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온양이씨시조(溫陽李氏),이흥서(李興瑞),온양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3 14:52 수정일 : 2018-07-19 15:1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온양이씨 (溫陽李氏)의 시조(始祖)는 조선조(朝鮮朝) 선조(宣祖) 때 옥천군수(沃川君守)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항전하다가 순국한 이흥서(李興瑞)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며, 손자 만립(萬立)이 난중향기(亂中響記)에서 조부의 행적(行蹟)을 알았으나 역시 선대(先代)를 알 수 없어 흥서(興瑞)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온양(溫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온양(溫陽)은 충청 남도(忠淸南道) 아산군(牙山郡)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탕정군(湯井郡)을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이 주(州)로 승격 시켜 총관(總管)을 두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삼았으며, 고려 (高麗)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년)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신창현(新昌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다가 다시 온수현(溫水縣)이라 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온양군(溫陽郡)이 되었고, 1913년 아산군(牙山郡)에 속한 온양면(溫陽面)이 된 후 지금의 온양읍(溫陽邑)에 이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온양이씨 (溫陽李氏)는 효자(孝子)의 집안으로 이름났는데 조선 숙종(肅宗) 때 태귀(泰貴)와 헌종(憲宗) 때 흥엽(興爗)은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려와 삼효문(三孝門)이 세워졌고 의친왕(義親王): 고종의 셋째아들)의 친필(親筆)로 「온양이씨 삼효문(溫陽李氏三孝門)」이라 쓴 비(碑)가 세워졌다. 이외에도 항일(抗日) · 구국(救國)운 동에 앞장선 응선(應)과 경선(景善)이 온양 이씨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인 구

201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온양이씨(溫陽李氏)는 전국에 1,8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온양이씨조상인물

이태귀(李泰貴):호(號)는 삼성당(三省堂).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母親)의 병이 위독(危篤)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4번이나 살아나게 하였고, 3년 동안 초막올 짓고 모친의 무덤을 살피니 나라에서 그의 효행(孝行)을 표창하고 정려(施 間)를 하사했다.

이흥엽(李興燁) : 호(號)는 에일당(愛日堂). 조선 현종(憲 宗) 때 효자(孝子)로 칭송이 자자하여 정려와 삼효문(三孝門)이 세워졌고, 의친왕(義親王)의 친필로 「온양이씨삼효문(il[陽李氏二孝門)」이라 쓴 비석(碑石)이 세워졌다.

이원배(李元培):자(字)는 찬옥(贊玉), 호(號)는 영모당(永慕堂). 효행이 지극하여 조선(朝鮮) 순종(純宗)으로부터 온양이씨(溫陽李氏) 계효지비(繼孝之碑)가 건립되었다.

이응선(李應普):호(號)는 검헌(儉軒). 조선 순종(純宗) 때 시종관(侍從官)을 지냈으며 순종(純宗) 별세(別世) 후 항일 운동(抗日運動)에 일생을 바쳤다.

이경선(李景善):호(號)는 난계(蘭溪).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지하에서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전념하였고 3 · 1 운동(運動)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