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덕수이씨(德水李氏),덕수이씨시조,이돈수(李敦守),덕수이씨유래,덕수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30 16:57 수정일 : 2018-08-06 12:00

덕수이씨시조 및 덕수이씨유래(본관)

수이씨(德水李氏)의 시조(始祖) 이돈수(李敦守)는 고려(高麗) 신호위 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양준(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 보승장군(興威衛保勝將軍)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에 추증 되었다.

그 후 양준의 아들 소()가 고려 고종(高宗) 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와 지삼사사(知三司事)․세자내직랑(世子內直郞) 등을 역임하였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군장산(開豊郡中面德水里軍壯山) 아래에 있는 그의 묘()는 공자(孔子)를 낳게 한 이산(尼山)을 닮았다는 여니산(如尼山)을 주산(主山)으로, 동쪽에 군자암(君子岩), 북쪽에 성인암(聖人岩), 서쪽에 대장암(大將岩), 남쪽에 성현암(聖賢岩)을 거느린 야자형(也字形)의 명당(名堂)으로 소문이 난 명묘(名墓)이다.

소의 아들 형제 중 장자(長子)인 윤온(允蒕)이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워 선충경절공신(宣忠勁節功臣)에 책록 되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추증되어,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받들고 누대로 세거(世居)해 온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명현(名賢)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말에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에 올라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던 천선(千善 : 윤온의 아들)이 뛰어났고, 도사(都事) 윤번(允蕃)의 증손(曾孫) (: 수사재시사 공진의 아들)이 유명했다.

1419(세종 1) 문과에 급제했던 변은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내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변은 내 평생 남을 속인 일이 없다.” 고 떳떳하게 자부했다. 그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서 매양 인재를 뽑는데 판서(判書)를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서로간에 조화가 되지 않았다. 어느날 외관(外官) 한 사람이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선사한 것을 받지 않았으나 판서는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듣고 퇴청하였다. 마침 그 날 판서가 그 고기로써 맛있는 성찬을 차려 변을 대접하자 그는 젓가락을 들고, “이것이 이른바 얼얼의 고기입니까하며 힐책하자 판서가 깊이 원혐(怨嫌)을 가졌다고 한다.

제국(齊國)의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였는데, 그의 형은 재상이었다. 중자가 어머니를 뵈러 형의 집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거위를 선사했는데 형이 받았다. 중자가 형에게 얼얼(거위 우는 소리)하는 것을 왜 받으시오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의 어머니가 그 거위로 국을 끓였다. 중자는 그것을 모르고 먹는데 형이 들어오더니 이것은 <얼얼>의 고기로구나하니 중자는 씹던 고기를 토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변은 이 고사를 인용하여 판서를 비꼬았던 것이다.

변의 손자 거()1480(선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과천(果川) 등지에서 탐관오리를 다스렸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내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 부정이 있으면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掌令)으로 속칭되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인범(仁範)의 후대에서는 그의 현손(玄孫)인 홍산 현감(鴻山縣監) 의석(宜碩)의 증손 율곡(栗谷) ()가 빼어났다.

1536(중종 31) 아버지인 찰방(察訪) 원수(元秀)와 어머니 신부인(申夫人 : 기묘명현 신명화의 딸)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어머니 신씨가 꿈을 꾸었는데, 흑룡(黑龍)이 바다로부터 솟아 올라와 침실로 날아 들어왔었기 때문에 어릴 대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다. 율곡(栗谷)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하며, 겨우 세살 때 외조모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 같으냐하니, “붉은 가죽 주머니 속에 부서진 구슬을 넣었도다라고 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주야로 울부짖던 율곡은 어느 날 우연히 불가(佛家)의 글을 보고 그 사생설(死生設)에 깊이 느낀 바 있었고, 또 그 학문의 간편청정(簡便淸淨)함을 기뻐하여 세상 일을 버릴 생각을 하였다. 열아홉 살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여러 벗들에게 글을 보내어 고별하고, 이내 절()에 살면서 계(: 5계와 250계가 있는데 이를 지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함)와 정(: 마음에 동요됨이 없고 안정된 것)을 굳게 하여 침식까지도 잊어 버렸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불교가 이치에 가까운 듯 하면서 진()을 혼란하게 한 곳이 있음을 엿보고, 드디어 그 학문을 모두 버리고 유학(儒學)에 전심했다.

22세 때 성주 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이듬해 처가에 갔다오는 길에 도산(陶山)에 있는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을 찾아 갔다와서 그 해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천도책(天道策)>이란 유명한 논문으로 장원하고 초시(初試)․복시(覆試)에 아울러 아홉차례나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웠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초임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副校理)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며 「명종실록(明宗實錄)」에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율곡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 분당의 조정을 위하여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선(朝鮮)의 유학계(儒學界)의 거봉(巨峰) 퇴계 이 황(李 滉)과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자로, 장구(章句)의 분석적인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통찰함을 학문 연구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 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해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근본 사상으로 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여, 이 시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또한 율곡은 학문을 민생 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모두 능했다.

율곡의 아우 옥산(玉山) ()도 어머니 신씨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서()․화()․금()에 모두 능하여 <사절(四節)>로 불리웠다.

지돈령 부사(知敦寧府事) 명신(明晨)의 손자 의무(宜茂)는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으로「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녹피(鹿皮)를 하사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명성을 떨쳤는데, 맏아들 권()은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했고, 둘째 기()는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셋째 행()은 좌의정을, 넷째 령()은 군수(郡守), 막내 미()는 대사헌을 지냈다.

키가 10척이나 되고, 얼굴이 모나고 수염이 많았던 행(), 1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문형(文衡)에 올라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평생에 다섯 번을 귀양갔다가 유배지인 함종(咸從)에서 죽은 기구한 일생이었다.

그가 생전에 남산(南山) 아래에 있는 청학동(靑鶴洞)에 서당을 지었는데, ()나라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 등이 모두 시()를 지어 보냈고, 스스로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고 호()를 지었다. 길을 끼고 좌우에 소나무와 전나무․복숭아․버드나무를 심었고, 공무에서 나오면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를 한가하게 하여 마치 야인과 같았다.

어느 날 해가 저물었는데 녹사가 보고할 일이 있어 찾아가 보니, 한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떨어진 옷을 입고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동구 문을 나오는 지라, 녹사가 말을 타고 지나 가다가 정승 계시오하고 물었다. 이에 행()이 천천히 돌아다 보면서 무슨 일이냐, 내 여기 와 있다하니 녹사가 깜짝 놀라 말 위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행의 증손 안인(安仁)은 임진왜란 후 면천(沔川)에 초당을 짓고 끝내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행의 현손(玄孫) (: 안성의 아들)은 광해군(光海君)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조좌랑(吏曹佐郞)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돌아와 대사헌(大司憲)과 형․이․예조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특히 그는 당대의 이름 난 학자로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으며, 한문학(漢文學)에 정통하여 <한문사대가(寒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또 다른 인맥으로는 가문에 쟁쟁한 무맥(武脈)을 형성한 충무공(忠武公) 순신(舜臣)을 들 수 있다.

1545(인종 1) 한양(漢陽)에서 정()의 셋째 아들로 출생한 순신(舜臣)1579(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이르렀고,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특히 순신은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勇壯)으로서 임진왜란 때 싸움마다 승리를 했으며, 적병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全羅道)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무인(武人)으로서 글씨에도 능했던 그는 후손들에게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게 되면 국가에 죽음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 것도 족하다. 만약 권귀에 아첨하여 한 때의 영화를 도적질 한다면 나는 심히 유감스러울 것이다.(大丈夫生用則效死 不用則耕於野足矣 若取楣權貴以竊)>라는 유훈(遺訓)을 남겨 대대로 지키도록 당부했다.

충무공 순시의 조카 완()은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아군의 사기를 위하여 시체를 배 안에 숨겨두고 독전(督戰)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올라 이 괄(李 适)의 난군을 토평하여 의주부윤(儀註府尹)이 되었다.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의주(義州)에 쳐들어온 청병(淸兵)과 접전하다가 손가락에 적의 화살을 맞아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하며 개탄하고는 탄약을 쌓은 위에 종제인 신()과 함께 누워 불을 질러 폭사했다.

순신의 5대손으로 1702(숙종 28) 무과에 급제했던 봉상(鳳祥)은 형조 참판(刑曹參判)․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다가 권신(權臣) 이광좌(李光左)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좌천되어 영조(英祖) 때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난군에게 피살되었다.

장신에는 길고 장엄한 수염과 호탕한 음성으로 주위를 압도하였던 그의 죽음에 어머니 정씨(鄭氏)내 아들이 선조의 유훈에 어김없이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통곡할 필요가 없다하고는 울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외 한성판윤(漢城判尹) 광하(光夏)의 아들 집이 영조(英祖) 때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佐議政)이 되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경종실록(景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군수(郡守) 선연(善淵)의 아들로 선원(善源)에게 입양했던 덕흠(德欽)은 윤 증(尹 拯)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만년에 성력(星歷)․상수(象數)․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명망을 떨쳤다.

1772(영조 48)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佐議政)에 올랐던 은(병조 판서 주진의 아들)은 왕명(王命)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5천 여 권을 구득하고 돌아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의 아들 병모(秉模)는 순조(純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춘영(春英)이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안승우(安承禹)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단양(丹陽)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했고, 류인석(柳仁錫)의 막하에서 중군(中軍)이 되어 조령(凋零)․달천(撻川)․안보(安保) 등지에서 일본 연합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의 아들 세영(世榮)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했으며, 민화(敏華)와 일영(鎰永)도 항일투쟁과 방공전(防共戰)에 혁혁한 훈공을 세워 명문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덕수이씨(德水李氏)는 남한(南韓)58,5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덕수이씨조상인물

이천선(李天善) 시호(諡號)는 양간(良簡), 윤온(允蒕)의 아들.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를 역임하고, 1356(공민왕 5) 기 철(奇 轍)․권 겸(權 謙) 등이 주살(誅殺)된 사실을 원나라에 보고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수사공․주국(金紫光祿大夫守司空株國)이 되어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졌으며, 정조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각(李 恪) 1374(공민왕 23)~1446(세종 28) 시호(諡號)는 양정(襄靖). 1402년(태종 2)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외직을 거쳐 1429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2년 강계 절제사(江界節制使)가 되어 최윤덕(崔閏德)을 따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여 공을 세우고, 1434년 평안도도절제사로 전임했으나 1436년 야인 침범을 막지 못해서 결성(結城)에 유배되었다. 1438(세종 20) 다시 기용되어 경상좌도 처치사(慶尙 左道處置使), 1443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이공진(李公晋) 조선 떄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를 지냈다.

이변(李 邊) 1391(공양왕 3)~1473(성종 4) 시호(諡號)는 정정(貞靖), 공진(公晋)의 아들. 1419년(세종 1)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 박사(承文阮博士)가 되고 한훈(漢訓)에 정통하여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56년(세조 2) 대제학(大提學), 1461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고, 1467년 궤장 (几杖)을 하사받았으며 1472년(성종 3)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의무(李宜茂) 1449(세종 31)1507(중종 2) 자(字)는 형지(馨之), 호(號)는 연헌(蓮軒),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명신(明晨)의 손자, 추(抽)의 아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 되고, 1487년 전적(典籍)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녹 피(鹿皮)를 하사 받았다. 그후 교리(校理)․지제교(知製敎)를 지냈고, 연산군(燕山君) 초 사간(司諫)․집의(執義)․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이거(李 琚) ?1502(연산군 8) 자(字)는 자미(子美), 대제학 변(邊)의 손자. 충무공 순신(舜臣)의 증조부.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설경(設經)이 되었고, 1484년 암행어사로 과천(果川)에서 오리(汚吏)를 잡아 올렸다. 그후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장악원정(掌樂院正)․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등을 거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1497년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이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 부정이 있으면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이행(李 荇) ()는 택지(擇之), ()는 용재(容齋)․청학도인(靑鶴道人)․어택어수(漁澤漁叟),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1495(연산군 1)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검열(檢閱)․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1519(중종 14)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1527(중종 22)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1539(중종 34) 여지승람(輿地勝覽) 수찬당상(修撰堂上)이 되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찬진(撰進) 했다.

이함(李 菡) ()는 자실(子實). 조선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해풍군(海豊君)에 봉해졌다.

이빈(李 頻) ()는 세형(世亨). 1502(연산군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 올랐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유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석방되어 복관(復官)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514(중종 9) 부응교(副應敎), 이듬해 응교 (應敎)에 승진, 함경도 경차관을 겸임하여 변방의 국방상태와 민정을 사찰했다. 1518년 삭주 부사(朔州府使),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조광조(趙光祖)의 축출과 형량과(賢良科)의 폐지에 앞장을 섰다. 이어 부제학(副提學)에 전직, 6개조의 시국 대책문을 올려 국정에 반 영케 했다.

이심(李 深) ()는 국향(國香).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역임했으며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하원군에 봉해졌다.

이순형(李純亨) 조선 때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했다.

이치(李 致) ()는 가원(可遠), ()는 매서(梅墅). 1540(중종 35)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이르렀다.

이기(李 芑) 1476(성종 7)~1522(명종 7) 자(字)는 문중(文仲), 호(號)는 경재(敬齋), 사간(司諫) 의무(宜茂)의 아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강진(康津)에 유배, 1537년 김안로가 제거 되자 풀려 나와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침범을 막았다.

1545년(명종 즉위)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겸직, 이때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으로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1549년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1551년 중풍으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직했다.

이미(李 微) ()는 자패(子佩), ()는 산북(山北). 조선조에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했다.

이원록(李元祿) 1514(중종 9)~1574(선조 7) 자(字)는 정서(廷瑞),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행(荇)의 아들. 1541년 문과(文科)에 급제, 1544년 수찬(修撰)․정언(正言)․지평(持平)․교리(敎理) 등을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재직중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사림(士林)이 화를 입자, 권신이던 숙부 이 기의 횡포를 적극 말려 이 황(李 滉) 등 많은 선비들을 구해 주어 유림(儒林)의 신망이 높았다. 1569년(선조 2) 영흥 부사(永興府使)․사인(舍人)․판교(判校)․공조 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병으로 사퇴했다.

이사성(李師聖) 1525(중종 20)~1571(선조 4) 자(字)는 성지(誠之), 헌남(獻納) 치(致)의 아들. 1548년(명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1550년 아버지가 옥사(獄事)에 연루, 처형되자 그 영향으로 출세의 길이 막혀 여러 현령(縣令)을 거쳐 사옹원정(司饔院正)에 그쳤다.

이인(李 訒) ()는 경민(景敏).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이이(李 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아명은 현룡(見龍), 자(字)는 숙헌(叔獻), 호(號)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찰방(察訪)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강릉(江陵) 출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儒學)에 전심하여 23세때 이 황(李 滉)을 찾아가 만났다.

1564(명종 19) 생원시(生員試)․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초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568(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副敎理)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했다.

그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 율곡(栗谷)과 석담(石潭)에서 학문연구에 전심하다가 1581년 다시 불려 대사헌․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의 판서(判書), 우참찬(右參贊)을 역임, 1583년 당쟁(黨爭)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같은 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등용,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 고 죽었다.

조선 유학계에 이 황(李 滉)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로 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說)을 근본사상으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성(養成)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조자앙(趙子昻)의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유중(李有中) ()는 시가(時可), 조선에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우(李 瑀) 1542(중종 37)1609(광해군 1) 자(字)는 계헌(季獻), 호(號)는 옥산(玉山)․죽와(竹窩),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원수(元秀)의 아들, 율곡(栗谷) 이(珥)의 아우. 1567년(명종 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그후 빙고 별좌(氷庫別坐)로 등용,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비안 현감(比安縣監)․감찰(監察)․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 괴산(槐山)․고부(古阜)의 군수를 거쳐 1609 년(광해군 1)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어머니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時)․서(書)․화․금(琴)에 모두 능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리었으며,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 선산(善山)의 무동서원(茂洞書院), 비안의 귀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순신(李舜臣) 1545(인종 1)~1598(선조 31) 자(字)는 여해(汝諧), 시호(諡號)는 충무(忠武), 병조 참의(兵曹參議) 거(据)의 증손, 정(貞)의 아들. 한양 출신. 1579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1591년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 : 여수)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에서 승전, 이어 한산도(閑山島)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최초의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으나, 1597년 원 균(元均)의 모함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鳴梁) 해전을 거쳐 노량(露梁) 해전 중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勇將)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고, 곡창 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탱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時調)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追封),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 1613(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충무(忠武)의 충렬사(忠烈祠), 순천(順天)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이광(李 洸) 1541(중종 36)~1607(선조 40) 자(字)는 사무(士武), 호(號)는 우계(雨溪), 좌의정 행(荇)의 손자, 원상(元祥)의 아들. 1574년(선조 7) 문과에 급제, 1590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이통(李 通) 1556(명종 11)~1620(광해군 12) 자(字)는 천구(天衢), 재종형(再從兄)인 이 이(李 珥)의 문인. 1584년(선조 1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에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이 되고, 고산 현감(高山縣監)․흡곡 현령․평창 군수(平昌郡守)․순천 군수(順川郡守) 등을 역임했다.

이분(李 芬) 1566(명종 21)~1619(광해군 11) 자(字)는 형보(馨甫), 호(號)는 묵헌(黙軒), 의신(義臣)의 아들. 아산(牙山) 출신. 정 구(鄭 逑)의 문인. 임진왜란 때 숙부인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문서(文書)를 관장하고,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09년(광해군 1)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내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선조 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널리 성현(聖賢)의 글을 탐독한 외에 악률(樂律)․산수(算數)에도 밝았다.

이회(李 薈) 1567(명종 22)~? 충무공(忠武公) 순신(舜臣)의 맏아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노량(露梁) 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음보(蔭補)로 임실군수(任實郡守)에 이르러 선정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후 첨정(僉正)에 이르렀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이경절(李景節) 1571(선조 4)~1640(인조 18) 자(字)는 길보(吉甫), 호(號)는 성재(省齋), 우(瑀)의 아들, 이(珥)의 조카. 1606년(선조 39)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 정랑(兵曹正郞)․교리(校理) 등을 역임, 우승지(右承旨)에 승진했다가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뒤에 혼란한 민정을 수습했다. 서예(書 藝)에도 뛰어났다.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자(字)는 자민(子敏), 호(號)는 동악(東岳), 시호(諡號)는 문혜(文惠), 형(泂)의 아들. 필(珌)에게 입양. 1599년(선조 32) 문과에 급제,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601년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지내고, 이해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다시 여러 관직을 거쳐 1617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오르고,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사직, 은퇴했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등용,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오르고,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 때 방관했다는 3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부처(付處)되었다.

1628(인조 6) 풀려 나와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에 복직, 형조참판(刑曹參判)․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존(追尊)을 허락받아 원종(元宗)이라는 시호를 받고 돌아와 그 공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했고, 죽은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선조 때의 시인 권 필과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서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면천(沔川)의 향사 (鄕祠)와 담양의 귀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완(李 莞) 1579(선조 12)~1627(인조 5) 자(字)는 열보(悅甫), 시호(諡號)는 강민(剛愍), 충무공 순신(舜臣)의 조카. 1592년(선조 25) 임진오란 때 이순신의 휘하에 종군하여 1598년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는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독전(督戰)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599년 무과에 급제, 평양 중군(平壤中軍)을 거쳐 1623(인조 1)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올라 이듬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토평하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병기고에 불을 지른 후 뛰어들어 분사(焚死)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1706(숙종 32) 아산(牙山)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이경용(李景容) 1579(선조 12)~1635(인조 13) 자(字)는 여복(汝復), 호(號)는 두곡(杜谷)․계곡(桂谷), 군수 통(通)의 아들. 1618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子)가 되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주서(注書)가 되어 반정 초기의 왕명 출납사무를 능숙히 처리, 이듬해 정언(正言)․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을 역임했다.

이식(李 植) 1584(선조 17)~1642(인조 25) 자(字)는 여고(汝固), 호(號)는 택당(澤堂),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좌의정 행(荇)의 현손(玄孫), 안성(安性)의 아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617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은퇴,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 조 좌랑(吏曹佐郞)에 등용, 다시 여러 관직을 거쳐 1638년 대제학․예조와 이조의 참판을 지내고 1642년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한다 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義州)에 구치(拘置)되었으나 탈출해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46(인조 24) 관직이 삭탈(削奪)되었다.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고 특히 한문학(漢文學)에 정통하여 한무 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686(숙종 12) 영의정에 추증(追贈), 여주(驪州)의 기천사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이경헌(李景憲) 1585(선조 18)1651(효종 2) 자(字)는 여사(汝思), 호(號)는 지전(芝田), 군수(郡守) 통(通)의 아들. 1623년(인조 1) 필선(弼善)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왕을 호종하였다. 돌아와 병조 참의(兵曹參議)․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163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심양(瀋陽)에 가서 인조의 병환이 심하므로 볼모로 있는 세자 대신 본국의 원손으로 대신시켜 세자를 귀국케 한 것이, 왕의 뜻을 어겼다 하여 이듬해 남양(南陽)에 유배되었으나 세자가 귀국하여 풀려 나와 호조와 공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경기도 관찰 사․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및 공조와 예조의 참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경증(李景曾) 1595(선조 28)~1648(인조 26) 자(字)는 여성(汝省), 호(號)는 송음(松陰)․미강(眉江), 시호(諡號)는 효정(孝貞), 군수(郡守) 통(通)의 아들, 참판(參判) 경헌(景憲)의 아우. 1624년(인조 2) 문과에 장원, 여러 관직을 거쳐 1635년 사인(舍人)이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남한산성에서 병방 승지(兵房承旨)로 공을 세워 1637년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이에 대사간에 승진, 1644년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협(李 禾夾) ()는 추빈(秋賓), ()는 능호(菱湖).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이정(李 程) ()는 운장(雲長), ()는 남곡(南谷). 조선조(朝鮮朝)에 승지(承旨)를 역임했다.

이동명(李東溟) ()는 백종(百宗), ()는 학정(鶴汀).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

이혜() ()는 차산(次山), ()는 현포(玄圃). 조선조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이합(李 柙) ()는 윤적(允迪), ()는 대산(臺山). 조선(朝鮮)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이희택(李喜澤) ()는 윤경(潤卿).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이유(李 柚) ()는 군실(君實). 조선(朝鮮) 때 병조 참판(兵朝參判)을 역임했다.

이선원(李善源) ()는 경보(敬甫).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희룡(李喜龍) ()는 군서(君瑞).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이선부(李善溥) ()는 팔보(八甫), ()는 육송(六松). 조선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이여() 1645(인조 23)~1718(숙종 44) 자(字)는 치보(治甫), 호(號)는 수곡(睡谷)․수촌(睡村)․포음(浦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시정(寺正) 신하(紳夏)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0년(숙종 6)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정자(正字)․승지(承旨)를 거쳐 1686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689년 기사환국(己 巳換局)에 서인(西人)으로 송시열과 함께 면직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이 제거되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710(숙종 36)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죽었다.

이단하(李端夏) 1625(인조 3)1689(숙종 15) 자(字)는 계주(季周), 호(號)는 외재(畏齋)․송간(松磵),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판서 식(植)의 아들. 송시열의 문인. 1662년(현종 3)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674년에 대사성(大司成)으로 대제학(大提學)을 겸했다. 이해 숙종 즉위 후 서인(西人)으로서 제2차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처벌의 부당성을 상소 했다가 파직, 이듬해 삭직(削職)당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풀려 나와 이듬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어「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684년 예조 판 서(禮曹判書)가 되어「사창절목(社倉節目)」을 지어 왕에게 바쳤으며, 이 해 좌참찬(左參贊)에 올라「선묘보감(宣廟寶鑑)」을 지어 올렸고, 1686년 우의정(右議政),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판돈령 부사(判敦寧府事)로 있다가 죽었다. 문명(文名)이 높았다.

이광하(李光夏) 1643(인조 21)~1701(숙종 27) 자(字)는 계이(啓以), 시호(諡號)는 정익(貞翼), 대사간(大司諫) 합의 아들. 1687(숙종 13) 문과에 급제, 1695년(숙종 21) 좌승지(左承旨)․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지냈고, 1700년(숙종 26)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병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함흥(咸興)의 문회서원 별사(文會書院別祠), 경성(鏡城)의 광혜사(光惠祠)에 제향되었다.

이희무(李喜茂) 1649(인조 27)~1708(숙종 34) 자(字)는 무경(茂卿), 예조 참판(禮曹參判) 경헌(京憲)의 손자. 1691년 문과에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동래 부사(東萊府使)․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거쳐 1689년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사전(司錢)의 주조(鑄造)를 엄금하도록 건의했다. 그후 승지(承旨)를 지내고 당쟁(黨爭)을 망국의 근원이라 하여 배격, 그뒤 신 완(申 琓)이 사복시(司僕寺)를 관장할 때 당진(唐津)․태안(泰安)의 민전(民田)을 빼앗자 그를 탄핵하여 백성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1705(숙종 31)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그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이탄(李 坦) ()는 군평(君平), ()는 춘강(春江). 조선조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이봉상(李鳳祥) 1676(숙종 2)~1728(영조 4) 자(字)는 의숙(儀叔),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순신의 5대손. 1702 년(숙종 28) 무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포도대장(捕盜大將)․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하다가, 이광좌(李光佐)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좌천,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충주(忠州)에서 난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아산(牙山)의 현충사(顯忠祠), 청주(淸州)의 표충사(表忠祠)에 제향되었다.

이서(李 漵) 1657(효종 8)~1794(정조 18) 초명은 한(瀚), 자(字)는 계호(季浩), 호(號)는 부계, 판서 주진(周鎭)의 아들. 1759년(영조 35) 음보(蔭補)로 여러 내외관직을 거쳐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대구(大丘)에 재직하였을 때 사재(私財)를 덜어 제방(堤防)을 쌓아 백성들이 그 둑을 이후언(李侯堰)이라 했다.

이당(李 簹) 1661(현종 2)~1712(숙종 38) 자(字)는 의숙(猗叔), 이조 판서 식(植)의 손자. 예빈시정(禮賓寺正) 신하(紳夏)의 아들. 음보(蔭補)로 사산 감역(四山監役)이 되고,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양구 현감(楊口縣監) 등을 역임했다.

이집(李 土集) 1664(현종 5)1733(영조 9) 자(字)는 노천(老泉), 호(號)는 취촌(醉村),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한성판윤(漢城判尹) 광하(光夏)의 아들. 1697년 문과에 급제, 1705년 겸문학(兼文學)으로 김 재(金 栽)를 논척(論斥)했다. 17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729년(영조 5)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경종실록(景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덕흠(李德欽) 1667(현종 8)~1746(영조 22) 자(字)는 숙형(叔亨), 호(號)는 동원(東園), 군수(郡守) 선연(善淵)의 아들. 장령(掌令) 선원(善源)에게 입양. 윤 증(尹 拯)의 문인. 백가(百家)의 서(書)에 통달했고, 특히「중용(中庸)」「논어(論語)」를 읽어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 만년에는「주역(周易)」을 탐구하여 성 력(星曆)․상수(象數)․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박학 정통했다.

한때 모친의 봉양을 위해 감역관(監役官)을 지내다가 모친이 죽자 곧 사퇴, 대신의 천거로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를 잠시 지내고,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기진(李箕鎭) 1687(숙종 13)~1755(영조 31) 자(字)는 군범(君範), 호(號)는 목곡(牧谷),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양구 현감(楊口縣監) 당의 아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1717년(숙종 43) 문과(文科)에 급제, 1721년(경종 1) 헌납(獻納)으로 왕세제(王世弟)에 책봉된 연잉군(延礽君 : 영조)에 대해 흉언(凶言)을 퍼뜨린 류봉휘(柳鳳輝)의 처벌을 주청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 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등용되어 시독관(侍讀官)으로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들에 대한 징토(懲討)를 극언(極言)하다가 한때 영조의 신임을 잃기도 했다.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가 되었으나, 왕세자관례(冠禮) 때에 봉전문(封箋文)을 빠뜨린 사건으로 파면되어 고향에 머물고 있던 중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대사성(大司成)에 기용, 여러 관직을 거쳐 1749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1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한봉도(汗峰圖)」를 지어 올렸고, 판돈령 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이주진(李周鎭) 1691(숙종 17)~1749(영조 25) 자(字)는 문보(文甫), 호(號)는 탄옹(炭翁),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좌의정 집의 아들. 1725년(영조 1) 문과에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부수찬(副修撰)․대사간(大司諫)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747년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이겸빈(李謙彬) ()는 성익(聖益). 조선(朝鮮)에서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이석(李 氵奭) 1701(숙종 27)~1759(영조 35) 자(字)는 자호(子浩), 호(號)는 동강(桐江), 봉진(鳳鎭)의 아들.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 학문에 정진했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문장이 뛰어나 많은 묘비문(墓碑文)을 지었다.

이한응(李漢膺) 1711(숙종 37)~? 자(字)는 사준(士俊). 충무공 순신(舜臣)의 증손. 훈련대장 봉상(鳳祥)의 조카. 1725년(영조 28)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총융사(摠戎使)․금위 대장(禁衛大將)․어영 대장(御營大將) 등을 역임했다.

이우(李 瑀) 1752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757년 영광 군수(靈光郡守)에 재직중, 대동미(大同米)를 조정에 바치지 않았다는 암행어사 홍경해(洪景海)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후에 사간(司諫)에 등용되었다.

이덕해(李德海) ()는 육여(六如), ()는 간암(艮菴).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했다.

이한일(李漢一) ()는 중협(仲協), ()는 곤월헌(壼月軒).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이담(李 潭) ()는 경룡(景龍), ()는 담녕(澹寧). 조선조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이택진(李宅鎭) ()는 희능(熙能),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이니(李 瀰) ()는 중호(仲浩).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이관(李 灌) 1712(숙종 3)1791(정조 15) 자(字)는 습지(習之), 호(號)는 만은(晩隱), 현감(縣監) 항(恒)의 아들. 이 재(李 縡)의 문인.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벼슬을 거쳐 연산 현감(連山縣監)이 되었다. 뒤에 노인직(老仁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풍안군(豊安君)을 습봉(襲封), 1791년(정 조 15) 부총관(副摠管)에 이르러 죽었다.

이은(李 溵) 1722(경종 2)1781(정조 5) 자(字)는 치호(稚浩), 호(號)는 첨재(瞻齋), 시호(諡號)는 충목(忠穆), 병조 판서 주진(周鎭)의 아들. 1759년 문과에 급제, 1765년 대사헌(大司憲)으로 한후락(韓後樂)을 신구(伸救)하려다가 왕의 분노로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전직되었다.

1772년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대사헌(大司憲) 정광충(鄭光忠)의 탄핵으로 파직, 이듬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777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왕명으로「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5천여 권을 구득하여 귀국한 뒤 영 중추부사(領中秋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심양 문안사(瀋陽門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80년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영돈령 부사(領敦寧府事)로 죽었다.

이한풍(李漢豊) 1733(영조 9)1803(순조 3) 자(字)는 계흥(季興), 음보(蔭補)로 오위 사직(五衛司直)이 되고 여러 내외직을 역임, 1789년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었다가 경기도에 창궐한 도적을 소탕하지 못한 책임으로 양재역(良才驛)에 유배, 후에 풀려 나와 1791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나갔고, 금위 대장(禁衛大將)․훈련 대장(訓鍊大將)․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을 거쳐 행호군(行護軍)이 되어 죽었다. 궁술․검법에 특기가 있었고 글씨도 잘 썼다.

이병모(李秉模) 1742(영조 18)~1806(순조 6) 자(字)는 이칙(彛則), 호(號)는 정수재(靜修齋),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연(演)의 아들. 1773년(영조 49) 문과에 급제,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거쳐, 1778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승지(承旨)가 되었다.

1790년 함경도․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고 1794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이듬해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1801(순조 1)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고, 영중추부사(領中秋府事)를 거쳐 1805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우수했다. 앞서 1797(정조 21)에는 왕명으로「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이노춘(李魯春) 1752(영조 28)~? 자(字)는 군정(君正), 동지돈령부사 용모(龍模)의 아들. 1780년(정조 4) 문과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고, 1782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802년 춘추관 실록청 당상(春秋館實錄廳堂上)으로「정조실록(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803년 대사성(大司 成)이 되었다.

이인수(李仁秀) ()는 성빈(聖賓). 1784(정조 8)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여러 외직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노익(李魯益) 1767(영조 43)~1821(순조 21) 자(字)는 겸수(謙叟), 호(號)는 탄초(灘樵), 영의정 병모(秉模)의 아들. 1805년(순조 5) 문과에 급제, 이듬해 부교리(副校理),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820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라 부빈객(副賓客)을 겸임했고,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임지(任地)에서 죽었다.

이항권(李恒權) ?~1835(헌종 1) 자(字)는 중구(仲久), 충무공(忠武公) 순신(舜臣)의 8대손. 1809년 무과에 급제,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고, 뒤에 부총관(副摠管)으로 훈련원(訓鍊院)․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의 중군 별장(中軍別將)을 지냈다.

이원희(李元熙) ()는 선장(善長), 시호(諡號)는 정희(靖僖), 선전관 익권(益權)의 아들. 여러 무관직을 거쳐 1860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에 재직중 돈의문(敦義門)에서 발생한 괘서사건(掛書事件)의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당했다.

후에 기용되어 1866(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공을 세웠고, 1868(고종 5) 어영 대장(御營大將)․훈련 대장(訓鍊大將)을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유수(李惟秀) ()는 대이(大頣). 조선(朝鮮) 때 훈련 대장(訓鍊大將)을 역임했다.

이승권(李升權) ()는 일여(日汝). 조선조(朝鮮朝)에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지냈다.

이규풍(李奎豊) ()는 낙서(樂瑞), ()는 우풍(又豊). 독립운동가로서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대통령표창(大韓民國建國功勞大統領表彰)이 수여되었다.

이규갑(李奎甲) ()는 원서(元瑞), ()는 운호(雲湖). 목사(牧師)로서 제2대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지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단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單章)이 수여되었다.

이규석(李奎奭) ()는 군백(君伯), 병마절도사 겸희(謙熙)의 아들. 1889년 후영사(後營使)를 거쳐 협판내무부사를 지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춘영(李春永) 1869(고종 6)~1896(건양 1) 자(字)는 우삼(友三), 호(號)는 괴은(槐隱). 경기도 지평(砥平) 출신. 1895년(고종 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안승우(安承禹)와 함께 원주(原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4백여 명을 모집, 단양(丹陽)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어 제천(堤川)으로 향하다 동지 이민옥(李敏玉)의 배반으로 관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이 해산되자 충주(忠州)로 피신, 류인석(柳麟錫)의 의병부대에 들어가 중군(中軍)이 되었다. 조령(鳥嶺)․달천․안보(安保) 등지에서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싸운 뒤에 충주에서 전사 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單章)이 수여되었다.

이세영(李世永) 1869(고종 6)1938 독립운동가. 일명 유흠(維欽)․천민(天民), 자(字)는 좌현(佐顯), 호(號)는 고광(古狂),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의 아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97년(광무 1) 육군 참위(參尉)를 거쳐 헌병대장 서리를 지낸 후 사직, 1904년 고향에 내려갔다.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 모집을 협의, 1906년 민종식을 대장으로 삼고 참모장이 되어 홍주(洪州)에서 싸우다 피체, 종신유형(終身流刑)을 당했다가 풀려 나왔다.

1908년 동생 창영(昌永)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설립, 교장으로 후진 교육을 담당했고 이듬해 항일운동을 벌였다.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상교(尙敎)가 되었으며 신흥무관학교 교장․통군부(統軍府) 사령관․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 이사장․통의부(統義府) 군사위원장을 역임, 상해(上海)에 가서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參謀部次長)을 지내고, 사천성(四川省)에서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이민화(李敏華) ()는 순구(舜九).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사관학교교관(士官學校敎官)을 역임하고,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23년 대대장(大隊長)으로서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單章)이 수여되었다.

이일영(李鎰永) 일명(一名) 붕해(鵬海), 호는 송강(松崗). 항일․방공전(抗日․防共戰)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해방 후 귀국, 제주도 병사구사령관(濟州道兵司區司令官)을 역임했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국민장(大韓民國建國勳章國民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