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악이씨시조(安岳李氏),이진(李震),안악이씨조상인물,이잠(李潛)

작성일 : 2017-05-02 09:25 수정일 : 2018-07-30 10:43

시 조

안악이씨시조(安岳李氏 始祖) 이진(李 震)은 중국(中國) 농서(隴西) 사람으로 기원전 108년(한무제 원봉 3)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이 한(漢)에  공(不貢)하여 무제(武帝)가 무장(武裝)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왕검성(王儉城)을 토평(討平)할 때 부장(部將)으로 출전하여 공(功)을 세워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낙랑후(樂浪候)에 봉해지고 낙랑태수(樂浪太守)로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대명(大命)을 완수했다.

그 후 그의 증손(曾孫) 천보(天寶)는 한(漢)나라 선기사 대장군(善騎射大將軍)으로 흉노(匈奴) 토벌(討伐)에 공(功)을 세워 양산후(楊山候)로 봉해져서 낙랑 태수(樂浪太守)를 지냈으므로 양산(楊山) 이씨(李氏)로 칭관(稱貫)하였다.

그 뒤 낙랑(樂浪)이 망하자 후손들은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 등지로 이거(移居)하며 대(代)를 이어오다가 후손 극규(極奎 : 중시조)가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양산백(楊山伯)에 봉해지고 안악(安岳)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곳에서 정착(定着)하여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안악(安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해왔다.


본관의 유래

안악(安岳)은 황해도(黃海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양악군(楊岳郡)인데 고려(高麗) 초에 안악(安岳)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풍주(豊州)에 속하였다가 1106년(예종 1) 감무(監務)를, 1348년(충목왕 4)에는 승격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선조(宣祖) 때 현(縣)으로 강등하였으나 1608년(선조 41)에 안악군(安岳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인물

안악이씨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중시조 극규(極奎)의 10세손 위(魏)가 고려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양산백(楊山伯)에 봉해졌고, 후손 견(堅)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신 부(辛 富)와 함께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관(灌)의 아들 계을(桂乙)이 고려말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역임한 후 고려가 망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의 아들 신(晨 : 해명 양소)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한편 세종(世宗) 때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낸 구관(九寬)은 뒤에 벼슬이 예조 참판(禮曺參判)에 이르렀고 만년에 충북 괴산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功臣)에 오른 심(沁)이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졌고, 희순(希舜)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한 수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을 거쳐 호당(湖堂)에 들어가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禍)를 입었다.

임진왜란 때 옥천(沃川)에서 왜적을 격파했던 잠(潛)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다가 혈전(血戰) 끝에 장렬하게 순절했으며, 응순(應順)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올라 익흥군(益興君)에 봉해져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른 정립(挺立)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악이씨(安岳李氏)는 남한에 12,31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시되었다.


역대 인물-안악이씨조상인물

이창운(李昌運): 호(號)는 하운(霞雲),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한나라 무제(漢武帝)의 사위(부마:駙馬), 소제(昭帝)의 스승, 12세에 어정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태학(太學)․오경박사( 五經博士)를 지냈다.

이옥(李 沃): 시호(諡號)는 문익(文益). 한(漢)나라에서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이심(李 沁): 한나라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이천일(李天一): 한(漢)나라에서 요동후(遼東候)에 봉(封)해졌다.

이창록(李昌祿): 한나라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여, 흉노(匈奴) 토벌(討伐)에 큰 공(功)을 세웠다.

이혁(李 爀): 한나라의 무기상시(武騎常侍)로 있으면서 고구려(高句麗)에 들어와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에 태대로(太對盧)․좌보(左輔)에 오르고 군국사(軍國事)를 역임하였다.

이도원(李度元): 자(字)는 치상(致祥), 호(號)는 죽계(竹溪), 시호(諡號)는 문익(文益).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역임하고 양산후(楊山候)에 봉(封)해졌다. 후에 왕 조(王 調)의 난이 일어나자 유 헌(劉 憲)과 더불어 순절(殉節)하였다.

이직(李 稙): 호(號)는 매헌(梅軒),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효행(孝行)이 뛰어나 양산성(楊山城 : 지금의 안악) 동쪽에 효자각(孝子閣)이 세워졌다.

이직(李 稷): 고구려(高句麗) 때 수호사(修好使)로 한(漢)나라에 다녀온 후 태대로(太對盧)를 역임하였다.

이태흥(李泰興): 시호(諡號)는 문절(文節). 한나라 태자(太子)의 사부(師傅)를 지냈다.

이농(李 瓏):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아버지 고(稿)를 따라 서역(西域)에서 흉노토벌(匈奴討伐)에 공(功)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조명공주(朝明公主)를 배위(配位)로 맞아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이태봉(李泰峰):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때 현토 태수(玄菟太守) 공손도(公孫度)와 우병마사(右兵馬使) 이 전(李 專) 등과 함께 부산(富山)에 침입한 외적(外賊)을 토벌(討伐)한 공으로 황기대장군(黃騎大將軍)에 올랐다.

이양실(李養實): 자(字)는 진충(眞忠), 호(號)는 화산(和山),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신라(新羅) 내해왕(奈解王) 때 이벌찬(伊伐湌)․병마사(兵馬事)를 역임하였다.

이돈(李 旽): 자(字)는 휘매(暉梅), 호(號)는 죽천(竹川), 시호(諡號)는 충량(忠良)․신라(新羅) 첨해왕(沾解王) 때 우장군(右將軍)으로 백제군(百濟軍)이 괴곡(槐谷) 봉산성(烽山城)을 공격(攻擊) 할 때 적과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이기(李 杞): 신라(新羅) 첨해왕(沾解王) 때 수호화친사(修好和親使)로 고구려(高句麗)에 다녀왔으며 미추왕(味鄒王) 때는 진(晋)나라에 수호(修好)차 다녀왔다.

이혼(李 渾): 시호(諡號)는 충의(忠義). 신라(新羅) 내물왕(奈勿王) 때 백제(百濟)와 왜군(倭軍)이 합세하여 침공하자 고구려(高句麗)에 청원사(請援使)로 가서 보기(步騎) 오만(五萬)의 구원병을 들여와 백제 왜군연합군(百濟倭軍聯合軍)을 물리치게 한 공(功)으로 서불한(舒弗邯)에 증직(贈職)되었다.

이봉(李 篈): 당고조(唐高祖) 이 연(李 淵)의 초청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수학(修學)하고 그 곳에서 전객사(典客事)에 올랐으며 환국(還國) 길에 진평왕(眞平王)의 책봉칭호(冊封稱號)인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이라 봉수(奉受)하여왔다.

이대흠(李大欽): 신라(新羅) 진덕여왕(眞德女王) 때 당나라에 상주(常駐)한 신라 사신사(新羅使臣使)가 되었다.

이용조(李龍祚): 자(字)는 치운(致雲). 양악군(楊岳郡) 태수(太守) 도독(都督)을 역임, 양산후(楊山侯)에 봉(封)해졌다.

이극규(李極奎): 자(字)는 월화(月華), 호(號)는 창평(昌平), 시호(諡號)는 충의(忠義). 동생 극서(極瑞)와 함께 당나라에서 유학(留學)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올랐고, 귀국(歸國)하여 양악 태수(楊岳太守)를 역임하였다. 후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開國功 臣)에 책록(策錄)되고 양산후(楊山侯)에 봉(封)해 졌으며 태사(太師)에 올랐다.

이무(李 茂): 자(字)는 춘경(春卿),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929년(태조 10) 상장군(上將軍)으로 운주(運州 : 홍성) ․강주(康州 : 진주)에서 후백제군과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창의군(昌義君)에 봉(封)해진 후 952년(광종 3)에 양산백에 봉해졌다.

이홍(李 泓): 자(字)는 여택(汝澤), 호(號)는 귀암(龜巖), 시호(諡號)는 문량(文良). 955년(광종 6) 사신(使臣)으로 후주(後周)에 가서 검교 호부 좌랑(檢校戶部佐郞)의 관직(官職)을 받고 돌아온 후 광평성(廣評省)․지성사(知省事)에 올랐다.

이위(李 魏): 자(字)는 동삼(桐三), 호(號)는 장평(莊平), 시호(諡號)는 정렬(貞烈). 문하시중(門下侍中)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양산백(楊山伯)에 봉(封)해졌다.

이성흥(李聖興): 자(字)는 학군(學群), 호(號)는 문곡(文谷), 시호(諡號)는 문의(文懿). 병부 상서령(兵部尙書領)을 역임하고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며 양산백(楊山伯)에 봉(封)해졌다.

이종기(李宗基): 자(字)는 양보(良寶), 호(號)는 금사(金沙), 시호(諡號)는 헌충(憲忠). 고려조(高麗朝)에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역임한 후 楊山伯)에 봉(封)해졌다.

이함(李 諴): 자(字)는 장평(章平), 호(號)는 금계(錦溪),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추충정란정원공신(推忠靖亂定遠功臣)으로 책록되고 양산백(楊山伯)에 봉(封)해졌으며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를 받고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진(李 晋): 자(字)는 여가(汝嘉), 호(號)는 용문(龍門), 시호(諡號)는 양정(良靖). 고려조(高麗朝)에 중대광(重大匡)․판전법사사(判典法司事)에 올랐다.

이견(李 堅): 자(字)는 윤석(胤錫). 고려(高麗)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이를 토벌(討伐)하려고 함종(咸從)에서 분전(奮戰)하다 개성 부사(開城府事) 신 부(辛 富)와 더불어 순절(殉節)하였다.

이계을(李桂乙): 자(字)는 천서(天叙), 호(號)는 단계(丹桂)․사고(師古). 고려조(高麗朝)에서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지냈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송도(松都) 병적산(屛跡山) 여릉(麗陵) 동록(東麓)에 무인묘(無人墓)를 만들고 안악(安岳)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순 절(殉節)하여 고려(高麗) 중신(重臣)의 절개(節槪)를 지켰다.

이시명(李時命): 자(字)는 경부(敬夫) 호(號)는 송호(松湖)․보림(寶林). 고려조(高麗朝)에 중대광(重大匡)․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지냈다.

이정우(李挺雨): 자(字)는 운서(雲瑞). 고려조(高麗朝)에 광록대부(光祿大夫)․전객시(典客寺) 전객령사(典客令事)를 지냈다.

이정림(李挺林): 자(字)는 운민(雲珉).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고려(高麗)의 중신(重臣)들을 유배(流配) 중 해남(海南) 앞 바다에서 이계정(李桂丁)․이계인(李桂仁) ․이계의(李桂義) 등과 더불어 수장(水葬)당하여 순절(殉節)하였다.

이규창(李奎昌): 자(字)는 의건(義健), 호(號)는 서파(西波), 시호(諡號)는 충절(忠節). 고려조(高麗朝)에 전객시령(典客시令)을 역임하였고, 고려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후에 조선(朝鮮) 세종(世宗)은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좌의정(左議政)에 추증, 안악군(安岳君)에 봉(封)하였으며 정려(旌閭)를 내렸다.

이양소(李陽昭): 호(號)는 금은(琴隱), 시호(諡號)는 청화(靑華). 고려가 망하자 72현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개(節槪)를 지켰다. 후에 조선 세종(朝鮮世宗)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안악군(安岳君)에 봉(封)하였다.

이영진(李永進): 자(字)는 중원(重遠), 호(號)는 수월당(水月堂), 시호(諡號)는 문렬(文烈). 고려조(高麗朝)에 밀직사 지원사(密直司知院事)를 역임하고 후에 이방원(李芳遠)의 일당에 의하여 벽란도(碧蘭渡)에서 강화도(江華島)로 유배(流配) 중 강화도 앞 바다에 수장(水葬)되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고 안악군(安岳君)에 봉(封)하여 정려(旌閭)를 세웠다.

이연수(李然壽): 자(字)는 도영(道永).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두류산하(頭流山下) 배록동(排祿洞)에 은거(隱居) 중인 고려 중신(高麗重臣)들을 불을 질러 학살(虐殺)할 때 순절(殉節)하였다.

이조(李 鋽): 일명(一名) 몽득(夢得). 고려말(高麗末) 홍산(鴻山 : 부여)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1380년(우왕 6) 남원 운봉의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대파(大破)하는데 공(功)을 세우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開國)하자 좌첨도지휘사(左僉都指揮使)의 관직을 물러나 평안도(平安道) 숙천(肅川) 송천리(松川里)에 은거(隱居)하였다.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사(不仕)하였다.

이구관(李九寬):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배수(拜受)하였고,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예(李 藝):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선친의 충절(忠節)에 의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학성군(鶴城君)에 봉(封)해졌다.

이견(李 堅): 고려 중신(高麗重臣) 영진의 아들.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고려 중신(高麗重臣)인 아버지 이영진의 충절에 의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안악군(安岳君)에 봉(封)하여졌다.

이호(李 灝):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평(李 枰): 자(字)는 평중(枰中).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라 청주 목사(淸州牧使)․강릉 부사(江陵府使)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라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러 안악군(安岳君)에 봉(封)해졌다.

이희순(李希舜): 자(字)는 사성(師聖), 호(號)는 강폐(岡閉), 시호(諡號)는 효간(孝簡).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하고 홍문관(弘文舘) 제학(提學)을 거쳐 호당(湖堂)에 들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賜死) 당했다.

이면: 조선조(朝鮮朝)에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거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이개(李 愷): 초명(初名)은 중형(中亨), 자(字)는 낙현(樂賢), 호(號)는 유부(儒夫), 시호(諡號)는 정혜(貞惠). 1441년(세종 23)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文科)에 올라 회원(檜原 : 창원) 부사(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양원군(楊源君)에 봉(封)해졌다.

이심(李 深): 연산군(燕山君)을 폐출(廢黜)하고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추대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이룬 공(功)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되고, 하원군(河原君)에 봉(封)해졌으나 이 과(李 顆)의 난(亂)에 연루(連累)되어 옥사(獄死) 하였다.

이잠(李 潛):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휘하(麾下)에서 10여일간 혈전(血戰) 끝에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인민(李仁民): 자(字)는 군오(君吾), 호(號)는 매산(梅山), 시호(諡號)는 무숙(武肅).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충주(忠州)․괴산(槐山) 등지에서 창의(倡義)하여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참전(參戰), 진주성(晋州城)이 함락(陷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投身) 하였으며, 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운장(李雲長): 자(字)는 희서(希瑞), 호(號)는 죽헌(竹軒).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령(宜寧) 정암진(鼎巖津)에서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이응순(李應順): 자(字)는 선수(善受).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갈 때 호종(扈從)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 오위도총광(五衛都摠管)에 올라 갑진회맹록(甲辰會盟錄)에 등재(謄載)되고 익흥군(益興君)에 봉(封)해졌다.

이득종(李得宗):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으로 전공(戰功)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정립(李挺立): 호(號)는 남은제(南隱濟).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군자감(軍資監) 부정(副正)으로 충무공(忠武公) 휘하(麾下)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병조(兵曹)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이수(李耳壽): 자(字)는 여담(汝聃), 호(號)는 무우당(無憂堂).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노환(老患)의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 중 왜적(倭賊)을 만나 몸에 칼을 맞고 쓰러지면서도 어머님을 해치지 않게 몸으로 감싸며 왜적에게 사정을 하니 왜적도 효행에 감탄(感歎)하고 살려 주었고, 후일 이 사실이 밝혀지자 효행(孝行)이 가상(嘉尙)하다 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하였다.

이진종(李振宗):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倭賊)이 그의 부친(父親)을 살해하자 왜적의 칼을 탈취(奪取)하여 수명의 왜적을 죽이고 자결하자 조정에서 효행(孝行)을 가상히 여겨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추증(追贈)하였다.

이정원(李挺元): 조선조(朝鮮朝)에 정원공신(定運功臣)으로 일양부원군 (一良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이민상(李敏祥): 조선 인조(仁祖) 때 봉림대군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병조(兵曹)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서진(李瑞珍):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세재(李世裁): 자(字)는 군배(君培), 호(號)는 초은(樵隱). 조선조(朝鮮朝)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공조(工曹)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이세원(李世元): 자(字)는 군초(君初), 호(號)는 어은(漁隱). 조선조(朝鮮朝)에 병조(兵曹)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이몽핵(李夢翮): 자(字)는 운기(雲基). 조선조(朝鮮朝)에 형조(刑曹)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인득(李仁得): 시호(諡號)는 은강(隱岡).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을 역임하였다.

이재형(李再馨): 자(字)는 춘장(春章), 호(號)는 가취헌(佳趣軒). 조선 때 공조(工曹) 참판(參判)을 역임하였고 「팔경음시집(八景吟詩集)」을 남겼다.

이효종(李孝宗): 조선조(朝鮮朝)에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역임하였다.

이현(李 礥): 자(字)는 중숙(重叔), 호(號)는 동곽(東郭). 조선조(朝鮮朝)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재령 군수(載寧郡守)를 거쳐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올랐으며「부상록 (扶桑錄:일본기행문)」등 12권의 문집(文集)을 남겼다.

이수무(李秀茂): 자(字)는 운경(雲卿). 조선 영조(英祖)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을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진위장군(振威將軍)에 올랐다.

이만빈(李萬彬): 조선조(朝鮮朝)에 무신란(戊申亂 : 이인좌란)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이하윤(李夏潤): 자(字)는 자홍(自洪).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이경번(李景蕃): 자(字)는 시부(時孚). 조선에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이종진(李宗珍): 조선조에 무산 도호부사(茂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