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강진이씨시조(康津李氏),이완(李完),이진(李珍),강진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8 22:19 수정일 : 2018-03-21 19:5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강진이씨(康津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남해왕(南海王) 때의 사람인 이완(李 完)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며.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검교(檢校) 첨의찬성사(儉議贊成事)에 오른 이진(李珍)을 일세조(一世祖)로 강진(康津)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강진(康津)은 전라남도 남서해안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도강(道康)과 탐진(眈津)의 합명(合名)인데, 도강현 (道康縣)은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양무군(陽武郡)으로 개칭하고, 고려시대에 도강으로 고쳐서 영암(靈岩)에 속하게 했다. 탐진현(眈津縣)은 원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탐 진으로 고쳐서 양무군에 예속(隸屬)시켰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에 속하게 했다가 뒤에 장흥(長興)으로 이속(移屬)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각 병마절도사영을 도강 구치(舊治)에 이설(移設)하고 양 현을 합쳐서 강진군을 설치하여, 탐진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1895년에 나주부(羅州府)의 관할 하에 들어갔고,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康津邑)으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진(珍)의 아들 석 (碩) 이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냈고. 손자 영기(英奇)는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은거(隱居)하여 조선조(朝鮮朝)에서 수차 벼슬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功)을 세운 터(攄)는 진(珍)의 증손(曾孫)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목사(牧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인문(人文) 은 감찰(監察)을 역임 했다. 부제학(副提學) 만균(萬約)은 중종(中宗) 대 문과에 올라 경연관 참찬관(經廷官參贊官)을 거쳐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을 지냈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추증(追贈) 되었다.

그 외 학자(學者)로 이름난 사경(思敬)과 효자(孝子) 상기(象璣)가 있었고. 근대에 와서는 봉수(鳳洙)가 독립운동가로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진이씨는 남한에 4,1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강진이씨조상인물

이진(李 珍):시호(諭號)는 문정(文定). 1308년(충선 왕 즉위) 앞서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보좌한 공으로 공신(功臣)이 되고, 1351년(충정왕 3) 지도침의상의(知都余議商議), 1354년(공민왕 3)에 평리(評理)가 되었으며, 이 해 천추사(千秋使)로서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석(李 碩):고려(高麗) 때 산원(散員) 동정(同正)을 지냈다.

이영기(李英奇):자(字)는 경열(慶稅). 호(號)는 모려. 1366년(공민왕 15)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구원(邱園)으로 낙향하였다.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수차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터(李 攄) :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冊錄)되었으며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이수(李 授):조선조(朝鮮朝)에 직장(直長)을 지냈다.

이달(李 提):자(字)는 윤중(允仲).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인문(李仁文):자(字)는 사실(士實). 조선(朝鮮) 때 선공감(總工監)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경문(李甄文):조선(朝鮮) 때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이직문(李直文):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만균(李萬鈞) : 호(號)는 선원당(仙源堂). 1522년(중종 17) 문과에 급제한 후 경연관(經廷官) 참찬관(參贊官) ·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등(等)을 역임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인로(李寅老):조선(朝鮮) 때 진사(進士)였다.

이충로(李忠老):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형로(李亨老):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이사홍(李思弘):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이사경(李思敬):자(字)는 계순(季純). 조선조(朝鮮朝)에 덕망있는 학자(學者)로 의병장 조헌(趙 憲)과 친분이 두터웠다.

이일순(李一淳):자(字)는 맹인(孟仁). 조선 때 소경(少 卿)을 지냈다.

이춘란(李春蘭):자(字)는 백형(白馨). 조선 때 찰방(察 訪)을 지냈다.

이경란(李景蘭) : 자(字)는 백훈(伯薰). 조선조에 찰방(察 訪)을 지냈다.

이민곤(李敏坤) : 자(字)는 군직(君直).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이민학(李敏學):호(號)는 선원(仙源). 조선조(朝鮮朝)에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이재흔(李載欣) : 자(字)는 성첨(聖詹). 조선조(朝鮮朝)에 호조(戶曹)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훈행(李勳行) : 자(字)는 수백(守百) 조선 때 중추부사 (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이상기(李象璣) : 자(字)는 국보(國寶), 호(號)는 현호(弦 皓).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로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이 깊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1871년(고종 8) 유림(儒林)에 천거(鹿擧)하여 효행에 대한 포상(襄賞)이 있었다. 그 후 1881년(고종 18) 유생과 같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척사(fF邪)를 논(論)하였다.

이봉수(李鳳洙) : 자(字)는 치장(致長) 한말에 도미(渡美)하여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와 광복동지회(光復同志會)의 회원으로서 재미(在美) 한인(韓人) 인구등록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의연금 모금에 많은 공(功)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