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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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8 14:53 수정일 : 2017-05-08 13:04

             풍산심씨(豐山沈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풍산심씨(豐山沈氏)의 시조(始祖) 심만승(沈滿升)은 중국(中國) 오흥(吳興: 浙江省 湖州市 菱湖鎭)인이다.
  중국(中國) 周나라 文王(1099~1050BC)의 열째아들인 담계재(聃季載)를 하남성(河南省) 여남(汝南)땅에 봉(封)하고, 그 땅을 심자국(沈子國)이라고 명함으로서 심씨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심형(沈亨)이 심자국의 국군(國君)에 재위 하였고 진대(秦代)에는 심융(沈戎)이 대부가 되었다. 그의 증손이 죽돈후(竹墩侯)가 됨으로, 곧 그분 후손이 오흥(吳興)에 세거(世居)하였다. 
  심융(沈戎)이 동한초(東漢初)에는 여러 차례 국가에 무공(武功)을 세웠고 양진(兩晋)과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강동(江東)의 저명한 무력강종(武力强宗)의 호족(豪族)이 되어 오흥군(吳興郡)의 대족(大族)으로 발전하였으나, 그 후  다시 쇠락하여 당송(唐宋)에는 가문의 영화(榮華)가 부침(浮沈)을 거듭하면서 한 때는 문화대족(文化大族)이 되기도 한다.
  중국 왕족의 후예(後裔), 대 호족(大豪族)의 후예(後裔)인 심만승(沈滿升)은 천성이 총민(聰敏)하고 박학다능(博學多能)하였다. 송(宋)나라가 북쪽의 금국(金國)의 세력에 밀려 항주(杭州)로 천도(遷都)하기 전(北宋 말 혼란한 시기), 혼란을 피하여 복주인 호종단(福州人 湖宗旦). 절강인 유재. 안신지(浙江人 劉載. 安愼之) 등과 함께 동도 입국(東渡入國)하여 태백산(太白山) 아래 풍산현(豐山縣)에 정착하였다. 문장(文章)과 행의(行義)가 뛰어나 예종(睿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청환직(淸宦職)에 발탁되어 상서봉어(尙書奉御)를 거쳐 태자첨사부 첨사(太子詹事府詹事)에 이르렀다.
  그 후 고려 국시(國是)에 의하여 식읍(食邑)을 풍산(豐山)으로 받고 세거하여 본관이 되었다.
  풍산(豐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하지현(下枝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이 되었고, 923년(고려태조 6)에 순주(順州)로 승격하였다가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함락되어 다시 하지현이 되었다. 그후 풍산으로 고쳐 현종(顯宗) 때 안동(安東)에 속하였다가 1172(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다시 안동에 속하여 현재 안동시 풍산읍이다. 
  그 후 만승의 7세손 승경(承慶)이 고려 말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상호군(上護軍)에 올랐으나, 난정(亂政)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개탄(慨嘆)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시서(詩書)로 자오(自娛)하며 효우(孝友)로 치가(治家)하였다, 
  그의 아들 구령(龜齡)은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태종(太宗: 방원)이 즉위하자 좌명4등 공신(佐命四等功臣)으로 풍산군(豐山君)에 봉해졌다. 1408년(태종 8)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전라도 연안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퇴시켜 크게 무명(武名)을 떨쳐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구령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보(寶)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차남 실(實)은 군수(郡守)를, 막내 치(寘)는 목사(牧使)를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이었고, 실의 아들로 백부(伯父) 보(寶)에게 출계(出系)한 주(冑)는 절의(節義)가 뛰어났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던 주(冑)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簒奪)하자 개탄하여 벼슬을 버린 후 김포(金浦)로 은거(隱居), 두견가(杜鵑歌)를 부르며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목사 치(寘)의 둘째 아들 응(膺)은 세조(世祖)때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李施愛) 반란 때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2등 공신(敵愾二等功臣)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3등 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풍창군(豐昌君)에 봉해졌던 형(亨)과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던 정(貞),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역임한 아우 의(義), 3형제는 풍산부원군 응의 아들로서 함께 명성을 떨쳐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정(貞)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이 극에 이르렀던 1502년(연산군 8)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고, 성천부사(成川府使)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핵(彈劾)으로 파직되었다. 이에 훈구파(勳舊派) 남곤(南袞) ‧ 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하여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몰아내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의(義)는 문장(文章)이 뛰어나 성세창(成世昌) ‧ 서경덕(徐敬德) 등과 함께 교유(交遊)가 깊었고,「대‧소관부」(大‧小觀賦)등의 명문(名文)을 지어 명성을 떨쳤으며, 바보로 자처하여 벼슬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사화(士禍)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던 좌의정 정의 아들 사손(思遜)은 비변사낭관(備邊司郎官)으로 야인(野人)정벌에 공을 세웠고 교리(敎理) 병조정랑(兵曹正郞) 수찬(修撰) 응교(應敎) 사인(舍人) 등을 거쳐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어 변방 방어에 힘쓰다가 야인들에 의해 화(禍)를 입었다.
  정(貞)의 셋째 아들로 백부(伯父)인 원(元)에게 출계(出系)한 사순(思順)은 중종(中宗) 때 등과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올랐으나 익명서(匿名書) 사건으로, 김안로(金安老)의 무고(誣告)로 고문 중에 화(禍)를 입었다.
  사손(思遜)의 아들 수경(守慶)은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를 지낸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유학자(儒學者)이면서도 무예(武藝)에 뛰어나 무공(武功)을 떨쳤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나 소실되고「견한잡록(遣閑雜錄)」「청천당집(聽天堂集)」이 전한다.
  수경의 증손, 로(로:관(關)의 아들)와 제(癠)의 형제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우승지(右承旨)와 부사(府使)를 각각 역임했고, 부총관을 지낸 연(延), 첨지충추부부사(僉知中樞府府事)를 역임한 익한(翊漢), 감찰(監察) 운식(雲植) 등과 함께 풍산심씨를 대표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풍산심씨(豐山沈氏)는 남한에 총 11,1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심승경(沈承慶) ~1377년(禑王3). 공민왕(恭愍王) 초기에 출사(出仕)하여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삼사우사(三司右事)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추증(追贈) 되었다.
  고려(高麗)말 왕의 음종(淫縱)이 날로 심해지고 시속(時俗)이 문란(紊亂) 함을 개탄(慨嘆)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시서(詩書)를 자락(自樂)하였고 효우(孝友)로 치가(治家)하였다. 남원 대산면 죽곡(南原 大山面 竹谷)마을 앞 봉황대(鳳凰臺) 좌측, 봉황이 품은 알형(卵形)에 산소가 있다.
  심구령(沈龜齡) 1350(충정왕 2)~1413년((태종 13). 자(字)는 천석(天錫), 호(號)는 병담(屛潭), 시호(諡號)는 정양(靖襄). 1398년(태조 7) 대장군(大將軍)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박원길(朴元吉) ‧ 정도전(鄭道傳)등을 제거하는데 참여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도 방원에게 가담하여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풍천군(豐川君)으로 봉해지고, 1406년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거쳐, 1408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이해 5월 남해안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박자안(朴子安)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출전하여 전라도 연안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과를 올렸다.
  1409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풍산군(豐山君)에 봉해졌고, 동지의흥부사(同知義興府事), 부진무상호군(副鎭撫上護軍)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궁궐 경비를 태만하게 한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1411년 지의흥삼군부사(知義興三軍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삼군별시위(三軍別侍衛)가 신설되자 별시위일번절제사(別侍衛一番節制使)가 되고 예조판서공안부사(禮曹判書恭安府事)를 지냈다. 卒한 후 상중(喪中)에, 국왕(國王)이 제관(祭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물리쳤으며, 왕비와 왕세자가 영전(靈前)까지 오시여 치전(致奠)하였다.
  구령(龜齡)은 유년(幼年)에 부친(父親)을 따라서 남원부 금안방(南原府 金岸坊)에 거처할 때 역행효제(力行孝悌)하고 삼년여막거상(三年廬幕居喪)하므로 서 효자 댁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로부터 택촌(宅村)이란 명칭이 생겨 육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검천리에 산소, 충남 아산시 선장면 신성리에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심보(沈寶) ~1463년(세종 7) 호(號)는 낙천(樂天), 구령(龜齡)의 長子. 음보로 출사(出仕). 1409년(태종 9) 고사(庫使), 1417년(태종 17) 상호군사(上護軍使), 1419년(세종1) 공조참의(工曹參議) 중군첨총제(中軍僉摠制), 1421년(세종 3)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공신도감사(功臣都監使), 다음 해 한성부윤(漢城府尹) 충청도절제사(忠淸道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심실(沈實) 구령(龜齡)의 次子. 1424년(세종 6) 창부승(倉副丞)을 거쳐 1442(세종 24)년 지풍덕군수(知豐德郡守)를 역임하였다.
  심치(沈寘) 1406(태종 6)~1471년(성종 2) 구령(龜齡)의 三子. 1437년(세종 19)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임진현감(臨津縣監)을 지내고 1454년(단종 2)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 1458년(세조 4)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1476년(성종 7) 남원부사(南原府使)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역임하고 찬성군(贊成君)에 봉해졌다.
  심주(沈冑) 자(字)는 자윤(子胤), 호(號)는 옹정(甕亭). 구령(龜齡)의 손자. 풍덕군수(豐德郡守) 실(實)의 아들로 백부(伯父) 보(寶)에게 출계(出系). 1457년(세조 3)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으로 재직 시에, 영월로 추방된 노산군(단종) 승하(昇遐)의 흉보를 듣고 관인(官印)을 도총부 안 벽에 걸어놓고 김포 옹자정(甕子井)에 은거(隱居)하였다. 두견시(杜鵑詩)에 가로되
  草綠江南愁日暮  풀 푸른 강남에서 해 저묾을 걱정하며
  秉潮催發漢湄船  조수 따라 마지막 배 뜨기를 재촉하네
  蜀中萬事無人問  나라 안 다 뒤져도 물어 볼 곳 없으니
  獨向靑山拜杜鵑  나 홀로 청산을 향해 두견을 사모하네
  이라 하여 그 뜻을 표시하였다. 늦게 소정(小亭)을 지어 옹정(甕亭)으로 자호(自號)하여 여기서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 종신자정(終身自靖)하였다. 후에 단종절신(端宗節臣)으로 추앙(推仰)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계룡산록(鷄龍山麓/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 되었다. 산소는 김포시 옹자정에 있다. 
  심견(沈肩) 목사 치(寘)의 長子. 조선 성종 조에 통훈대부(通勳大夫) 와서별제(瓦署別提)를 지냈다.
  심응(沈膺) 1433(세종 15)~1504년(연산군 10) 시호(諡號)는 양호(襄胡), 목사 치(寘)의 次子이며 좌의정(左議政) 정(貞)의 아버지. 1453년(단종 1) 음보로 충의위(忠義衛)에 배속되었고, 1459년(세조 5)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웅구용지사(雄舅勇之士)의 칭호를 받고 왕실 금위(禁衛)로 발탁되었다. 1467년(세조 13)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이 일어나자 조석문(曺錫文) ‧ 어유소(魚有沼) 등과 함께 반군을 토벌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서훈을 받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서(陞敍) 되었다. 1475년(성종 6)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 1483년(성종 14) 가선대부(嘉善大夫) 풍산군(豐山君)에 봉해지고 다음 해 봉조하(奉朝賀)의 은전을 받았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신도비(神道碑)와 사당(祠堂)은 김포시 지정 향토유적(金浦市 指定 鄕土遺蹟) 4호이다. 산소는 신도비, 사당과 함께 김포시 운양동에 있다.
  심서(沈胥) 목사(牧使) 치(寘)의 4子. 조선조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주부윤(慶州府尹), 상주진관병마절제도위(尙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심광필(沈光弼) 1450(세종 32)~1518년(중종 18), 字는 필지(弼之). 구령(龜齡)의 증손, 배(配)는 익안대군의 손녀로 이정신(李正信)의 딸이다. 1490년(성종 21) 사과(司果)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덕산(德山) ‧ 양천현감(陽川縣監), 영흥도호부판관(永興都護府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심광보(沈光輔) 字는 익지(翼之).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1493년(성종 24) 전적(典籍) 직강(直講), 1497년(연산 3)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1502년(연산 8) 상의원정(尙衣院正), 2년 뒤 장예원결사(掌隷院決事) 시혜청당상(施惠廳堂上)을 지내고 1505년(연산 11)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심광우(沈光佑) 주(冑)의 三男. 조선 성종조에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지냈다.
  심원(沈元) 도호부사 응(膺)의 長子. 조선 중종 때 풍저창수(豐儲倉守)를 지냈다.
  심형(沈亨) 도호부사 응(膺)의 次子. 1490년(성종 21) 내금위(內禁衛)에 배속, 다음 해 통정대부(通政大夫) 온성부사(穩城府使), 1493년(성종 24)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평안도우후(平安道虞侯)가 되었다. 그 후 1497년(연산군 3)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경원(慶源) ‧ 종성부사(鐘城府使)를 거쳐 1505년(연산 11) 의주목사(義州牧使) 겸 부절도사(副節度使)를. 이어서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고 1508년(중종 3) 전라우도수사(全羅右道水使)로 풍창군(豐昌君)에 봉해졌다.  
  심정(沈貞) 1471(성종 2)~1531년(중종 26) 字는 정지(貞之), 호(號)는 소요정(逍遙亭),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구령(龜齡)의 증손, 도호부사 응(膺)의 3子. 1495년(연산군 1) 생원(生員)이 되고, 15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509년 성천부사(成川府使), 1518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이어 정국공신(靖國功臣)도 삭탈 당하자 이에 훈구파(勳舊派) 남곤(南袞) ‧ 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하였다.
  1527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가 이해 복성군(福城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고 강서(江西)에 유배,「종루의 익명서(匿名書) 사건을 아들 사순이 하였다」라는 모함에 대해「아비가 몰랐을리 없다」라는 누명을 덧씌워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사헌부는 김안로가 정과 사순부자를 제거하기 위하여 채무택에게 사주하여꾸민 휴계라고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
산소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에 있으며 서울시 지정 문화재 제 77호 이다.
  심의(沈義) 1475년(성종 6)~  字는 의지(義之), 호(號)는 대관재(大觀齋). 응(膺)의 4子, 정(貞)의 아우. 1507년(중종 2)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이조좌랑(吏曹佐郞)과 소격서령(昭格署令)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바보로 자처하여 벼슬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사화(士禍)를 면할 수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 「대관재(大觀齋)」‧「소관부(小觀賦)」 등의 명문(名文)을 지었고, 서경덕(徐敬德) ‧ 성세창(成世昌) 등과 교유가 깊었다. 산소는 김포시 운양동에 있다.
  심안홍(沈安泓) 목사(牧使) 치(寘)의 손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심언달(沈彦達) 판관 광필(光弼)의 長子. 조선조 때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한성부주부(漢城府主簿) 용담현감(龍潭縣監) 장예원사평(掌隷院司評)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했다.
  심언통(沈彦通) ~1539년(중종 34) 字는 태이(泰而), 호(號)는 농와(聾窩). 판관 광필(光弼)의 次子. 조선 중종 조에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 종묘봉사(宗廟奉事) 겸 내금위(內禁衛)를 거쳐, 1519년(중종 14) 통훈대부(通訓大夫)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에 재직 중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다음과 같은 석침시(石枕詩)를 남기고 머나먼 천리 길,  남원 말천(南原秣川)으로 내려와 농와(聾窩)라 자호(自號)하고 은둔(隱遁)하였다.
   석침시(石枕詩)
  濟濟賢良堯舜世  어진 이 이어있어 요순시절 태평일세
  皐模夷禮贊繩平 고요의 법 백이의 예로 더욱 태평했네
  北門風雨前宵事  거센 바람 사나운 비는 지난 밤 일인데
  石枕時時夢亦驚  돌베개 꿈속에도 때때로 놀라네
  고종(高宗) 13년 상언입계(上言入啓)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았다.
  심세림(沈世霖) 字는 망이(望而). 목사(牧使) 치(寘)의 증손.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으로 재직 중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禍)를 당했다. 

  심사순(沈思順) 1469(연산군 2)~1531년(중종 26) 字는 의중(宜中), 호(號)는 묵재(黙齋). 도호부사 응(膺)의 손자. 1513년(중종 8) 17세 때 초시(初試)에 장원(壯元), 1516년(중종 11) 진사시(進士試)에 3위로 합격하였다. 다음해 중종 12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승문원(承文院)에 있다가 1518년(중종 13)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1519년 봉상시직장(奉常寺職掌), 1521년 수찬(修撰)을 지내고 다음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523년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敎理)로 재직 시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정시(庭試)에 장원하였다. 다음해 지평(持平), 1526년 집의(執義) 사간(司諫), 1529년 장악원정(掌樂院正)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1530년(중종 25)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었다. 
  다음해, 종루(鐘樓)에 시정(時政)을 비방하는 방문(榜文)을 건 흉모(凶謀)의 익명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사순(思順)이 아비 정(貞)이 찬축(竄逐)된데 유감을 품고한 행각이라 모함하여, 1개월간의 극심한 국문(鞠問)을 못 이겨 옥사(獄死)되었다. 이때의 나이 36세이다. 
  이 사건과 연계하여 7일 후 유배중인 부친 정(貞)까지 사사(賜死) 되었다.
1537년(중종 32) 사헌부가 밝힌 익명서 사건은, 김안로가 정적(政敵)으로 여긴 좌의정 정(貞)과 사순(思順) 父子를 제거하기 위하여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채무택(蔡無擇)이 그의 가신(家臣)을 시켜 꾸민 흉계(凶計)로 밝혀져 치죄(治罪)되었고, 사순의 직첩(職牒)은 복권 되었다. 산소는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에 있으며 서울시 지정 문화재 제 77호다. 
  심사공(沈思恭) 1490(성종 21)~1555년(명종 10) 號는 자온(子溫). 좌의정 정(貞)의 長子, 만포첨사 사손(思遜)의 兄.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  1521년 전연사별좌(典涓司別座), 1523년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으로 사재주부(司宰主簿),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 장흥고령(長興庫令)과 공조(工曹) ‧ 호조정랑(戶曹正郞), 중종 26년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으로 승서되었으나 부친(좌의정 貞)이 김안로(金安老)의 무고(誣告)로 사사(賜死)되는 경지에 이르러, 연계옥사로 몇 번이나 사경(死境)에 이르렀으나 김안로의 兄 김안정(金安鼎)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중종 32년 김안로가 복주(伏誅)된 후, 온양(溫陽) ‧ 가산군수(嘉山군수)를 거쳐 대구부사(大邱府使)로 부임되어, 선정을 베풀자 대구시민들이 대궐에 진정하여 임기를 1년 연장하기도 하였다. 
  그 후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재임 중, 1555년(명종 10) 3월 20일 김안로의 모해(謀害)를 받아 억울하게 사사된 선친(貞)의 직첩(職牒)을 돌려줄 것을 上言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원주목사(原州牧使)에 발탁되었으나 다음 해, 조카 수경(守慶)이 강원(江原)감사로 나가게 되어 부임하지 못하고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재직하였다.
  심사손(沈思遜) 1493(성종 24)~1528년(중종 23). 字는 양경(讓卿). 좌의정 정(貞)의 次子. 1513년(중종 8) 사마시(司馬試)를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되고, 1523년 비변사낭관(備邊司郎官)으로 서북면(西北面)의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다.
  예조좌랑(禮曹佐郞) 정언(正言) 교리(敎理) 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응교(應敎)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 1525년 경상우도어사(慶尙右道御使),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1528년(중종 20) 다시 서북 변경에서 야인(野人)들의 준동이 심해지자, 왕(중종)은 문무를 겸비하고 신망이 두터운 사손(思遜)을 특명으로 당상관(堂上官)에 특진시켜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로 임명하였다. 임지(任地)에서 위엄과 혜택으로 다스려 야인(野人)과 兵士가 모두 잘 따라 평정이 되어 가던 중, 1528년(중종 23) 1월 병영(兵營)에 땔감 채취를 위해 장졸(將卒)을 인솔하여 압록강을 건너가 작업 중에, 오랑캐의 급습을 받아 화(禍)를 당했다. 영상례 겸 행절충장군만포첨사(領相例兼折衝將軍滿浦僉使)에 추증 되었다.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에 있는 산소와, 영의정 홍섬(洪暹)이 찬(撰)한 신도비, 사당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 제 77호다.
  심사건(沈思謇) 목사(牧使) 치(寘)의 증손.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교리 . 지제교 . 경연(弘文館敎理 ‧ 知製敎 ‧ 經筵),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편수관검교관(編修館檢校官)을 역임하였다.
  심연(深淵) 字는 자정(自靜). 판관 언달(彦達)의 아들.
1534년(중종 29) 생원(生員), 1549년(명종 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승문원판교부사(承文院判校府使)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筵)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으로 증직 되었다.
  심주(沈澍) 1541(중종 36)1601~년(선조 34) 字는 택중(澤仲), 號는 한천(寒泉). 목사 치(寘)의 현손. 1581년(선조 14) 조중부참봉(調中部參奉), 영능참봉, 준원전참봉(濬源殿參奉), 정은전참봉(廷恩殿參奉), 1589년(선조 22)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 1591년(선조 24)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으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의 창의군(倡義軍)에 참가하였다. 1595년(선조 28)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으로 재직 중 1601년 졸하였다.
  심수경(沈守慶) 1516(중종 11)~1599년(선조 32), 字는 희안(希安), 號는 청천당(聽天堂). 좌의정 정(貞)의 손자로 만포진첨절제사 사손(思遜)의 長子. 13세 때 부친을 잃고, 15세 때 조부 좌의정 정(貞)과 숙부 부제학 사순(思順)까지 김안로(金安老 )의 무고(誣告)로 죽임을 당하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친(慈親)의 교육과 면학으로 역경을 이겨내었다. 1543년(중종 38) 생원 ‧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로 장원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출사하였다.
  호당(湖當)에 피선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와 지제교(知製校)에 뽑혀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무신(武臣)이 뽑히는 자리인 겸선전관(兼宣傳官) 순찰사(巡察使) 종사관(從事官) 비변사랑청(備邊司郞廳)과 제조(提調)에 뽑힌 유장(儒將)이다.
  삼사(三司)와 육조(六曹)의 諸職을 두루 편력하고 1556년(명종 11)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시발로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를 순력하였다. 그 외의 외직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 안변부사(安邊府使) 함경도병마절제사(咸鏡道兵馬節制使)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한성부윤(漢城府尹), 1584년(선조 17) 좌참찬(左參贊), 1586년(선조 19) 좌찬성(左贊成), 1590년(선조 23)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재상(宰相)직에서 물러나 경도유수(京都留守)로 재임 중, 호서(湖西)에서 병으로 쉬고 있을 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돌발하자 호서지방의 의병을 규합하여 77세의 노신(老臣)으로 왜적과 싸우는 중 도체찰사(都體察使) 겸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과 건의대장(建義大將)에 임명되어 왜병 퇴치를 지휘하였다.
  1597년 임란이 소정된 82세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54년간 나라 일에 몸담았다.
  관직을 떠나서는 과천(果川) 비산동(飛山洞) 오두막집에 우거(寓居)하면서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사후에 신도비를 세우지 말 것을 자손들에게 당부하고 1599년, 향년 84세에 卒하였다. 
  1562년(명종 17) 경기 관찰사로 재임 시에 정릉(靖陵)을 이장할 때 담당관리의 잘못으로 대여(大輿)가 한강에 이르도록 미리 준비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 된 일이 있고, 1565년(명종 20)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가서는 잡신(雜神)을 섬기는 칠성당과 송악산의 음사(淫祠)를 모두 불태우고 무당들을 추방한 일과, 임기를 마치고 개성을 떠나올 때 백성들이 거리를 메워 수레를 에워싸고 울면서 참아놓지 못했으며, 비를 세우고 노래를 지어 사모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노래가 전해진다고 한다. 75세와 81세에 득남(得男)하여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미역을 보내며 축하한 일 등, 여러 일화가 있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사어(射御)에도 뛰어났으며, 염근(廉謹)한 문신으로 1601년(선조 34)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조선조의 명상(名相)이다. 그 두 아들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저서로는 견한잡록(遣閑雜錄)과 시부(詩賦)를 모은 청천당집(聽天堂集)이 있고, 귀전창수(歸田唱酬)와 상제잡의(喪制雜儀)가 있다고 전한다. 산소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에 산소와 사당이 서울시 문화재 지정 77호다.
  심수약(沈守約) 1519(중종 14)~1582년(선조 25) 좌의정 정(貞)의 손자, 만포진첨절제사 사손(思遜)의 次子. 조선조에 사도시직장(司導寺直長)을 지냈다.
  심수준(沈守準) 1524(중종 19)~  좌의정 정(貞)의 손자, 만포진첨절제사 사손(思遜)의 3子. 조선조에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와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를 역임하였다.
  심수빈(沈守빈) 적개공신 응(膺)의 증손. 조선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용양위부사정(龍驤衛副司正)을 지냈다.
  심정방(沈正邦) 字는 정숙(正淑). 한성부판관 언달(彦達)의 손자. 조선조에 동지의금부사(同旨義禁府事) 소위장군(昭衛將軍) 충좌위부사직(忠佐衛副司直)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풍계군(豐溪君)에 봉해졌다.
  심일휴(沈日休) 字는 습미(襲美). 우의정 정(貞)의 증손.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일장(沈日將) 1536(중종 31)~1597년(선조 30) 字는 백진(伯進). 우의정 수경(守慶)의 長子. 조선조에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을 지냈다.
  심일취(沈日就) 1547(명종 2)~1616년(광해군 8) 字는 중진(仲進), 호(號)는 비산옹(飛山翁). 우의정 수경(守慶)의 次子. 1573년(선조 6) 진사(進士)가 된 후 의금부(義禁府)에서 일하고 성현 ‧ 중림 ‧ 연원도찰방(都察訪)을 지내고 사도시(司導寺)로 재직 시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로 동궁(東宮)을 호송, 홍주(洪州)에 주둔하였다.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로 승서된 후 당진현감(唐津縣監)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장례원사의 ‧ 사어(掌隷院司議 ‧ 司御)를 거쳐 호조좌랑(戶曹佐郞‧金浦縣令)을 지냈다.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군기시첨정(軍器射僉正)  도총부중추부경력(都摠府中樞府經歷)으로 첨지중추사(僉知中樞使)에 특배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심일매(沈日邁) 우의정 수경(守慶)의 3子. 조선조에 관상감정(觀象監正)을 지냈다.
  심일준(沈日遵) 1590(선조 23)~1659년(효종 10) 字는 경행(景行) 우의정 수경(守慶)의 4子. 1624년(인조 2) 진사(進士)가 되고, 1641년(인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 급제, 문과역기랑(文科歷騎郞) 포천현감(抱川縣監) 인동부사(仁同府使)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심일운(沈日運) 1596년(선조 29)~  字는 경원(景遠). 우의정 수경(守慶)의 5子. 1624년(인조 2) 생원(生員),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있다가 해미현령(海美縣令)‧은율현감(殷栗縣監)을 지냈다.
  심일엄(沈日嚴) ~1624년(인조 2) 좌의정 정(貞)의 증손. 조선조에 무남선전관(武南宣傳官)을 지냈다.
  심일신(沈日新) 1540년(중종 35)~  字는 일강(日强). 
좌의정 정(貞)의 증손.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심천수(沈天授) 字는 사수(士授). 목사 치(寘)의 5세손. 조선조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심천정(沈天挺) 字는 사호(士豪). 목사 치(寘)의 5세손. 통훈대부(通訓大夫) 한성판관(漢城判官) 괴산군수(槐山郡守)를 역임하였다.
  심동명(沈東明) 1581년~  字는 고여(고如). 판관 언달(彦達)의 증손. 1618년(광해군 10) 무과급제(武科及第), 어모장군행오위도총부경력(禦侮將軍行五衛都摠府經歷), 1622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좌위부사직(忠佐衛副司直), 1624년 어모장군행훈련원주부(禦侮將軍行訓練院主簿), 1623년 어모장군오위도총부도사(禦侮將軍五衛都摠府都事), 1631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창성진병마절제도위(行昌城鎭兵馬節制都尉), 1637년 갑산도호부사(甲山都護府使)로 있으면서 공(功)을 세워 남풍군(南豐君)에 봉해졌다.
  심즙(沈楫) 字는 여섭(汝涉). 판관 광필(光弼)의 현손.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위(沈闈) 1588~1642년 좌의정 정(貞)의 현손, 목사 사공(思恭)의 증손. 어모장군 행충좌위부사과(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果)를 지냈다.
  심관(沈關) 1569(선조 2)~1608년(선조 41) 字는 중유(仲由), 별호(別號) 남대공(南臺公). 우의정 수경(守慶)의 손자. 선조 중년 음보로 통남대기랑(通南臺騎郞)으로 있다가 1596년 호조정랑(戶曹正郞), 1598년 평양판관(平壤判官), 1604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역임했다. 선무원종공신(宣撫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고 임란공신(壬亂功臣) 충의사(忠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심곤(沈閫) 1564(명종 19)~1640년(인조 18) 字는 유행(由行). 우의정 수경(守慶)의 손자, 부사 일취(日就)의 長子. 1585년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아산현감(牙山縣監) 공조정랑(工曹正郞) 신천군수(信川郡守)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을 역임하였다.
  심항(沈閌) 1587(선조 20)~1650년(효종 1) 字는 계유(季由). 우의정 수경(守慶)의 손자, 부사 일취(日就)의 3子이며 실학자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의 장인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으로 철산부사(鐵山府使)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심인(沈闉) 좌의정 정(貞)의 현손. 어모장군 행충좌위부사용(禦侮將軍 行忠佐衛副司勇)을 지냈다.
  심종경(沈從卿) 좌찬성 치(寘)의 6세손.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심흔(沈俒) 1624년~  字는 중윤(仲允). 한성부판관 언달의 현손. 1657년(효종 8) 어모장군(御侮將軍) 행충좌위부사용(行忠佐衛副司勇) 선략장군충좌위부사직(宣畧將軍忠佐衛副司直)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역임하였다.
  심찬서(沈纘西) 1613(광해군 5)~1681년(숙종 8) 자는 사윤(士允). 판관 광필의 5세손. 조선조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다.
  심일웅(沈一雄) 좌의정 정(貞)의 5세손. 조선조에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증직 되었다.
  심서(沈序) 좌의정 정(貞)의 5세손.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풍녕군(豐寧君)에 봉해졌다.
  심로(沈로) 1590(선조 23)~1664년(현종 5) 자는 원직(元直), 호는 죽사(竹沙) 죽계(竹溪). 우의정 수경(守慶)의 증손. 162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사과(司果)로 재임 중, 1635년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乙科)로 급제, 1644년(인조 22)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淸나라에 다녀와 장령(掌令)으로 특진되고 이어 수찬(修撰) 교리(敎理)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고.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남해, 부령, 연안 등지에 3년간 유배(流配)되었다.
  1650년(효종 1) 귀양에서 풀려나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거쳐 승지(承旨) 수찬(修撰)을 지내고, 1656년(효종 7)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가 청백리(淸白吏)로 애민 교화한 목민관(牧民官)으로 군민들이 동비(銅碑)를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심제(沈癠) 1597(선조 30)~1649년(인조 27) 字는 사천(沙川). 우의정 수경(守慶)의 증손. 1624년(인조 2) 생원 ‧ 진사 양시 합격, 의금부도사 ‧ 경력(義禁府都事 ‧ 經歷)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전옥주부(典獄主簿) 호조좌랑(戶曹佐郞) 참익위(參翊衛)로 재직 시에 1633년(인조 11) 증광별시문과(增廣別試文科) 병과(丙科) 급제, 사서(司書) 무장현령(茂長縣令) 수찬(修撰) 역삼사전랑((歷三司銓郞) 보덕(輔德) 사인(舍人) 응교(應敎) 종사관겸선전관(從事官兼宣傳官)으로 있으면서 별지제교(別知製敎)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다. 1646년(인조 24) 참중시(參重試)에 합격, 1648년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재임 중에 53세로 卒하였다. 
  仁祖大王은 아까운 나이에 장상(將相)재목을 잃었다며 祭文을 내렸다. 사회경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경세문장(經世文章)으로 명성을 떨쳤고 소북파(小北派)의 八文章이다.
  심연(沈延) 좌찬성 치(寘)의 7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심구(沈玖) 1612(광해군 4)~1671년(현종 12) 字는 구옥(久玉). 우의정 수경(守慶)의 현손. 1633년(인조 11) 생원 ‧ 진사시 합격. 1644년 별시문과(別試文科) 丙科에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지내고 사헌부(司憲府)에 있다가 1650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다음 해 남양현감(南陽縣監)을 지냈다. 1669년(현종 10)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제수 받고 참알(參謁)할 때 단자(單子)만 올리고 나오지 않아 영의정 허적(許積)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가 다음 해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역임하였다.
  심련(沈璉) 字는 연옥(連玉). 목사 치(寘)의 8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심수곤(沈壽崑) 1691(숙종 17)~1767년(영조 43) 字는 여경(汝卿). 판관 광필(光弼)의 7世孫.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심수빈(沈壽瀕) 1683((영조 45)~1769년  字는 여원(汝遠). 판관 광필(光弼의 7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숙(沈숙) 字는 숙옥(肅玉), 號는 초당(草堂). 우의정 수경(守慶)의 현손. 1660년 진사가 되고 여산군수(礪山郡守)와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역임하였다.
  심현(沈玹) 1649(인조 27)~1727년(영조 3) 字는 현옥(玄玉). 우의정 수경(守慶)의 현손. 1669년(현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자익위솔(世子翊衛率), 호조 ‧ 형조 ‧ 공조정랑(戶曹 ‧ 刑曹 ‧ 工曹正郞), 승지 겸 영위사(承旨 兼迎慰使)를 거쳐, 1700년 도사(都事)를 지내고 안산현감(案山縣監), 숙종32년 김포 ‧ 김제군수(金浦 ‧ 金提郡守)을 지내고 혜랑(惠郞)을 역임하였다.
  심두한(沈斗漢) 1730(영조 6)~1815년(순조 15) 字는 사능(士能). 목사 치(寘)의 9세손.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행진보현감(行眞寶縣監) 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였다.
  심수현(沈秀賢) 1713~1793년. 좌의정 정(貞) 7세손. 가선대부(嘉善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심준경(沈俊慶) 목사 치(寘)의 9세손. 어모장군 ‧ 용양위부호군(禦侮將軍 ‧ 龍驤衛副護軍)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管)에 증직되었다.
  심익한(沈翊漢) 1704~1785년 字는 군보(君輔). 우의정 수경(守慶)의 5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유익(沈維益) 1727(영조 3)~1815년(순조 15) 字는 일보(溢甫). 판관 광필(光弼)의 8세손. 조선조(정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도현(沈道賢) 1781~1859년 字는 내관(乃寬), 호(號)는 돈와(돈窩). 판관 광필(光弼)의 9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후천(沈後天) 1722(경종 2)~  字는 덕조(德租). 우의정 수경(守慶)의 7세손. 1809년(영조) 무과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광양현감(行光陽縣監)을 지냈다.
  심종탁(沈宗鐸) 1740(영조 17)~1829년(순조 29). 판관 광필(光弼)의 10세손. 조선조(순조)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 희(沈禧) 1728(영조 4)~1799년(효종 1) 字는 자순(子純). 우의정 수경(守慶)의 8세손. 1763년 생원이 된 후, 영조 48년 휘능참봉(徽陵參奉)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내고 희능직장(禧陵直長)이 되었다. 1777년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에 이어서 1781년(정조 5) 한성주부(漢城主簿), 1782년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승서된 후 니성현감(尼城縣監), 1784년(영조 8) 천안군수(天安郡守), 1790년(영조 14) 백천군수(白川郡守), 이천부사(利川府使), 1799년 광능영활인서별제(光陵令活人署別提),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를 역임했다.
  심경택(沈卿宅) 1825(순조 25)~1893년(고종 30) 字는 남서(南瑞). 판관 광필(光弼)의 11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훤(沈暄) 1819(순조 19)~1914년(왜정) 字는 선일(宣日). 부제학 사순(思順)의 10세손. 1887년(고종 24년)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심재훈(沈在壎) 1837(헌종)~1897년. 字는 중려(仲呂). 판관 언달(彦達)의 11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절교위충좌위부사과 겸 충훈부도사(秉節校尉忠佐衛副司果 兼忠勳府都事)를 지냈다.
  심첩(沈堞) 1861(철종 12)~1938년. 字는 내성(乃成), 號는 송천(松川). 판관 광필(光弼)의 12세손. 의금부도사 겸 이조참의(義禁府都事兼吏曹參議)를 지냈다.
  심락원(沈樂遠) 1823~1897년. 字는 광문(廣文). 판관 광필(光弼)의 12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돈녕부도정(行敦寧府都正)을 지냈다.
  심경(沈儆) 1768(영조 44)~1846년(헌종 12) 字는 경백(敬伯). 우의정 수경(守慶)의 10세손. 1827년(순조 27) 소녕수봉관(昭寧守奉官)으로 있다가 1829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 1831년 사포서직장(司圃署直長), 1832년 내첨시주부(內瞻寺主簿), 1833년 평시주부(平寺主簿)로 있다가 경모궁령(景慕宮令)을 지내고, 연산현감(連山縣監)을 역임하였다.
  심진창(沈鎭昌) 1806(순조 6)~1884년. 字는 주백(周伯). 판관 광필의 13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절충장군(行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심진헌(沈鎭憲) 1841(헌종)~1922년. 字는 희경(熙敬), 號는 죽파(竹坡). 판관 광필(광필)의 13세손. 제능참봉(齊陵參奉)으로 있다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서되었다.
  심운식(沈雲植) 1841(헌종 7)~1903년. 字는 선원(善元). 좌의정 정(貞)의 13세손. 선략장군 행충무위부사과(宣略將軍 行忠武衛副司果)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감찰(行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