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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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8 13:49 수정일 : 2018-07-26 15:17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은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기울고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창업에 훈고을 세운 명신(名臣)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용연보감(龍淵寶鑑) 」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고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파평(坡平)은 경기도(京畿道) 파주군(坡州郡)에 위치한 파평면의 옛 지명이다. 파주는 본래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때 파주사현(坡州史懸)이었는데 1398(조선 태조 7)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坡平懸)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고 하였고, 태종(太宗) 때는 교하현(交河懸)을 폐지, 이에 병합하여 도호부(都護部)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교하현을 다시 복구시켰으나 도호부는 그대로 두었다. 1461(세조 7)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 1895년 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하현을 폐합하였다.

씨족사 개요 

특히 시조 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 2등공신(璧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그후 신달의 현손(玄孫) ()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宣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내고, 1107(예종 2)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9지구에 성()을 쌓아 참범하는 여진을 평정(平定)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번() 세조(世祖)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의 아들 삼형제(三兄第)중 맏아들 사분(士昐)이 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영동령부사(領敦寧府事), 둘째 아들 사윤(士昀)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

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셋째 사흔(士昕)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름으로써 형제 정승(政丞)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사분(社昐)과 사흔(士昕)의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王妃)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政治的)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곤()은 정종조(定宗朝)의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파령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1408(태종 8)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다녀온 후 세종(世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올랐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호(: 곤의 손자)는 성종비(成宗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뒤 영돈령부사(寧敦寧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필상(弼商)은 세조(世祖) 때의 총신(寵臣)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낼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우참찬(右參贊)에 특진(特進)되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하여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공을 세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으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약(賜藥)을 받았다. 필상(弼商) 증손(曾孫) ()1537(중종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종중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한 뒤 호조 판서(戶曹判書)․돈령부사(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난「국간집(菊磵集)」을 저술했다.

목사(牧使) ()의 아들로 세종(世宗) 때 좌찬성(左贊成)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사로(師路)는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때 좌익공익(左翼功臣)에 책록되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의 아들 헌주(憲注)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후,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파령 윤씨(坡平尹氏)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지내고 기로소(妓老所)에 들어간 강()과 그의 다섯 아들 지미(趾美)․지선(趾善)․지완(趾完)․지경(趾慶)․지인(趾仁) 형제가 크게 현달(賢達 )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그 중에서 현종(顯宗) 때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병․이․공조 판서(兵․吏․工曹判書) 등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지선(趾善)과 숙종(肅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파령군(坡平 君) 에 봉해진 비경(飛卿)과 그의 손자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봉구(鳳九)는 학행(學行) 뛰어난〈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고, 봉오(鳳五)는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른 봉조와 함꼐 명성을 떨쳤다.

당대의 덕망높은 학자였던 심형(心衡)은 비경(飛卿)의 증손으로 영조(英祖) 때 부제학(副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속종(肅宗) 때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증()은 수차에 걸쳐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 등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당시 격렬한 사색 당쟁(四色黨爭)에 깊숙이 가담하여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송시열(宋時烈) 중심의 노론(老論)에 대항하며 이산(尼山)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종(仁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오른 인경(仁鏡)과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이른 동도(東度)가 뛰어났으며, 학자(學者)로 명망(名望) 높은 정()과 경남(景男). ()등은 학문으로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이름난 준희(俊熙)와 창석(昌錫)․기섭(기燮)․해()․애경(愛卿)․석구(錫求)․현진(顯振) 등이 구국(救國)의 신념(信念)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으로 일본군(日本軍)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의사(義士) 봉길(奉吉)은 학문(學問)고 충절의 전통 가문인 파평 윤씨의 전통을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평윤씨(坡平尹氏) 전국에 총 770,9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윤신달 : 893(신라 진성왕 7)~973(고려 광종 24) 일명 협신이고 시호는 소양(昭襄)이신데 파평윤씨의 시조이시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한 공올로 벽상삼한 익찬공신에 책훈되고 벼슬은 삼중대광태사에 이르다, 공은 944(혜종 원년)에 경주대도독에 부임하여 31년간 덕치에 힘쓰다.

윤관(尹 瓘) ?1111(예종 6)

()는 동현(同玄),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검교소부소감(檢敎小府少監) 집형(執衡)의 아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1088(선종 5) 합문 지후(閤門祗候)로 광주(光州)․충주(忠州)․청주도(淸州道)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헌종 1) 좌사 낭중(左司郎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에 동궁 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어 조 규(趙 珪)와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알리고, 이듬해「자치통감(資治通鑑)」을 기중받고 귀국하였다. 110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이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어사 대부(御史大夫)․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다가 실패했다.

그후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예종 2) 여진 정벌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했다.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여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 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 (判尙書吏部事)․지군국중사가 되었다.

이해 여진이 계속 북변 침범하자 다시 출전했으나 패전했고, 그후 여진이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교섭해 오자 조정은 지키기 어렵다 하여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강화를 한뒤 모함을 받아 패군의 책임을 지고 회군하는 도중 벼슬을 뺴앗기고 곧 공신마저 삭탈 (削奪)되었다가, 1110년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판병부사(判兵部事)․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水國史)가 되었으나 우울 한 날을 보내다 죽었다.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윤언순(尹言純) 시중(侍中) ()의 아들. 1115(예종 10) 시어사(侍御史)로 사신이 되어 요()나라에 가서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했다. 이때 금()나라가 일어나 길이 막힌데다가 요나라 동경(東京)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영창(高永昌)에게 구금되어 그의 강압에 못이겨 표 ()를 올리고 칭하(稱賀)했다. 귀국 후에 이 일을 감우고 있다가 탄로되어 벌을 받았으며, 뒤에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윤언식(尹彦植) ?1149(의종 3)

시중(侍中) ()의 아들. 인종(仁宗)을 세자(世子) 시절부터 가까이 모셔 인종(仁宗)의 즉위 후 청환직(淸宦職)을 지냈으며, 1136(인종 14) 전중감(殿重監)으로서 조제사(弔祭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 왔고, 1148(의종 2)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가 되었다.

윤언이(尹彦頣) ?1149(의종 3)

()는 금강거사(金剛居士),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시중(侍中) ()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인종(仁宗) 때 기거랑(起居郞)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 우정언(右正言) 권 적(權 適) 등과 함께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왕으로 하여금 실시케 했다.

1128(인종 6)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송나라에 파견되어 국교 재개를 청하고 돌아왔으며, 1132년에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서 경연(經筵)에서 경의(經義)를 강의하고 화서대(花犀帶)를 하사받았다.

일찍이 예종 때 아버지 관()이 왕명을 받아 지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碑文)을 김부식(金富軾)이 함부로 고친 일이 있어, 아버지를 모욕한 김부식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차에 1133(인종 11) 김부식의 주역(周易) 강의를 문난(問難)하라는 왕명을 받고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아버지를 위해 설분했다.

1135(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에 원수(元帥) 김부식의 막료로 출전하여 이듬해 서경(西京)의 함락 때 공을 세웠으나 도리어 정지상과 내통했다는 김부식의 보고에 의해 양주 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겨났다.

뒤에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자 지난날 억울했던 사실을 왕에게 해명했으며, 1147(의종 1)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예종(睿宗)․인종(仁宗)․양조(兩朝)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주역(周易)」에 밝았으며, 만년에는 불교를 깊이 믿어 중 관승(貫乘)과 친교를 맺었다.

윤언민(尹彦旼) 시중(侍中) ()의 아들. 1135(인종 13) 묘청(妙淸)의 난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 김부의(金富儀)의 좌군(左軍)으로 공을 세웠으며, 1143년 상식 봉어(尙食奉御)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윤인첨(尹鱗瞻) 1110(예종 5)1176(명종 6)

()는 태조(胎兆), 시호(諡號)는 문정(文定), 정당문학(政堂文學) 언이(彦頣)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의종(毅宗) 때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으나 고관의 뜻을 거슬러 좌사 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좌천, 1153(의종 7)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사은사(謝恩 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서북면 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고, 1169(의종 23)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이듬해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 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1172(명종 2) 동북면 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의 난 직후 이의방(李義方)으로부터 주동자의 한 사람이란 의심을 받았으나 유응규(庾應圭)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했으며, 이어서 상장군(上將軍)을 겸하고 중방(重房)의 의사(議事)에 참여, 수태사(守太師) 벼슬이 내려졌다.

1174(명종 4)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에는 원수(元帥)가 되어 삼군(三軍)을 이끌고 절령(岊嶺)에서 반군과 싸워 패퇴(敗退), 다시 기탁성(奇卓城)․진 준(陳 俊) 등과 출정하여 이듬해 서경을 평정하고 조위총을 벴으며, 전공으로 추충정란광국공신(推 忠靖亂匡國功臣)․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 명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윤자연(尹自淵) 시호(諡號)는 창화(昌和).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윤지호(尹之顥) 시호(諡號)는 문화(文和).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大提學)․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다.

윤세유(尹世儒) ?1215(고종 2)

시중(侍中) ()의 손자. 1209(희종 5) 우어사(右御史)로서 좌어사(左御史) 최 부(崔傅)와 함께 왕가(王駕)를 모시고 연경궁(延慶宮)에 돌아갈 때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린 일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 양주부사(梁州副使)로 좌천되었다.

1214(고종 1)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고, 이듬해 평소 사감이 있던 우복야(右僕射) 정 진(鄭 稹)을 반역죄로 무고했다가 유배, 이어 소환되어 오던 도중 병사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윤보(尹 珤) ?1329(충숙왕 16)

시호(諡號)는 문현(文顯). 충렬왕(忠烈王) 때 정방(政房)에 보직, 1296(충렬왕 22) 좌승지(左承旨),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잠시 왕 위에 올라 관제를 개혁할 때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의조 상서(儀曹尙書),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를 거쳐 1321(충숙왕 8)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윤선좌(尹宣佐) 1265(원종 6)1343(충혜왕 복위 4)

()는 순수(淳叟), 시중(侍中) ()7대손. 충렬왕(忠烈王)때 문과(文科)에 장원, 비서랑(秘書郞)이 되고 충선왕(忠宣王) 초에 좌정언(左正言)․내서사인(內書舍人)을 거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고, 성격이 강직하여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부인(符印)을 관장했다.

이듬해 감찰 집의(監察執義)로서 왕에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進講) 했고, 심양왕(瀋陽王) ()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간신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의 서명(署名) 위협을 솔선 거절 함으로써 대간(臺諫)들이 이에 따르게 되어 왕위 찬탈의 위기를 모 면케 하는 데 성공했다.

충숙왕(忠肅王)의 귀국 후 판전교(判典校)를 거쳐 민부 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윤(漢陽尹)이 되고, 1335(충숙왕 복위 4) 계림윤(鷄林尹)에 이어 첨의평리(僉議評理)․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지내고 치사(致仕)했다. 경학(經學)에 밝고 노자(老子)․장자(莊子)․형명(刑名)의 학()도 연구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윤계종(尹繼宗) 고려조(高麗朝)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고, 딸이 충혜왕(忠惠王)의 비()가 되어 충목왕(忠穆王)을 낳았다.

윤안적 : 대언공이라 하다. 공은 문현공의 둘째 아드님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언에 이르다. 배는 장흥임씨(長興任氏)로서 그 아버지는 병부상서 급(伋)이다. 공의 묘소는 실전되고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 일명 시묘동에 단을 모시고 시사를 받들고 있다.

윤안숙(尹安淑) 시호(諡號)는 양간(良簡). 고려(高麗) 충정왕(忠定王)때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책록되었고, 삼사 좌사(三司左使)․첨의찬 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윤안비(尹安庇)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문하시랑(門下侍郞)․찬성사(贊成事)․태위(太尉) 등을 지냈다.

윤해(尹 侅) 1307(충렬왕 33)1376(우왕 2)

()는 자기(子奇),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 소부시윤(小府寺尹) ()의 아들. 1320(충숙왕 7) 음보(蔭補)로 주릉직(周陵直)이 되었고, 1340(충혜왕 복위 1) 흥위위 정용호군(興威衛精勇護軍), 이어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친어군 호군(親御軍護軍)․삼사 좌윤(三司左尹)을 거쳐 1349(충정왕 1) 대간(臺諫)에 등용 되었다.

판소부시윤(判小府寺尹)․지전법사사(知典法司事)․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수주 목사(遂州牧使)를 역임하고,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복주(福州)에 호종(扈從),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었으며, 1364년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1372(공민왕 21) 전법 판서(典法判書), 2년 후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윤척(尹 陟) ?1384(우왕 10)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안숙(安淑)의 아들. 1350(충정왕 2)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1363(공민왕 12) 군부 판서(軍簿判書)로서 앞서 홍건적(紅巾賊)의 난 당시 경성(京城 : 개성) 수복의 공으로 2등공신에 올랐으며, 우왕(禑王) 때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윤승순(尹承順) ?1392(태조 1)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 상호군(上護軍) 조 인(趙 璘) 등과 함께 신 돈(辛 旽)을 살해하려고 모의 하다가 누설되어 1367(공민왕 16)에 유배되었다. 1371(공민왕 20) 신 돈이 주살(誅殺)된 뒤에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이 되고 뒤에 왜구(倭寇)를 막아 누차 공을 세웠다.

1389(창왕 1)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 근(權 近)과 함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왕()씨로 공민왕의 후사(後嗣)를 정하라는 명제(明帝)의 지시를 전함으로써 창왕(昌王)이 폐위되고 정창군(定昌君) (: 공양왕)가 즉위하였고, 그후 판개성부사(判開城府 事)를 역임하였다.

윤승례(尹承禮)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윤호(尹 虎) ?1393(태조 2)

()는 중문(仲文), 시호(諡號)는 정후(靖厚), 파평군(坡平君) ()의 아들. 글씨와 바둑에 능했으며, 공민왕과 내기 바둑을 두면서 지은 시가 화근이 되어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 좌천되었으나, 전략에 밝아 왜구(倭寇)를 소탕, 그 공으로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1381(우왕 7) 다시 왜구를 격퇴했고, 1385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앞서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때의 공으로 1390(공양왕 1)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 1392년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이해 조선이 건국 되자 태조(太祖)를 도운 공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이 되어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금암역(金巖驛)에서 병사했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었다.

윤규(尹 珪) 1365(공민왕 14)1414(태종 14)

판도판서(判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1383(우왕 9)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390(공양왕 1)에 우정언(右正言)이 되고, 그후 예조 정랑(禮曹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형조 좌참의(刑曹左參議) 등을 지냈다.

1409(태종 9) 병조 참의(兵曹參議)․우부대언(右副代言)을 역임, 뒤에 좌부대언(左副代言)․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1413(태종 13) 경승 부윤(敬承府尹)이 되었다.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에 능해 항상 상서사(尙瑞司)의 벼슬을 겸임했으며, 태종(太宗)과 같은 해에 급제하여 태종 즉위 후 후대를 받았다.

윤곤(尹 坤) ?1422(세종 4)

시호(諡號)는 소정(昭靖),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고려말 문과(文科)에 급제, 동생 향()과 함께 문학(文學)으로 기용되었다. 1400(정종 2)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태종)에 가담, 1401(태종 1) 좌명공신(左命功臣) 2등이 되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이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8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나가 기악(妓樂)을 폐지하고 풍속(風俗)을 바로잡는 등 치적을 남겼으며,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윤향(尹 向) 1374(공민왕 23)1418(태종 18)

시호(諡號)는 소도(昭度), 문하평리(門下評理) 승순(承順)의 아들. 고려 우왕 때 생원(生員)으로서 사예(司藝) 류백순(柳伯淳), 생원 박초(朴 礎) 등과 함께 상소하여 불교 때문에 나라가 망하므로 정도전(鄭道傳) 등 유학자(儒學者)들을 존중하여 유학(儒學)을 권장하라고 주장했다.

1404(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이듬해 집의(執義)를 거쳐 1406년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서 충청도 경차관(忠淸道敬差官)이 되어 왜구(倭寇)에게 미곡 운반선을 탈취당한 충청도 안문도절제사(忠淸道安問都節制使) 최 이(崔 迤) 등 지방관 4명을 처벌했다.

이듬해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한성 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 1408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완산 부윤(完山府尹)을 겸직, 다음해 참지의정 부사(參知議政府使)를 거쳐, 1410년 경상좌도 병마절제사(慶尙左道兵馬節制使)로 계림부윤(鷄林府尹)을 겸한 뒤 1412년 한성 부윤에 재임되었다.

다음해에 대사헌․공조 판서, 1415년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 판서에 재직중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당시에 공을 세운 장수들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재정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당하고 전리(田理)에 방귀(放歸), 이어 적성(積城)에 안치(安置)되었다. 1417년 풀려 나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고,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 평양(平壤)에서 객사했다.

윤희제(尹希齊)  1380년(고려 우왕 6년)~1467년(세조 13년) 정현대부 호서판서에 이르고 보국 승록 대부 의정부 좌찬성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증자되었다.

배는 남양홍씨로서 부는 찬성 잠(潛)이다.

윤번(尹 璠) 1384(우왕 10)1448(세종 30)

()는 온지(溫之), 시호(諡號)는 정정(貞靖), 승례(承禮)의 아들. 음보(蔭補)로 신천 현감(信川縣監)을 거쳐, 1428(세종 10)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에 이르러 딸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부인이 되자 군기시 부정(副正)에 승진,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143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거쳐 이조․호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1439년 경기도 도관찰사(京畿道都觀察使)를 지낸 후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1440년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공조 판서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병으로 사직, 1447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윤삼산(尹三山) ()는 수옹(壽翁), 좌의정 호()의 아버지. 명종(明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문장․글씨․죽화(竹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로 알려졌다.

윤형(尹 炯) 1388(우왕 14)1453(단종 1)

()는 중회(仲晦),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장군 관()의 후손. 1411(태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사직단직(社稷壇直)에 보직되고, 군자직장(軍資直長)에 전임, 1420(세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 사인(舍人)․지제교(知製敎)․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1439(세종 21)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440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경기도 관찰사․경창 부윤(慶昌府尹)․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냈다.

1447년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이듬해 공조 판서․호조 판서를 역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거쳐 1452(문종 2)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2등에 추록,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윤사분(尹士昐) 1401(태종 1)1471(성종 2)

()는 계휘(繼輝), 시호(諡號)는 이정(夷靖), () 영의정 번()의 아들, 정희왕후(貞熹王后:세조비)의 오빠. 1426(세조 8) 음보(蔭補)로 중부 녹사(中部錄事)에 발탁되고, 세자익위사 우위수(世子翊衛司右衛率)․감찰(監察), 형조와 호조의 좌랑(佐郞), 한성부 판관(漢 城府判官)․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등을 지내고, 1455(세조 1)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다음해 첨지돈령부사(僉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458년 인수 부윤(仁壽府尹), 다음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 1461년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오르고, 이어 우찬성(右贊成)․좌찬성(左贊成)․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뒤 1468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이해 우의정(右議政) 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1470(성종 1)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를 지냈다.

윤사윤(尹士昀) 시호(諡號)는 성안(成安).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판서(禮曹判書)․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윤사흔(尹士昕) 시호(諡號)는 양평(襄平). 조선(朝鮮)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라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였으며 파주 부원군(坡州府院君)에 봉해졌다.

윤 경(尹 坰) 조선 때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역임하였고 추충적덕병의보조공신(推忠積德秉義輔祚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윤은(尹 垠)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였고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윤암(尹 巖) 시호(諡號)는 제도(薺度). 조선 때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냈으며 태종(太宗)의 딸 숙경옹주(淑慶翁主)와 결혼,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윤평(尹 泙) 1420(세종 2)1467(세조 13)

인수 부윤(仁壽府尹) ()의 아들, 태종(太宗)의 사위 16세 때 태종의 딸 숙순응주(淑順翁主)와 결혼, 파원군(坡原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의빈부 승빈(儀賓府承賓)에 이르렀다.

윤사로(尹師路) 1423(세종 5)1463(세조 9)

()는 과옹(果翁)․주옹(周翁), 시호(諡號)는 충경(忠景), 목사(牧使) ()의 아들. 1436(세종 18)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1452(문종 2) 영천위(鈴川尉)로 개봉(改封)된 뒤 세종 능의 수릉관(守陵官)을 지냈다.

이어 문종(文宗)이 죽자 다시 문종 능의 수릉관이 되고 숭덕대부(崇德大夫)에 가자(加資),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세력에 가담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추방하고, 1455년 세조(世祖)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좌찬성(左贊成)으로 발탁,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를 겸직한 뒤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 1458(세조 4)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461년 간경도감 도제조(刊經都監都提調), 충훈부 당상(忠勳府堂上) 등을 지냈다.

윤호(尹 壕) 1424(세종 6)1496(연산군 2)

()는 숙보(叔甫), 시호(諡號)는 평정(平靖), 윤 관(尹 瓘)의 후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1472(성종 3)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지낼 때에 그의 딸이 성종의 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자 국구(國舅)로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76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8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오르고, 이듬해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를 겸했다. 1494년 우의정(右議政)으로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고, 다시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윤흠(尹 欽)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1450(세종 32) 문과에 급제 한 후 한림정언(翰林正言)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윤신(尹 信)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좌랑(佐郞)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던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이다.

윤탄(尹 坦) ()는 탕보(蕩甫), 시호(諡號)는 정호(丁胡). 제천․천령 현감(提川․川寧縣監) 및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거쳐 내섬(內贍)․내자(內資)․종부(宗簿)의 시정(寺正), 우통례(右通禮)․우부승지(右副承旨)․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등을 역임하였다.

그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영성군(鈴城君)에 봉하여졌다.

윤필상(尹弼商) 1427(세종 9)1504(연산군 10)

()는 양좌(陽佐), 참판(參判) ()의 아들. 1447(세종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50(세종 32) 추장문과(秋場文科)에 급제, 1453(단종 1) 저작(著作)이 되고, 1455(세조 1)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오르고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45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63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된 후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여 세조(世祖)의 측근에서 왕명의 출납을 잘 처리하여 총애가 두터웠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히 처리하여 우참찬(右參贊)에 특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지고, 이해 강 순(康 純) 등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들을 토벌하자 왕명으로 군진에 가서 개선군을 위유(慰諭)했고, 이듬해 안주 선위사(安州宣慰使)로서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해 세조가 죽자 3년간 광릉(光陵:세조의 릉) 수묘관(守墓官)으로 있었고, 1471(성종 2) 경상도에 한재(旱災)가 들어 기근이 심하자 우찬성(右贊成)으로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기민을 구제, 다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겸직 발령되어 이듬해까지 기민을 구제 한 공으로 모의(毛衣)․녹비화(鹿皮靴)를 하사받았다.

1474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겸직하다가 한명회(韓明澮)․노사신(盧思愼) 등 권신들이 이조(吏曹)의 권한인 인사권(人事權)에 간섭이 심하므로 분개하여 사직하고 일시 은퇴 했으나 곧 복직, 좌찬성(左贊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던 도중 건주위(建州衛) 야인들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여 보고했고,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479년 명나라가 건주위를 토벌할 때 좌의정으로서 서정 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직,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건주위를 토벌했으며, 1481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84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1496(연산군 2)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로 추죄(追罪)되어 진도(珍島)에 유배, 사약(賜藥)을 먹었으나 죽지않아 가졌던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윤석(尹 晳) 1435(세종 17)1505(연산군 11)

()는 희묵(希黙), ()는 한송(寒松), 부사(府使) 계흥(繼興)의 아들. 1456(세조 2) 진사(進士)가 되고, 1466년 고성별시문과(高城別試文科)에 급제,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뒤에 우통례(右通禮)에 이르렀으며,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 증(追贈)되었다.

윤계겸(尹繼謙) 1442(세종 24)1483(성종 14)

()는 익지(益之), 시호(諡號)는 공양(恭襄), 부원군(府院君) 사흔(士昕)의 아들. 1457(세조 3) 음보(蔭補)로 세자 우참군(世子右參軍)이 되고,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거쳐 1467(세조 13)에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468(예종 즉위) 남 이(南 怡)․강 순(康 純) 등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참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으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1469년에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이듬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진,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봉해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겸임했다. 그후 대사헌․형조 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481(성종 12)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윤상로(尹湯老) ?1508(중종 3)

()는 상경(商卿), ()는 뇌헌(瀨軒), 시호(諡號)는 영평(靈平), 우의정 호()의 아들,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오빠. 1486(성종 17) 무과(武科)에 장원,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이 되었다.

1498년 우익위(右翊衛)가 되고, 1505년 동반직(東班職)에 기용되어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채청사(採靑使)로 지방에 내려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형조 참판(形曹參判)이 되고 대간(臺諫)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특지로 정국공신(靖國功 臣) 3등이 되었다.

1507년 이 과(李 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파천군(坡川君)에 봉해졌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윤형로(尹衡老) 1494(성종 2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조(吏曹)의 천거로 지평(持平)이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미관말직을 전전하 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이되고, 영양군(鈴陽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윤금손(尹金孫) 시호(諡號)는 헌의(獻懿). 1491(성종 22) 문과에 급제한 후 옥당(玉堂)에 보직되었으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파성군(坡城君)에 봉해졌다. 그후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여필(尹汝弼) 1466(세조 12)1555(명종 10)

시호(諡號)는 정헌(靖憲), 중종의 장인. 1506(중종 1)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고 이듬해 딸이 중종의 계비(繼妃 : 장경왕후)가 되어,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1545(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아들 임()이 화를 입었으나 그는 80세의 노령이었으므로 화를 모면, 뒤에 용인현(龍仁縣)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551(명종 6) 풀려 나왔다. 죽은 후 복관(復官)되었다.

윤세림(尹世霖) ()는 은좌(殷佐), 지숭(之崇)의 아들. 생원(生員)으로 1494(성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11(중종 6) 헌납(獻納),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사화에 희생된 조광조(趙光 祖) 일파의 억움함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1522년 집의로서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가 되고, 이듬해 충청도의 민정을 시찰했다. 죽은 뒤인 1537, 앞서 산릉도감 낭관(山陵都監郎官)으로 있을 때 장경왕후(章敬王后 : 중종비)의 장지(葬地 : 희릉)를 잘못 택했었다는 의금부(義禁府)의 탄핵으로 직첩(職牒)을 추탈(追奪)당했다.

윤세호(尹世豪) 1470(성종 1)?

()는 사영(士英),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직장(直長) 지준(之峻)의 아들. 1503(연산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520(중종 15) 전라도 관찰사로서 죄인(罪人) 김 식(金 湜)의 사건에 연루,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1531년 심 정(沈 貞)․이 항(李 沆)․김극핍(金克愊) 등이 제거되자 다시 기용, 1539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윤탁(尹 倬) 1472(성종 3)1534(중종 29)

()는 언명(彦明), ()는 평와(平窩), 현감(縣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