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전주이씨,전주이씨본관,전주이씨시조,이한

작성일 : 2017-05-04 21:16 수정일 : 2018-08-01 15:52

瑢源先系 및 瑢源世系(전주이씨시조)

전주이씨는 우리나라 대성 중에서 근대시기에 크게 성장한 성씨 집단이다. 이는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왕실이 전주이씨를 근본으로 하는 부계중심의 왕실을 유지 500여 년간을 지속하면서 종친을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역대 왕들은 많은 왕자군을 생산하여 왕통만이 아니라 왕실의 배경으로 전주이씨의 친족들의 세를 확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왕실의 성립을 기점으로 하여 그 선대의 역사를 소개하고 역대 왕들의 행적을 간략하게 보고, 이어 역대 왕들의 왕자군들의 형세를 살펴보도록 한다. 그것은 왕자군들이 바로 전주이씨의 파시조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우리들은 대개 파시조를 중심으로 친족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어, 친족 모임의 연원을 따지게 되는 것에 대답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유념할 것은 부계를 중심으로 이씨 친족의 계보를 기술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성씨들이 있고 각 성씨들과 혼인하여 전주이씨의 친족세를 확장하였다. 혼인하여 온 성씨를 왕대별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주요 자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이고 『선원계보』 등을 참고하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30년사』와 『전주이씨대관』을 참조하여 기술하였다.

Ⅰ. 선원선계(璿源先系)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하여 조선왕조의 시조의 계보를 추적하는 마당에서 전주이씨는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을 수용하고 있다.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주이씨는 시조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하는 것이다.
선원세계는 추존왕 4대와 태조고황제부터 순종황제까지 20세를 합쳐 24세의 역대왕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대왕의 5왕자로부터 장조의 3왕자군까지 도합 125개의 파계가 있었으나 무사(無嗣)의 군파가 있어 현재는 105여 파로 분리되고, 2004년 9월 현재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한 파종회는 89개파다. 
따라서 전주이씨를 개관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역사를 시작으로 하여 태조가 추존한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마지막 황제이신 순종황제까지의 선원세계를 우선 조명하고, 이어 선원파계(선원속계)의 대강을 소개함으로써 현재 전주이씨의 파계를 종관할 수 있다고 하겠다.
「조선태조실록」 총서에는 선원선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이성계(李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휘(諱)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이인(李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

라고 하여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4대조를 추존하여 8촌 범위의 친족을 왕실로 격상시키고, 여기서부터 파조를 형성 전주이씨의 부계 성씨를 보존하여 자자손손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태조대의 역사부터 다시 조명하면서 전주이씨의 전파의 계보도를 보도록 하겠다.

“태조는 선조 사대(四代)의 존호(尊號)를 사후(死後)에 올렸다. 고조고(高祖考)는 목왕(穆王)이라 하고, 비(?) 이씨(李氏)는 효비(孝妃)라 하였으며, 증조고(曾祖考)는 익왕(翼王)이라 하고, 비 박씨(朴氏)는 정비(貞妃)라 하였으며, 조고(祖考)는 도왕(度王)이라 하고, 비 박씨(朴氏)는 경비(敬?)라 하였으며, 황고(皇考)는 환왕(桓王)이라 하고, 비 최씨(崔氏)는 의비(懿妃)라 하였다.” 라고 「태조실록」 총서에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7월 왕위에 오르자 개국을 도운 태조의 아들과 조카을 봉군하고 있다. 봉군을 받은 왕자들은 바로 파시조가 되어 친족의 독립 친족을 만들고 왕실에 협력하는 단위의 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실록을 보면,

“왕자(王子)를 군(君)으로 봉(封)하였다. 이방우(李芳雨)는 진안군(鎭安君)이라 하고, 이방과(李芳果)는 영안군(永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고, 방의(芳毅)는 익안군(益安君)이라 하고, 이방간(李芳幹)은 회안군(懷安君)이라 하고, 이방원(李芳遠)은 정안군(靖安君)이라 하고, 서자(庶子) 이방번(李芳蕃)은 무안군(撫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고, 부마(駙馬) 이제(李濟)는 흥안군(興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삼고,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아들 이양우(李良祐)는 영안군(寧安君)이라 하였다.”(「태조실록」 권1 1년 8월 7일)
 라는 봉군(封君)과 함께 인사를 통하여 왕실의 호위로 한 것을 확인하게 한다. 이어 태조는 시조(始祖)가 기반으로 한 전주(全州)를 승격시켜 완산부(完山府)로 삼고, 유구(柳?)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태조실록」 권1 1년 8월 7일)고 「태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를 더 조명하면, 지금의 전북도청 소재지인 전주시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比斯我?比自火)으로 554년(백제 위덕왕 1) 주를 두어 완산주(完山州)라 하였다가 565년(위덕왕 11)에 주를 폐하였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 후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칭하더니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신검(神劒)을 토벌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 23)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993년(성종 12)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개칭하였다가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되었다. 1018년(현종 9) 안남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되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 (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어 오늘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첫 이름이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또 부의 북쪽 10리에 있으면서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이던 산이었다.
따라서 전주이씨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대체로 전주이씨라 부르고 간혹 기호에 따라 완산이씨라고 기록할 때도 있다. 이 전주는 조선왕조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그래서 이 전주는 전주이씨와 절대적인 관계에 있고, 전주이씨를 빼놓고 전주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경단(肇慶壇)

'조경(肇慶)' 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전주이씨의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시조 한(翰)의 묘역(墓域)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왕조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전주는 곧 조선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조선의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여 지키게 하고, 전라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중략)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이 비문은 조선의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 1853~1939)가 썼다. 이로 보면 시조의 묘가 이곳에 있었고 태조고황제도 관심을 기울여 묘역을 수호케 하였으며 특히 영조대왕은 대대적으로 정화 작업을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시조공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정조대왕도 산소 보존을 위하여 사방경계를 정 하는 등, 여러 열성조가 선조 묘역 수호 보존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웠다.
그러나 1899년(고종 광무 3) 4월 8일에 묘소 앞에 조경단을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선원계보기략』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전까지 450 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Ⅱ. 선원세계(璿源世系)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태종을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어 사대(四代)의 능실(陵室)에 제사를 지내어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고, 이내 능호(陵號)를 올리니, 황고(皇考)는 정릉(定陵), 황비(皇?)는 화릉(和陵), 황조(皇祖)는 의릉(義陵), 황조비(皇祖?)는 순릉(純陵), 황증조(皇曾祖)는 지릉(智陵), 황증조비(皇曾祖?)는 숙릉(淑陵), 황고조(皇高祖)는 덕릉(德陵), 황고조비(皇高祖?)는 안릉(安陵)이라 하였다.(「태조실록」 권1 1년 8월 8일) 이는 새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의식으로 태조의 웃 4대조를 추존하여 왕으로 받드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선원파계의 연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목조(穆祖)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요, 고려 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 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와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이고, 차례는 넷째다.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오늘날 오목대(梧木臺)의 동쪽 발리산 아래의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이다.
목조는 <완산지(完山誌)>에 의하면 전주에 살던 유년 시절, 수백 년 묵은 고목나무인 장군수(將軍樹)를 둘러싸고 여러 아이들과 진법(陣法)을 익혔다. 전주향교 뒤에 있는 은행나무터가 바로 그것이다.
목조왕은 또 어렸을 때에 발리산 아래에서 폭풍을 만나 바위 밑으로 피하자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목조왕은 거기에 모인 여러 아이들에게 이르기를?호랑이는 단 한 사람만 해칠 것이니, 모두가 자기 옷을 벗어 던져 봐서 옷을 받아 무는 아이만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러면 네가 먼저 던져 봐라.? 하였다. 목조대왕은 그 말대로 제일 먼저 옷을 벗어 던지니, 호랑이가 덥석 받아 물었다. 이 때 여러 아이들은 목조대왕더러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굴에서 나오자 호랑이는 달아나고 동시에 바위 벼랑이 갑자기 무너졌다. 그래서 여러 아이들은 화를 입게 되었으나 목조대왕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오늘날 전주 발리산 남쪽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정자 한벽당(寒碧堂 : 梧木臺 동쪽 1㎞)에서 400m 쯤 떨어진 지점에 굴러 내린 바윗돌이 강물 가운데서 완연히 보인다. 이 돌을 호운석(虎隕石)이라 한다.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이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려는 목조왕은 장군공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괴산(槐山)?제천(堤川)?정선(旌善) 등의 직선 코스를 따라 달려갔다. 이 때 장군공과 목조왕에 따르기를 원하는 혈족과 외족은 170여 호나 되었다. 대이동한 일족은 삼척군(현 삼척시) 내의 삼화사(三和寺 : 정선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계곡을 지나면 있으며, 삼척시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동쪽 25리에 북평이 있고, 북쪽 30리에 묵호가, 서남쪽 10리에 頭陀山城이 있다) 근방에 도착한 것이다. 대이동이 있자,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1231년(고려 고종 18)에 제1차 몽고병의 침입이 있었고, 같은 해에 목조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장군공 묘는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목조왕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지 수년만에 다시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에 가까운 덕원(德源)으로 이주해야 했다. 왜냐 하면, 1235년(고려 고종 22)의 제3차 몽고군 침입의 행패가 가라앉을 무렵인 그 이듬해에 공교롭게도 전일의 전주 산성별감이 강원도의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릉과 삼척 사이는 해륙 교통이 편리한 가까운 지리인지라, 목조왕은 장차 묵은 혐의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일족을 이끌고 이미 마련해 둔 선단 15척으로 개척돼 있는 항로를 따라 손쉽게 동북면의 덕원부(德源府) 용주리(湧珠里 : 赤田社)로 이주하니, 때는 1236년(고려 고종 23)이었다. 이 때 전주에서 장군공과 목조왕을 따라 삼척군으로 이동해 온 혈족과 외족 170여 호도 역시 목조를 따라 이주해 왔는데, 이 사실은 또 한편으로 일족의 선단이 묵호만(墨湖灣)에서 모두 영흥만(永興灣)으로 대이동해 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목조왕은 덕원에서 삼척을 왕래하며 활기리 노동(蘆洞)의 선고묘(先考墓)와 동산리의 선비묘를 성묘함과 동시에 과거에 이미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삼화사에 참례하였는데, 풍부한 학식을 가진 목조는 삼화사에 저 유명한 <금은수사경(金銀手寫經)>을 남겨 놓은 것이다.
목조는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해 온 지 19년만에 다시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으로 이주하였다. 오동(斡東) 발음을 <위적사(偉蹟史)>의 번역에선 ‘와뚱’이라 하고 <왕조실록(王朝實錄)> 등에선 ‘알동’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2장에 “穆祖移居斡東之地”라 기록돼 있다. 위치는 두만강 입구에서 60리 거슬러 올라가면 있다. 이 곳에서 30리 더 올라가면 국방상의 요충지인 경흥(慶興)이 있다. 경흥(慶興) 땅인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에 도착하니 때는 목조대왕의 춘추 51세 1254년(고려 고종 41) 쯤 이었다.
태조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왕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공주(孔州 : 慶興)의 성(城) 남쪽 5리에 장사지냈다.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의 계좌원(癸坐原)으로 이장되었다. 덕릉(德陵)이 바로 이곳이다.

(2) 익조(翼祖)
18세 목조의 제4남으로 이름은 행리(行里)요, 함경도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태조고황제가 익왕(翼王)으로 추존하고, 그 뒤 태종이 강혜성익(康惠聖翼)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고 표석이 있다.
배위는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인데, 본관은 등주(登州)요, 호장 기열(基烈)의 딸이다. 9월 2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정비(貞妃)로 추존하고 태종이 정숙(貞淑)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숙릉(淑陵)으로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에 있고 표석이 있다.
익조는 8남 1녀를 두었으니, 사자(嗣子)인 도조왕은 차례로 넷째이다. 장남은 함녕대군(咸寧大君) 안(安)이요,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장(長)이며,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송(松)이요,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원(源)이요,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고태(古泰)요, 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전(?)이요,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응거(應巨)이다. 장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인데 증좌군도통제(贈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갔다. 태조고황제의 증조부인 익조대왕은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익조왕의 부인은 손부인(孫夫人)으로서 함께 적도(赤島)까지 도피하는 등 초년 고생을 함께 하였다. 후에 익조왕은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에 장가들어 도조왕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익조왕은 8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도조왕은 차례가 넷째이니 위로 형이 셋이요, 아래로 아우가 넷인 셈이다. 그래서 손부인이 낳은 두 아들이 함녕대군과 함창대군이고 나머지 다섯 아들과 딸이 정숙왕후 소생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8남 1녀를 전부 정숙왕후가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3) 도조(度祖)
19세 익조의 제4남으로 이름은 춘(椿)인데 처음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명은 패안첩목아이다.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생하여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 7월 24일에 승하하니 고려 조정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도왕(度王)으로 추존되고 후에 태종이 공의성탁(恭毅聖度)이라고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두었다. 능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에 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배위는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이니 본적은 문주(文州)요 원나라에서 천호벼슬을 받고 조선조 때 문하시중에 증직된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고 7월 23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낳았고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남 흥남시 마전리에 있다. 표석이 있다.
사자(嗣子) 환조(桓祖)왕은 차례가 둘째요, 장남 완창대군(完昌大君)은 자흥(子興)이요, 3남 완원대군(完原大君)은 자선(子宣)이며, 4남 완천대군(完川大君)은 평(平)이요, 5남 완성대군(完城大君)은 종(宗)이다. 장녀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고, 차녀 문숙공주(文淑公主)는 다루카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으며, 삼녀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경순왕후 박씨는 완창대군과 환조왕만 낳고 박씨가 승하한 뒤 조씨(趙氏)에게서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으니, 첫 아들이 완자불화(完者不花)요, 다음 아들이 나해(那海)라고 하였다. 그러니 5형제 중 아들 하나는 누가 또 낳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5남 3녀를 모두 경순왕후 박씨가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환조(桓祖)
 20세 도조왕의 제2남으로 이름은 자춘(子春)인데 자도 역시 자춘이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탄생하고 고려때에 벼슬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고 1360년(고려 공민왕 9) 4월 갑술일(『태조실록』에는 庚戌日)에 승하하니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환왕(桓王)으로 추존되고 태종이 연무성환(淵武聖桓)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795년(정조 19) 영흥 본궁(本宮)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7일에 본궁 이안청(移安廳)에서 신판(神板)을 만들어 4월 26일 본궁 정전(正殿)에 모셨다. 3남 1녀를 두셨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으며 1360년 8월에 장례했다.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를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배위는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이니 본적은 영흥(永興)이요, 원나라에서 천호(千戶)를 받고 조선조에서 판문하(判門下) 영흥백(永興伯) 정효공(靖孝公)을 추증받은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봉작을 받고 2월 24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의비(懿妃)에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의혜(懿惠)라 더 존호를 올렸다. 1795년(정조 19)에 영흥 본궁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1일에 본궁 이안청에서 신판을 만들어 26일에 본궁 정전에 모셨다. 1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화릉(和陵)으로 환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는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사자는 태조고황제이고, 장녀는 정화공주(貞和公主)로서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다. 환조왕은 따로 두 배위를 두었다. 한 분은 이씨(李氏)로서 완풍대군(完豊大君) 원계(元桂)를 낳았고, 또 한 분은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로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를 낳았다. 환조왕이 함경도로 떠난 그해 1360년(고려 공민왕 9) 신축년 4월에 갑자기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환조왕의 보령이 46세였다.

(다음은 조선왕조의 태조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까지 역대 왕의 왕비의 성씨와 왕자 공주의 내력을 약술하여 전주이씨 대성이 번성하게 된 줄기를 기술할 것이다.)

1. 태조(太祖)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정의 광덕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이름은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 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화상(畵像)이 두 벌이 있어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그린 또 한 벌이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삼(儉巖山)에 있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다.
비(妃) 승인 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 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다.
계비(繼妃) 순원 현경 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8남 5녀를 두었다.
제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제2남은 정종대왕이다. 제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 大匡輔國 贈 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철원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德)에 있으며, 정종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제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밀양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김포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兎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제5남은 태종대왕이다. 제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제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개성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제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유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제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제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제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개국공신(開國功臣)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2. 정종(定宗)
 정종 공정 의문 장무 온인 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은, 휘는 경(?)이며, 자는 광원(光遠)이고, 처음 휘는 방과(芳果)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지정 17년 공민왕 6년 7월 초하룻날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私邸)에서 낳았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상(將相)까지 이르렀고, 태조가 즉위한 다음에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하였다. 무인년 홍무 31년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고, 경진년 건문(建文) 2년 11월에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는데, 그 해 12월에 인문공예(仁文恭睿) 어첩(御牒)에 기록한 휘호에 겹친 글자가 있고 시호 가운데 온인(溫仁) 밑에 공용(恭勇) 두 자가 있으나, 공(恭) 자가 겹쳐 나오므로 어첩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2년이고, 기해년 세종 원년 영락17년 9월 26일 무진에 인덕궁(仁德宮)에서 승하하였으니, 상왕위(上王位)에 있은 지 19년이며, 수(壽)는 63세였다.
숙종(肅宗) 7년 신유에 추후해서 묘호(廟號)를 정종(定宗)이라 하고 의문장무라고 시호를 더 올렸으며, 능은 후릉(厚陵)이다. 풍덕(豊德) 동편 흥교동(興敎洞)에 있다. 경자년(1420) 정월 초사흗날에 장사지냈는데, 표석(表石)이 있다.
비(妃) 순덕 온명 장의 정안왕후(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 김씨(金氏)는, 본관은 경주이니,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증 문화좌시중(贈門下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을미년 지정 15년 정월 9일에 나서 무인년(1386)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비(德妃)로 올려서 봉하였다. 경진년(1400)에 존호를 순덕이라고 올리고, 임진년 태종 12년, 영락(永樂) 10년 6월 25일 무인에 인덕궁에서 승하하였는데, 수가 58세고 자녀는 없었다. 숙종 신유년(1681)에 추후하여 휘호를 온명장의(溫明莊懿)라 올렸다. 능은 후릉(厚陵). 대왕의 능과 같은 산에 있는데, 임진년(1412) 8월 8일에 장사지냈다.
아들 열 다섯과 딸 여덟을 두었다.
1남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 지씨(池氏)가 낳았고, 시호는 민간(敏簡)이다. 철원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금천 감무(衿川監務) 치숭(致崇)의 딸이다. 5남 3녀를 두었다. 2남 순평군(順平君) 군생(群生). 기씨(奇氏)가 낳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순창설씨(淳昌薛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3남 금평군(錦平君) 의생(義生). 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금평군을 추증하였다. 남양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직 홍숙(洪宿)의 딸이다. 4남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연일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의(參議) 종성(宗誠)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안강김씨(安康金氏)를 재취하였으니, 상호군(上護軍) 중약(仲約)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5남 종의군(從義君) 귀생(貴生). 문씨(文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종의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양구유씨(楊口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正)으로 찬성(贊成)을 추증한 수빈(守濱)의 딸이다. 해풍장씨(海豊張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장균(張均)의 딸이다. 6남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 이씨가 낳았고,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의령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상호군(上護軍) 남심(南深)의 딸이다. 7남 수도군(守道君) 덕생(德生). 윤씨(尹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수도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여산송씨(礪山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계성(繼性)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8남 임언군(林堰君) 녹생(祿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언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혜안(惠安)이다. 고령박씨(高靈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少尹) 박부(朴溥)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9남 석보군(石保君) 복생(福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석보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원주김씨(原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중추부사 대민공(戴敏公) 연지(連枝)의 딸이다. 3남 5녀를 두었다. 10남 덕천군(德川君) 후생(厚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장수 이씨(長水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양후공(良厚公) 종무(從茂)의 딸이다. 4남 5녀를 두었다. 11남 임성군(任城君) 호생(好生). 지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성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평창이씨(平昌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수(郡守) 계동(繼童)의 딸이다. 12남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용인이씨(龍仁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부사(府使) 수강(守綱)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전주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사직(司直) 최수(崔洙)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3남 장천군(長川君) 보생(普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장천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화순최씨(和順崔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사(郡事) 자해(自海)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14남 정석군(貞石君) 융생(隆生). 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정석군(貞石君)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충주권씨(忠州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직장(直長) 권돈(權敦)의 딸이다. 15남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 기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이(昭夷)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정(司正) 흥선(興善)의 딸이다. 2남 4녀를 두었다.
1녀 함양옹주(咸陽翁主). 지씨가 낳았다. 남편은 지돈녕부사 박갱(朴?)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박갱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득중(得中)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기씨가 낳았다. 남편은 판돈령부사 양평공(良平公) 김세민(金世民)인데, 아들 넷과 딸 넷을 두었다. 세민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김겸(金謙)이다. 3녀 덕천옹주(德川翁主). 남편은 행부사(行府使) 변상복(邊尙服)인데, 3남 2녀를 두었다. 상복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總制) 변이(邊?)이다. 4녀 고성옹주(高城翁主). 남편은 지중추부사 김한(金澣)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그 집 족보(族譜)에는 안성위(安城尉) 호평공(胡平公)이라 하였고, 본관은 안산(案山)이며, 아버지는 연성군(連城君) 위정공(威靖公) 정경(定卿)이다. 5녀 상원옹주(祥原翁主). 남편은 행사직(行司直) 조효산(趙孝山)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효산의 본관은 평양이고, 아버지는 의방(義方)이다. 6녀 전산옹주(全山翁主). 남편은 행사직 이희종(李希宗)인데, 3남 1녀를 두었다. 희종의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7녀 인천옹주(仁川翁主). 남편은 행부사(行府使) 이관식(李寬植)인데, 5남 3녀를 두었다. 관식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성간(成幹)이다. 8녀 함안옹주(咸安翁主). 남편은 부지돈녕부사 월림군(月林君) 소정공(昭靖公) 이항신(李恒信)인데, 1남을 두었다. 항신의 본관은 경주이다.

3. 태종(太宗)
 
태종 공정 성덕 신공 문무 예철 성렬 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은, 휘는 방원(芳遠)이고, 자는 유덕(遺德)이며,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지정(至正) 27년 정미 공민왕 16년 5월 16일 신묘에 함흥 귀주동(歸州洞) 사저에서 낳았다. 홍무(洪武) 임술년에 고려에서 진사를 하고, 다음해인 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태조가 즉위한 뒤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고, 경진년 건문 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11월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술년 영락(永樂) 16년 8월에 세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는데, 11월에 성덕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왕위에 있은 지 18년이고, 임인년 세종 4년 5월 10일 병인에 천달방(泉達坊) 새 대궐에서 승하하였으니, 상왕위에 있은 지 4년이고, 수는 56세였다. 숙종 9년 계해에 예철성렬(睿哲成烈)이라고 시호를 더 올렸고, 능은 헌릉(獻陵) 광주(廣州) 서쪽 대모산(大母山)에 있다. 임인년(1422) 9월 6일에 장사지냈는데,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비(妃) 창덕 소열 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민씨(閔氏)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문하좌정승 여흥부원군 문도공(門下左政丞驪興府院君文度公) 민제(閔霽)의 딸이다. 지정(至正) 25년 을사 공민왕 14년 7월 11일에 송경 철동(鐵洞) 사저에서 나고, 홍무(洪武) 임신년 태조 원년 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으며, 경진년 정빈(貞嬪)으로 책봉되었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정비(靜妃)로 책봉되었다. 경자년 세종 2년 7월 10일 병자에 수강궁(壽康宮) 지금의 창경궁별전(別殿)에서 승하하시니, 수는 56세였다. 갑진년 세종 6년에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고 존호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헌릉(獻陵)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9월 17일에 장사지냈다.
아들 열 둘과 딸 열 일곱을 두었다. 제1남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다. 처음에 세자로 봉했다가 태종 18년에 폐(廢)하고 대군으로 봉하였다. 시호는 강정공(剛靖公)이다. 광주김씨(光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광산군(光山君)으로 좌의정을 추증한 한노(漢魯)의 딸이 3남 4녀를 두었다. 제2남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처음 이름은 이호(李祜)이고, 시호는 정효공(靖孝公)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으로 좌의정을 추증한 정도공(貞度公)정역(鄭易)의 딸인데, 6남 1녀를 두었다. 제4남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種). 대광보국 변한공(大匡輔國卞韓公)으로 시호는 소경공(昭頃公)이다. 창녕 성씨(昌寧成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원사(判院事)로 좌의정을 추증한 희정공(僖靖公) 성억(成抑)의 딸이다.
제1녀 정순공주(貞順公主). 남편은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인데, 딸 하나를 두었다. 백강의 본관은 청주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문도공 거이(居易)이다.제2녀 경정공주(慶貞公主). 남편은 평양부원군 강안공(康安公) 조대림(趙大臨)인데, 1남 4녀를 두었다. 대림의 본관은 평양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문충공 조준(趙浚)이다.제3녀 경안공주(慶安公主). 남편은 길창군(吉昌君) 제간공(齊簡公) 권규(權?)인데, 2남을 두었다. 권규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다. 제4녀 정선공주(貞善公主). 남편은 의산군(宜山君)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인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남 경녕군(敬寧君). 이비(李?) 효빈(孝嬪) 김씨가 낳았고 시호는 제간공(齊簡公)이다. 청풍 김씨(淸風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의증 좌찬성 김관(金灌)의 딸이다. 4남을 두었다. 2남 함녕군(?寧君) 이인(李?). 신빈(信嬪) 신씨(辛氏)가 낳았고, 처음에 공녕(恭寧)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함녕으로 고쳤다. 시호는 정민공(貞敏公)이다. 전주최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3남 온녕군(溫寧君) 이정(李?). 신빈 신씨가 낳았고, 시호는 양혜공(良惠公)이다. 순천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정(副正) 증 찬성 문목공(文穆公) 안명(安命)의 딸이다. 4남 근녕군(謹寧君) 이농(李?). 신빈 신씨가 낳았고, 시호는 희의공(僖懿公)이다. 하양허씨(河陽許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관찰사 증 찬성 지혜(之惠)의 딸이다. 2남 7녀를 두었다. 5남 혜령군(惠寧君) 이지(李祉). 안씨(安氏)가 낳았고, 시호는 양회공(襄懷公)이다. 무송윤씨(茂松尹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증 찬성 윤변(尹?)의 딸이다. 1남 3녀를 두었다. 6남 희령군(熙寧君) 이타(李?). 숙의(淑儀) 최씨가 낳았고, 시호는 이정공(夷靖公)이다. 순창신씨(淳昌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첨지 증 찬성 숙생(淑生)의 딸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를 재취하였으니, 군수(郡守) 사렴(士廉)의 딸이다. 3남을 두었다. 7남 후령군(厚寧君) 이한. 최씨가 낳았고, 시호는 희도공(僖悼公)이다. 평산신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영(令) 증 찬성 경종(敬宗)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8남 익녕군(益寧君) 이치. 선빈(善嬪) 안(安)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강공(昭剛公)이다. 운봉박씨(雲峯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절제사(節制使) 증 찬성 종지(從智)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녀 정혜옹주(貞惠翁主).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낳았다. 남편은 정난공신(靖難功臣)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 성렬공(成烈公) 박종우(朴從愚)이다. 종우의 본관은 운봉(雲峯)이고, 아버지는 찬성 충숙공(忠肅公) 박신(朴信)이다. 2녀 정신옹주(貞信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계동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판서(判書) 윤향(尹向)이다. 3녀 정정옹주(貞靜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한원군(漢原君) 소회공(昭懷公) 조선(趙璿)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조선의 본관은 양주(楊洲)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이다. 4녀 숙정옹주(淑貞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고, 남편은 행 판서(行判書)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인데, 2남 4녀를 두었다.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아버지는 판서 정진(鄭鎭)이다. 5녀 소선옹주(昭善翁主). 남편은 유천위(柔川尉) 변효순(邊孝順)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효순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아버지는 감찰(監察) 상주(尙周)이다. 6녀 숙혜옹주(淑惠翁主). 소빈(昭嬪) 노씨(盧氏)가 낳았다. 남편은 성원위(星原尉) 장절공(章節公) 이정녕(李正寧)이고, 3남 1녀를 두었다. 정녕의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아버지는 좌윤(左尹) 사후(師厚)이다. 7녀 숙녕옹주(淑寧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파성군(坡城君) 윤우일(尹愚一)인데, 1남 2녀를 두었다. 우일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사간(司諫) 수미(須彌)이다. 8녀 소숙옹주(昭淑翁主). 안씨가 낳았다. 남편은 해평군(海平君) 평도공(平悼公) 윤연명(尹延命)인데, 4남 2녀를 두었다. 연명의 본관은 해평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연성(連誠)이다. 9녀 숙경옹주(淑慶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좌익공신(佐翼功臣) 파평군(坡平君) 제도공(齊度公) 윤암(尹巖)인데, 6남 1녀를 두었다. 윤암의 본관은 파평이고, 아버지는 생원(生員) 태산(太山)이다. 10녀 경신옹주(敬愼翁主). 안씨가 낳았다. 남편은 전성위(全城尉) 양효공(良孝公) 이완(李梡)이며, 6남 1녀를 두었다. 이완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아버지는 판사(判事) 공전(恭全)이다. 11녀 숙안옹주(淑安翁主).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회천위(懷川尉) 양도공(良悼公) 황유(黃裕)인데, 3남을 두었다. 황유의 본관은 회덕(懷德)이고, 아버지는 판사(判事) 자후(子厚)이다.
12녀 숙근옹주(淑謹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좌익공신(佐翼功臣) 화천군(花川君) 양효공(襄孝公) 권공(權恭)인데, 1남을 두었다. 권공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아버지는 도절제사(都節制使) 권복(權復)이다. 13녀 숙순옹주(淑順翁主). 이씨가 낳았다. 남편은 파원위(坡原尉) 윤평(尹評)인데, 2남 1녀를 두었다. 윤평의 본관은 파평이고, 아버지는 참의(參議) 윤창(尹敞)이다.

4. 세종(世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