(出戰)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무찔렀으나 대대장(大隊長) 당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일본 제국(日本帝國)에 항거하였다는 죄로, 19402229세의 나이로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본군은 판결문과 유골함(遺骨函) 및 유품을 보내와 하차서면(下車書面) 임자동리(荏子洞里) 직동(直洞) 사미혈(蛇尾穴)에 안장(安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