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성이씨(固城李氏),고성이씨시조,이황(李璜),고성이씨조상인물,고성이씨유래

작성일 : 2017-04-29 15:54 수정일 : 2018-01-22 11:33

고성이씨시조 및 고성이씨유래(본관)

고성이씨(固城李氏) 시조(始祖)이황(李 璜)이다. 이씨추원록(李氏追遠錄)」에 의하면 고성 이씨(固城李氏) 시조(始祖) 이 황(李 璜)은 한()나라 문제(文帝) 때 사람인 이 반(李 槃)24세손이다. 그는 고려 덕종(德宗 : 9대왕, 재위기간 : 10311034) 초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1033(덕종 2) 거란(거丹)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문종(文宗) 때 호부(戶部) 상서(尙書)에 올라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고성(固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성(固城)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6가야(六伽倻) 중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이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우다가 고려(高麗) 때 철성부(鐵城府)로 개칭되었으며, 조선(朝鮮) 때 고성현(固城縣)이 되었고, 1895(고종 32) 고성군(固城郡)이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7세손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존비(尊庇)와 그의 아들 우()가 유명했다. 충숙왕(忠肅王) 때 전주(全州)와 진주(晋州)의 목사(牧使)를 지냈고,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아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었던 그는 뒤에 벼슬이 상서병부(尙書兵部)의 판사(判事)와 경령전(景靈殿)의 서장관사(書掌觀事)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의 아들 암()과 교()가 뛰어났다. 1313(충선왕 5) 문과(文科)에 급제한 암()은 충정왕(忠定王) 때 우정승(右政承)을 지냈고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리웠으며 <대갑편(大甲篇)>을 옮겨 써서 왕에게 바쳤다. 그의 동생 교()는 공민왕 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전선(銓選 : 재능, 기량 따위를 전형하여 인재를 뽑음)을 관장했다.


고려시대에 명문(名門)으로 세력(勢力)을 떨친 고성 이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도 대()를 이어 유명한 문신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성세(盛勢)를 보였다. 행촌(杏村) ()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인()은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졌으며, 차남 숭()은 공민왕(恭愍王) 때 궁술(弓術)로 무명(武名)을 떨치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태조(太祖) 때 검교 시중(檢校侍中)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서예(書藝)로 필명을 떨쳤던 아우 강(: 암의 막내아들)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의 아들 원()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學問)을 수학(修學)하고 고려(高麗) ()에 예부(禮部) 좌랑(佐郞)과 병부(兵部)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조선조(朝鮮朝)가 개국(開國)한 이후(以後) 태종(太宗)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병조(兵曹) 판서(判書)와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외교적으로도 수완이 뛰어나 명()나라 영락제〔永樂帝:3대 황제(皇帝), 재위기간 : 14031424〕에게는 누른 수염의 재상으로 총애(寵愛)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자가 많아 태종조(太宗朝) 후에는 항상 적을 안고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태종은 적으로부터 그를 보호에 주었으나 세종(世宗)은 기강을 위해 그를 유배시키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철성군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라고 자주 아쉬워했다고 한다. 원은 슬하에 대()․곡()․질()․비()․장()․증()․지()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문에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했다. 1462(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칙()은 이조(吏曹) 참판(參判)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하고 덕망(德望)과 직간(直諫)으로 당대에 명망(名望)을 떨쳤다. 칙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다가 외직(外職)인 충청도(忠淸道) 감사(監司)로 나가게 되자 유생(儒生) 2백 여 명이 모여 이칙은 유림(儒林)의 모범이요 도학(道學)의 종사(宗師)이니, 지금 외직(外職)으로 나가면 한 지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받지만 이 나라의 선비들은 어디 가서 덕()을 배우겠습니까라는 유임소(留任疏)를 올렸다.

성종(成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을 지낸 육()은「청파극담(靑坡劇談)」의 저자(著者)로도 유명했다. 그가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지()가 괴산(槐山) 군수(郡守)로 있어서, 임금이 난처하게 생각하여 전지(傳旨)를 내려 그의 아버지를 내직(內職)으로 전임시켜 주었다. 육의 아우 백()은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연산군(燕山君)의 총녀(寵女) 장숙용(張淑容)의 사저(私邸)가 외람(猥濫)되게 화려(華麗)하다고 간()했다가 유배(流配)당했다. 좌의정(左議政) ()의 증손(曾孫) (: 현감 평의 아들)1488(성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정언(正言)을 지내고 성당(盛唐 : 당시가 가장 성행하던 시기)의 품격을 갖춘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라 하여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피살되었고, 그의 아우 여()는 임금이나 조정에서 크게 촉망받다가 안질로 29세에 요절했다. 그 외 명종(明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명규(名珪)가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예조(禮曹) 참판(參判)에 이르러, 필명을 떨쳤던 택(: 참판 육의 손자)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기()가 을사오적(乙巳五賊 :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의 암살을 결행하다가 실패하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으며,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덕수(德秀)는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평북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상의(象義)․상룡(相龍)과 함께 의절(義節)의 전통 가문인 고성 이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이씨(固城李氏)는 남한에 88,58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고성이씨조상인물

이진(李 瑨): ()는 국보(國寶), ()는 문산(文山).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학사(學士)가 되었으며, 원종(元宗)이 즉위(卽位)하여 환관(宦官) 김신원(金信元)을 시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하도록 했으나 듣지 않고 문소산(文召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다. 효성(孝誠)이 지극하였고 죽은 뒤 왕명(王命)으로 예장(禮葬)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이존비(李尊庇): ?1287(충렬왕 13). 초명은 인성(仁成), ()는 빈연(彬然), 시호(諡號)는 문희(文僖). 원종 초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학박사(國學博士)․직한림(直翰林)․이부(吏部) 시랑(侍郞)을 역임하고, 충렬왕(忠烈王) 초 상서(尙書) 우승(尙書右丞)․사의대부(司議大夫)를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필도치(必闍赤)가 되었다. 1279(충렬왕 5)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세자(世子) 원빈(元賓)․감찰대부(監察大夫) 역임하였으며, 1287(충렬왕 13)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할 때 경상(慶尙)․충청(忠淸)․전라도(全羅道)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병량(兵糧)․군선(軍船)을 조달, 뒤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이우(李 瑀): ()는 원옥(元玉),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고려(高麗) 때 김해(金海)․회양(淮陽) 부사(府使)를 거쳐 전주(全州)․진주(晉州) 목사(牧使)를 지냈고, 위주사(位舟師) 도원사(都元師)․문하시중(門下侍中)․병부(兵部) 상서(尙書)․경령전(景靈殿)의 서장관사(書狀官事)가 되었으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았다. 그 후 신덕수의근성익조공신(愼德守義勤誠翊祚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암(李 嵒): 1297(충렬왕 23)1364(공민왕 13). 초명은 군해(軍侅), ()는 고운(古雲), 초자(初字)는 익지(翼之), ()는 행촌(杏村),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존비(尊庇)의 손자,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의 아들. 1313(충선왕 5) 17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비서성(秘書省) 교감(校勘)․도관 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密直代言) 겸 감찰 집의(監察執義)가 되었다가 1340(충혜왕 복위 1)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 1348년 충목왕이 흉하고 충정왕을 받들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와서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 되고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대갑편(大甲篇)」을 옮겨 써서 왕()에게 바쳤고 그림은 묵죽(墨竹)에 능했다.

이교(李 嶠): ?1361(공민왕 10). ()는 모지(慕之), ()는 도촌(桃村), 시호(諡號)는 문열(文烈), ()의 아우.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1357(공민왕 6) 천추사(千秋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1360(공민왕 9) 전선(銓選)을 관장했다.

이숭(李 崇): ?1394(태조 3). 시호(諡號)는 안정(安靖), ()의 아들. 궁술(弓術)에 능해 공민왕 때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검교 시중(檢校侍中)이 되었다.

이음(李 蔭): ?1361(공민왕 10).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 ()의 아들. 1359(공민왕 8) 홍건적(紅巾賊)의 제1차 침입 때 장군(將軍)으로서 안 우(安 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승진하고, 1361(공민왕 10)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자 안주(安州)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강(李 岡): 1333(충숙왕 복위 2)1368(공민왕 17). ()는 사비(思卑), ()는 평재(平齋),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의 아들. 1347(충목왕 3) 15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충정왕 때 시독(侍讀)에 뽑히고, 공민왕 때 전의 주부(典儀主簿)․이부 낭중(吏部郎中)․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에 이어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1368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진현관 (進賢冠)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서예(書藝)에도 뛰어났다.

이임(李 琳): ?1391(공양왕 2). 일명 성림(成琳․成林), 감찰대부(監察大夫) ()의 아들. 공민왕(恭愍王) 때 여러 내외(內外)직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고, 1376(우왕 2) 서북면 선위사(西北面宣慰使), 이듬해 지밀직(知密直)으로 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를 방어했다. 1378년 판밀직(判密直)으로서 양광․전라(楊廣․全羅) 조전원수를 겸하여 연산(連山)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이듬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그의 딸이 우왕의 비()가 되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에 봉해졌으며, 그 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귀생(李貴生): 문하시중(門下侍中) ()의 아들. 1390(공양왕 1)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이 색(李 穡)․우인렬(禹仁烈)․우현보(禹玄寶) 등 당시 구세력(舊勢力)의 중신들이 유배당할 때 고성(固城)에 유배, 이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홍수로 인해 풀려 나왔다.

이근(李 懃): ()의 조카. 1388(우왕 14)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그후 좌상시(左常侍)로서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가 되어 경상도(慶尙道)에 파견, 1392년 호조(戶曹) 판서(判書)에 이어 우대언(右代言)이 되었다. 이해 태조가 즉위하자 좌승지(左承旨)에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에 올랐으며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이원(李 原): 1368(공민왕 17)1430(세종 12). ()는 차산(次山), ()는 용헌(容軒), 시호(諡號)는 양헌(襄憲), ()의 손자, 밀직부사(密直副使) ()의 아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385년 문과(文科)에 급제, 사복시(司僕寺) ()을 거쳐 예조(禮曹) 좌랑(佐郞)․병조(兵曹)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 왕조가 개국하자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1400(정종 2)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태종)을 도와 이듬해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지고, 공안부(恭安府) 소윤(少尹)․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그 후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에 등용되고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대사헌(大司憲)․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경상도(慶尙道) 도관찰사(都觀察使) 등을 거쳐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1415년 예조(禮曹) 판서(判書)에 승진하였으며, 이어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병조(兵曹) 판서(判書)․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1419(세종 1)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이교연(李晈然): ()는 순보(純甫), 시호(諡號)는 공안(恭安). 1442(세종 2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부빈객(副賓客)이 되었고, 그후 예조(禮曹) 참판(參判)․개성(開城) 유수(留守)․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증(李 增):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지(李 墀): ()는 사암(思菴). 조선 때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이칙(李 則): 1438(세종 20)1496(연산군 2). ()는 숙도(叔度), 시호(諡號)는 정숙(貞肅). 좌의정 원()의 손자. 1456(세조 2) 진사(進士)가 되고, 1462(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병조(兵曹) 좌랑(佐郞)을 거쳐 이조(吏曹) 정랑(正郞)을 지내고, 사인(舍人)․집의(執義) 등을 역임했다. 성종 초에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그 후 관찰사(觀察使)에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이조(吏曹) 참판(參判)․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장(文章)에 능하고, 덕망․선견(先見)․직언(直言)으로 당대에 유명했다.

이육(李 陸): 1438(세종 20)1498(연산군 4). ()는 방옹(放翁), ()는 청파(靑坡), 시호(諡號)는 문광(文光), 사간(司諫) ()의 아들. 1452(문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64(세조 10)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 1466년 발영시(拔英試)2, 1468(세조 1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문학(文學)․응교(應敎)를 거쳐 예종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관(臺官)이 되고, 이어 판결사(判決事)․대사성(大司成)․충청도관찰사․호조와 예조(禮曹) 참의(參議)를 역임(歷任)하고, 1484(성종 15) 형조(刑曹) 참의(參議)를 거쳐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병으로 사임했다. 뒤에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을 거쳐 정조사(正朝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刑曹) 참판(參判)이 되고, 1494년 성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부사(告訃請諡請承襲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大司憲)․호조(戶曹) 참판(參判)․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병조(兵曹)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이필(李 珌): ()는 기지(器之). 1474(성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적성(積城)․평강(平康) 군수(郡守)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이윤(李 胤): ()는 자백(子伯), ()는 쌍매당(雙梅堂).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이의손(李懿孫): 조선조(朝鮮朝)에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이평(李 泙):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이굉(李 浤): 1440(세종 22)1516(중종 11). ()는 심원(深源), ()는 귀래정(歸萊亭)․연생당(戀生堂), 현감 증()의 아들. 1480(성종 1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子)․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1500(연산군 6) 집의(執義)를 거쳐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 개성부(開城府) 유수(留守)가 되었다. 치사(致仕)한 후 안동(安東)에 내려가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풍류(風流)를 즐겼으며, 시문(詩文)에 능했다.

이주(李 冑): ?1504(연산군 10). ()는 주지(冑之), ()는 망헌(忘軒), 현감(縣監) ()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8(성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498(연산군 4) 정언(正言)이 되었다. 성당(盛唐)의 품격을 갖춘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맥(李 陌): ()는 괴산(傀山). 조선(朝鮮)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이규(李 逵): 1454(단종 2)1505(연산군 11). ()는 통지(通之), 좌정승 원()의 증손. 1472(성종 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천거로 등용되어 내시 교관(內侍敎官)․참군(參軍)을 거쳐 군기시(軍器寺) ()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서()에 능했다.

이명(李 洺): ()는 호원(浩原). 조선조(朝鮮朝)에 이조(吏曹) 참의(參議)를 지냈다.

이맹우(李孟友):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부(李 阜): 1482(성종 13)?. 조선의 문신. ()는 자릉(子陵), ()는 행원(杏園), 사과(司果) ()의 아들. 사림파(士林派)로서 조광조(趙光祖)와 교유(交遊)했고, 1519(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兵曹) 좌랑(佐郞)․정언(正言)을 역임하고 병으로 사직했다.

이위(李 偉):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이려(李 膂): ()는 강재(强哉). 조선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반(李 胖):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중(李 中): 1488(성종 19)?. 초명은 충(), ()는 이강(而强), ()는 명암(明巖), 첨정(僉正) ()의 아들. 숙부 주()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趙光祖)․김 식(金 湜)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사림(士林)간에 명망이 높았다. 1532년 학행(學行)으로 예조(禮曹) 정랑(正郞)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영산의 덕천서원(德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명규(李名珪): 1497(연산군 3)1560(명종 15). ()는 광윤(光潤), 시호(諡號)는 안혜(安惠), 의영고(義盈庫) () ()의 아들. 1519(중종 14)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고, 1528(중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여러 벼슬을 역임,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1557(명종 12) 동지 겸 주청사(冬至兼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병조(兵曹)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사어(射御)에 능하고 서예(書藝)에도 뛰어나 특히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빼어났으며, 이 암(李 嵒)의 서체(書體)를 본받았다.

이순(李 淳): ()는 자진(子眞), ()는 야로당(野老堂). 퇴계 이 황(李 滉)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술(李 述): ()는 군우(君遇).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이찬(李 澯): 1498(연산군 4)1554(영종 9). ()는 자정(子淨), ()는 수곡(守谷), 참판(參判) ()의 손자, ()의 아들. 1523(중종 18) 생원(生員)으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吏曹) 참의(參議)․참판(參判)을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초서(草書)․예서(隸書)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택(李 澤): 1509(중종 4)1573(선조 6). ()는 택지(澤之), ()는 우당(雨堂), 참판(參判) ()의 손자, ()의 아들. 1531(중종 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전적(典籍)에 올라 교검(校檢)을 겸임했다. 외교문서(外交文書) 작성에 뛰어나 항상 승문원(承文院)의 벼슬을 겸직했고, 1554(명종 9)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禮曹)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해서(楷書)를 잘 썼다.

이경명(李景明):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성길(李成吉): 1562(명종 17)?. ()는 덕재(德哉), ()는 창주(滄洲), 참봉(參奉) 정려(精瓈)의 아들. 수석으로 진사(進士)가 된 후 1589(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94년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을 세워 수성도(輸城道) 찰방(察訪)이 되었다. 1596년 북청(北靑) 판관(判官)․함흥(咸興) 판관(判官)․여산(礪山) 군수(郡守)․합천(陜川) 군수(郡守) 등 외직(外職)을 역임하고, 지평(持平)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兵曹)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며, 두 번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림에도 능하여 진중(陣中)에서〈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그렸다.

이지(李 遲): 조선조(朝鮮朝)에 공조(工曹)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이효남(李孝男): 조선 때 형조(刑曹)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이노(李 魯): ()는 여유(汝唯), ()는 송암(松巖), 시호(諡號)는 정의(貞義). 조선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이돈(李 遯): 조선에서 호조(戶曹)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이근(李 瑾): 조선(朝鮮) 때 호조(戶曹)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이원량(李元樑):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이괄(李 适): 1587(선조 20)1624(인조 2). ()는 백규(白圭), 참판(參判) ()의 후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조(宣祖) 때 형조(刑曹) 좌랑(佐郞)․태안(泰安) 군수(郡守)를 역임하였으며, 1622(광해군 14) 함경북도(咸鏡北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반정(反正)을 성공케 했다. 이어 평안도(平安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부원수(副元帥)로 발탁되어 국경 경비에 힘썼으며, 이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624(인조 2) 아들 전()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무고를 받기도 하였으며, 무능하고 의심증 많은 공신들에 대한 평소의 적개심이 폭발, 공신들의 제거를 이유로 난을 일으켜 구성(龜城) 부사(府使)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군사 12천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란(避亂)하고 서울을 무혈점령했지만 장만과 정충신이 이끈 관군(官軍)의 반격(反擊)으로 참살(斬殺)되었다.

이중국(李重國): ()는 국이(國耳), ()는 수남(水南).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이준영(李俊榮): 조선조(朝鮮朝)에 병조(兵曹)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이시항(李時沆):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이일증(李一曾): 조선에서 승지(承旨)를 지냈다.

이득화(李得華): 조선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이주정(李周禎):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이기(李 沂): 1848(헌종 14)1909(융희 3). 독립운동가. ()는 백증(伯曾), ()는 해학(海鶴). 전라도 만경(萬頃) 출신. 실학(實學)을 연구하여 류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했다. 1905(광무 9) 노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고 미국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기 위해 도미(渡美)하려 했으나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의 방해로 떠나지 못했다. 이에 일본 도오꾜오(東京)로 건너가 일본 천황과 정계요인(政界要人)들에게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서면항의(書面抗議)를 했다.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07(융희 1) 나인영 등과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결행했으나 실패하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돌아와「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면서 민중계몽운동에 종사했다.

이덕수(李德秀): ?1940. 독립운동가. ()는 벽산(碧山), 평북 삭주(朔州) 출신. 1919년 만주(滿洲)로 망명, 의민사(義民社)를 조직하여 사장(社長)이 되고 한족회 군사부장(韓族會軍事部長)․신흥무관학교 통화분교(新興武官學校通化分校)의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21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부관(副官)으로 있다가 벽창(碧昌) 청년의용대(靑年義勇隊)를 조직, 이듬해 통군부(統軍府)의 중앙위원(中央委員) 겸 군사부(軍事部) 차장(次長)이 되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가했으며, 1925년 정의부(正義府)를 조직 중앙위원(中央委員)으로 있다가 임시정부(臨時政府)로부터 평북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었다.

이상의(李象義): ()는 만초(萬初), ()는 석주(石洲).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한학(漢學)에 능했다. 1925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독립투사(獨立鬪士)이다.

이상룡(李相龍): 1858(철종 9)1932. ()는 만초(萬初), ()는 석주(石洲),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 어려서 학문을 용모가 특출하였고 향리 사림(士林)의 거성(巨星)이며 선각자로 한일합방 후에 만주로 이주하여 조국 광복운동에 종사하며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이 되었고, 191931운동 때는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남만(南滿)의 군사기관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독판(督辦)이 되었고 1926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어 활약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19325월 향년 75세로 병사하였다. 19623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 장(單章)을 받았다.

이상동(李相東): 1865(고종 2)1951. ()는 건초(建初), ()는 만진(晩眞), 상룡(相龍)의 동생. 1895(고종 32) 형 상룡과 함께 의병장 신돌석(申乭錫) 휘하에서 창의(倡義) 활동하였고, 1905(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구국운동에 헌신 기독교에 입교, 장노(長老)가 되어 191931운동 때 안동시장에서 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지휘 하다가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왜인(倭人)의 신사참배(神社參拜)․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다 여러 차례 구속(拘束)되어 고초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