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강화위씨(江華韋氏),위수여(韋壽餘),강화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6 16:12 수정일 : 2018-04-22 20:07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위씨(韋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팽조(烹調)의 손자(孫子)가 위(韋)땅에 봉해졌음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나라 위씨(韋氏)는 중원(中原) 출신인 위수여(韋壽餘)가 960년(고려 광종 11) 동래(東來)하여 사선관(司膳官)을 거쳐 목종(穆宗)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현종(顯宗) 초에 치사(致仕)를 상소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 받은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으로 강화백(江華伯)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은 강화(江華)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강화(江華)는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 나라 다섯 번째의 섬으로 일찍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아득한 옛날 갑비고차(甲比古次)라 하다가 고구려(高句麗) 때 혈구군(穴口郡), 신라(新羅) 시대에는 해구군(海丘郡)으로 불리었다. 그후 940년(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江華)로 개칭되었으며, 고려 시대(高麗時代) 몽고의 침입 때와 조선(祖先)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86년)․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 1875년)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의 후손 근영(瑾英)이 고려 인종(仁宗)때 소감(少監)을 역임했으며, 원(元)은 몽고(蒙古)의 내침으로 강화(江華)에 천도하는 왕(王)을 호종하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의령 현감(宜寧縣監)과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事)를 역임한 조(組)가 간신(奸臣)들의 모략으로 평안도 영유(平安道永柔)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그 곳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자 그를 낙향시조(落鄕始祖)로 삼고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1세조(世祖) 조(組)의 9세손 관(觀)이 1689년(숙종 1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찰방(察訪)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후 홍성 군수(洪城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상소문(辭退上疏文)을 올리자 왕명(王命)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이건창(李建昌)과 함께 고군도(古郡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풀려 나와 영유(永柔)에서 일생을 마치자 후손들은 위촌(韋村) 뒷산 주마현(走馬峴)에 솟대를 세우고 그의 영광(榮光)된 유업(遺業)을 영원히 기렸다.

그 외 인물로는 효행(孝行)이 뛰어난 정려(旌閭)가 내려졌던 응표(應豹)와「백석창화집(白石唱和集)」을 남겨 문명(文名)을 떨쳤던 관식(觀植)이 유명했으며, 병식(秉植)과 달식(達植)은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신명(身命)을 바쳐 강화 위씨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위씨(江華韋氏)는 전국에 총 751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강화위씨조상인물

위근영(韋瑾英):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소감(少監)을 지내다가 반적(叛賊) 조 광(趙 匡)이 협조(協助)를 청(請)해오자 늙은 모친이 있었으므로 겉으로는 위배(違背)하지 못하고 한유관(韓儒琯)․안덕칭(安德偁)․김영년(金永年)등과 함께 거짓으로 상여(喪輿)를 꾸며 장사지내는 것같이 하여 성문(城門)을 나오다가 일이 누설되어 한유관과 함께 잡혀가 태형(笞刑)과 낙형(烙刑)을 입었으나 죽을 때까지 끝내 공모자를 대지 않았기 때문에 안덕칭과 김영년은 해를 면하게 되었다. 1136년(인종 14) 4월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부식(金富軾)이 서경(西京)에서 반적을 치고 개선한 후 왕은 반적의 모의에 가담하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위원(韋 元): 1225년(고종 12) 몽고병의 내침으로 왕(王)이 강화(江華)에 천도해 있을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왕을 극진하게 보필했다. 고종이 개경(開京)에 돌아온 후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내시(內侍)로 삼고 친히 의대(衣帶)와 안마(鞍馬)를 비롯하여 금(金)․은(銀)․주과(酒果)를 하사했다. 후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위득유(韋得儒): ?~1278(충렬왕 4). 1274년(충렬왕 즉위) 석도(席島)와 가도(椵島) 사람들이 반역을 도모하자 서북면 병마사 이 교(李 喬)의 명을 받아 도령(都領)으로 가서 괴수 내동(來同)의 무리를 토평하고 뒤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어 도원수(都元帥) 김방경(金方慶)의 휘하에 들어가 일본(日本) 대마도 정벌(征伐)에 출정했다가 이끼도에 이르러 태풍(颱風)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이때 좌군사(左軍使) 김 선의 익사(溺死)를 구출(救出)하지 못했다 하여 회군(回軍) 후 파직(罷職) 당했다.

위조(韋 組): 조선조에 의령 현감(意寧縣監)․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였고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랐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謀陷)으로 평안도 영유(榮柔)로 유배(流配) 되었다가 그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니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조(組)를 낙향시조(落鄕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고있다.

위섭(韋 燮): 1450년(세종 3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진사(進士)에 올랐다.

위익(韋 翼): 1593(선조26)~1619(광해군11). 일찍부터 무과(武科)에 뜻을 두고 장사랑(將仕郞)으로 훈련원(訓鍊院)에 있다가 명(明)나라가 청태조(靑太祖) 누루하치의 침략을 당하여 조선(朝鮮)에 원병(援兵)을 청(請)해 오자 박난영(朴蘭英)과 더불어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들어가 군대를 이끌고 창성(昌城)을 거쳐 무순(撫順) 동쪽에서 격전 끝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 강홍립은 항복하고 우모령(牛毛嶺)에서 대적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위관(韋 觀): 1652(효종4)~1733(영조9). 초명(初名)은 수징(壽徵), 호(號)는 덕구(德耈). 1689년(숙종 15)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찰방(察訪)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한 후 홍성 군수(洪城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상소문(辭退上疏文)을 올리자 왕명(王命)을 어겼다고 하여 이건창(李建昌)과 함께 고군도(古郡島)에 유배되었다. 유배된 지 1개월 후에 이건창이 풀려나 향리(鄕里)인 강화(江華)로 떠나면서 함께 석별(惜別)의 정(情)을 시(詩)로 나누었고, 후에 그도 풀려나서 영유(永柔)로 귀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그뒤 후손들이 그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주마현(走馬峴)에 솟대를 세우고 추모하여 왔다.

위응표(韋應豹): 조선 때 효행(孝行)이 뛰어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위도성(韋道成):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위관식(韋觀植): 호(號)는 석곡(石谷). 조선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저서(著書)로「백석창화집(白石唱和集)」을 남겼다.

위원희(韋元羲):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위원봉(韋元鳳): 조선(朝鮮) 때 진사(進士)였다.

위승로(韋升魯):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위혜림(韋惠林):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樹立) 당시 러시아 주재 외교위원 (外交委員)을 지냈다.

위병식(韋秉植): 호(號)는 해산(海山). 일정(日政) 때 광복 운동을 하다가 체포령(逮捕令)이 내려지자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가담, 백범(白凡) 김 구(金 九) 주석(主席)의 귀농파(歸農派) 일원으로 귀국, 한의원을 개설한 후 황해도 장연(黃海道長淵)과 평남 숙천 등지에서 지방유지들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교류했다. 서예(書藝)에도 뛰어났다.

위병두(韋炳斗): 평남 평원군(平南平原郡)등 대표적인 한학자(漢學者)로 시에 능했고, 공자묘(孔子廟) 석전(釋典)에 아헌관(亞獻官)이었다.

위달식(韋達植): 평양 대학(平壤大學) 출신지에서 지방 유지들과 독립정신을 교의으로 애국 운동(愛國運動)을 하다가 요절했다.

위기철(韋基喆): 유림회 회장(儒林會會長)으로 구한말(舊韓末)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