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부평이씨시조(富平李氏),이희목(李希穆),부평이씨조상인물,이세화(李世華)

작성일 : 2017-05-01 14:34 수정일 : 2018-07-16 15:4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부평이씨 시조(富平李氏 始祖) 이희목(李希穆)은 고려에서 삼중대광 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올랐고, 그의 증손(曾孫) 정공(靖恭)이 1062년(문종 16) 시예부외랑(侍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삼례도(三禮圖」․「손경자서(孫卿子書)」를 신조(新彫)하여 나라에서 포상을 받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치사(致仕)하여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부평(富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부평(富平)은 경기도(京畿道) 중서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 불리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장제군(長堤郡)으로 개칭하여 그 관할 하에 4개 현(顯)을 두었다. 고려 성종 때에 수주(樹州), 문종 때에 안남(安南) 또는 부평(富平)이라 불렀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며, 1914년 군부(郡府) 폐합령에 따라 넓은 지역이 인천부(仁川府)에 속하게 되었고, 나머지 지역과 주변 일부지역을 합쳐서 부천군으로 발족하였다. 그후 인천과 서울의 팽창에 따라 주읍(主邑)인 부평이 인천에, 9개 리(里)가 서울에 편입되어 소사(素砂) 1읍과 9면을 관할 하에 두었다가 1973년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9면이 옹진군․시흥군․김포군에 이관되고,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부평이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시조의 증손(曾孫) 정공(靖恭)은 아들 3형제를 두어 맏아들 도(璹)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차남 위(瑋)는 고려 선종(宣宗) 때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부사(判上書部事)에 오르고 계양군(桂陽郡)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뒤에 광국공신(光國功臣)․진정공신(鎭定功臣)의 호를 받아 계양공(桂陽公)에 봉해졌으며, 정공(靖恭)의 셋째 아들인 순(珣)은 고려 때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라, 뒤에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냈다.

정공(靖恭)의 16세손인 이세화(世華)는 조선(朝鮮) 때 문과에 올라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겸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공조․형조․병조․이조 등의 판서(判書)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부평 이씨(富平李氏)의 가문을 빛내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좌승지(左承旨) 세유(世維)의 아들인 정제(廷濟)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사간(司諫)으로 이 유(李 濡)․김창집(金昌集) 등 중신(重臣)들을 탄핵하다가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가문(家門)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평이씨(富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7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부평이씨조상인물

이정공(李靖恭) ?~1099(숙종 4)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예부외랑(試禮部外郞)․시어사(侍御史)․한림학사(翰林學士)․예부 상서(禮部尙書)․병부 상서(兵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수국사(修國史)를 거쳐 1083년(문종 37)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 中書門下平章事)에 오르고, 1086년(선종 3)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치사(致仕)했다.

이위(李 瑋) 1049(문종 3)~1133(인종 11) 자(字)는 직청(直淸), 시호(諡號)는 장숙(莊肅). 문하시중(門下侍中) 정공(靖恭)의 아들, 참지정사(參知政事) 도(璹)의 아우, 문과(文科)에 급제, 선종(宣宗) 때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으며, 숙종(肅宗) 때 서북면 해영병마사(西北面行營兵馬使)가 되어 여진(女眞)정벌을 종군했다.

1109년(예종 4) 추밀원사(樞密院使)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어 문하시랑종중서문하평장사가 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116년 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에 올라, 태부․계양군 개국백(太傅桂陽郡開國伯)에 봉해지고 1122년(인종 즉위) 계양공(桂陽公)에 봉해졌으며 1127년 중서령(中書令)으로 진정공신(鎭定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순(李 珣) 시호(詩號)는 평간(平簡). 일찍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1362년(공민왕 11) 밀직사사(密直司使)로서 서북면 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가 되어 홍건적(紅巾賊)을 방어했다. 다음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使)로 양광도 도순문사(陽廣道都巡問使)가 되어 홍 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그후 서북변 고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평리(評理) 등을 역임하고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

이상재(李尙載) 1607(선조 40)~1636(인조 14) 자(字)는 문거(文擧), 군수(郡守) 덕일(德一)의 아들. 163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곧 저작(著作)에 승진하고 1636년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이 되었다.

이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정세규(鄭世規)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정하여 용인(龍仁)에서 적의 협공을 당해 전사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교리(敎理)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세화(李世華) 1630(인조 8)~1701(숙종 27) 자(字)는 군실(君實), 호(號)는 쌍백당(雙栢堂)․칠정(七井),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이재(李載)의 아들. 희재(熙載)에게 입양(入養). 1657년(효종 8)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장령(掌令)을 거쳐 황해도․평안도․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사직, 고향에 돌아갔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대사간(大司諫)이 기용되고, 이듬해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겸 지경연사(知經筵事)․세자 빈객(世子賓客)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공조․형조․병조․이조 등의 판서(判書)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파주(把住)와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정제(李廷濟) 1670(현종 11)~1737(영조 13) 자(字)는 중협(中協), 호(號)는 죽호(竹湖), 시호(諡號)는 효정(孝靖). 좌승지(左承旨) 세유(世維)의 아들. 1699년(숙종 2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숙종 때 정언(正言)․지평(持平)․사간(司諫) 등을 거쳐 1721년(경종 1) 홍주 목사(洪州牧師)를 지내고 1723년 우승지(右承旨)로 노론 축출에 가담, 노론의 집권으로 삭직(削職)되었다. 1728년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형조․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헌경(李軒卿) 1851(청종 2)~? 자(字)는 용칠(容七), 현감(縣監) 연광(演光)의 아들. 연삼(演參)에게 입양(入養).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내외직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曺參判)을 거쳐 상의원사장(尙衣院司長)이 되었다.

이듬해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시강원 부첨사(侍講院副詹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1년(광무 5)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장례원 소경(掌隷院少卿) 등을 지내고, 1904년(광부 8)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