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령유씨(高靈兪氏) 시조는 고려 때 현감(縣監)을 역임한 유진(兪軫)이라 전하는데

작성일 : 2017-04-26 16:45 수정일 : 2017-11-01 16:5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고령유씨(高靈兪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때 현감(縣監)을 역임한 유진(兪 軫)이라 전하는데, 그 후 후손들이 고령(高靈)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고령(高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남서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인데, 16520년을 계승해 오다가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때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757(경덕왕 16)에 고양군(高陽郡) 되었고, 1018(고려 현종 9) 영천현(虛川縣)이 되어 경산부(京山府 : 지금의 성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영()을 따서 고령현(高靈縣)이라 하였으며, 1895(고종 32)에 성주(星州) 9면과 현풍(玄風) 3면을 병합하여 고령군(高靈郡)이 되었다.

고령유씨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호인(好仁)을 들 수 있는데,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販讀書) 한 후 검토관(檢討官)을 거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 : 임금이 내려준 옷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下賜) 받았으며 장령(掌令)을 거쳐 합천군수(陝川郡守)로 나갔다. () () 글씨에 모두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2000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령 유씨(高靈兪氏)는 전국에 총 238가구, 735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유후보(兪后甫)조선(朝鮮) 때 지후(祗侯)를 지냈다.

유신(兪 信)조선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유호인(兪好仁) : 1445(세종27)-1494(성종 25). ()는 극기(克己), ()는 임계(林溪) 뇌계, () 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 1462(세조 8) 생원(生員)이 되고 1474(성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상시(奉常寺) 부봉사(副奉事)를 거쳐, 1478년 사가독서(賜峨讀書)한 후 1480년에 거창현감으로 나갔다. 이어서 공조(工 曹) 좌랑(佐郞)을 지내고, 1486(성종 17) 검토관(檢討官)을 거쳐 이듬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488년 의현인시고(義縣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 받고, 1494년 장령(掌令)을 거쳐 합천(陝川) 군수(郡守)로 나갔다가 재직 중 병사(病死)했다.

() · () ·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로 불렸고. 특히 성종(成宗)의 총애가 지극하여 경관직(京官職)에 있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외관직(外官職)으 로 나가려 할 때 성종이 만류하다 못해 술잔을 권하며 이 시럼 부대 갈다 아니 가든 못할 소냐” 하는 시조로 석별의 정을 표했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