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해평윤씨시조(海平尹氏)윤군정(尹君正)

작성일 : 2017-04-28 18:16 수정일 : 2018-08-03 10:06

해평윤씨(海平尹氏)의 연원

해평윤씨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출사하여 원종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판공부사(判工部事) 등을 역임한 윤군정(尹君正)이다.

그의 아들 만비(萬庇)가 충렬왕(忠烈王) 원년에 기사일등공신에 추록되고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손자(孫子) 석(碩)은 충숙왕(忠肅王) 때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등을 역임하고,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으로 도첨의 우정승(右政丞)에 올라 품계가 벼강삼한삼중대광에 이르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군되었으며 원(元)나라로부터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의 직위(職位)를 받았다.

나라에서 해평의 땅을 하사받고 해평으로 낙향하여 세거하게 되어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ㄴ가문의 번성과 많은 명현이 배출되었으며 근세에 와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명문이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평윤씨(海平尹氏)는 남한(南韓)에 32,0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윤군정(尹君正) 1257년(고종 44) 원주(原州)의 안열(安悅)이 고성(古城)에서 난을 일으키자 장군(將軍)으로 낭장(郎將) 권찬(權 贊) 등과 이를 토벌했다. 우복야(右僕射)․좌복야(左僕射)를 거쳐 1273년(원종 14) 수사공(守司空)․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판공부사(判工副使)에 올랐다.

윤만비(尹萬庇) 첨의중찬(僉議中贊) 석(碩)의 아버지. 1277년(충렬왕 3) 낭장(郎將)으로서 정조 부사(正朝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1300년(충렬왕 26)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며, 뒤에 1등공신(一等功臣)에 봉해졌다.

윤석(尹 碩) ? ~ 1348(충목왕 4)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만비(萬庇)의 아들. 충선왕(忠宣王) 때 별장(別將)이 되어 제2왕자 도(燾 : 충숙왕)의 총애를 받았고,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호군(護軍)에서 대언(代言)에 올랐다.

1320년(충숙왕 7) 총부전서(摠部典書)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으며, 1327년 왕의 선위(禪位) 기도(企圖)를 번의 한 뒤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서 1등공신에 올랐고, 이듬해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이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혜왕 (忠惠王) 초에 중찬(中贊)이 되고 벽상삼한십자공신(壁上三韓十字功臣)이 되었으며, 1332년 충숙왕 복위 후 원나라에 있던 충숙왕에 의해 충혜왕의 충신이었다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좌정승(左政丞)이 되고 충목왕(忠穆王) 초원나라로부터 진국 상장군(鎭國上將軍)․고려 도원수(高麗都元帥)가 되어 시기하는 군간(群奸)의 탄핵을 받아 해평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윤지현(尹之賢) 시호(諡號)는 문영(文英).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진현관대제학(進賢冠大提學)․지춘추 관사(知春秋館事)로 관제개편, 인제양성, 내정쇄신 등에 참여했다.

윤지표(尹之彪) 1310(충선왕 2)~1382(우왕 8)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1332년(충숙왕 복위 1)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1340년 충혜왕(忠惠王)이 복위하자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 1344년(충혜왕 복위5)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1347년 평양윤(平壤尹)으로서 서북면존무사(西北面存撫使)를 거쳐, 1355년(공민왕 4) 문하 평리(門下評理)로서 원나라에 가서 공주(公主)의 책봉(冊封)을 사례 했으며 돌아와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다.

윤진(尹 珍) 시호(諡號)는 문평(文平).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1382년(우왕 8)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1388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명(明)나라에 가서 세공(歲貢)하였다.

윤가관(尹可觀) ?~1387(우왕 13)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석(碩) 증손. 대호군(大護軍) 보(寶)의 아들. 무예(武藝)에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있었다. 공민왕(恭愍王) 말년 한 안(韓 安)․홍 윤(洪 倫) 등이 왕명에 의해 강제로 여러 비빈(妃嬪)을 능욕하던 무렵, 익비(益妃)와 사통하라는 명을 거절하여 한 때 서인(庶人)으로 깎였다.

우왕(禑王) 때 밀직 부사(密直副使)로서 경상도 부원수(慶尙道副元帥)로 나가 의성현(義城縣) 등지에 침입한 왜구(倭寇)와 안동(安東)․예안(禮安)에서 싸우다가 패전, 부상을 당했다.

1383년(우왕 9)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합포(合浦)에 주둔, 진주목사(晋州牧使) 박자안(朴子安)과 함께 함양군(咸陽郡)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왜구의 근거지 축산도(丑山島)에 선졸(船卒)을 배치했다.

왜구의 침입이 차츰 없어지자 병기를 개조, 농구를 만들고 둔전(屯田)을 두어 군량에 충당하는 등 치적을 올렸으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죽었다.

윤사수(尹思修) 1365(공민왕 14)~1411(태종 11) 동지밀직(同知密直) 방안(邦晏)의 아들. 1383년(우왕 9)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 되자 영의정(領議政) 조 준(趙浚)의 천거로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발탁,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使)와 경력사(經歷司)의 도사(都事)를 겸직했다.

그후 교서소감(校書少監)․간의대부(諫議大夫)․산기상시(散騎常侍)등을 지내는 동안 경력(經歷)을 겸임하다가 조 준이 사임할 때 면직 되었다. 1401년(태종 1)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에 복직, 이어 이조 좌참의(吏曹左參議)를 지내고, 1405년 대언(代言) 1407년 예문관제학 (藝文館提學), 이듬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가 되고, 1410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서 명나라에 가서 북정(北征)을 축하했다.

윤훤(尹 萱) 자(字)는 백영(伯英).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윤은보(尹殷輔) 1468(세조 14)~1544(중종 39) 자(字)는 상경(商卿), 시호(諡號)는 정성(靖成), 첨정(僉正) 훤(萱)의 아들.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에 뽑혔고, 이듬해 교검(校檢)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497년(연산 군 3) 예관(禮官)으로 문소전(文昭殿)에 제사를 지낼 때 제4실의 신주(神主)를 떨어뜨려 파손케 한 죄로 장류(杖流)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정언(正言)으로 기용, 지평(持平)․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506년(중종 1)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편찬에 참여했다.

1509년 쓰시마도 경차관(對馬島敬差官)으로 가서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에게 국서(國書)를 전하여 왜구의 침범을 금하도록 요청했고, 1513년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 이듬해에 사성(司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오르고 1517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1521년(중종 16)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공조 참판․예조 판서, 1525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이조 판서를 겸직한 뒤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2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다음해에 호조와 예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1529년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대사헌에 재임,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거쳐 1533년 좌찬성(左贊成), 1535년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1537년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543년(중종 38)에 왕명(王命)으로「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편찬했다.

윤은필(尹殷弼) 자(字)는 상로(商老), 시호(諡號)는 헌간(憲簡), 첨정(僉正) 훤(萱)의 아들, 영의정 은보(殷輔)의 동생.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부교리(副校理)․장령(掌令)․부응교(副應敎)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윤변(尹 忭) 1495(중종 28)~1601(선조 34) 자(字)는 구부(懼夫), 호(號)는 지족암(知足庵), 희림(希琳)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년(중종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해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조광조가 투옥되자 성균관(成均館) 유생들과 함께 대궐에 가서 그의 무죄를 호소했으며, 1522년 식년문과(式 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가 되고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윤두수(尹斗壽) 1533(중종 28)~1601(선조 34) 자(字)는 자앙(子仰), 호(號)는 오음(梧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군자감정(軍資監正) 변(忭)의 아들. 이 황(李 滉)․이중호(李仲虎)의 문인. 1555년(명종 10) 생원(生員)이 되고,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에 급제, 정자(正字)․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권신(權臣) 이 양(李 樑)의 아들을 천거할 것을 거부하여 파직, 이해 이 양이 제거되자 수찬(修撰)으로 등용 되었다.

그후 이조․공조․형조․호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역임. 1577년(선조 10)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도승지(都承旨)로서 이종제(女夷從弟) 이 수(李 銖)의 옥사(獄事)에 연좌, 파직되었다.

1579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기용,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승진, 이어 부총관(副摠官)․형조 참판(形曹參判) 등을 거쳐 1587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1590년 종계변무(宗系辯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고, 형조 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듬해 호조 판서에 전임했다.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西人) 정 철(鄭 澈)이 화를 입자 같은 서인으로 연루, 회령(會寧)에 유배되고, 이어 홍원(洪原)․연안(延安) 등지로 이배(移配) 당했다가 전리(田里)에 방송(放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왕을 호종(扈從), 개성(開城)에 이르러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고 이어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평양(平壤)에 가서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때 평양이 위급해지자 함흥(咸興)으로 몽진(蒙塵)하자는 조의(朝議)를 반대, 의주(義州)로 갈 것을 주장, 이를 실현케 함으로써 뒤에 함흥이 함락된 뒤에도 왕이 무사하여 그 선견지명을 칭찬받았으며, 왕이 요동(遼東)에 까지 피난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하루에도 다섯 번 씩이나 상소를 하였다.

1594년 세자(世子)를 시종, 남하(南下)하여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고,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왕비를 해주(海州)로 시종했고, 1598년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 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에도 문징명체(文徵明體)를 본떠 일가를 이루었다.

윤근수(尹根壽) 1537(중종 32)~1616(광해군 8) 자(字)는 자고(子固), 호(號)는 월정(月汀)․외암(畏菴),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군자감정(軍資監正) 변(忭)의 아들, 영의정 두수(斗壽)의 아우, 이 황(李 滉)의 문인.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봉상시주부(奉常射主簿)․연천현감(漣川縣監)을 역임, 1562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광조(趙光祖)의 설원(雪冤)을 상소하여 과천 현감(果川縣監)에 좌천되었다.

이듬해 교검(校檢)이 되고 이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지제교(知製敎)․이조좌랑(吏曹佐郞)․교리(敎理)를 역임, 1567년(명종 22)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어 사인(舍人)․집의(執義)․응교(應敎)를 지내고 1572년(선조 5)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승진, 이듬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辯誣)를 했다.

귀국 후에 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내다가 서인(西人)으로서 1578년에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 이듬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역임, 1589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다시 종계변무를 했다.

돌아와 형조 판서에 승진, 대사헌․이조 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辯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이어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가 1591년 서인 정 철(鄭 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화를 입자 같은 서인으로 형 두수와 함께 삭직(削職)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등용되어 왕을 호종(扈從), 지경연사(知經莚事)․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등을 모두 겸임, 한편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奏請使) 등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 당, 광녕(廣寧)에 세 번, 요동(遼東)에는 여섯 번이나 왕래하며 국난 극복에 힘썼다.

그후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고,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으며,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廟號)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케 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이 황(李 滉)․조 식(趙 植)을 찾아 주자(朱子)와 육구연(陸九淵 : 상산)의 학문을 토론했고, 성 혼(成 渾)․이 이(李 珥)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거장(巨匠)으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그의 글씨는 영화체(永和體)라 하여 격찬을 받았다.

윤현(尹 晛) 1536(중종 31)~? 자(字)는 백승(伯昇), 호(號)는 송만(松巒), 두수(斗壽)의 조카, 담수의 아들. 1564년(명종 19)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1567년(선조 즉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73년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고, 1578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서 서 인(西人)의 거두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와 함께 당파(黨派)를 조성하여 양사(兩司)의 논핵을 받았다. 5181년 안악 군수(安岳郡守)로서 선정(善政)하여 포상(褒賞)받았으며, 뒤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윤승길(尹承吉) 1540(중종 35)~1616(광해군 8) 자(字)는 자일(子一), 호(號)는 남악(南岳), 시호(諡號)는 숙간(肅簡), 감찰(監察) 홍언(弘彦)의 아들. 1561년(명종 16)에 사마시를 거쳐 156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이어 장령(掌令) 등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구성 부사(龜城府使)로서 병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 등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올랐다. 이어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600년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이해 딸이 선조의 7남 인성군(仁城君)과 결혼했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좌참찬(左參贊)을 역임, 뒤에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다.

윤승훈(尹承勳) 1549(명종 4)~1611(광해군 3) 자(字)는 자술(子述), 호(號)는 청봉(晴峯),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감찰(監察) 홍언(弘彦)의 아들. 1573년(선종 6)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81년 정언(正言)으로 이 이(李 珥)를 탄핵했다가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에 응교(應敎)로서 선유어사(宣諭御史)를 겸직, 전란의 뒷수습에 공을 세워 1594년 충청도 간찰사(忠淸道觀察使)에 오르고 , 이어 형조 참의(刑曹參議)․서로 조도사(西路調度使)를 겸한 뒤 호조 참판(戶曹參判)․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97년 형조 판서로 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 판서가 되었다.

병조 판서를 거쳐 1601년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 이듬해 이항복(李恒福)을 신구(伸救)하려다 3사(司)의 탄핵으로 면직, 곧 기용되어 1603년 좌의정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선조에 대한 존호(尊號) 결정에 소홀했다는 좌의정 류영경(柳永慶)의 모함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곧 신원(申寃)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윤호(尹 皥) 자(字)는 중승(仲昇). 1576년(선조 9) 사맹(司猛)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지평(持平)․교리(校理)를 거쳐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가던 중 사망하였다.

윤방(尹 昉) 1563(명종 18)~1640(인조 18) 자(字)는 가회(可晦), 호(號)는 치천(稚川),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영의정 두수(斗壽)의 아들. 이 이(李 珥)의 문인. 1582년 진사(進士)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591년 아버지가 당쟁(黨爭)으로 유배되자 사직되었다가 이듬해 아버지가 다시 재상(宰相)이 됨으로써 정언(正言)으로 등용, 이어 지평(持平)․교리(校理)․이조 좌랑(吏曹佐郞)․전적(典籍)․응교(應敎)를 지냈다.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에 재직중 또 아버지가 파직당하자 군기시 첨정(軍器射僉正)에 전직되고, 1597년 경상도 순어사(慶尙道巡禦使)로 나갔다가 이어 군기감정(軍器監正)․평산 부사(平山府使)를 지냈다. 1601년 아버지가 죽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습봉(襲封)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 직하여 임진왜란으로 불탄 실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하였다.

도승지(都承旨)․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하자(字)는 정청(庭請)에 불참하고 사직, 은퇴했다가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예조 판서(禮曹 判書)에 등용되었다. 이어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을 거쳐 1627년(인조 5)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강화(江華)에 호종(扈從)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묘사 제조(廟社提調)로 40여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강화에 피난하여 땅속에 파묻어 화를 면하게 했으나 1638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분실하고 나머지 신주를 말에 함부로 실어 한성(漢城)에 옮겼다는 죄로 파직, 연안(延安)에 유배되었다가 곧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다. 1640년(인조 18) 풀려나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윤흔(尹 昕) 1564(명종 19)~1638(인조 16) 초명은 양(暘), 자(字)는 시회(時晦), 호(號)는 도재(陶齋)․청강(晴江), 시호(諡號)는 정민(靖敏), 영의정 두수(斗壽)의 아들. 성 혼(成渾)의 문인.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95년(선조 2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正字)에 이어 전적(典 籍)에 특진, 내외 관직을 거쳐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관련, 파직되고 1620년 서반직(西班職)에 여러번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부총관(副摠管) 등을 거쳐 한성부(漢城府)의 좌․우윤(左右尹)을 역임.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에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江華)에 호종, 화의를 반대 했으며 1632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 163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윤휘(尹 暉) 1571(선조 4)~1644(인조 22) 자(字)는 정춘(靜春), 호(號)는 장주(長洲)․천상(川上), 시호(諡號)는 장익(章翼), 영의정 두수(斗壽)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89년(선조 22) 진사(進士)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1596년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승진하고 이어 사서(司書)․장령(掌令)․필선(弼善)․사간(司諫) 등을 거쳐 전라․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관련, 삭직(削職)당했다가 뒤에 다시 기용되었고 1618년 동지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냈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장흥(長興)․아산(牙山)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627년(인 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기용되어 한성부 좌윤(漢成府左尹)․청주 목사(淸州牧使)․호조와 형조의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 적진에 왕해하면서 화의(和議) 교섭을 했다.

환도 후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했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형조 판서를 거쳐 1639년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641년 공조 판서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增)되었다.

윤훤(尹 暄) 1573(선조 6)~1627(인조 5) 자(字)는 차야(次野), 호(號)는 백사(白沙), 영의정 두수(斗壽)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90년(선조 23) 진사(進士)가 되고 159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고 1599년 호조 좌랑(戶曹佐郞), 1605년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했다.

1612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서 죄인 김직재(金直哉)를 압송(押送)할 때 후대(厚待)하여 관작(官爵)을 삭탈당했다가 그뒤 복관되어 1624년(인조 2)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1627년 부체찰사(副體察使)를 겸임했다.

윤수겸(尹守謙) 1573(선조 6)~1624(인조 2) 자(字)는 명익(鳴翼), 시중(時中)의 아들. 1601년(선조 34)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주서(注書)가 되고, 1603년 감찰(監察)로서 사은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해에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임진왜란 때 불탄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하고, 1604년 예조 좌랑(禮曹佐郞)․정언(正言)․사서(司書)를 역임했다. 이듬해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1607년 전라도 도사(全羅道 都事), 1608년(광해군 즉위) 헌납(獻納)이 되고, 이듬해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 1610년 서흥 부사(瑞興府使)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관련되어 추국을 당했다.

1612년 경상도 양전사(慶尙道量田使)가 되어 양전절목(量田節目)의 문란을 시정하는데 힘썼으며, 1614년 순천부사(順天府使)를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을 때,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소오(宗義智)가 차왜(差倭 : 사절)와 서계(書契)를 보내어 울릉도(鬱陵島)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자 이를 반박, 조선의 영유권을 명확히 했다.

1617년 황연평안등도 조도사(黃延平安等道調都事)로서 철(鐵)을 많이 영납(營納)하였고, 1619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윤간(尹 旰) 자(字)는 유자(幼孜). 조선(朝鮮) 때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윤신지(尹新之) 1582(선조 15)~1657(효종 8)

자(字)는 중우(仲又), 호(號)는 연초재(燕超齋)․현주(玄州), 시호(諡號)는 문목(文穆), 영의정 방(昉)의 아들. 1596년(선조 29)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해숭위(海崇尉)에 봉해졌다.

인조(仁祖) 때 정1품에 이르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강화(江華)로 들어가 소모대장(召募大將)이 되었으며, 이때 갑진(甲津)이 함락되고 적이 부성(府城)에 육박해오자 자살을 기도, 언덕에서 투신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다.

윤숙(尹 숙) 자(字)는 원옥(元玉). 1605년(선조 38) 무과(武科)에 합격하고, 1608년(선조 41) 중시문과(重試文科)에 합격한 후 부원수(副元帥)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윤이지(尹이之) 1589(선조 22)~1668(현종 9) 자(字)는 중소(仲素), 호(號)는 추봉(秋峯), 시호(諡號)는 정효(靖孝), 영의정 두수(斗壽)의 손자, 영의정 방(昉)의 아들.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공조와 호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다.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고 은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여주목사(驪州牧使)에 기용되고, 이듬해에 충청도 관찰사로 특진했다.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전라도 관찰사․강원도관찰사․도승지(都承旨)․경기도관찰사를 역임, 병조․예조․호조의 참판(參判) 등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서 강화를 수비하다 패했다.

해창군(海昌君)에 습봉(襲封)된 뒤 1645년 평안도 관찰사,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 164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다음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1650년(효종 1) 형조 판서, 다시 한성부 판윤을 지낸 후 노인직(老人職)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윤순지(尹順之) 1591(선조 24)~1666(현종 7) 자(字)는 낙천(樂天), 호(號)는 행명(행溟), 두수(斗壽)의 손자, 관찰사 훤(喧)의 아들. 종조(從祖) 윤근수(尹根壽)에게 학문을 배우고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2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를 급제, 검열(檢閱)․언관(言官) 등을 역임했다.

인조(仁祖) 초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아버지가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서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사사(賜死)가 되자 은거했다가 1629년 부교리(副校理)에 등용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南 漢山城)에 왕을 호종(扈從)하여 환도 후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고, 1643년 통신사(通信士)로 일본에 다녀왔다.

1654년(효종 5) 경기도 관찰사로서 소송사건을 속결하지 않고 민원(民怨)을 사서 도배(徒配), 뒤에 풀려 나와 1657년 실록수정청 당상(實錄修正廳堂上)이 되어「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편찬에 참여했고, 대제학(大提學)에 이어 1633년(인조 11) 공조 판서(工曹判書) 에 이르렀다. 시(詩)와 글씨에 뛰어났다.

윤지(尹 土犀) 1600(선조 33)~1644(인조 22) 자(字)는 군옥(君玉), 호(號)는 하빈옹(河濱翁), 영의정 방(昉)의 손자, 해숭위(海崇尉) 신지(新之)의 아들. 1616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설서(設書)를 지낸 후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大北派)의 전횡으로 사직하고 은퇴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지평(持平)에 등용되었다.

정언(正言)․수찬(修撰)․집의(執義) 등을 역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서 교조(敎條)를 만들어 백성을 교화(敎化)했으며, 부병(府兵) 2천 명을 장정(壯丁)으로 교체하고 군기(軍器)를 정비하여 정병(精兵)으로 개편(改編)했다.

1635년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들과 동서양무(東西兩廡)의 위패(位牌)를 뒷산에 묻고 오성․십철(五聖․十哲)의 위폐만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옮겼다. 1637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주목 사(忠州牧使), 다음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641년 부제학으로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하다가 어머니의 병으로 사직을 원했으나 도리어 일시적인 작은 병을 핑계로 왕을 속였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1643년(인조 21)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윤구(尹 坵) 1606(선조 39)~1637(인조 15) 자(字)는 군평(君平), 신지(新之)의 아들, 어머니는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이어 봉교(奉敎)․전적(典籍)을 지냈다.

정언(正言)으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능참배(陵參拜)는 여자로서 불가하다고 규탄했다가 좌천되었고, 설서(設書)를 거쳐 1636년(인조 14)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체찰사(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을 지내다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승진, 이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종(扈從)했다.

윤계(尹 堦) 1622(광해군 14)~1692(숙종 18) 자(字)는 태승(泰升), 호(號)는 하곡(霞谷), 시호(諡號)는 익정(翼正), 영의정 두수(斗壽)의 증손, 첨정(僉正) 면지(勉之)의 아들. 1650 년(효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1664년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낭청(郎廳)으로 있었다.

이듬해 전적(典籍)․감찰(監察)․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 1668년 직강(直講)으로서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를 겸하고, 이듬해 사서(司書), 그호 문학(文學)․지평(持平)․제주목사(濟州牧使)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서 원접사(遠接使) 오시수(吳始壽)가 중국 사신에게 선왕 효종(孝宗)이 신하의 경제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했다하여 이를 극론(極論)하다가 영광(靈光)에 유배, 이어 경성(鏡城)에 이배(移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왔다.

1678년 진주목사(晋州牧使), 1680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府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오고 1682년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승진했다.

1684년 형조판서에 전임했다가 이어 강화(江華)․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689년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이해 기사환국(己巳換局)에 남인(南人)의 집권으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죽었다. 문장․글씨가 뛰어났으며, 1694년 신원(伸寃) 되었다.

윤강(尹 堈) 자(字)는 평숙(平叔). 조선 때 사평(司評)을 지냈다.

윤세기(尹世紀) 1647(인조 25)~1712(숙종 38) 자(字)는 중강(仲綱), 호(號)는 용포(龍浦), 시호(諡號)는 효헌(孝獻), 판서 계(堦)의 아들, 1682년 장령(掌令)을 거쳐 1687년 승지(承旨)에 재직중 비망기(備忘記)의 환수(還收)를 청했다가 파직당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승지로 복직, 1689년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추방당하자 파직,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풀려 나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등용되고, 1703년 반송사(伴送使)를 겸한 뒤 이듬해 서북면 출신의 무신도 선전관(宣傳官)으로 기용하라는 왕명을 시행하지 않았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1705년 호조 판서로 기용되어 우참찬(右參贊)․예조 판서(禮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 이어 좌참찬(左參贊)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했다.

윤택(尹 澤) 자(字)는 춘경(春卿), 호조판서 계(堦)의 손자,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세강(世綱)의 아들. 23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96년(숙종 22) 음보(蔭補)로 영조참봉(永照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701년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이 된 후 종부시주부(宗簿시主簿)․감찰(監察)․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공조와 형조의 정랑(正郞)을 역임. 금산(金山)과 한산(韓山)의 군수(郡守), 청풍부사(淸風府使) 등을 지냈다.

윤세수(尹世綏) 자(字)는 유안(幼安).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윤성시(尹聖時) 1672(현종 13)~1730(영조 6) 자(字)는 계성(季成), 좌찬성(左贊成) 근수(根壽)의 현손(玄孫), 현감(縣監) 서(垿)의 아들. 1699년(숙종 25) 생원(生員)이 되고,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721년(경종 1) 교리(校理)․수찬(修撰) 등을 지내며 소론(少論)의 선봉으로서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게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老論) 4대신을 탄핵하여 유배케 했다.

이듬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4대신이 사사(賜死)된 뒤 계속 해서 노론의 숙청에 앞장을 섰으며, 헌납(獻納)․이조 좌랑(吏曹佐郞)․장령(掌令)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1724년 영조(英祖) 즉위 후 노론이 재집권하자 삭출(削黜)되고,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면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어 고문받던 끝에 장살(杖殺)되었다.

윤유(尹 游) 1674(현종 15)~1737(영조 13) 자(字)는 백수(伯修)․백숙(伯叔), 호(號)는 만하(晩霞), 세희(世喜)의 아들. 1702년(숙종 28)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이 된 후 진천현감(鎭川縣監) 등을 역임했다.

171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721년(경종 1) 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 이듬해 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 1724년 동래부사(東萊府使), 이해 영조가 즉위한 뒤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부제학(副提學)․승지(承旨)등을 지냈다.

이듬해 노론(老論)이 득세하자 앞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삭출(削黜)당하였다가 1723년 (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小論)이 재집권하자 대사간에 복직, 승지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대사헌․예조참판(禮曹參判) 이 되고, 1730년 병조 참판으로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府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던 도중 발병하여 되돌아왔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731년 형조 판서에 오르고 1733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지경연사(知經莚事)를 겸직, 다음해 병조 판서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공조․호조․이조․예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윤급(尹 汲) 1679(숙종 5)~1770(영조 46) 자(字)는 경유(景孺), 호(號)는 근암(近菴),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영의정 두수(斗壽)의 5대손, 황해도 관찰사 세수(世綏)의 아들. 이 재(李 縡)․박필주(朴弼周)의 문인. 1725년(영조 1) 진사(進士)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조 좌랑(吏曹佐郞)․집의(執義)․부응교(副應敎)를 역임하고 173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744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여 일신현감(一新縣監)에 촤천, 1746년 도승지(都承旨)로 기용되어 이해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8년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이듬해 이조 참판에 전직했으나 다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여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좌천당했다.

1751년 부제학(副提學)으로 등용, 그후 대사헌․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형조 판서(刑曹判書)․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면서 계속하여 탕평책을 반대, 누차파직 혹은 좌천 당하다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란 독특한 서체(書體)를 이룩했다.

윤순(尹 淳) 1680(숙종 6)~1741(영조 17) 자(字)는 중화(仲和), 호(號)는 백하(白下)․학음(鶴陰), 지평(持平) 세선(世善)의 아들. 1712년(숙종 38)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723년(경종 3) 응교(應敎)로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 3)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직,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가 되고, 1729년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예조 판서를 거쳐 1735년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 1739년(영조 15)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 평안도 관찰사에 전직하여 관하를 순찰하다 벽동(碧潼)에서 객사 했다. 당대의 이름난 서예가로서 송나라 미남궁체(米南宮體)를 완전히 터득했다.

윤득화(尹得和) 1688(숙종 14)~1759(영조 35) 자(字)는 덕휘(德輝), 금천 현감(衿川縣監) 상명(商明)의 아들. 1725년(영조 1)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727년 사관(史官)으로 윤 증(尹 拯)이 그의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죄를 추론(追論)하여 삭직(削職)되었다.

이듬해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서 기용, 지평(持平)을 거쳐 1729년 사서(司書)로 노론(老論) 4대신을 신원(伸寃)하고 소론(少論) 이광좌(李光佐)의 죄를 극언한 후, 경성부판관(鏡城府判官)에 좌천되었다.

1731년(영조 7) 진위사(鎭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지평(持平)이 되고, 수찬(修撰)을 거쳐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이광좌의 죄를 논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된 민형수(閔亨洙)를 변호하다가 다시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좌천되었으나 곧 교리(校理) 겸 한학교수(漢學敎授)로 발탁되었다.

이어 호조 참의(戶曹參議)․대사간(大司諫)․좌부승지(左副承旨)․대사성(大司成)․도승지(都承旨)․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등을 역임, 대사헌에 올라 송인명(宋寅明)이 당(黨)을 만들어 국권(國權)을 전횡(專橫)한다고 탄핵하다 파직되었다. 뒤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기용,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다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병사했다. 글씨를 잘 썼다.

윤득우(尹得雨) 자(字)는 윤경(潤卿). 조선에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윤득의(尹得毅) 자(字)는 사홍(士弘).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윤득성(尹得聖) 자(字)는 군경(君敬), 호(號)는 향서(香西). 조선조(朝鮮朝)에 형조 참판(形曹參判)을 지냈다.

윤득양(尹得養) 자(字)는 계화(季和). 조선(朝鮮) 때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다.

윤득경(尹得敬) 자(字)는 성직(聖直). 1736년(영조 1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뽑혔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윤득규(尹得逵) 자(字)는 형로(亨路). 조선 때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다.

윤득맹(尹得孟) 자(字)는 성여(聖與). 조선(朝鮮)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윤득재(尹得載) 자(字)는 자후(子厚), 호(號)는 응휴(應休).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옥당(玉堂)에 보직되고 삼사(三司)를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및 병조․이조 판서(兵曹․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 (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윤득영(尹得英) 자(字)는 낙이(樂而). 조선(朝鮮) 때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냈다.

윤문동(尹文東) 자(字)는 경회(景晦), 호(號)는 오하(梧下). 조선조(朝鮮朝)에 형조 참판(形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윤학동(尹學東) 자(字)는 사행(士行),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옥당(玉堂)에 뽑혔으며 대사헌(大司憲)․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윤상동(尹尙東) 자(字)는 위로(渭老), 호(號)는 중암(中菴). 조선(朝鮮)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윤현동(尹顯東) 1713(숙종 39)~1782(정조 6) 자(字)는 성중(誠中), 호(號)는 석운(石雲) 참판 득화(得和)의 아들. 일생을 향리에 묻혀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윤면동(尹冕東) 1720(숙종 46)~? 자(字)는 자목(子穆), 호(號)는 오헌(吳軒), 신지(新之)의 5대손, 택현(澤顯)의 아들. 1756년(영조 3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승지(承旨)․양주 목사(楊州牧使) 등을 지내고, 정조(正祖) 때 사직(司直)으로서 병마참지(兵馬參知)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윤득부(尹得孚) 1723(경종 3)~1799(정조 23) 자(字)는 사휴(士休), 호(號)는 신암(信庵)․신재(信齋), 대제학 근수(根壽)의 후손, 원(源)의 아들. 박필주(朴弼周)의 문인.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1780년(정조 4) 정언(正言)으로 세도(世道)를 부 리던 홍국영(洪國榮)의 죄를 논하고 그 일파인 서명선(徐明善)의 처단을 주장했다.

이듬해 은산 현령(殷山縣令)이 되었다가 수찬(修撰)으로 기용, 1784년 다시 정언이 되어 윤 증(尹拯)의 복관(復官)을 반대하다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당했다. 뒤에 석방되어 1790년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고, 이어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거쳐 1794년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승진, 그후 승지(承旨)․형조 참판(形曹參判)․대사간 (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1796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좌유선(左諭善)을 겸했다.

윤취동(尹聚東) 자(字)는 여오(汝五), 호(號)는 응암(凝菴), 득량(得良)의 아들. 김양행(金亮行)의 문인.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했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정릉참봉(貞陵參奉)이 되었다. 직장(直長)․주부(主簿) 등을 거쳐 용인현감(龍仁縣監)이 되고, 노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윤시동(尹蓍東) 1729(영조 5)~1797(정조 21) 자(字)는 백상(伯常), 호(號)는 방한(方閒),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판서 세기(世紀)의 증손, 득민(得敏)의 아들, 유척기(兪拓基)의 사위.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설서(設書)가 되고,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하는 동안 1756년 당론을 운위했다는 죄로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1763년(영조 39) 풀려 나와 1765년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고, 1768년 좌부승지(左副承旨)에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논하다가 전리에 방축, 이어 1772년에는 갑산(甲山)에 유배, 뒤에 방환되었다. 또 1776년(정조 즉위)에도 경기 관찰사로서 당론을 논의했다는 죄로 남해현(南海縣)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는 등 탕평책(蕩平策)에 순응하지 않고 당론을 일삼은 죄로 여러번 유배생활을 했다.

1786년(정조 10)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발탁되고, 1788년 형조 판서에 올랐다가 다시 당론을 운위했다는 죄로 삼화(三和)에 유배, 1789년 풀려 나와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795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윤계동(尹桂東)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윤현동(尹顯東) 자(字)는 성중(誠中), 호(號)는 석운(石雲). 조선조(朝鮮朝)의 학자로 평생 향리(鄕里)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여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윤노동(尹魯東) 자(字)는 성첨(聖詹), 호(號)는 용서(蓉西).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삼사(三司)를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다.

윤서동(尹序東) 자(字)는 치구(穉球). 조선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윤홍열(尹弘烈) 자(字)는 사의(士毅), 호(號)는 허주(虛舟), 시호(諡號)는 경헌(景憲). 조선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윤승열(尹承烈) 자(字)는 사구(士逑). 조선(朝鮮)에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윤장열(尹長烈) 자(字)는 상보(상甫). 조선(朝鮮)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윤욱열(尹郁烈)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에 함종부사(咸從府使)로서 관군(官軍)을 이끌고 박천 송림리(博川松林里) 싸움에서 난군(亂軍)을 격파하였고, 이어 곽산(郭山) 싸움에서 반군을 대파하였으며 선천(宣川)․철산(鐵山)등지를 회복하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1814년(순조 14) 황해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1826년(순조 26)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고 그뒤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윤우열(尹羽烈) 자(字)는 문서(文瑞). 조선조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윤명열(尹命烈) 1762(영조 38)~1832(순조 32) 자(字)는 언국(彦國), 호(號)는 석유(石囿),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기동(起東)의 아들. 면동(冕東)에게 입양(入養).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를 급제, 주서(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뒤에 감찰(監察)․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우승지(右承旨)에 올랐다.

1805년(순조 5) 동래(東萊)에서 왜역관(倭譯官) 최 괴(崔 王回)가 왜인(倭人)과 공모, 인장(印章)을 위조하여 재화를 훔치려던 사건이 발생하지 동래부 안핵사(按覈使)가 되어 최 괴를 주살했다.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재직중 도적을 잡지 못한 죄로 삭직(削職), 뒤에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등용되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대사간(大司諫)․좌승지(左承旨)를 역임, 1821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동지 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전직,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을 역임, 1823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뒤에 이조 참판(吏曹參判)․호조참판(戶曹參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윤익열(尹益烈) 자(字)는 가급(可及), 호(號)는 송서(松西).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윤정열(尹鼎烈) 자(字)는 여수(汝受).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윤풍열(尹豐烈) 자(字)는 대유(大有). 조선(朝鮮)에서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윤병열(尹秉烈) 자(字)는 백교(伯敎). 조선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윤구동(尹久東) 자(字)는 치항(稚恒). 조선조(朝鮮朝)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윤치원(尹致元) 자(字)는 대숙(大叔). 조선(朝鮮)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윤치용(尹致容) 자(字)는 대수(大受).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조선(朝鮮)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윤치희(尹致羲) 1797(정조 21)~1866(고종 3) 초명은 치수(致秀), 자(字)는 성여(成汝), 호(號)는 금범(錦帆),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참판(參判) 명렬(命烈)의 아들. 경렬(敬烈)에게 입양(入養). 1827년(순조 2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834년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갔다. 1838 년(헌종 4)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보완하여 광명전(光明殿)에 옮길 때 집례(執禮)로서 일을 처리하였고, 1842년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1846년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어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예방승지(禮房承旨) 등을 역임, 1849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승진, 1853년(철종 4) 예조 판서로 존호도 감제조(尊號都監提調)를 겸직,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다.

1855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형조 판서,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내고 1863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윤치정(尹致定) 1800(정조 24)~? 자(字)는 사능(士能), 호(號)는 석취(石醉),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판서 세기(世紀)의 5대손, 경렬(慶烈)의 아들.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내고 1834년(순조 34)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갔다.

1845년(헌종 11) 한성부(漢城府) 좌윤을 거쳐 1847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50년(철종 1)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듬해 대사성(大司成), 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864년(고종 1)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다.

윤치성(尹致性) 자(字)는 성지(性之), 호(號)는 미제(迷齊), 조선(朝鮮)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윤치겸(尹致謙) 자(字)는 중익(仲益), 호(號)는 현허당(玄虛堂). 조선조(朝鮮朝)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다.

윤우선(尹宇善) 자(字)는 보여(輔汝), 호(號)는 이당(彝堂). 조선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윤승구(尹升求) 자(字)는 순화(舜華), 호(號)는 매사(梅史). 조선조에 내장원경(內藏院卿)을 지냈다.

윤치정(尹致鼎) 자(字)는 성구(聖九). 조선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윤치원(尹致元) 자(字)는 대숙(大叔).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윤항선(尹恒善) 호(號)는 송오(松塢). 조선(朝鮮)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였다.

윤치화(尹致和) 1821(순조 21)~? 자(字)는 경중(景中), 좌열(佐烈)의 아들. 1855년(철종 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초임(初任)되었고 정언(正言)․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 1863년(철종 14)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1877년(고종 14)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이해 10월 일본의 전권대신(全權大臣) 하나부사(花房義質)가 부산에 상륙하여 일본공사의 경성 주차(京城駐箚)와 개항장(開港場)을 요청하는 일본정부의 요구를 조정에 보고했다가 정부의 거부 지시를 받고 그들의 무단 상륙과 해변 측량을 항의했다.

이듬해 일본의 야마노시로(山城祐長)가 부산항 관세(關稅) 문제로 항의를 제기해 왔으나 정부의 묵살 지시로 수리를 거부했고, 1879년 일본군이 상륙, 훈련을 빙자하여 동래로 행진해 오자 이에 격분한 백성들이 돌을 던져 저항한 사실을 핑계삼아 관아에 함부로 들어오므로 이를 막다가 판찰관(辦察官) 현석운(玄昔運)과 함께 그들의 칼에 부상을 당했으나 끝까지 수교(修交)를 거부, 일본의 만행을 항의 했다. 뒤에 정부의 정책 변경으로 문호가 개방되고 수교(修交)가 이룩되자 일본의 압력으로 파면당했다.

윤정구(尹正求) 자(字)는 사교(士敎), 호(號)는 하진(下震). 조선(朝鮮)때 찬성(贊成)을 지냈다.

윤치직(尹致稷) 자(字)는 경백(景百). 조선조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윤경선(尹慶善) 자(字)는 성필(聖弼). 조선 때 순천 군수(順天郡守) 겸 성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成川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윤정선(尹定善) 1826(순조 26)~1865(고종 2) 자(字)는 경안(景安), 이조 참판(吏曹參判) 치희(致羲)의 아들. 1848년(현종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853년(철종 4)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갔다.

1856년 교리(校理)를 거쳐 1860년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2년 후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어 대사성(大司成)에 재임되었다. 1835년(헌종 1)부터 1849년까지의 헌종(獻宗) 재위동안의 조보(朝報)를 초(抄)하여「난선(爛選)」을 편찬했다.

윤용선(尹容善) 1829(순조 29)~1904(광무 8) 자(字)는 경규(景圭), 호(號)는 자유재(自由齋),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참판 치의(致義)의 아들. 1885년(고종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96년(건양 1)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에서 총리대신(總理大臣)에 올랐다가 이해 관제 개혁으로 의정(議政)이 되 고, 이때부터 1903년(광무 7)까지 6회나 의정을 역임했다. 정계의 원로로 성격이 원만 온후했다.

윤영렬(尹英烈) 자(字)는 백웅(白雄), 호(號)는 경제(敬齊). 조선조(朝鮮朝)에 육군참장(陸軍參將)을 역임하였다.

윤웅렬(尹雄烈) 1840(현종 6)~1911 치호(致昊)의 아버지. 아산(牙山) 출신. 1856년(철종 7) 무과(武科)에 급제, 1861년 충청감영 중군 겸 공주 중군(忠淸監營中軍兼公州中軍), 이듬해 함격북도 북청 병마 우후 토포사(咸鏡北道北靑兵馬虞侯討捕使)가 되고 1878년(고종 15) 통리기무아문 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 등을 지내고, 1880년 별군관(別軍官)으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를 거쳐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신설되자 훈련원 하도감(訓鍊院下都監)의 신병대장(新兵隊長)의 영관(領官)이 되었으나 이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의 나가사끼(長崎) 피했다.

그후 귀국하여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개화당(開化黨) 내 각의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나 정변이 실패하자 1886년 능주(綾州)로 귀양갔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화파가 다시 집권하자 풀려 나와 경무사(警務使)․군부대신(軍部大臣)등을 지내고, 1896년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1910년 한일합방 때 일본정부에의해 남작(男爵)이 되었다.

윤정구(尹定求) 1841(헌종 7) 자(字)는 사교(士敎), 호(號)는 하운(下雲), 회선(會善)의 아들.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93년(고종 30)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찬정(贊政)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앞서 1870년(고종 7) 남해(南海)의 금산영응기적비(錦山靈應紀績碑)와 대한 중흥 송덕축성비(大韓中興頌德築誠碑)의 비문을 찬(撰)하고 썼다.

윤정구(尹正求) 자(字)는 대이(大而), 호(號)는 석하(石下). 조선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윤의선(尹宜善) 자(字)는 경교(景敎).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로 존경을 받았다.

윤용구(尹用求) 1853(철종 4)~1936 자(字)는 주빈(周賓), 호(號)는 석촌(石村)․해관(海觀)․장위산인(獐位山人), 부사(府使) 회선(會善)의 아들. 남령위(南寧尉) 의선(宜善)에게 입양(入養). 1871년(고종 8) 직장(直長)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지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이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895년 이후 법부(法部)․탁지부(度支部)․내무(內務)의 대신(大臣)으로 10여회나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 하고 서울 교외의 장위산(獐位山) 밑에 은거했다.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고 특히 해서(楷書)․행서(行書)․금석문(金石文)을 많이 썼으며, 죽란(竹欄)을 잘 그렸다. 한일합방 뒤에 일본정부의 남작(男爵)이 되었으나 거절했다.

윤치호(尹致昊) 1865(고종 2)~1945 호(號)는 좌옹(佐翁). 충청도 출신.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고종 18) 17세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수원(隨員)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미국에 건너가서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미국공사 푸우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이듬해 주사(主事)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總理大臣秘書官)을 거쳐 학부 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으로 투옥,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때 다시 복직, 민영환(閔泳煥)을 따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했다. 귀국 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 1898년(광무 2) 제2대 회장이 되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을 겸임했다.

이해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 시정개혁(施政改革) 6개조를 결의 상소하여 자주독립과 경제번영을 위한 민중의 의사를 반영시켰으며 그후 황국협회(皇國協會)의 모함과 테러로 피신, 독립협회도 해산당했다. 이듬해 정부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하려 했으나 거절하고 함경도 덕원 부윤(德源府尹)으로 나갔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과 국력 배양에 힘썼으며, 1910년(융희 4) 대한 기독교 청년회를 창설, 회장이 되고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체, 이듬해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윤희구(尹喜求) 1867(고종 4)~1926 자(字)는 주현(周賢:周玄), 호(號)는 우당(于堂), 참의(參議) 홍선의 아들.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897년(광무 1) 조정에 사례소(史禮所)가 설치되자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직원이 되어 「대한예전(大韓禮典)」을 편찬했다.

그후 참상(參上)이 되어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증수(增修)하고, 규장각(奎章閣)에 보직되어「양조보감(兩朝寶鑑)」을 편찬했다. 한일합방 후 총독부 중추원 촉탁(中樞院囑託)이 되어 경학원 부제학(經學院副提學)을 겸했으며, 1916년 장지연(張志淵)․오세창(吳世昌) 등과 「대동시선(大東詩選)」을 편찬했다.

윤우선(尹寓善) 자(字)는 경위(景爲). 조선조(朝鮮朝)에 황후궁 대부(皇后宮大夫)에 이르렀다.

윤덕영(尹德榮) 1873(고종 10)~1940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철구(徹求)의 아들, 택영(澤榮)의 형, 순정효 황후(純貞孝皇后)의 삼촌, 1894년(고종 31)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비서감 우비서랑(秘書監右秘書郞)이 되고, 총리대신 비서관 겸 참서관(參書官)․시독관(侍讀官)․ 비서승(秘書丞)․농상공부 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내부 지방국장 등을 역임, 1901년(광무 5)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 했다가 이듬해 철도원 부총재(鐵道院副總裁)가 되어 경부선(京釜線)의 철도부설(鐵道敷設)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지계아문 부총재(地契衙門副總裁)․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비서원경․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겸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의정부 찬성(贊成)을 지냈다. 1908년(융희 2) 시종원경(侍從院卿)이 되었다.

윤복영(尹復榮) 자(字)는 순교(舜敎), 호(號)는 기재(夔齋). 1913년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하였고 1919년 길림(吉林)에서 북군정서 길림분서고문(北軍政署吉林分署顧問)․전만주통일준비회 집행위원(全滿洲統一準備會執行委員)․북만주 신민부고문(北滿洲新民府顧問)․길림 성 성외교위원(吉林省城外交委員) 등을 지냈다.

1927년 일본형사(日本刑事)와 중국군경(中國軍警)의 기습으로 이탁(李鐸)․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체포되어 43일만에 석방되었고, 남북만주 한국독립운동단체 3부 통합회의에 길림 대표로 참석하였고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1930년 길림성(吉林省) 수원현(綏遠縣)의 조위민(趙尉民) 소유의 땅을 운남성(雲南省) 곤양현(昆陽縣)에 귀속하려 할 때 이를 양수(讓受)받아 병대(兵隊)의 교련장(敎鍊場)으로 하려 하였으나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 좌절되었다.

윤택영(尹澤榮) 자(字)는 계덕(季德), 호(號)는 동음(桐陰), 한말(韓末)의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윤명구(尹命求) 자(字)는 복여(福汝). 구한국 육군보병참위(陸軍步兵參尉)로서 군(軍) 해산 때 동기생 2명과 중국(中國)으로 망명(亡命)하여 류동열(柳東悅) 교관(敎官)과 더불어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윤극영(尹克榮) 1903~1988 동요작가, 동요 작고가, 아동문화운동가. 세칭 반달할아버지. 서울 출생.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 도오꾜오 음악학교, 동양음악학교 등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1923년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 24년 동요 단체인 <다알리아회>를 조직해 어린이 운동과 동요 창작, 작곡 운동을 전개했과, 한때 간도(間島)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으며, 하르빈에서 예술 활동을 하다가 귀국, <노래 동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24년 10월 <반달> <설날> <까치까치 설날> <할미꽃> <고기잡이> <꾀꼬리> <옥토끼 노래> 등 널리 알려진 장착 동요를 발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고드름> <따오기> 등 작곡을 통한 동요 보급 운동을 동시에 전개, 점층 수법에 의한 동요 창작과 작곡을 통해 초창기 아동 문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1956년 제1회 소파상 수상, 63년 서울교육대학제정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됐고, 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아, 8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