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해이씨시조(寧海李氏),이연동(李延東),영해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03 13:40 수정일 : 2018-07-18 11:36

영해이씨의 연원

영해이씨(寧海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영해군(寧海君)에 훈봉(勳封)된 이연동(李延東)공이다. 신라(新羅)의 사도(司徒) 완산(完山) 이입전(李立全)의 후손(後孫)이다. 사도공 이후의 세계(世系)는 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어 영해군을 시조로 하고 완산으로부터 이적(移籍)하여 공의 군호(君號) 영해(寧海)를 성관(姓貫)으로 하였다. 시조의 발상지(發祥地)를 성씨(姓氏)의 관향(貫鄕)으로 삼는 일반적인 현상과는 다르다. 시조의 묘(墓가) 실전(失傳)되어 영단(靈壇)을 설치하고 세사(歲事)를 봉사(奉祀)하고 있다.


사적(事蹟)

서산지절(西山之節)

4세 장밀(長密)공은 고려의 호부전서(戶部典書)를 지냈다. 공은 고려가 망함에 따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大義)를 지켜 동해에 가서 죽겠노라고 맹세하였다하여 세상에서 서산지절(西山之節)이라고 하였다. 1392년 고려의 운(運)이 다하자 충신 열사들은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송도(松都)의 동남 언덕에 올라 각기 뜻한 바를 나누고 헤어졌다. 공은 두문동(杜門洞) 72현과 뜻을 같이 하여 처가(妻家)가 있는 강릉(江陵)에 내려와 살았다.

조선최초(朝鮮最初)의 4형제 효자정려(孝子旌閭)

5세 눌재(訥齋) 이성무(李成茂)공은 그 아우 선무(善茂) 춘무(春茂) 양무(良茂)와 더불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79세의 노모(老母)가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음식을 먹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잉어회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때는 엄동(嚴冬)이라 잉어 얻을 길이 없었다. 성무 4형제는 얼음을 두드리며 “이 자식으로 어머님의 목숨을 대신하여 주옵소서.” 하면서 잉어를 얻게 해 주기를 하늘에 빌었다. 이에 갑자기 잉어 두 마리가 뛰어 나오므로 이를 어머니께 드리니 맛있게 먹고 곧 병이 나았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이를 듣고 크게 감탄(感歎)하여 찬시(讚詩) 2절구(絶句)를 하사하고, 1417년 조선최초(朝鮮最初)로 4형제 모두에게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 이는 세종명찬(世宗命撰)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 조선시대 효자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눌재 이성무는 강릉향현사(江陵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양무(良茂)의 후손 이당(李堂)과 이민(李 )이 1706년에 또 효자정려를 받았다. 이에 양대(兩代)의 6분 효자를 ‘영해이씨이세육효지려’(寧海李氏二世六孝之閭)에 모셨다.

삼부자등과(三父子登科) 형제장원(兄弟壯元)

10세 동명(東溟) 이오(李璈)공이 160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1615년에는 큰아들 국우(菊雨) 이상혐(李尙馦)공이 병과(丙科)에 장원급제 하였고, 둘째 아들 미노(嵋老) 이상빈(李尙馪)공은 갑과(甲科)에 동시(同時) 장원급제 하였다. 동명공은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냈고 동명공파(東溟公派) 파조(派祖)이다. 국우공은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벙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미노공은 강서(江西) 용강(龍岡)에 출사(出仕)하였고, 이괄(李适)의 난(亂)에는 공주(公州)에서 인조대왕(仁祖大王)을 호위(扈衛)한 공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제수 받았다. 이들 삼부자의 문명(文名)이 드높아 세인(世人)들이 당(唐)의 소동파(蘇東波) 삼부자와 비견(比肩)하여 향리(鄕里)를 소리곡(蘇李谷)이라 이름하였고 문집(文集) 명우양세유고(溟雨兩世遺稿)가 세전(世傳)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해이씨는 전국에 2,4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영해이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이을년(李乙年) 1356년 문과(文科)에 정포은(鄭圃隱)과 함께 급제하여 태사감후(太史監候)를 거쳐 중현내부령(中顯內府令)에 올랐다.

조선시대 인물

이중원(李仲元) 1450년 진사에 올랐으며 145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이전손(李傳孫) 자는 조윤(祚胤)이고 호는 신은(莘隱). 1486년에 진사, 151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禮曹左郞) 흡곡현령(翕谷縣令)을 지냈다.

이상필(李尙馝) 자 문보(聞甫), 호 일희정(日希亭). 1606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올랐으며, 병자호란때 는 고을 사람들을 규합, 의병을 조직하여 공이 의병장에 추대되어 양근 지방에 출정(出征)하였다.

그 후 인제현감(麟蹄縣監)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자신의 호로 명명한 일희정(日希亭)을 지어 만년(晩年)을 소요(逍遙)하였다. 감찰공파(監察公派) 파조(派祖)이다.

이상암(李尙馣) 호 초우(蕉雨). 문장과 재예(才藝)가 뭇 사람들보다 뛰어나 1630년에 진사가 되었으 나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강호(江湖)에 마음을 붙여 후학을 가르쳐 인도하니 그 문하생 가운데 소, 대과에 입격(入格)한 사람이 여럿이었다.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派祖)이다.

이모(李模) 자 원례(元禮). 1651년 생원이 되었고, 율곡우계선생(栗谷牛溪先生)종사(從祀)와 신덕왕후 복릉소(神德王后復陵疏) 소두(疏頭)로 활약하였다.

이진석(李震錫) 자 극보(極保). 무과(武科)에 올라 3년 동안 궐내(闕內)를 지켰다.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에 이르렀다.

현대 인물

이승복(李承福) (1960~1968). 1968년 12월 9일 울진(蔚珍) 삼척(三陟) 무장공비 출현으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를 외치다가 순국(殉國)하였다. 1982년에 정부(政府)에서 이승복 생가(生家) 부근 3만평 부지에 이승복기념관(李承福紀念館)을 건립, 국민정신교육(國民精神敎育)의 장(場)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