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단양이씨시조(丹陽李氏),이배환(李盃換),단양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30 10:09 수정일 : 2018-08-03 14:42

시조 및 본관의유래

단양이씨시조(丹陽李氏)  이배환(李盃換)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는데 공(功)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에서 내시진전직(內寺眞殿直)을 지낸 그의 10세손 이방규(李方揆)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계대(繼代)해 오고 있다.

배환의 14손인 판서(判書) 거경(居敬)의 아들 무(茂)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올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조선(朝鮮) 개국 후 1398년(태조 7)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왕자의 난(亂) 때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단양(丹陽)은 충북 북부, 동단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 혹은 적성현(赤城縣)으로, 신라 때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초에 단산(丹山)으로 개칭, 1018년(현종 9)에 원주(原州)에 속했다가 뒤에 충주(忠州)로 이속되고, 고종 때 고을 사람들이 합단(哈丹)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8년(충숙왕 5)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에 군(郡)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들어갔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에 따라 영춘군(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인물을 보면 겸(謙)과 지시(之詩)․입(立) 등이 뛰어났다.

겸(謙)은 집의(執義)를 역임한 맹지(孟智)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올라 장령(掌令)․사성(司成) 등을 지내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으나 영조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지시(之詩)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서 장원하고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인(龍仁)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의병장(義兵將) 입(立)은 임진왜란 때 소사싸움에서 공(功)을 세워 훈련판관(訓鍊判官)이 되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정묘호란 때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오랑캐를 무찔러 공(功)을 세움으로써 명나라로부터 상을 하사받았다. 죽은 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이씨(丹陽李氏)는 남한(南韓)에 19,0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단양이씨조상인물

이상재(李尙材)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지냈다.

이공로(李公老) ?~1224(고종 11) 자(字)는 거화(去華). 명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안변 판관(安邊判官)으로 사재를 털어 민부(民賦)를 대신하는 등의 선정(善政)으로 사의서승(司儀署丞)이 된 후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고종 초기에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조충(趙沖)의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고, 1219년(고종 6) 한순(韓恂)이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선무사(宣撫使)가 되었다.

이후 비서소감(秘書少監)․경상도 안찰사(按察使)․전중감(殿重監)을 지내고, 1222년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을 거쳐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했다. 변려문에 능했다.

이방규(李方揆) 자(字)는 공비(公庇). 고려조(高麗朝)에 내시 전직(內侍殿直)을 지냈다.

이인경(李仁卿) 자(字)는 강(剛). 고려 때 예빈 승(禮賓丞)을 지냈다.

이구(李 玖) 고려조에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지냈다.

이원간(李元幹) 자(字)는 원중(原中). 고려조(高麗朝)에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이거경(李居敬) 직제학 원간(元幹)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判圖判書),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이존경(李存敬) 고려(高麗)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다.

이무(李 茂) 1355(공민왕 4)~1409(태종 9) 자(字)는 돈부(敦夫), 시호(諡號)는 익평(翼平), 판서(判書) 거경(居敬)의 아들. 공민왕 대 문과(文科)에 급제, 우왕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개성윤(開城尹)을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서강(西江 : 예성강) 및 강화도(江華島)의 병선(兵船)을 점검했으며, 이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했고, 1396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이끼도(壹岐島)․쓰시마도(對馬島)의 왜구를 토벌 했다.

1398년(태조 7)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제1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임, 1410년(태종 1)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고,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우정승(右政丞)에 승진, 이어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우정승 겸 판병조사(判兵曹事)를 역임하고, 1406년 김사 형(金士衡)․이회(李薈) 등과 「역대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彊理圖)」를 편찬했다.

이흥림(李興林) 자(字)는 종용(從容), 판도판서 존경(存敬)의 아들. 고려때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에 이르렀다.

이공유(李公柔) 조선조(朝鮮朝)에 집의(執義)를 지냈다.

이공효(李公孝)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이공지(李公祗)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지지(李之知) 자(字)는 효부(曉夫), 호(號)는 초옹(草翁). 조선 때 군사(軍事)를 지냈다.

이맹지(李孟智) 호(號)는 만취당(晩翠堂). 조선조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이지시(李之詩) ?~1592(선조 25) 자(字)는 영이(詠而), 호(號)는 송암(松菴), 시호(諡號)는 경의(景毅), 우의정 무(茂)의 후손. 1567년(선조 즉위) 무과(武科)에 장원,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가 문한(文翰)에 능하므로 동반직(東班職)에 전임, 주서(注書)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 이성 현감(利城縣監)으로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격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용인(龍仁)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병조 판서에 추증(追贈), 태인(泰仁)의 모충사(慕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지례(李之禮) 자(字)는 만혜(漫兮), 시호(諡號)는 장민(莊愍), 문호(文虎)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를 평양(平壤)까지 호종하였고, 형(兄) 지시(之詩)와 함께 개산(介山) 전투에 참전하여 장렬하게 순절 하였다.

이겸(李 謙) 자(字)는 자익(子益), 호(號)는 손재(遜齋), 집의(執義) 맹지(孟智)의 아들. 1501년(연산군 7) 진사(進士)가 되고, 1507년(중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 로 급제, 장령(掌令)․사성(司成)을 거쳐 중화부사(中和府使)에 이르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巳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변호하다가 파직 되었으며 영조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문은(李文殷) 자(字)는 낙신(洛新). 조선 때 부위(副尉)를 지냈다.

이응남(李應男)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이침(李 忱) 조선조(朝鮮朝)에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이장(李 蔣) 자(字)는 상보(相甫). 조선(朝鮮)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이희노(李希老) 조선 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올랐다.

이학례(李學禮) 자(字)는 문숙(文叔). 조선 대 만호(萬戶)를 지냈다.

이중기(李重器) 자(字)는 성보(聖甫). 조선 대 만호(萬戶)를 지냈다.

이복례(李復禮)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이광립(李光立) 자(字)는 명숙(明叔). 조선조(朝鮮朝)에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이입(李 立) ?~1627(인조 5) 본명은 정립(挺立), 광립(光立)의 아우. 무과(武科)에 급제, 내금위(內禁衛)에 보직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사(素沙) 싸움에서 공을 세워 훈련 판관(訓鍊判官)이 되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대 안 준(安 俊)․김 우(金 佑)․안종록(安宗祿)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장사준(張士俊)을 죽이고 오랑캐를 크게 무찔러 전공을 세움으로써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의 상주(上奏)로 명나라로부터 은자패(銀子 牌)와 쌀 1천석(石), 총기(銃器) 등의 상품을 받았다.

이어 인산진 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가 되어 대계도(大鷄島)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병사(病死)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1736년(영조 12) 안주(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숙형(李叔坰)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숙균(李淑均) 자(字)는 균평(均平).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연숭(李連崇)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지숭(李智崇) 자(字)는 원보(元甫).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견(李 堅) 자(字)는 중강(仲剛). 조선 때 첨사(僉使)를 지냈다.

이희춘(李希春) 자(字)는 중인(仲仁).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득춘(李得春) 자(字)는 사화(士華),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영립(李榮立) 자(字)는 경관(景官), 호(號)는 화암(華巖).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장배(李長培) 자(字)는 운달(雲達),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이적(李 迪) 조선조(朝鮮朝)에 집의(執義)를 지냈다.

이원형(李遠馨) 자(字)는 여겸(汝謙). 조선조에 도정(都正)을 지냈다.

이엽(李 曄) 자(字)는 광원(光遠),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혁(李 赫) 조선조(朝鮮朝)에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지냈다.

이덕수(李德秀) 자(字)는 희지(希之).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종렬(李宗烈) 자(字)는 양좌(良佐).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