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해남윤씨(海南尹氏),해남윤씨시조, 윤존부(尹存富),해남윤씨유래,해남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8 17:39 수정일 : 2018-08-01 14:43

해남윤씨시조 및 해남윤씨유래(본관)

해남(海南)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의 색금현(塞琴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침명(浸溟)으로 고려 양무군(陽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해남(海南)으로 고쳐 영암군(靈岩郡)에 예속시켰다가, 1409(태종 9) 진도현(珍島縣)과 합하여 해진현(海珍縣)이라 했으며, 1895(고종 32)에 현()을 폐지하고 해남군(海南郡)이 되었다.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고려(高麗) 중기 때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과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 후 7세손까지의 소목(昭穆)도 미상(未詳)하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직장(司醞直長)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단학(丹鶴) 형제를 데리고 강진(康津)으로 은둔(隱遁)하여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8세손 광전(光碘)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자리를 잡고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온 해남 윤씨는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대()에 와서 크게 가세(家勢)가 융성하여 가문의 기반이 다져졌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던 구(: 효정의 맏아들)1516(중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호당(湖堂)에 뽑히고 주서(注書)에 어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으나 기묘사(己卯士禍) 때 삭직당해 영암(靈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복관(復官)되었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후일 현손 윤선도(尹善道) ․류희춘(柳希春) ․최 부(崔溥) ․임억령(林億齡) 등과 더불어〈해남 오현(海南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의중(毅中)도 명종조(明宗朝)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직제학(直提學)과 형, 예조참의(, 禮曹參議)․ 도승지(都承旨)․ 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직했고,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572(선조 5) 평안도 관찰사와 이듬해 병조 참판(兵曹參判)․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가 동인(東人)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삭출되었다.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로 관찰사 유기(惟機)에게 입양했던 고산(孤山) 선도(善道)는 혼조의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와 은거지에서 생활하며 시가(詩歌)의 미답지를 개척하고 우리말의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었고 우리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616(광해군 8) 서른 살 때 일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서 북인(北人)의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영의정(領議政) 박승종(朴承宗)의 전횡을 고발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지루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는 시()를 읊기를 좋아했으나 쓰기를 싫어했다고 하며 일생을 경륜(經倫)과 절의(節義)로 살았으며, 울분은 문학으로 발산했다. 문학과 함께 인품으로도 명망을 받았던 고산은 그를 못살게 하였던 정적(政敵) 원두표(元斗杓)가 앓아 누웠을 때 갖가지 비약(秘藥)을 써서 낫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효종(孝宗)의 스승이기에 임금은 항상 고산을 가까이 두고 싶었으나, 당시 성세(盛勢)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逡吉) 등 집권자들에 의하여 가혹한 정치적인 보복을 받았다.

고산은 74세때 최악의 유배지라는 삼수(三水 : 함경남도 벽지)에 귀양갔다가 81세에 풀려나서 완도의 보길도에서 생을 마쳤다.

효종(孝宗)이 세자(世子)였을 때 수원(水原)에 살면서 고산을 항상 곁에 두고 싶어 집을 지어 주었는데, 효종이 작고한 뒤에 그 집을 뜯어 배로 고향인 해남 연동에 옮겨 지금도 남아 있다. (사적 제167)


그밖에 해남 윤씨를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형인 윤()을 비롯, 아들․조카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신()이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다시 전장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절하여 화암사(花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치경(致敬)과 동철(東喆)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함께 순절하였다.

그외 많은 인물들이 국난극복에 신명을 바쳐 앞장섰으며, 고산의 증손(曾孫) 두서(斗緖)는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통하여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겸재(謙齋) 정 선(鄭歚) 등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불리웠고, 그의 아들 덕희(德熙)도 맹영광(孟永光)의 영향을 받아 말()과 신선(神仙)을 잘 그려 아버지인 두서(斗緖)와 함께 <쌍절>로 일컬어졌다.

구한말에 와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기(廷琦)가 경사(經史)와 문장에 정통했으며 송()나라 미불(米芾)의 서체(書體)를 터득한 글씨로 필명을 떨쳤다.

주찬(柱瓚)은 고종(高宗)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다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위해 결사대를 편성하는 등 항일투쟁에 공헌하여 의절(義節)과 학문(學問)의 전통가문인 해남 윤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남윤씨(海南尹氏)는 남한(南韓)66,3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해남윤씨조상인물

윤환(尹 桓) 고려조(高麗朝)에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윤녹화(尹祿和) 고려(高麗) 때 진사(進士)를 지냄.

윤광전(尹光琠) 고려조에 영동정(令同正)․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

윤단봉(尹丹鳳) 고려 말(高麗末) 우왕(禑王)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낙향하여 강진(康津)에 은거하였다.

윤단학(尹丹鶴) 고려 때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역임.

윤천우(尹天佑) 조선조에 부정(副正)을 역임.

윤사보(尹思甫) 조선 때 창신교위(彰信校尉)․중단사직 좌통례(左通禮)를 역임.

윤종(尹 種) 조선 때 호군(護軍)을 역임.

윤경(尹 耕) 조선에서 사간원 사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

윤사서(尹思瑞) 조선(朝鮮) 때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

윤강(尹 江) 조선 때 안산군수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

윤처지(尹處智) 조선조(朝鮮朝)에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윤효정(尹孝貞) 연산조 때 호조참판 역임

윤충은(尹忠殷)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윤충언(尹忠彦) ()는 형백(亨伯), ()는 율리(栗理). 조선(朝鮮)때 목사(牧使)를 역임.

윤안국(尹安國) ()는 언보(彦甫), ()는 일덕재(逸德齋).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윤경우(尹景佑) ()는 흥방(興邦). 조선 때 시독관(試讀官)을 지냄.

윤세좌(尹世佐) ()는 충보(忠甫).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냄.

윤순(尹 循) ()는 강정(講亭). 조선 중종(中宗) 대 예문관 교수(藝文館敎授)․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남.

윤구(尹 衢) 14951542 자(字)는 형중(亨仲), 호(號)는 귤정(橘亭),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1513년(중종 8) 생원이 되고, 15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듬해 주서(注書)에 이어 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등용되었다. 1519년(중종 33)복관되었다. 문장(文章)에 능했다.

윤행(尹 行) ()는 대용(大用), ()는 졸재(拙齋).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능성 현령(綾城縣令)을 거쳐 진주․동래․제주․나주․광주 목사(晉州 東萊․濟州․羅州․光州牧使) 8()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윤복(尹 復) ()는 원례(元禮), ()는 석문(石門)․행당(杏堂),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목사(牧使) ()의 아우. 1534(중종 29) 생원(生員)이 되고, 153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53(명종 8) 낙안 군수(樂安郡守), 1568(선조 1) 선공 감 부정(繕工監副正)이 되고, 사성(司成)․수찬(修撰)․장령(掌令)․교리(校理)․집의(執義)․좌부승지(左副承旨)․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

윤의중(尹毅中) 15241597 자(字)는 치원(致遠), 호(號)는 낙천(駱川), 정랑(正郞) 구(衢)의 아들. 1548년(명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저작(著作) 등을 거쳐 1553년 부수찬(副修撰)으로 검토관(檢討官)을 겸했고, 이듬해 부교리(副校理)로서 제주 선위사(濟州宣慰使)가 되어 나갔다.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고, 1557년 검상(檢詳)․사인(舍人), 뒤에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예조참의(禮曹參議)․승지(承旨) 등을 거쳐 1562년 대사성(大司成), 이어 부제학(副提學)․대사간, 병조와 호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1566년 호조 참판(戶曹叅判)으로 안주 영위사(安州迎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명종(明宗)이 죽자 이조 참판(吏曹叅判)․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1572(선 조 5) 평안도 관찰사, 이듬해 병조참판․대사헌(大司憲), 1574년 대사간․예조 참판 등을 역임, 1576년 형조 판서에 올랐다. 동인(東人)으로서 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때 삭출(削黜) 되었다.

윤광계(尹光啓) 15591619 자(字)는 경열(景說), 호(號)는 귤옥(橘屋), 목사(牧使) 행(行)의 손자, 화중(和中)의 아들. 조 헌(趙憲)의 문인. 1585년(선조 18) 생원(生員)이 되고,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01년 주서(注書)․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거쳐 1603년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서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역대실록(歷代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했다.

이듬해 예조 정랑(禮曹正郞), 1606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다음해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조 헌의 문인이었으므로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았고,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말직을 전전하다가 고향에 은퇴했다. 격조 높은 시작품을 남겼다.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참찬(叅贊) 의중(毅中)의 손자,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 관찰사 유기(惟幾)에게 입양(入養). 1612년(광해군 4) 진사(進士)가 되고, 1616년 성균관(成均館)의 유생으로서 권신 이이첨(李 爾瞻) 일당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이듬해 경원(慶源)에 유배, 이어 기장(機張)에 이배되는 등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석방,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海南)에 내려갔으며, 찰방(察訪)․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사퇴,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어 특히 봉림 대군(鳳林大君 : 효종)을 보도(輔導)했다.

이듬해 공조 좌랑(工曹佐郞)․형조 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호조 정랑․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예조 정랑(禮曹正郞)․문학(文學)을 지냈고, 이해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 현감(星山縣監)에 좌천되었다가 1635년 파직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왕을 호종하지 않아 화의가 성립된 뒤 영덕(盈德)에 유배, 이듬해 방환된 후부터 은거했다.

1652(효종 3) 왕명으로 불리어 사예(司藝)를 거쳐 예조 참의(禮曹叅議)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 다시 은퇴했다가 1657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기용되고, 이듬해 공조 참의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같은 남인(南人)인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을 철폐하려는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노쟁하다가 3()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었다.

남인의 거두로서 1659년 효종(孝宗)이 죽자 산릉 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수원(水原)에 장지를 정했다가 서인(西人)의 반대로 묵살되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3년설을 주장, 서인들의 정치세력을 꺾으려다가 서인들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됨으로써 삼수(三水)에 유배되고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어 위리안치(圍籬安置), 1667(현종 8) 방환되었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으며, 그 동안의 작품은「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경원 배소에서 지은「견회요(遣懷謠)」와「우후요(雨後謠), 영덕 배소에서 풀려나와 고향에서 지은「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노후에 은퇴하여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의 시가(詩歌)는 미답지를 개척하고 우리말 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활용한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1675(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윤신(尹 紳) ()는 사진(士搢).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형() 윤 륜(尹 綸)과 아들․조카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웠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용감히 싸우다 1010일 모두 순절(殉節)하였다. 화암사(花巖祠)에 제향(祭 享)되었다.

윤이경(尹履慶) ()는 사영(士榮). 양근 군수(楊根郡守)를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항쟁하다 순절(殉節)하였다. 화엄사(花巖祠)에 제향되었다.

윤익경(尹益慶) ()는 탁영(卓榮).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倭賊)을 막았으며,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항거하다가 순절(殉節)하여, 화암사에 제향(祭享)되었다.

윤륜(尹 綸) ()는 사언(士言).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윤신(尹紳)․윤치경(尹致慶)․윤동철(尹東喆)과 함께 병치(兵峙)에서 싸우다 순국(殉國)하였다.

윤치경(尹致敬) ()는 일지(一之).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윤신(尹紳)․윤륜(尹綸)․윤동철(尹東喆)과 더불어 왜적(倭賊)에 항거하다 순국(殉國)하였다. 화암사(花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