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청주이씨(淸州李氏),청주이씨시조,이능희(李能希),청주이씨유래,청주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5 12:08 수정일 : 2018-08-13 13:43

청주이씨시조 및 청주이씨유래(본관)

청주이씨(淸州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 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 三重大匡太師)를 지낸 이능희(李能希)이다.

능희(能希)의 10세손 계감(季瑊)은 낭성군(埌城君)에 봉해졌고, 13세손 애(薆)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堂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주(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에 위치하는 도청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백제(百濟)가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娘臂성) 또는 낭자곡(娘子谷)으로 불리우다가 685년(통일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청주(淸州)로 고치고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청주군이 되었으며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시(市)가 되었다.


능희(能希)의 아들 겸의(謙宜)도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에 올랐으며, 증손(曾孫) 중강(仲降)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한 중강(仲降)의 손자 공승(公升)이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刑部)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계장(桂長)도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망 높은 청주 이씨(淸州李氏)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가문이 번성하여 거이(居易)가 태조(太祖)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태종(太宗) 때에는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서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외에도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서 공신(功臣)이 된 애(薆)와, 태종(太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봉해진 백강(伯剛),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하성(夏成), 참판(參判)을 지낸 현송(顯孫)과 세양(世陽) 등은 청주이씨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이씨(淸州李氏)는 남한(南韓)에 37,3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청주이씨조상인물

이겸의(李謙宜) 고려 때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형관어사(刑官御史) 역임하였다.

이원심(李元審) 고려조(高麗朝)에 태보(太保)를 지냈다.

이중강(李仲降) 고려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이인지(李仁至)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고려(高麗) 때 태부(太傅)를 역임하였다.

이공승(李公升) 1099(숙종 4)~1183(명종 13) 자(字)는 달부(達夫), 호(號)는 추월재(秋月齋), 시호(號)는 문정(文正), 태조(太祖) 때의 공신 겸의(謙宜)의 5세손.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을 지냈으며 1148년(의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우승선(右承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를 거쳐 형부 상서(形部尙書)․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이부 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등을 역임하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이춘로(李椿老) 1133(인종 11)~1209(희종 5) 자(字)는 고존(固存), 시호(號)는 정숙(貞肅), 평장사(平章事) 공승(公升)의 아들, 일찌기 서해도(西海道)를 안무(按撫)했고, 1203년(신종 6)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이계장(李桂長) 평장사(平章事) 공승(公升)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199년(신종 2) 비서감(秘書監), 1205년(희종 1) 첨서추밀원 사(簽書樞密院事), 1211년(희종 7)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서 각각 과거(科擧)를 관장했다. 뒤에 수태부(守太傅)․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이장(李 粧) 고려 때 판레조사(判禮曹事)를 지냈다.

이황(李 滉) 고려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창우(李昌祐) 고려조(高麗朝)에 전중감(殿中監)을 지냈다.

이천기(李天奇)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이원서(李元瑞) 고려조(高麗朝)에 치과교위(致果校尉)에 이르렀다.

이계감(李季瑊) 호(號)는 백헌(百軒), 시호(諡號)는 정헌(正憲). 고려에서 태사(太師)를 역임하였다.

이계성(李季成) 고려(高麗) 때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역임하였다.

이무(李 茂) 고려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이정(李 挺) 호(號)는 사암(思菴),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1325년(충숙왕 12) 음보(蔭補)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이 되고 다음해 문과(文科)에 급제, 전법 좌랑(典法佐郞)․판도정랑(版圖正郞)․지초계군사(知草溪君事)․감찰 장령(監察掌令)․전법 총랑(典法摠郞) 등을 거쳐 1353년(공민왕 2)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역임하고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이방직(李邦直) 자(字)는 청경(淸卿), 호(號)는 의곡(義谷). 고려 때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냈고, 낭성군(埌城君)에 봉해졌다.

이유신(李由信) 호(號)는 송은(松隱). 고려(高麗) 때 형부 낭중(刑部郎中)을 역임했다.

이거인(李居仁) ? ~ 1402(태종 2) 자(字)는 수보(壽父), 호(號)는 난파(蘭坡), 시호(號)는 공절(恭節). 우왕 초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1382년(우왕 8)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1391년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가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삼사 좌사(三司左使)로 진위사(陳尉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지낸 후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으로 청성백(淸城伯)에 봉해졌다.

이거의(李居義) 호(號)는 청은(淸隱), 고려(高麗)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했다.

이송고(李松固) 고려(高麗)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원수(李元粹) 고려에서 중승(中丞)을 지냈다.

이보무(李輔武) 고려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이방고(李芳固)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원엽(李元曄) 고려조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이거이(李居易) 1348(충목왕 4)~1412(태종 12) 자(字)는 낙천(樂天), 호(號)는 청호당(淸虎堂), 시호(號)는 문도(文度). 진천(鎭川) 출신. 고려 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393년(태조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참지문하 부사(參知門下府事)․참찬문하 부사(參贊門下府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역임했다. 1400년(정종 2)에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오르고, 1402년(태종 2)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관도(李寬道) 조선(朝鮮)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이곤륜(李崑崙)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이애(李 薆) 시호(諡號)는 경숙(景肅). 조선(朝鮮)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백신(李伯臣)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백강(李伯剛) 1381(우왕 7)~1451(문종 1) 시호(號)는 정절(靖節), 영의정 거이(居易)의 아들. 17세 때 음보(蔭補)로 별장(別將)이 되고, 1399년(정종 1) 감찰(監察)이 되어 태종의 맏딸 정순공주(貞順公主)와 절혼, 청평위(淸平尉)가 되고, 병조(兵曹)와 형조(刑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태종)을 도와 공을 세워 우장군(右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태종이 즉위하자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지고, 1418년(태종 18)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이중하(李仲夏) 조선(朝鮮) 때 정헌대부(政憲大夫)로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역임했다

이태(李 迨) 자(字)는 중예(仲豫).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하성(李夏成) 호(號)는 매촌(梅村).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공조 참의(工曹參議)․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이원첨(李元瞻) 호(號)는 동명(東溟). 조선(朝鮮) 때 평산 부사(平山府使)를 역임했다.

이윤광(李允光)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이세영(李世榮) 자(字)는 형지(亨之), 호(號)는 서산(西山). 조선(朝鮮)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다.

이원복(李元福) 조선조(朝鮮朝)에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렀다.

이지천(李知天)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이거(李 蕖) 자(字)는 형백(馨伯), 호(號)는 강개옹(慷槪翁), 시호(號)는 청절(淸節). 조선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청주(淸州)에서 적을 대파했고, 1596년에는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성생(李誠生)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이시휘(李時暉) 자(字)는 회숙(悔叔). 조선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이지한(李志漢) 자(字)는 자성(子誠). 조선조에 사재시첨정(司宰寺僉正)을 지냈다.

이유한(李惟漢) 자(字)는 여흠(汝欽), 호(號)는 초정(草亭), 시호(號)는 문효(文孝). 조선(朝鮮) 때 시직(侍直)을 지냈다.

이장신(李長新) 자(字)는 중윤(仲允), 호(號)는 설라옹(薛蘿翁). 조선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위(李 煒) 자(字)는 사휘(士暉), 호(號)는 비목재(卑牧齋).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이진만(李鎭萬) 자(字)는 치정(致貞). 조선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이홍순(李弘淳) 자(字)는 사범(士範). 조선조(朝鮮朝)에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이인식(李仁植) 자(字)는 영선(永善), 호(號)는 만수당(萬壽堂).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다.

이노철(李魯轍) 자(字)는 성삼(省三), 호(號)는 범벽재(犯碧齋). 조선 때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이현손(李顯孫) 호(號)는 삼청당(三淸堂).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이효분(李孝芬) 조선조(朝鮮朝)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이운(李 芸) 자(字)는 진남(振南), 호(號)는 정포(停圃).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진(李 珍) 자(字)는 천보(天輔), 호(號)는 준암(峻巖).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이흥무(李興武)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회양(李懷陽) 자(字)는 포휘(布輝). 조선 때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역임하였다.

이식기(李植鰭) 자(字)는 자서(子瑞). 조선조(朝鮮朝)에 부사맹(副司猛)을 지냈다.

이향(李 香) 자(字)는 화여(華如). 조선(朝鮮)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이의장(李義長) 자(字)는 장지(長之).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충순위사직(忠順衛司直)을 지냈다.

이억(李 億) 자(字)는 기수(期叟).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순창 군수(淳昌郡守)․정평 부사(正平府使)․충청 수군절제사(忠淸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이령(李 欞) 자(字)는 일수(一壽).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이희뉴(李希杻) 조선조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역임하였다.

이희일(李希逸) 자(字)는 시경(時卿). 조선 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이희생(李希生)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이희육(李希陸) 조선조(朝鮮朝)에서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지냈다.

이인남(李仁男) 조선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이예남(李禮男)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이익립(李益立) 조선에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이진립(李震立) 조선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상고(李尙固) 조선조에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이영립(李英立) 자(字)는 여준(汝俊).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세양(李世陽) 조선조(朝鮮朝)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이득양(李得陽)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곤(李 鵾) 자(字)는 원남(圓南), 무과(武科)에 급제,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과 충순위 사직(忠順衛司直)을 역임 하였다.

이원양(李元陽) 자(字)는 도원(道元).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이담령(李聃齡)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유상(李有相) 조선조(朝鮮朝)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이성(李 晟)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우민(李禹民) 자(字)는 치윤(治允), 호(號)는 강의재(剛毅齋).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거져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진양(晋陽)에서 순절했다.

이계년(李桂年) 자(字)는 수경(壽卿).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첨정(訓鍊僉正)․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남원 판관(南原判官)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과 싸우다 순절(殉節)했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언침(李彦琛) 초명(初名)은 효희(孝希). 자(字)는 극충(極忠), 호(號)는 고송(孤松) 시호(諡號)는 정사(靖社).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능양군(陵陽君)에 봉해졌으며 숭록대부(崇錄大夫)에 올랐으나 과격한 당쟁을 개탄하여 1624년(인조 2) 고금도(古今島)로 은거(隱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