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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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4-27 11:00 수정일 : 2018-01-03 09:52

강릉 유씨의 연원(江陵劉氏의 (淵源)

중국 한()나라 시조(始祖) 고황제 유방(劉邦)40세손인 휘()유전(劉荃) () 죽간(竹諫) 시호 문양(文襄) 송조한림학사 (宋朝翰林學士),정헌대부 병부상서(正憲大夫 兵部尙書)로 재직중 재상 인 왕안석(王安石)이 제정(制定)한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이 부당함을 왕에게 극간(極諫)하다 수용되지 아니하자 뜻을 같이한 팔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고려문종(高麗文宗)36(1082)고려에 동도(東渡)하여 지금의 경북 영일군 기계면에 정착하시어 우리나라 유()씨의 시조(始祖)가 되셨다. 강릉유씨시조(江陵劉氏始祖)는 시조의 9세손 휘 승비(承備).초휘는 서()요 자는 천상(天祥) ()는 국재(菊齋)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도성 추밀원 좌복야로 치사(퇴직)하시고 증손 유 창(劉敞)께서 조선개국 공신에 책록, 옥천(江陵의古號)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시어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하면서 증조(曾祖)이신 국재공을 시조(始祖)로 하여 계대(系代)한 것이 700여년이며 2015년 통계청 조사 자료에 의하면 남한에만 236,871여명이 살고 있으며 북한을 합한다면 약 25만명이 되는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중국에서는 황족(皇族)으로 천하대성(天下大姓)이라 칭()한다고 한다.

 

강릉유씨조상인물

고려시대인물(高麗時代人物)

유승비(劉承備) ()는 천상(天祥), ()는국재(菊齋).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도성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증손 유창(劉 敞)의 귀로 순충보조공신(純忠補助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 되었다.

유송백(劉松栢) ()는공헌(公憲),()는 송봉(松峰). 고려 때 개성윤(開城尹).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유송재(劉松梓) 고려조(高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금성군 (金城君)에 봉해졌다.

유천봉(劉天鳳) ()는 내소(來韶), ()는 절재(節齋).고려 때 지안악군사(知安岳郡事)를 지내고, 충근익대수의 협찬보조공신(忠謹翊戴守義 協贊補祚功臣).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영 경연판병조사(領 經筵判兵曹事)에 추증(追贈) 되었다.

유천록(劉天祿) 고려조에서 한림원(翰林院) 시강을 역임하다.

조선시대인물(朝鮮時代人物)

유창(劉 敞) 1352(恭愍王 1)~1420(世宗 2)초명은경(), 자는 태화(太和), 호는 선암 (仙庵),시호는 문희(文僖). 1371(恭愍王 20)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성균학유 (成均學諭)가 되고 박사(博士). 문하주서(門下注書)를 역임하였다.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문희공(文僖公) 유 창(劉 敞)영정

특히 이성계(李成桂)와 절친하여 측근에서 항상 학문을 강론해 주었다. 1376(禑王 2)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전공좌랑(典工佐郞). 예의정랑(禮儀正郞). 군부정 랑(軍簿正郞)을 거쳐 1389(恭讓王 1)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했고, 이어 호조의랑(戶 曹議郞). 성균제주(成均祭酒)를 역임했다. 1392년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 臣)2등으로 대사성(大司成)에 승진했고, 그 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좌부승지(左副承旨). 충추원부사(中樞院副使)등을 지내고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으며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 事)가 되었다. 1401(太宗 1)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고 왕자 난을 거쳐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太祖(李成桂)가 소요산(逍遙散)에 들어 갔을 때 태종의 간곡한 청을받고 太祖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 하기도 하였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태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1410년 길주도찰리사(吉州道察理使)로 나갔다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지낸 뒤 1413년 세자 이사(世子貳師) 가 되고,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進封), 1420년에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20129일 졸()하니 나라에서 환관(宦官)을 보내어 백미(白米)와 콩을 후부(厚賻)하여 1등공신(一等功臣)의 예()로 후장(厚葬)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였으며. 명부조묘(命不祧廟)하였으며 그를 칭송하기를 당()나라 누사덕(婁師德)에 비유하였다. 태종(太宗)이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어필(御筆)을 하사하고 부(). (). 증조(曾祖)3(3)에 벼슬을 추증(追贈)하였으며,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양리에 영정각(影幀閣)및 어필각 (御筆閣)을 세워 봉안하다가 199010월 서울 상일동 해천재(蟹川齋)에 이봉(移奉)하여 모시고 있으며 문희공신도비1.문관석2.묘갈1. 망주석2기와 보호구역4필지19,651m2를 서울시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직(劉 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다.

유방(劉 方) 조선조에서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유치(劉 治) ()는 청유(靑遊). 조선조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유경(劉 景) ()는 유지(有之)()는송은(松隱).조선조에평산부사(平山府事)를 지냈다.

유인통(劉仁統) ()는 경원(景元). 조선조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유인제(劉仁悌) ()는 이공(而恭), ()는 송재(淞齋), 조선조(朝鮮朝)에 금산군수(金山郡守 現 慶北金陵郡)역임하고 증.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받으시다.

유상우(劉尙友) 조선조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유인길(劉仁吉) 조선조(朝鮮朝)에서 보국판서(輔國判書)를 역임하였다.

유인부(劉仁夫) 일명(一名) 인보(仁輔). 조선조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유인수(劉仁秀) 조선조에서 어사(御使)를 지냈다.

유인덕(劉仁德) 조선(朝鮮)조에서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유지주(劉智周) ()는 광윤(匡允), ()는 담재(湛齋). 조선조(朝鮮朝)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유신주(劉信周) ()광민(匡民)()순재(純齋) 조선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유계주(劉繼周) ()는 국헌(國憲), ()는 성재(省齋). 조선조(朝鮮朝)에 이조좌랑(吏曹佐郞)를 지냈다.

유한(劉 翰) ()는 운거(雲擧). 조선조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유극주(劉剋周) 자는 춘선(春善)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다

유생(劉 生) 조선조(朝鮮朝)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유정(劉 貞) 조선조(朝鮮朝)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유장생(劉長生) 조선조(朝鮮朝)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유천수(劉千壽) 조선조(朝鮮朝)에서 목사(牧使)를 지냈다.

유용량(劉用良) ()는 유능(幼能).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유용평(劉用平) ()는 평중(平重), ()는 퇴헌(退軒). 조선조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유용하(劉用何) ()는 사능(士能)()는 성재(省齋) 조선조때 예조좌랑(禮曹佐郞) 을 역임하였다.

유용삼(劉用參)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유용순(劉用恂) ()는 사성(士誠), ()는 율강(栗江). 조선조(朝鮮朝)에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유웅(劉 熊) 조선조(朝鮮朝)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충좌위(忠佐衛)를 역임하다.

유호(劉 虎) 조선조(朝鮮朝)에서 예조좌랑(醴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유현(劉 賢) 은율(殷栗) 현감(縣監)해주진관 병마절제도위(海州鎭管 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다.

유한량(劉漢良) ()는 충겸(忠謙), ()는은재(隱齋)무장현감(茂長縣監)재직중 임진왜란 맞아 진주성(晉州城)을 수비하던중 7일만에 성이 함락(陷落)돼매 진주남강에 투신(癸巳6.29)자결 하셨다.고창(高敞)조산사(造山祠)와 장성(長城)송계서원(松溪書院)에 배향(配享)되셨다.

유서(劉 瑞) 조선조(朝鮮朝)에서 추밀월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

유태(劉 泰) 조선조(朝鮮朝)에서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유가례(劉嘉禮) 조선조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유가민(劉嘉敏) 조선조(朝鮮朝)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유숭(劉 崇) 조선조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유자강(劉自彊) 조선조(朝鮮朝)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유효종(劉孝宗) 조선조(朝鮮朝)에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유인(劉 認) 조선조에서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유세분(劉世玢) 자는 온여(溫汝)호는 낙헌(樂軒) 성종19(1488)진원(珍原) 현령(縣令)을 역임하다. 시입장성(始入長城)하시여 자손이 번연(蕃衍)하다

유세석(劉世碩) 초휘는 개석(開碩) 호는 송강(松崗) 남해(南海)군수를 역임하다.

유계(劉 啓) 자는 대옥(大玉) 광주(光州) 목사(牧使)를 지내다.

유한필(劉漢弼) 자는 양좌(良佐) 호는 매헌(梅軒) 풍덕(豊德)군수를 역임하다.

유계창(劉季昌) (1458~중종) 자는 군현(君賢) 호는 송암(松庵)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시다. 혼조(昏朝)를 당하여 사절영도(謝絶榮道)하고 남이호남(南移湖南)하여 복거우 장흥건산(長興巾山)하다 이에 후손이 번연(蕃衍)하였다.

유귀필(劉貴弼) 자는 현경(賢卿) 호는 퇴암(退庵) 문의(文義)현령 양근(楊根)군수 연안(延安)부사를 역임하다.

유덕문(劉德文) ()는 욱경(郁卿), ()는 술재(述齋). 선조 임진난에 성내제현(城內諸賢)과 오산남문(鰲山南門)에서 창의(倡義)로 조선조(朝鮮朝)에서 가선대부 충좌위 상호군(上護軍)에 제수(除授)하시다.장성군 북이면.사거리 로상에 차의비를 건립하고 송계사(松溪祠)에 배향(配享) 향중유림(鄕中儒林)이 향사하고 있다.(事載全南道史)

유안례(劉安禮) ()는 의보(.). 조선조에서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유몽룡(劉夢龍) 자는 치운(致雲) 무과급제 거제현령(巨濟縣令) 보성군수(寶城郡守)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책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재령군수(載寧郡守) 1628년 책녕사원종공신(策寧社原從功臣) 1886년 포충정려(褒忠旌閭)를 받으시다.

유찬선(劉纘先) 자는 효백(孝伯)전라좌도 수군절도사 풍천부사(豊川府使)를 역임하다.

유여준(劉汝俊) 조선조에서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유곤(劉 琨) ()는 옥여(玉汝). 조선조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유연문(劉衍文) 조선조에서 목사(牧使)를 지냈다.

유덕인(劉德仁) 조선조(朝鮮朝)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유준민(劉俊民) 조선조(朝鮮朝)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유일민(劉逸民) 조선조에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유원문(劉元文) 조선조(朝鮮朝)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유경상(劉景祥) 조선조에서 전적(典籍)을 지냈다.

유희도(劉希度) 조선조(朝鮮朝)에서 판윤(判尹)을 역임하였다.

유서승(劉瑞升) 조선조 에서 전적(典籍)을 지냈다.

유대옥(劉大玉) 조선조에서 학유(學諭)를 지냈다.

   유여호(劉汝豪) 조선조에서 덕망(德望)이 높은학자(學者)였다.

   유호인(劉好仁) 1502~1584자(字)는 극기(克己), 호(號)는 산당(山堂). 또 천방(天放). 조선조 때 경서(經書) 와 사기(史記)에 통달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사마시(司馬試)합격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學文)에 열중하여 후진(後進)양성에 힘썼다. 1574년(선조 7)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그는 상소(上疏)하여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祈雨) 할 것을 결심하고,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위에 (正坐)하고 기원(祈願)하면서 나무에 불을 지르니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왕(王)이 이를기특하게 여기고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내렸다. 공은 자품(資稟)이 순수하고 풍채가 괴위(魁偉)하면서도 일생을 낙천적으로 지내면서 마을이름을 자하동(紫霞洞)사는집을 정정당(定靜堂)사랑채를 불우당(不憂堂)집앞에 못을 완묘호학지심지(琓妙好學之心池)라 이름하고 평생을 풍류와 환락(歡樂)으로 살으셨다 장흥(長興)의 예양서원(汭陽書院)과 장성 송계서원. 순천 월계사에 배향(配享)되었다.

유호의(劉好義) 1522~1584 ()는 극신(克信), ()는 산제(山齋). 조선조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유덕소(劉德昭) 1580~1647 .광수(光叟)호는 사산초노(獅山樵老) 인조 갑자난에 유공하여 사재(事載)녕국원종훈록(寧國原從勳錄)과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하다.

유한계 劉漢啓 1688~1794 .운보(雲輔)소년등제(少年登第)상몽성총(上蒙聖寵)하고하수존경(下受尊敬)하다.벼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전남.강진.병영면.성동리 배진(背津)강변에 웅장하고 정교하며 미려(美麗)한 석교(石橋)는 공()의 정승(政丞)기념교(紀念橋)로 전남도지방문화재 제129호가 있다.

유섬(劉 暹) 자는 일진(日進) 호는 송암(松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다.

유대남(劉垈楠) 자는 종오(宗五) 호는 수분와(守分窩) 고부(古阜) 군수를 역임하다.

유대남(劉大南) 자는 형일(亨一)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때 금천(衿川)전투 (지금 경기도 시흥)에서 전사하시다.

유일남(劉日南) 초휘는 혁남(赫南) 자는 인세(仁世) 무과급제하여 백씨(형님) 대남(垈南)과 같이 전사 하시다.

유기남(劉起南) 자는 순경(順卿) 무과급제 하여 병자호란 때 위로 두 형님께서 전사 하매 공께서 단독 접전 장렬히 전사하니 시체 수습할 사람없다 공의 기마(騎馬)가 머리를 입에 물고 고향집으로 찾아와 말도 같이 죽었다 일문삼층(一門三忠)은 고금에도 드문일로 그 의열(義烈)을 높이 숭앙하며 그의 말도 공()의 묘()계하에 장사하여 마총(馬寵)이 지금도 전한다.

유진길(劉進吉) 1791(정조 15)~1839(헌종 5) 교명은 아오스딩, 학기(學基)의 아들. 서울 출신. 대대로 역관(譯官)을 지낸 집안 출신으로서 음보(蔭補)로 역관이 되어 사역원 당상역관(司譯院堂上譯官)에 올랐다. 특히 중국어에 능통하여 전후 8차에 걸쳐 사신들을 수행, 수행역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유재건(劉載建) 1793(정조 17)~1880(고종 17) 자는 덕초(德初),호는 겸산(兼山), 한미(寒微)한 집안출신으로서 벼슬은 서리(胥吏)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와 글씨에능했다. 특히 전서(篆書).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오랫동안 규장각(奎章閣)에서 「열성어제(列聖御製)」편찬에 공이 컸다. 순조 때 조직된 직하시사(稷下詩社)의 시인(詩人)으로 있었고, 철종 때 최경흠(崔景欽)과 함께 「풍요삼선(豊謠三選)」을 편찬했다.

유경달(劉景達) 조선조(朝鮮朝)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유진화(劉鎭華) 초휘는정식(正植)자는정보(正輔)통훈대부 사헌부감찰을 지내시다.

유진성(劉鎭成)자는경전(敬田)통정대부(通政大夫)를역임하다.

유원영(劉元永)1814~1891자는 자보(子寶)진사합격 통정대부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 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

유재소(劉在韶) 1829(순조 29)~ ? 자는 구여(九汝), 호는 학석(鶴石). 형당(蘅堂). 소천(小泉). 벼슬은 판관(判官)에 이 르렀고 묵화(墨畵)를 잘 그렸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은 내놓지 않았으므로 작품이 매우 귀했다.

유홍기(劉鴻基) : 성달 호: 대치(大致). 대치(大痴) 선각자 원래 한의사로서 역관 오경석(吳慶錫)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선진문물을 소개하는 서적을 탐독,일찍부터 개화에 눈을 떠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을 지도했다. 당시 정계 막후에서 이들 개화당 인사들에게 큰 영향력이 있어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으며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문호개방과 정치의 혁신을 주장하며 시국을 개탄(慨嘆)하다가 갑신정변(1884.12.4)발발(甲申政變勃發)직전에 세상을 뜨셨다.

유석(劉 錫) 문희공(휘유 창)14대손으로 진잠(鎭岑지금충남서산군)현감 재직시 조상의 문헌을 정리하여 문희공조의 묘비문을 찬()하는데 공헌 한바 크다.

유여대(劉汝大) 1878(고종 15)~ 1937 호는 낙포(樂圃), 택현(澤賢)의 아들. 평안도 의주(義州) 출신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학문을 배우고 18세 때에 한학 서당을 세워 무료로 아동들을 지도했다. 1990(광무 4) 의주에 양실학교(養室學校)를 창건한 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전도사로 송장면 교회(松長面敎會). 수진면 교회(水鎭面敎會)를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하다가 1909(융회 3)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후 목사가 되어 의주 동교회(義州東敎會)에서 시무하면서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19년 선천(宣川)의 목사 양전백(梁甸伯) 집에서 김병조(金秉祚). 이승훈(李昇薰) 등과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귀향한 후 동지 이원익(李元益). 안석응(安碩應). 김창수(金昌洙) 등과 시위 계획을 협의했다.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 군중을 지휘하였고,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 의주 동교회에 돌아와 폐쇄된 양실학교를 개건한 후 1931년 신의주 백마교회(白馬敎會)에서 시무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유병헌(劉秉憲) 1842~ 1918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소식을 듣고 구국의 일념으로 각국 공관에 일제의 불법 침탈를 규탄하는 장서(長書)를 보내 세계여론에 호소하시다 투옥되고 매국오적성토(賣國五賊聲討)사건으로2차투옥 은수변파록(恩讐辯破錄: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 사건으로 3차투옥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았으며 1918년 세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너희 천황의 머리를 베어 술잔을 만들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하고 기계를 굽히지 않고 끝내 감옥에서 순국 하시다. 선생의 위덕은 사후 사람들이 상의계(尙義契)를 조직하여 유허에 숭의제(崇義齋)를 건립하여 기리고 나라에서는 1963년대통령 포상에 이어 197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영정(影幀)과 영위(靈位)를 서대문 독립관에 모셔서 매년 순국선열기념일에 보훈청의 주관으로 향사(享祀)하고 있다.

유재희(劉載熙) 1854~1894 자는 강화(光華) ()죽산(竹山) 1894(甲午) 동학농민군에 솔선 참여하여 전봉준(全琫準) 과 합세 문란한 관기확립(官紀確立)과 오리숙청(汚吏肅淸) 왜군섬멸(倭軍殲滅)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18941210일 전남화순 전투에서 37세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 순국 하시다.

199561일자 한국.문화.광주 3개 방송국에서 당시 상황을 방영하고 다음날 광주. 무등일보에 상재(詳載)되었다.

유병기(劉秉淇) 1883(고종 20)~ ?  전남 구례(求禮) 출신. 1907(융희 1)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자 일본군의 축출과 매국노 타도를 목적으로 김태원. 김 율. 백낙구 등과 협의하여 함평군(咸平郡) 나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7백여명의 동지를 규합, 5백정의 총을 확보하고 참모대장(參謀隊長)이 되어 담양(潭陽). 영광(靈光). 장성(長城). 창평(昌平). 광주(光州) 동복(同福)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창평 전투에서는 가와미쓰 조장 등 많은 일본군을 죽였고, 영광에서는 중위 스가이 등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전공을 세웠다. 1909년 담양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고 도피했다가 체포되었다.

왜군섬멸(倭軍殲滅)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 순국 하시다.

유명규(劉明奎) 1907(隆熙 1) 구한국 군인이 해산되자 강화 진위대(江華鎭衛隊)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황해도에 가서 의병군(義兵軍)과 합류되어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유범규(劉範圭) 1891(고종 28)~ 1949함경도 온성 출신. 1910년 경성 기독교 청년회관 중학부(京城基督敎靑年會館中學部)를 졸업, 1915년 만중에 망명, 3.1운동 후 임시정부 재무국 소속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28년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위조지폐를 제조하여 일제 식민지 경제를 혼란시키고 독립공채를 인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폭탄을 제조하여 관공서 습격을 계획하다가 피체,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유득신(劉得信1896(건양 1)~ 1950  1920년 암살단(暗殺團)에 가입하여 경기도 고양(高陽)과 서울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기도 양주(楊州)의 송신묵에게 자금을 얻다가 체포되어 경성 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9년간 복역 후 석방되어 교회목사로 있다가 6.25사변 때 순교했다.

유광훈(劉光勳함남출신으로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신대리에 거주하면서 일제에 항거 브라지보스톡으로 망명 20세 전후부터 로만경계(露滿境界) 홍개호 연안에서 독립군에 무기를 조달하였으며 1923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의용단 단장 이화정(李華亭)의 지시에 따라 국내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모금을 모금하기로 단장의 위임장을 휴대하고 잡입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이기인(李基仁)씨 댁에 유숫하면서 선산. 대구 등지에서 모금 북경으로 돌아갔다.1924년 다시잡입하여 모금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복역하다.

효자(孝子)

유만채(유만채) 1705~1779 자 여정 세살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시하에 성장하면서 8세에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에 피를 내어 드림으로 연명하시다 별세하심에 묘하에 여막을 짓고 시묘 하던 중 계모의 병환으로 정성을 다해 간호하다가 계모께서 말고기를 찾으매 사방으로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구하지 못한 것을 알고 그의 효심에 감복한 호랑이가 밤에 말고기를 물고와 끓여 드렸다는 하늘에서 낸 효자라 유림의 천거로 정조임금 계묘년 1783126일 정려를 명받으시다.

유만채 정려(旌閭)

유덕숭(劉德嵩) 1735~1787 초휘 덕산(德山)자는 성유(聖裕) 효자만채의 둘째 아들로써 효행이 탁이하여 유림(임술년 순조1802)이 예조에 천거하여 표창으로 효자문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