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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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9 17:10 수정일 : 2018-08-01 11:26

광주이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비조(鼻祖)는 신라(新羅) 내물왕(奈勿王 : 17대 왕,재위기간 356~402)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래 칠원(漆原)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世襲)해 오다가 제56대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그 후손이 이에 불복(不服)하고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太祖)가 강계(降階)하여 회안호장(淮安戶長)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본관(本貫)을 회안으로 칭관(稱貫) 하다가 940(고려 태조 23)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광주(廣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마한(馬韓)의 일부로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이 곳에 남하해서 한왕(韓王)이 되어 세운 회안국(淮安國)의 일부였다.

371년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남한산(南漢山: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이도(移都)하여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553(백제 성왕 31,신라 진흥왕 14) 신라(新羅)에게 나라를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고려 태조 23)에 광주(廣州)로 고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 광주군(廣州郡)이 되었다.

그 후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수보(收譜)를 하게 되었다.

생원공(生員公) ()의 후손은 생원공(生員公) 휘 당(諱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遁村) ()1(一代)로 하여 족보를 만들어 대종회라 칭하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一代로 하여 종회를 구성하였으나 현재는 십운과공 종회만이 존재한다.

석탄공(石灘公), 암탄공(巖灘公) 댁은 한희(漢希)를 시조로 하여 율정공댁과 합보하여 오다가 1987년 정묘(丁卯)대동보(大同譜)에서 석탄공과 암탄공을 1대조로 하였으며 율정공 댁은 록생공(祿生公)1대로 하여 족보를 만들었다.

씨족사 개요(氏族史 槪要)

. 대종회(大宗會)생원공당(生員公唐)의 五子 둔촌(遁村)과 십운과공(十韻科公) 가문(家門)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빼어난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생원공(生員公) ()의 후손에서는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오자구등과(五子俱登科)> 현달하여 광주이씨의 중추를 이루었으니 인령(仁齡)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경선고사(慶先庫使)이며 아드님 조()가 있어 문과(文科)에 올라 강원도사(江原都事)를 경력(經歷)하였으며 둘째는 초명(初名) 원령(元齡) 개명(改名) ()이고 셋째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지군사(知郡事) 희령(希齡)이고 넷째 자령(自齡)도 문과(文科) 십운과(十韻科)에 급제(及第)한 고려조(高麗朝) 판서(判書)이다. 다섯 째 천령(天齡)은 문과에 급제한 보현과공(補賢科公)이다.

그 중 둘째 아들 둔촌(遁村) ()의 인맥(人脈)이 가장 화려하다.

초명(初名)이 원령(元齡)인 집()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해박(該博)한 학문과 고상(高尙)한 지절(志節)로 명망을 떨쳤으며, 여말(麗末) 삼은(三隱: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과 같은 명현(名賢)들과 더불어 문교(文交)를 나누며 존경을 받았다.

1368(공민왕 17) 당시 요승(妖僧) 신 돈(辛旽)이 득세(得勢)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웃에 살고 있는 채판서(蔡判書)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화()를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둔촌(遁村)은 노구인 아버지 당()을 등에 업고 개경(開京)을 빠져 나와 과거동기(科擧同期)인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살고 있는 경북 영천(慶北永川)으로 은거하였다.

둔촌 부자(父子)를 반갑게 맞이한 천곡 최원도는 다락방에 이들을 숨기고 4년 동안 피화생활(避禍生活)을 돌봐 주며,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큰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 때 천곡(泉谷)의 집에는 열 아홉 살인 제비(燕娥)라는 여종이 있어, 한 끼에 밥을 세 그릇씩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상전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친 행세를 하는 상전의 소행을 수상쩍게 여긴 주인마님은 이 제비라는 여종으로 하여금 염탐을 시켰다.

제비는 밥 세 그릇을 상전이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벽장 속에 두 사람을 숨겨 두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약에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진 둔촌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양가(兩家) 모두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방마님이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니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질린 여종 제비는 마님의 걱정을 덜고 또 상전의 신의와 상전 친구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하여 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듬 해 둔촌의 아버지 당()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천곡은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영천군 나현(羅峴:광릉골) 모부인(母夫人) 묘 아래에다 예장을 치루었다.

1371(공민왕 20) 신돈(辛旽)이 역모로 주살된 후에야 비로소 둔촌은 자유의 몸이 되어 송경(松京)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있는 현화리(玄化里) 옛 집으로 돌아와 초명인 원령(元齡)을 집()으로 자()를 호연(浩然)으로, 호를 둔촌(遁村)으로 고치어 살면서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모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맏아들 지직(之直)1380(우왕 6) 문과(文科)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정종(定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에 올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둘째 지강(之剛)은 고려 우왕(高麗 禑王) 8년 임술(壬戌) 138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태종 칠년(太宗 七年) 다시 중시을과(重試乙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랐으며 세자 좌부빈객(世子 左副賓客)으로 세자(世子:後日의 世宗大王)에게 경서와 사적을 강의하며 군왕의 도의를 가르치는 막중한 직책을 맡게 되어 정심설(正心說)을 강()하곤 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후일 성군(聖君)이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시호(諡號)가 문숙(文肅)이다.

셋째 지유(之柔)1389년 기사(己巳) 공양왕(恭讓王) 1년에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으로 발탁되어 재직 중 소도(昭悼)의 변란(變亂)을 당함에 정지아(鄭之雅)와 더불어 방원(芳遠:後日 太宗)에게 극간하여 후일 방원이 태종(太宗)으로 등극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됨에 왕실형제(王室兄弟) 간의 살육전을 통탄하다가 득병(得病)하여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다.

둔촌(遁村)의 후손으로 청백리(淸白吏) 지직(之直)의 맏아들 장손(長孫)은 태종 11년 신묘(太宗 十一年 辛卯:1411)에 문과 급제(文科及第)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부친상을 당하여 산소자리를 선택할 때 의지가 잘 통하는 진사(進士) 조한필(曺漢弼)이라는 벗이 있었는데 풍수에 밝아 묘()자리를 보고 말하기를 "이 자리가 좋아서 자손들이 연이어 과거에 오르고 현달 하겠으나 다만 장자에게 흉하다고 말한 즉, 아우 충희공(忠僖公:仁孫)이 형에게 불길한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부모를 장사지내겠느냐고 한 즉 사인공은 부모를 안장하는 것이 소원이지 기타의 부족한 것은 말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그 땅에 장사지내고 독실한 효도로 슬퍼하더니 오래지 않아 서거하였다.

청백리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 인손(仁孫)은 태종 정유년(太宗丁酉年)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대사헌(大司憲)과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거쳐 세조(世祖) 기묘년(己卯年:1459)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임되었다. 호는 풍애(楓厓) 시호(諡號)는 충희(忠僖)로 장지는 현 영릉(英陵) 자리인데 예종(睿宗) 기축년(己丑年:1469)에 이르러 능터로 빼앗기고 연을 띄워 떨어진 곳인 여주군 능서면 연주리로 이장 모셨다. 옛날에는 연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연주리라 불리었으나 왜정 시대에 바뀌어 지금은 신지리라 한다.

청백리공의 셋째 아들 예손(禮孫)은 세종(世宗) 갑인(甲寅:1434)년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대사성과 황해도 관찰사로서 명예스러운 치적을 올렸다.

그리고 우의정(右議政) 인손(仁孫)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오자구등과(五子俱登科)>현달하여 명문(名門)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成宗) 때 좌리3등공신(左理三等功臣)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특히 그는 항상 자기 가문의 세력이 너무 성함을 두려워하여 집안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허>를 설득하였고 가문이 너무 성해지면 망하는 이치를 강조하였으며, 두 손자의 이름을 겸()과 공()이라 지으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도리는 이 두 글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경계하였다.

세조(世祖) 때 좌익3등공신(左翼三等功臣)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던 인손(仁孫)의 둘째 아들 극감(克堪)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했으며 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여 필명을 떨쳤다.

우정승 인손의 셋째 아들 극증(克增)은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익대 2등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성종(成宗) 때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국가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올라서는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한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우의정(右議政) 인손(仁孫)의 넷째 아들 극돈(克墩)은 이십삼세(二十三歲)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이예조좌랑(吏禮曹佐郞)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세조(世祖) 무자(戊子:1468)년 중시(重試)를 아원(亞元)으로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에 직배(直拜)되었다.

성종(成宗) 원년(元年) 경인(庚寅:1470) 대사헌(大司憲)으로 시무 12(時務十二條)를 상소(上疏)하여 사서인교육(士庶人敎育)의 기강(紀剛)을 법으로 정해 학훈도교수(鄕學訓導敎授)를 대읍(大邑)에는 급제(及第) 출신(出身)으로 소읍(小邑)에는 생원진사년사십정도(生員進士年四十程度) 유경행자(有經行者)로 교육실행(敎育實行)할 교직자(敎職者)를 선정하게 되었으니 일성록(日省錄)에 「李克墩之功은 不在於黃熹之下라 하고 又曰 李克墩은 今之伊尹傳說)이라」하였다. (伊尹과 傳說은 殷나라 賢相이다.)

성종(成宗) 2年 신묘(辛卯:1471)에 참좌리공신(參佐理功臣)이 되어 광원군(廣原君)의 봉호를 받고 평안ㆍ전라관찰사와 호조판서가 되었고 성종(成宗) 을사(乙巳:1485)년에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을 편찬할 책임을 맡아 실록당상(實錄堂上)으로 서거정(徐居正) 등과 공찬(共撰)하고 노사신(盧思愼) 등과 강목신증(綱目新增)과 강정무경제서(綱正武經諸書)를 편찬하고 서문을 썼다. ()은 좌찬성(左贊成)으로 시호(諡號)는 익평(翼平)이다.

좌의정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횡포를 바로 잡으려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지인 인동(仁同)에서 사사(賜死)당한 극균(克均)은 우의정(右議政) 인손(仁孫)의 다섯째 아들로 사약을 받고서 유실(幽室)에 들어갔다가 분통함을 참을 길 없어 다시 나와서 형관(刑官)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白病)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죽은 넋이 너를 따라다니며 평생 괴롭힐 것이다."하고 들어가 약사발을 들이켰다. 형관이 돌아가 연산군에게 그 말을 전하니 더욱 노하여 극균의 뼈를 부수도록 하명하여 쇄골표풍(碎骨飄風) 하였다.

또한 예손(禮孫)의 맏아들 극기(克基)는 단종(斷種) 계유(癸酉:1453)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성종(成宗) 경인(庚寅:1470)년에 한명회가 공() 8인을 경의에 밝고 행의(行誼)가 있다 하여 사표(師表)의 소임에 맡기고자 아뢰자 신숙주(申叔舟)가 찬성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올라 예문관 부제학(副提學) 및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겸하였는데 그 때에 모두 이르기를 「경의에 밝고 행의가 있기로는 이모(李某) 한 사람 뿐이지 그 나머지는 다소 훈고(訓고)를 알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성종(成宗)이 연산군의 어머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던 날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그의 아들 수형(守亨:사인)ㆍ수의(守義:한림)ㆍ수정(守貞:수찬) 3형제가 이조(吏曹)와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류자광(柳子光)이 크게 시기하여 밤낮으로 연산군을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어느 날 임금과 신하들이 같이 즐기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들이 잇달아 술 두 잔을 올리면 연산군도 또한 끝의 술잔으로서 재상에게 돌려 주었다. 다른 재상들은 받아서 마셨는데, 세좌는 끝의 술잔을 받아서 마시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튿날 연산군은 신하가 임금이 주는 술을 받아서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고, 또 남은 술방울을 임금의 옷자락에 흘린 것은 불경죄(不敬罪)이니 세좌를 옥에 가두라고 하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손자들과 설날 그의 집에 세배갔던 이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세좌의 손자 연경(延慶:수원의 아들)은 세좌가 북방 변지로 귀양갔을 때 모시고 다니며 모든 험난한 일을 다 겪었다. 그 후 조부와 숙부가 모두 화를 입었고, 연경도 연좌되어 귀양을 갔는 데 단정하고 깨끗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죽을 때에 갈팡질팡 하여 정당한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얼굴빛이 평화롭고 말씨가 따뜻하며 흉금(胸襟)이 쇄락(灑落)하였고, 학문은 세속의 누습을 벗어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엎지러지는 물결 같은 세상에서도 능히 우뚝 서서 시종 불변하였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3년이 지나도록 치르지 못한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모친을 모시고 충주(忠州) 북촌(北村)에 살다가 안당(安唐)이 설치한 현량과(賢良科)에 특채되어 유학(儒學)을 바탕으로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혁신 그룹에 서서 중견 구실을 하였다.

1519(중종 14)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 등의 반동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혁신정치를 추구하는 신진파를 제거할 때 그 숙청자 명단의 우두머리에 연경의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중종(中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연경은 어필로 이름이 지워져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량과가 파과(罷科)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충주(忠州)에 물러가 살았다.

수정(守貞:세좌의 넷째 아들)은 연산군 때 아버지 세좌와 함께 사화에 연좌되어 피살되었고, 당시 일곱 살인 맏아들 윤경(潤慶)과 여섯 살인 차남 준경(浚慶)의 형제는 귀양을 갔다.

어린 나이로 가난한 귀양살이에 옷이 해지고 이와 서캐가 많아서 아우인 준경이 긁으며 울자, 윤경은 웃으며 "새 옷이 입고 싶지"라고 말하니, 준경은 "어디서 새 옷을 얻겠나"하였다. 윤경은 준경을 시켜 불을 피우라고 시킨 다음 형제가 입었던 옷을 벗어 모두 불에 태우고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때마침 초하루 날이라 귀양살이의 순찰점고(點考)를 하는데, 지키는 사람이 발가벗은 어린 형제의 사정을 관에 보고하자 원은 놀라서 새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온 윤경(潤慶)과 준경(浚慶)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1531(중종 26) 문과에 급제했고, 여러 관청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558(명종 13)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윤경의 아들 중열(中悅)은 중종(中宗) 때 등과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학문이 뛰어나 장래를 촉망받았으나 명종(明宗) 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친구 이휘(李輝)를 변호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 사사(賜死) 되었다.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의하면 중열은 다정한 친구인 이휘로부터 시국에 걸리는 중대한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열은 이휘의 일당으로 몰려 처형되느냐 아니면 이휘의 말을 고발하여 자신은 모면하느냐 하는 위태로운 경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윤경에게 찾아가 상의했더니 윤경은 "자신이 죽는 것도 애석한 일이지만 친구를 어떻게 배반한단 말이냐"하였다.

중열은 다시 숙부인 준경에게 물었더니 "우리 선대에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피해를 당하여 언제나 원통하고 한스러운 터인데, 오늘날 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위에 계신 부형(父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가문을 보존할 생각으로 글월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라고 하였다.

이 때 중열의 아버지인 윤경이 승정원에서 편지를 보내어 아들을 책망하기를 <내가 항상 이휘는 일을 저지를 사람이니 사귀지 말라고 주의시켰는데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지금 화가 눈 앞에 닥쳤다고 해서 어찌 친구를 팔아서 살기를 도모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열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1547(명종 2) 311일 밤 부엉이가 동북쪽 모퉁이에 모여들어 울어대니 예로부터 불길의 전조라,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가 부엉이가 운 지 9일만에 사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 이씨의 화려한 인맥(人脈)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목(巨木)인 한음(漢蔭) 덕형(德馨)은 좌의정 극균(克均)의 오대손(五代孫)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른 민성(民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이 놀라게 했으며, 양사언(楊士彦)은 덕형이 14세 때 지은 시()를 보고 <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덕형은 조정에서 베풀어진 각종 정시(庭試)마다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으므로 다른 선비가 이 정시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나 일부러 병을 핑계로 시험을 치지않았다.

31세 때 학자 관직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제학(大提學)에 초탁(超擢)되었다. 조정에서 대제학을 회천(會薦)할 때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장만 끼고 양보하였다. 한 데 한 점의 반대표가 있어 모두를 의아해 하는 데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며 <노부(老夫)의 소위>라고 자칭하고 서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은 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좀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성숙함을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덕형은 큰절로 노대신의 충고를 흔연히 감사하니 선비들 공론이 양쪽을 모두 아름답게 일컬었다.

중국의 조사(詔使)로 조선에 건너온 왕경민(王敬民)이 덕형의 명성을 듣고 한 절귀의 시()를 써 주기를 "군의 풍도와 기상이 멀리 범류에 뛰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만나 보지 못하여 이것을 써 주어 신교(神交:얼굴은 보지 못하고 정신으로 교분이 깊다는 말)를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53세로 생을 마쳤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

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혼조삼리(昏朝三李)>라 하여 이항복ㆍ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짓밟힌 사직을 지탱한 명신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文人)으로 임진왜란 후 조정의 해잉한 기강을 바로 잡는 데 공헌했던 윤우(潤雨)는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었고, 청명고절(淸明高節)로 명망이 높았던 아들 도장(道長)을 비롯하여 숙종(肅宗) 때 영남(嶺南)의 대기근을 구제하여 전설에 오르기까지 한 담명(聃命)과 함께 명문(名門) 광주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 석탄(石灘)과 암탄(巖灘) 가문(家門)

한편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를 역임하여 강직(剛直)한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1392(태조 1)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南漢山)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자 몸소 양중을 찾아와 농주(農酒)로서 옛정을 나누며 시()를 짓기를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光武皇帝)와 엄자룡의 우의를 보나 한()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하니, 양중이 답()하기를 "옛날의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對酌)이 있으리요"하니 왕도 그의 굳은 지조를 알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고, 양중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서 주부(司온署主簿)를 제수했다.

고려 말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형()인 석탄공 양중과 함께 충절을 지켰던 암탄공(巖灘公) 양몽(養蒙)은 자손(子孫)들에게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기를 유언했고, 지금의 서울시 고덕동(高德洞)은 양중과 양몽이 정의를 지켰던 고덕(高德)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명일동 소재 고지봉(高志峯) 또한 두 분의 뜻을 기려서 붙인 이름이다.

. 록생(祿生)의 손자(孫子) 청백리 지()의 가문과 율정공(栗亭公)의 후손 율정공파(栗亭公派)의 중시조(中始祖) 관의(寬義)는 청백리(淸白吏) ()공의 맏아들로 세종(世宗) 때 누차에 걸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合格)하지 못하여 자신의 불운함을 느끼고 황야에 은거(隱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다가 후에 다시 송정(松亭) 김반(金泮)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修學)하여 학문에 정통했고, 덕행이 뛰어나 정여창(鄭汝昌)ㆍ손순효(孫舜孝)ㆍ남효온(南孝溫) 등과 같은 훌륭한 석학(碩學)을 배출시켰다.

성종(成宗) 때 와서 찬성(贊成) 손순효의 천거로 경연(經筵)에 나가 성리(性理)의 근원(根源)과 성신(星辰)의 도수(度數)를 강론(講論)하자 성종이 감탄하여 율정(栗亭)이라고 친서(親書)로 사호(賜號)하고 율봉찰방(栗峰察訪)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노구를 핑계 삼아 사양함으로 왕이 가상히 여겨 지방 수령에게 명()하여 여생(餘生)을 보살피도록 하고 쌀과 비단을 내렸다.

율정공 관의(寬義) 맏아들 점()은 성종(成宗) 초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77(성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와 집의(執義)ㆍ사성(司成)을 역임한 후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

1503(연산군 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전북(全北) 부안(扶安)으로 유배 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복관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와 한성판윤(漢城判尹)ㆍ중추부사(中樞府使)에 이르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이씨는 남한에 181,3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이씨조상인물

이집(李 集) 1327(충숙왕 14) ~ 1387(우왕 13) 초명은 원령(元齡),자는 호연(浩然),호는 둔촌(遁村), 생원(生員) ()의 아들ㆍ1347(충목왕 3)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했다.

1368(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천(永川)으로 피신, 1371년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송경(松京)에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驪州) 천녕현(川寧縣)에서 독서(讀書)로 세월을 보내며「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한 질문서를 정몽주에게 보내 문사들을 경탄케 했다. 서울시 강동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광주이씨대종회(廣州李氏大宗會)1(一代)이다.

이자령(李自齡) 생원공(生員公) ()의 넷째 아들로 고려조 십운과(十韻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며 십운과공종회(十韻科公宗會) 1(一代)이다.

이양중(李養中) ()는 자정(子精), ()는 석탄(石灘), 둔촌(遁村) 이집(李集)11촌 조카로,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 후 은거하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검교(檢校) 한성윤(漢城尹)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므로 태종이 수차 방문하여 부임을 종용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후에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석탄공종회(石灘公宗會)1(一代)이다.

이양몽(李養蒙) 호(號)는 암탄(巖灘). 고려말(高麗末)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고 형(兄) 양중(養中)과 함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抗節臣)으로 조선조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암탄공종회(岩灘公宗會)의 1대(一代)이다.

이지직(李之直) ?~1419(세종 1) 초명(初名)은 도(), ()는 백평(伯平), ()는 탄천(炭川),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학문(學問)이 고명하고 성품이 강정(剛正)하였으며 1380(우왕 6) 사마서승(司馬署丞) 문과(文科)에 아원(亞元)으로 급제, 교리(校理)ㆍ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1400(정종 2)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받았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영의정에 증직 되었다.

이지강(李之剛) 1363(공민왕 12) ~ 1427(세종 9) 자(字)는 중잠(仲潛),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아들ㆍ1382년(우왕 8)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조선 개국 후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1407년(태종 7) 경승부소윤(慶承府少尹)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ㆍ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ㆍ수원부사(水原府使)를지내고 1411년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충청도ㆍ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14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416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이듬해 경상도(慶尙道) 도관찰사(都觀察使)를 거쳐 형조ㆍ호조의 참판(參判)이 되었다.

1418(태종 18) 평안도 관찰사가 되고 이 해 세종 즉위 후, 호조참판 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으로 정조부사(正祖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호조판서ㆍ예조판서ㆍ의정부참찬겸대사헌(議政府參贊兼大司憲)을 지낸 뒤 1425(세종 7) 중군도총제(中軍都總制)로 사직했다.

이지유(李之柔) ()는 숙명(淑明),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의 아들. 1389(공민왕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사간(司諫)과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이장손(李長孫) ()는 맹윤(孟胤), 청백리(淸白吏) 지직(之直)의 장자(長子). 태종(太宗) 신묘(辛卯:141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30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진사(進士) 조한필(曺漢弼)이 산소자리를 보고 「이 자리는 좋아서 자손들이 연이어 과거에 오르고 현달하겠으나 다만 장자에게 흉하다」고말한 즉 아우 충희(忠僖)가 형에게 불길한 곳에 어떻게 부모를 장사 지내겠느냐고 말하니 사인은 부모를 안장하는 것이 소원이지 기타의 부족한 것은 말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그 땅에 장사지내고 독실한 효도로 슬퍼한 나머지 이듬해에 서거하니 향년 31세였다. 후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인손(李仁孫) 1395(태조 4) ~ 1463(세조 9) ()는 중윤(仲胤), ()는 풍애(楓厓), 시호(諡號)는 충희(忠僖), 참의(參議) 지직(之直)의 아들. 1411(태종 11)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14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에 발탁되고, 1434(세종 16)에 감찰(監察)을 거쳐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냈다.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453(단종 1)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정권을 쥐게 되자 호조판서에 승진,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임, 이어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1459(세조 5) 우의정에 올라 곧 치사(致仕)했다.

이예손(李禮孫) ?~1459(세조 5) ()는 계윤(季胤). 1434(세종 16) 생원(生員)으로서 문과(文科)에 급제,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관의(李寬義) 1409(태종 9) ~ ? ()는 의지(義之), ()는 율정(栗亭).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일두(一두) 정여창(鄭汝昌) 손순효(孫舜孝) 남효온(南孝溫) 등 일류석학(碩學)들이 스승으로 섬기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이 되었으나 사퇴, 1843(성종 14) 학문에 밝은 자로서 성종에게 불려 진강(進講), 왕을 감탄케 했고 늙도록 학문을 열심히 한다 하여 포상되었다. 이천(利川)의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율정공종회(栗亭公宗會)는 율정공의 증조부(曾祖父) 록생(祿生)1(一代)이다.

이우생(李遇生) 형조참의(刑曹參議) 양중(養中)의 아들. 조선조에 사온서 주부(司온署主簿)를 역임하였다.

이극규(李克圭) ()는 공서(公瑞). 사인(舍人) 장손(長孫)의 아들. 1471(성종 2) 문과(文科)에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해주 수양산으로 낙향하여 지방인재들을 양성하였고, 창녕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극배(李克培) 1422(세종 4) ~ 1495(연산군 1) ()는 겸보(謙甫), ()는 우봉(牛峰)ㆍ매월당(梅月堂), 시호(諡號)는 익평(翼平),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77(세종 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감찰(監察)ㆍ정언(正言)ㆍ병조좌랑(兵曹佐郞)ㆍ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총애를 받다가 1455년 그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고, 1457(세조 3)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라 세조가 영남지방을 순행(巡幸)하게 되자 특히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병조와 예조의 참판(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거쳐, 1459년 북변의 야인(野人)을 정벌할 때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출전하였고, 돌아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2(세조 8) 이조판서에 승진했고, 형조와 예조의 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어 병조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예종 때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1471(성종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를 겸하고 147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승진, 1481년과 1482년의 대기근(大饑饉)을 구제하고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성종 16) 우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1493년 영의정에 올라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극감(李克堪) 1427(세종 9) ~ 1468(세조 14) ()는 덕여(德與),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44(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集賢殿)에 보직되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어 다음해 강서원(講書院)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55(세조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아 즉위하자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오르고, 이 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겸하여 맡았다.

1458(세조 4)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 이듬해 좌승지(左承旨)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과 「의방유취(醫方類聚)」를 수교간행(수校刊行)했으며, 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1461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진(撰進)했다.

이극증(李克增) 1431(세종 13) ~ 1494(성종 25) 자(字)는 경위(景僞), 시호(諡號)는 공장(恭長),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1년(문종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종묘녹사(宗廟綠事)가 되었다가 1456년(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을 거쳐 1461년 이조정랑(吏曹正郞), 1463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겸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지내고 사인(舍人)이 되었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고, 1468(예종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470(성종 1) 이조판서에 올라 국가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었으며, 호조판서ㆍ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482(성종 13) 우참찬(右參贊)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병조판서ㆍ지경연사(知經筵事)ㆍ형조판서ㆍ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1484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어 문묘(文廟)를 대대적으로 증수(增修), 1488(성종 19)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이극돈(李克墩) 1435(세종 17) ~ 1503(연산군 9) 자(字)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ㆍ응교(應敎)ㆍ필선(弼善)ㆍ집의(執義) 등을 역임했다. 146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승진, 이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470년(성종 1) 대사헌ㆍ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遠君)에 봉해졌다. 147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87년(성종 18)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494년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ㆍ호조판서를 지내고 그 동안 평안(平安)ㆍ강원(江原)ㆍ전라(全羅)ㆍ경상(慶尙)ㆍ영안(永安) 5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이극균(李克均) 1437(세종 19) ~ 1504(연산군 10) 자(字)는 방형(邦衡),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으나 무술(武術)에도 뛰어남으로써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460년(세조 6) 회령도사(會寧都事), 이듬해 지평(持平)ㆍ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고 1472년(성종 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1년 이조판서로 서북면(西北面)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야인(野人) 토벌에 공을 세우고,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497(연산군 3)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을 때 경상우도의 지도(地圖)를 만들어 바쳤다. 1499년 좌찬성(左贊成)ㆍ평안도 경변사(警邊使)를 지내고 1503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나, 누차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 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인동(仁同)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이극기(李克基) 1426(세종 8) ~ 1491(성종 21) ()는 백온(伯溫), 관찰사(觀察使) 예손(禮孫)의 아들. 1446(세종 2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453(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전랑(銓郞)에 보임(補任)되었다. 이어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올라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ㆍ직제학(直提學)ㆍ지제교(知製敎) 및 삼사(三司)의 장()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승진(陞進),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전임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관提學)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명유(名儒)로 명성을 떨쳤다.

이극견(李克堅) ()는 중고(仲固), 관찰사(觀察使) 예손(禮孫)의 둘째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성주목사(星州牧使)를 거쳐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고,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종반(縱班) 숙질(叔侄) 등이 참화(慘禍)를 당()하자 처가(妻家) 고장인 전북 옥구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며 여생을 보냈다.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 되었다.

이천기(李天奇) ? ~ 1516(중종 11) 석탄공(石灘公) 양중(養中)5대손으로 호가 퇴암(退菴)으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로 있을 때 연산군(燕山君)이 간신들의 간계(奸計)에 빠져 국법을 어기고 장사고(藏史庫)를 열어 폐비사실의 내용을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사초(史草)에 가담된 연루자를 극형(極刑)할 때(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혹독한 국문(鞠問)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나 한 사람 죽는 것은 좋으나 죄 없는 많은 대신들이 죽는 게 아깝다. 후일 누구와 더불어 국사(國事)를 하리오"하니 좌우 대신들이 극간(極諫)하여 구명(救命)되었다.

그러나 모든 벼슬을 삭탈관직 당하고 조수(曹壽), 김훤(金暄), 강학손(姜鶴孫) 4인과 같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니, 4인은 결의형제(決議兄弟)하였다. 그 후손들은 사성연모비(四姓戀慕碑)를 세우고 선조를 회상하며 420 여 년 간 돈목하게 살고 있다.

이두신(李斗信) 십운과공(十韻科公) 자령(自齡)의 증손(曾孫)으로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나 문신옥사(文臣獄事)에 연루되어 장흥에 귀양갔었다. 시호(諡號)는 충민(忠愍)이다.

이수철(李守哲) 1411(태종 11) ~ 1473(성종 4) 주부(主簿) 우생(遇生)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평안도(平安道) 절도부사(節度副使)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다.

이손(李 蓀) 1439(세종 21) ~ 1520(중종 15) ()는 자방(字芳), 시호(諡號)는 호간(胡簡), 병마절도사 수철(守哲)의 아들. 1459(세조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1470(성종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조정랑(禮曹正郞)ㆍ김해부사(金海府使)ㆍ판결사(判決事) 등을 지냈다.

이어 충청도 와 함경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충청도ㆍ황해도ㆍ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 이조ㆍ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1501(연산군 7)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져 우참찬(右參贊)에 승진, 궤장(궤杖)을 하사받았다.

1513(중종 8)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만년에는 영의정 류순(柳洵), 판서 안침(安琛) 등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구로회(九老會)를 조직, 친목을 두텁게 했다.

이점(李 점) 1446(세종 28) ~ 1522(중종 17) 율정공(栗亭公) 관의(寬義)의 맏아들. 시호(諡號)는 문호(文胡). 1471년(성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내고 사간(司諫)ㆍ집의(執義)ㆍ사성(司成)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올라 1503년(연산군 9)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ㆍ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부안(扶安)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 복관(復官)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고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漢城判尹)ㆍ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이세좌(李世佐) 1445(세종 27) ~ 1504(연산군 10) 자(字)는 맹언(孟彦), 판서 극감(克堪)의 아들. 1477년(성종 8) 첨정(僉正)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튿날 대사간에 특진, 1485년(성종 16)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이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1503년 예조판서로서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여 왕이 내리는 술을 어의(御衣)에 엎지른 실수로 무안(務安)에 부처(付處), 이어 평해(平海)에 이배(移配),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이 윤비(尹妃:연산군의 생모)를 폐할 때 이를 극간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移配)되던 중, 곤양군(昆陽郡) 양포역(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한뒤 효수(梟首) 당했다.

이은(李 誾) 1455(세조 1) ~ 1522(중종 17) ()는 자화(子和), ()는 음애(陰厓), 참판(參判) 극기(克基)의 아들. 1480(성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건릉참봉(健陵參奉)을 거쳐 봉사(奉事) 직장(直長), 주부(主簿)를 지내고 공조(工曹)ㆍ형조정랑(刑曹正郞)에 승진(陞進)되었다. 이어 첨정(僉正)과 안성(安城)ㆍ고원군수(高原郡守)를 역임하였고,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학파(新進學派)에 연좌(蓮座)되어 영광(靈光)으로 유배(流配)되어 적소(謫所)에서 여생을 마쳤다. 영광의 보촌서원(甫村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수언(李粹彦) 1457(세조 3) ~ 1496(연산군 2) 자(字)는 사미(士美), 좌찬성(左贊成) 손(蓀)의 아들. 1477년(성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48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로 기용되고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ㆍ형조좌랑(刑曹佐郞)ㆍ예조좌랑(禮曹佐郞)ㆍ지평(持平)ㆍ충청도도사(都事)ㆍ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했다.

1491년 북방에 야인(野人)이 침입하자 문무를 갖춘 자로서 발탁되어 장령(掌令)에서 사예(司藝)로 전직되고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전공을 세워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이 되었다. 1494년 집의(執義)로 있을 때 즉위한 연산군(燕山君)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가, 서계(西界)에 둔전을 설치하게 되자 교리(校理)로 기용되어 둔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해주(海州)에서 죽었다.

이수공(李守恭) 1464(세조 10) ~ 1504(연산군 10) 자(字)는 중평(仲平),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 세충(世忠)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6년(성종17) 진사(進士)가 되고, 148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장령(掌令)ㆍ응교(應敎)ㆍ전한(典翰)을 거쳐 1498년(연산군 4)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이 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창성에 유배된 뒤, 광양(光陽)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501년에 풀려나왔다.

이연경(李延慶) 1477(성종 19) ~ 1552(명종 7) ()는 장길(長吉), ()는 탄수(灘수), 시호(諡號)는 정효(貞孝),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좌(世佐)의 손자, 봉사(奉事) 수원(守元)의 아들. 1504(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되는 조부를 배소(配所)까지 따라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돌아왔다.

이듬해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蔭補)로 선릉참봉(宣陵參奉)을 거쳐 1518년 공조ㆍ형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ㆍ교리(校理) 등을 지내다가 이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 파직되었다가 1545(인종 1) 폐과(廢科)되었던 현량과가 복구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약수(李若水) 1486(성종 17) ~ 1531(중종 26) ()는 지원(止源), ()는 우천(牛泉), 현감 자()의 아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동료 유생 150 여 명을 이끌고 궐내에 들어가 조광조의 설원(雪寃)을 호소하다가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다. 1521(중종 16)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창성(昌盛)에 유배, 대흥(大興)에 이배(移配)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대흥(大興)의 우천사(牛泉祠)에 제향되었다.

이약빙(李若氷) 1489(성종 20) ~ 1547(명종 2) ()는 희초(熹初), ()는 준암(樽巖), ()의 아들. 성균관 유생으로 1508(중종 3) 왕이 성균관을 찾아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禮記)」를 하사받았고, 1513(중종 8) 수석으로 생원(生員)이 되어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518(중종 18)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조광조(趙光祖)와 형 약수(若水)의 사면을 주청하다 삭직(削職)되고,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보직, 1539년 노산군(魯山君:단종)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또 파직되었다.

1543(중종 38) 경기도에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고, 이듬해 수원부사(水原府使)ㆍ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거쳐 1547(명종 2) 좌통례(左通禮)로 재직 중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蘅)ㆍ이기(李芑) 등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을 일으켜 대윤(大尹)을 제거할 때 윤임(尹任)의 인척이라 하여 사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 선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이약해(李若海) 1498(연산군 4) ~ 1546(명종 1) ()는 경용(景容), ()는 수암(首巖), ()의 아들. 1516(중종 11)에 진사(進士)가 되고, 153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서 1538년 탁영시(擢英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종학교수(宗學敎授)가 되었다. 1544(중종 39) 좌보덕(左輔德)을 지내고,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영접, 1545(인종 1)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이해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小尹) 윤원형(尹元형)이 정권을 잡자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되고, 이 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잔당(殘黨)으로 몰려 경원(慶源)에 안치(安置),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신원(伸寃)되고,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윤경(李潤慶) 1498(연산군 4) ~ 1562(명종 17) 자(字)는 중길(重吉), 호(號)는 숭덕재(崇德齋), 시호(諡號)는 정헌(正獻), 수찬(修撰) 수정(守貞)의 아들.

1504년 아버지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자 전 가족이 원지(遠地)에 유배,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서울에 올라와 1531(중종 26) 진사(進士)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저작(著作)ㆍ수찬(修撰)ㆍ교리(校理)를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어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1545(명종 즉위)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의 복설(復說)을 청했고,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으나, 아들 중열(中悅)이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자 관작(官爵)이삭탈(削奪)되었다가 1550년 용서되어 승지(承旨)를 지내고, 이해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라는 무고로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

1553년 등용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보직, 이듬해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고,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관찰사의 명으로 영암(靈巖)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구(倭寇)의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전라도 관찰사에 승진했다. 그 후 도승지(都承旨)ㆍ병조판서를 지내고,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 중 병사했다.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 5) ~ 1572(선조 5) ()는 원길(原吉), ()는 동고(東皐)ㆍ남당(南堂)ㆍ양와(養窩)ㆍ홍련거사(紅蓮居士), 시호(諡號)는 충정(忠正), 부수찬(副修撰) 수정(守貞)의 아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를 입은 조부와 부친에 연좌하여 형 윤경(潤慶)과 같이 괴산(傀山)에 유배(流配)되었으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온 뒤 신승연(申承演)ㆍ황효헌(黃孝獻)에게 수학, 1522(중종 17) 생원(生員)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다가 1533년 사경(司經)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피죄인(被罪人)의 무죄를 논()했다가 김안로(金安老) 등의 미움을 사서 파직,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응교(應敎)ㆍ보덕(報德)ㆍ승지(承旨)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ㆍ부제학(副提學), 1543년 문신정시(文臣廷試)에 장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오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이듬해 중종이 죽고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이 되었고, 1545(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1548년 병조판서ㆍ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550년 대사헌이 되었다.

앞서 병조 판서 때 이기(李기)가 뇌물을 받고 구관자(求官者)의 이름을 적어 보내어 등용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했던 일로 그 일당인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으로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